12월 29일 런던 히드로 공항.
공항 광장에 서 있는 탑시계가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7시)를 막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검은 색깔의 오스틴형 택시가 대합실 입구 앞으로 굴러
와 멎더니 동양인 한 명을 내려놓았다. 택시는 곧 출발했고, 그
동양인은 출입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짐도 없는지
누런 가죽 가방만을 한개 달랑 들고 있었다. 중키에 중후한
몸집을 가진 50 전후의 남자로 회색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브라운 빛이 도는 안경을 끼고 있어서 얼굴 모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양인 신사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베이지 색의 코트 앞을 열어
놓고 있었다. 넥타이는 단정하게 조여져 있지 않고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얼굴빛은 거무스레했다. 코트 안에 입고 있는
양복은 회색 저고리와 검정 바지의 콤비였다. 넥타이가 걸린
와이셔츠는 체크 무늬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에 걸친 짙은
자주색 머플러의 양쪽 끝이 앞으로 길게 흘러 내려와 있었다.
브라운 안경으로 가려진 두 눈이 대합실 안을 불안한 듯
훑어보더니 이윽고 중절모의 사나이는 각 항공사의 카운터가
늘어서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대합실 안은 사람들로 와글거리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 위로 가방을 끌고 가는 소리가
마치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중절모는 걸어가면서도 주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에어 프랑스 카운터 앞에 멈춰섰다. 몇 사람이 그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맨 뒤에 붙어
서서 비행기표를 꺼내들고 초조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었다. 이미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좌석 배정만 받으면 되었다. 금발의 여직원이 표를 받아들더니
영어로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치실 짐은 없나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발은 표를 뜯어낸 다음 그에게
좌석번호가 적힌 보딩패스를 내주었다.
출발시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대합실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는 대형 전자게시판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게시판에는
각항공사의 편명(便名)과 출발시간, 목적지, 탑승구 번호 등이
나와 있었다. 그가 타야 할 비행기는 AF811번 기였다.
출발시간은 11시 30분. 그는 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출국심사대 쪽으로 다가갔다.
허리에 권총을 찬 보안요원들이 출국심사대에 앉거나 혹은
서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엑스선 투시기가 설치되어
있는 검사대 위에 올려놓은 다음 심사대 앞으로 바싹다가섰다.
심사대 위에 여권과 보딩패스를 올려놓으면서 보안요원의 표정을
살폈다. 여권 표지에는 대한민국 여권 이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보안요원이 컴퓨터를 두드렸다. 수배인물이라면
화면에 금방 드러나고 말 것이다. 중절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경을 벗어보실까요?
보안요원이 영어로 물으면서 손으로 안경을 가리켜보였다.
한국 여권을 가진 사나이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심스럽게 안경을 벗었다.
불안하고 피곤에 젖은 두 눈이 나타났다. 눈꼭지가 쳐져
있었고 눈가에는 주름이 많았다. 눈빛은 흐려보였다.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보안요원은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과 실제 얼굴을 대조해 보고
나서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여권의 빈칸에다 스탬프를
쾅하고 찍었다.
중절모는 출국심사대를 통과해 보세구역으로 들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무겁고 지쳐 있는 듯이 보였다. 엑스레이 검사대를
통과한 가방을 들고 그는 홀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스낵코너가 있었다. 코너 주위에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는 스탠드 위에 파운드화 동전을 꺼내놓고 굳이
종이컵에다 커피를 따라달라고 부탁했다.
커피가 나오자 그는 그것을 들고 맞은편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는 길게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홀 쪽을 등지고 앉았다. 거기서는 공항 활주로가 훤히
내다보였다.
그는 중절모를 벗어 옆자리에 내려놓고 이마에 번진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더워서 흘린 땀이 아닌 식은땀이었다.
이마는 넓었고 기름을 바른 머리는 가르마 없이 올백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활주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튼튼하게 생긴 턱 주변은 면도자국이 시퍼렇게
나있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다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거기다 바람까지 몹시 불어대고
있었다. 흐린 하늘 저편 아득한 곳으로부터 안개 같은
희끄무레한 것이 밀려오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윽고 눈발이 되어
나타나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는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들어 있던 사진 한 장을
빼냈다. 그것은 컬러로 된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미치게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그의 아내는 고생에 찌들고 늙은 모습이었다.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거의 밖으로만 싸돌아다녔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혼자 살림을 꾸려 가느라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자식들은 구김살 없이
모드들 잘 자라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들 둘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 맏이는 어느 새 소년티를 벗어나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버려두었던 그 찌들고 늙은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그렇게도 그리워 보기는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아이들보다도 그녀가 더 보고 싶었다. 만일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내를 아끼면서 살아야지. 시골에다 집을
하나 사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지.
그러나 그는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신세이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이 미치게 그리운지도
몰랐다.
집과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만 떠돌아다닌 지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전에도 해외 나들이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랐다.
그 전에는 일거리가 있어서 외국 여행을 했지만 지난 1년
동안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은 그야말로 아무 하는
일없이 마치 부평초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보복이 두려워 줄곧 도망
다녔다고 보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도망다니는 데도 지쳐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나이
50이 가까와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그가 지난 1년
동안 외국으로만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충분한 돈이 없었다면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에게는 많은 돈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도망다니기에 충분한 막대한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을 느끼기는 커녕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오히려 돈 많은 부자보다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죽어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데.......
그는 종이컵을 구겨쥐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생각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죽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힘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양쪽에서 쫓기고 있었다.
조직이 그를 쫓고 있었고, 경찰 또한 그를 찾고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공항에서 맞아죽든가 경찰에 체포될 것이
뻔했다.
그는 경찰보다도 조직을 더 무서워 하고 있었다. 국제조직인
만큼 그들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영역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지구에 생존해 있는 한 말이다.
그들은 지구 어디에나 손을 뻗칠 수가 있었고, 바로 그 점을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한국 경찰에 대해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는 한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을 아주 놓을 수는 없었다. 한국 경찰이
인터폴(국제경찰)과 손을 잡고 수사를 전개한다면 그를
못잡을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항의 출입국심사대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보면 인터폴은 그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안았다.
11시 30분발 파리행 에어 프랑스 811번기를 기다리는
손님들께서는 5번 게이트로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11시 30분발.......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 다음 그것을 품 속에
집어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5번 게이트로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도 그들 속에 섞여
보딩패스를 보이고 게이트를 통과해 비행기에 연결되어 있는
브리지 위를 걸어갔다.
비행기의 출입구에 서있던 두 명의 금발 미녀가 그를 향해
미소를 던졌다.
그중의 한 명은 가슴이 너무 풍만해 스튜어디스 제복의 맨
윗단추가 풀어져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앉은 그는 벨트를 매자마자
이내 졸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비행기 타는 것도 이제 지겨운 일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어느 호텔 화장실의 변기 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뒤로부터 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이 무쇠 같은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기는 커녕
숨이 막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팔뚝을 손톱으로
할퀴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돈을
내놔. 돈을 어디다 두었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목을 분질러
버릴 테다. 이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말하고 있었다. 몰라.
돈이 지금 없어. 돈은 은행에 들어가 있어. 스위스 은행.......
그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막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악스런 손이 그의 뒤에서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팔에 감겨 있던 그의 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다.
으악!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옆에 앉아 있던 노파가 놀라서 일어나려고 했다. 앞자리의
흑인이 껌을 씹으면서 뒤돌아보았다. 흑인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복의 윗단추가 벗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노파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빈 자리로 옮겨앉았다. 그는 식은 땀을 닦으면서 목을
어루만졌다. 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드골 공항에 곧 착륙하겠으니 벨트를
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스먼트를 듣고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20분.
10분후 AF811기는 비행을 끝내고 드골 공항 활주로 위를
굴러갔다. 히드로 공항을 출발한 지 꼭 한 시간만이었다. 그는
현지시간에 맞춰 시계바늘을 한 시간 빠르게 돌려놓았다.
입국심사대 앞에 앉아 있는 프랑스 관헌은 그에게 안경을
벗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여권에다
입국해도 좋다는 스탬프를 찍었다.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와 홀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는 유리벽 저편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가 찾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몰려 서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길게 목을 빼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흔들어댔다. 그것은
책이었다.
홀로 나서자 젊은 그녀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담뿍
미소를 담은 채.
오랜만이에요.
머리를 잘랐군.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마한 그녀의 손은 병아리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잘라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희었고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녀는 푸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그 코트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괜찮아. 무겁지 않아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어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서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대요.
그는 끄덕이면서 잠시 무표정하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
공항 광장을 바라보았다.
공항 건물은 광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세워져 있었다.
채 녹지 않은 눈을 뒤집어쓴 차들이 물을 튀기면서
일방통행로를 따라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택시를 집어탔다. 그녀가 능숙한 불어로
뭐라고 말하자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차를 출발
시켰다.
광장을 빠져나온 택시는 파리 시내를 향해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중년의 운전사는 아스팔트 노면이
진눈깨비로 젖어 있는 것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2년만이죠?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음, 그렇지.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 참 빠르군.
그는 가능한 한 웃어보이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 그는
일거리가 있어 파리에 왔다가 어느 한국 식당에 들렀었다.
식사를 하면서 한국인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 주일쯤
관광안내를 맡아줄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웃으면서
가능하면 여자가 좋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그날 저녁 한국인 여자
유학생 한 명을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대면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무화(柳霧花)라 했다. 그녀는 건축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파리에 온 지 3년이 된 아가씨였다. 여느
유학생들처럼 그녀도 시간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한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관광안내를 맡고 있었다.
그때 말이 그녀는 집에서 부쳐주는 돈이 너무 적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근근히 유학생활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에게 적은 돈이나마 부쳐주는
그녀의 아버지는 시골 국민학교 교장이었던 것이다. 가정형편을
보아 도저히 유학할 형편이 못되었지만 그녀는 고생할 각오를
하고 떠나왔다고 하면서 지금은 언어장벽을 어느 정도 극복했기
때문에 차차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일 주일 동안 안내를 해준 댓가로 그는 정해진 액수의 배가
되는 달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놀란 그녀가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다음 번의 안내비를 미리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그녀의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었다.
1년 후, 그러니까 2년 전 가을 그는 파리에서 두번째로 그녀를
만났다. 그때에는 닷새쯤 머물다 갔는데 그때에도 그는 적지
않은 달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떠났었다. 그러고나서 이번에
세번째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귀중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공부는 잘 돼가요?
네, 그럭저럭.......
그녀는 공부에 시달린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좀 야위었어. 헤어스타일도 바뀌고 말이야.
2년 전 그녀는 지금처럼 야위지는 않았었다. 머리도 길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귀찮아서 잘라버렸어요. 머리에 신경쓰지 않으려고요.
그녀는 예쁜 여자는 아니었다. 결코 미녀라고 할 수 없는데도
그녀에게서는 미녀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연약해
보이면서도 연약하지 않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한
개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옆얼굴을 보면 차가운 느낌이었다. 눈빛은 맑았다.
선생님, 피곤해 보여요.
음, 돌아다녔더니 좀 피곤한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자 쓰신 게 어울려요.
다행이군.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호텔에 예약해 놨어요.
고마워요.
웅장한 개선문이 앞으로 다가왔다. 차는 개선문이 서있는
에트왈 광장을 오른쪽으로 돌아 콩고르드 광장을 향해 샹젤리제
대로를 조금 굴러가다가 멈춰섰다.
폭 1백 10미터의 넓은 거리 양쪽에 있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가지들은 잎 하나없이 눈을 뒤집어쓴 채 앙상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거리는 지저분했다.
황표(黃彪)는 길을 건너갔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호텔에 먼저 가서 짐을 풀어야 하지
않아요.
무화가 뒤따라 오면서 물었다.
짐 풀 것도 없어요. 짐이 있어야 풀지. 우선 어디가서 커피나
한잔 합시다.
네, 그래요. 이쪽으로 가요.
그녀가 그를 앞질렀다.
조금 후 그들은 르 콜리세 로 들어섰다. 그곳은 파리 최대의
카페였다.
날씨가 나빴기 때문에 카페 안은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마침 창가에서 한 쌍의 남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쪽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으니 샹젤리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모자를
벗어 탁자 한쪽에 올려놓았다.
흰 머리가 많이 생겼어요.
그녀가 그의 머리를 유심히 살피면서 말했다.
나이는 못 속이지. 이젠 늙었어.
늙으시기는요. 이제 한창이신데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음, 덕분에 잘 지냈어요.
그녀는 그를 사업가로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무역회사
대표로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그렇게 알 수밖에 없었다.
무화는 스푼으로 커피를 여러번 저었다. 황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희고 조그만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들의 관계는 관광객과 가이드의 관계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고 있었다. 남자 쪽에서 조심하고 있다기보다는 여자 쪽에서
워낙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가 가이드 이상의
관심을 자기한테 보여주었으면 했지만 지난번까지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세번째 만났으니 이번에도
그녀가 자신을 지켜낼지 의문이었다.
파리에 온 지 이제 얼마나 됐지요?
6년 됐어요.
꽤 됐군.
네, 스물 세살 때 왔는데 어느 새.......
그녀는 말 끝을 흐렸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는데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흑인 백인 황인종이 뒤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유무화는 스물 아홉이었다. 그 나이인데도 그녀는 결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집에는 몇번 다녀왔어요?
작년 여름에 한번 다녀왔어요.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래요?
그는 약간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어요?
거기까지는 물어보는 게 예의였다.
그녀는 담배를 뽑아 물었다.
소뿔에 가슴을 받혔나 봐요.
저런 어쩌다가.......
먹이를 주는데 갑자기 달려들었대요.
그녀는 남의 일처럼 가볍게 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그전에도 가끔씩 피우긴 했어요. 선생님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지만.......
작년에 한국에 갔다면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지?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시간도 없었지만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어요.
코밑 수염을 기른 웨이터가 빈 잔을 거두어갔다.
런던에는 무슨 일로 가셨어요?
아, 회사일로 갔다가 무화가 보고 싶어서 이리로 방향을 바꾼
거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얼마나 계실 거예요?
보름 아니면 한 달.......
이번에는 오래 계시네요.
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미스 유한테 신세를 질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인데.......
신세는 언제나 제가 지고 있는 걸요.
요즘 시간은 어때요?
방학이라 시간은 많아요. 여기서 하실 일이 많으신가 보죠?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당황한 것을 감추려는 듯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여기 온 지 6년이 됐으면 이제 고국에 돌아갈 때도 됐지
않나요?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네, 언제 돌아가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꼭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공부도 아직 안 끝났고요.
참 학위는 받았나요?
못받았어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녀의 맑은 눈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창 밖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파리에서는 3년 안에 학위를 따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3년이
지나면 학위 따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파리를 너무 속속들이
알게돼 공부하는 데 지장을 많이 받거든요.
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기도 했다.
파리에 막 와서 아무 것도 모를 때 후다닥 공부해서 학위
따가지고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지체하다 보면 갈수록 학위
받기가 어려워져요. 파리에 젖어들다 보면 주위의 유혹을 많이
받게 되고...... 결국 공부보다는 다른 데 더 신경을 쓰게 되죠.
저같이 학위도 못받고 세월만 잡아먹고 있는 유학생들이 꽤
많아요. 전...... 학위다운 학위를 받고 싶어요. 트뢰지엠 시클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런 건 받으려고 했으면 벌써
받았을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리고 있는 것을 그는 얼핏 볼 수
있었다.
트뢰지엠 시클? 그게 뭐지요?
여기에는 두가지 종류의 박사학위가 있어요. 하나는 방금
말한 트뢰지엠 시클이고, 다른 하나는 독토라 데타라고
국가박사가 있어요. 트뢰지엠 시클은 외국인에게 주로 내주는
학위로 우리 유학생들도 대부분 그걸 받아가고 있어요. 3년만에
후다닥 따가지고 가는 게 대부분 그거예요. 하지만 그 학위는
프랑스 국내에서는 권위가 없어요. 그걸 여기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아요. 여기서 그 권위를 인정해 주는 건 국가박사예요. 하지만
그건 따기가 몹시 어려워요.
그녀는 단숨에 말하고 나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샹젤리제의 흐름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가로수
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미스 유가 노리고 있는 게 바로 국가박사인가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절박하게 갈구하지는 않아요.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집어치울 거예요.
다르게 사는 방식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건 상당히 타협적인 말인데.......
네, 그래요. 전 6년 동안에 많이 달라졌어요. 극한투쟁하는
것처럼 제 자신을 질책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리고 술도 마시고
싶어요. 차도 한 대 사고 싶어요.
운전 할 줄 알아요?
면허증은 벌써 땄어요. 친구 차로 시내 운전도 여러 번
해봤어요. 서울보다 운전면허가 훨씬 쉬워요. 서울 사람들은 왜
그렇게 결사적으로 운전을 하죠? 서울에 굴러다니는 차들은 차가
아니라 살인도구 같아요. 운전하는 사람들은 여유도 없고 품위도
없어요. 마치 촌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차라는 것을
사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같이 자기
괴시욕으로 차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땅은 좁은데
차가 크고 사치스러울 수밖에요. 보세요. 저기 굴러다니는
차들치고 반반한 차 있어요? 하나같이 날고 볼품없는 차들을
굴리고 있어요. 괴시욕이란 조금도 없어요. 필요하기 때문에
굴리는 거예요. 하지만 거리를 굴러가는 차량의 흐름은 멋지지
않아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는 그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쓸만한 중고차라면 값이 얼마나 되나요?
천 달러 정도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하나 사주지.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입을 다물고 손을 빼냈다.
내일 나하고 차를 사러 갑시다.
그는 잔에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선생님은 가끔씩 저를 놀라게 하세요. 그때마다 저는 여간
불편하지가 않아요. 차를 사주시겠다는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그런 선물을 받아야할 명분이 없잖아요. 그런 말씀은 없었던
걸로 해요.
그럴 수는 없지. 자, 호텔로 갑시다.
그가 먼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차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중고차를
한 대 사줘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 바사노
거리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얼마쯤 걸어간 곳에 조그마한 호텔이
하나 있었다.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나.
그는 호텔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무화는 얼굴을 붉혔다.
깨끗하고 비싸지도 않아서 여기를 예약했어요. 들어가보시면
괜찮을 거예요. 굳이 비싼 호텔에 가서 달러를 없앨 필요는
없잖아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설교하려고 하지는 말아요.
그는 앞장 서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에토왈이라는
호텔이었다.
그녀가 프론트로 다가가 뮤스 황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했다고
하자 프론트맨은 예약자 명단을 체크해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은 여권을 내놓았다. 프론트맨은 여권을 찬찬히
살피면서 필요 항목에 적고 나서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빈 칸에 사인하고 나서 열쇠를 받아들었다.
샤워하고 좀 쉬세요. 7시 쯤에 제가 이리로 오겠어요.
그가 방으로 함께 올라가자고 말하기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긴 그 전에도 그녀는 호텔 방까지 따라들어 오지는
않았었다.
그럼 이따 7시에.......
몇 호실이에요?
512호실.
그는 얼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보다 깨끗하고 고급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호텔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그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유무화가 큰 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무화씨!
그는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뒤돌아보자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지 말고 이이 올라와요!
그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주춤하면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후에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여자답게 조심스러운
노크소리였다. 그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넥타이를 뽑아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유무화가 코트에 두 손을 찌른 채 경계의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이리 들어와요.
그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는지 소퍼에 털썩 주저 앉는다. 왜
불러들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부른 거요.
그는 가방 속에서 위스키병을 꺼내들었다. 노란 액체가 병의
중간 정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고 이지적이던 옆모습은 담배를 입에 물자 데카당한
모습으로 변했다.
탁자 위에는 컵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컵에다 노란
액체를 조금 따랐다.
자, 한잔 들어요. 얼음도 없고 안주도 없으니까 그냥
스트레이트로 들어요.
그녀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술잔을 받아들었다.
황표는 잔이 없었기 때문에 병째 나발 불었다.
그가 병째 술을 마시는 것을 무화가 흥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가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렇게 드러누운 상태에서 술을 들이켰다.
코트 벗어요.
그가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화는 앉은 채로 코트를 벗어
빈 의자에 던져놓았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그렇게 묻고 나서 그녀는 위스키를 입 속에 흘려넣었다.
그 물음에 대해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있는 그 점이 그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선생님, 그전 같지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전 같지가 않고 어떻다는 거지?
그는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피로해 보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사실이야. 나는 지금...... 죽음과 싸우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늙은이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그가 불치의 병에라도 걸려 그것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물음이었다. 황은 쿡쿡거리고 웃었다.
몸은 건강하지.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쫓기고 있어.
누구나 다 죽음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닌가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듯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리 와요. 이리 와서 슬 한잔 더 받아요.
무화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으며 빈 술잔을
내밀었다.
술을 따라주는 그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술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자가 있으면 금상첨화인데 말이야.
저는 여자가 아닌가요?
그녀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이기 전에 가이드이지.
가이드이기 전에 전 여자예요. 제가 선생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녀는 술이
엎질러지지 않게 술잔을 든 손을 높이 쳐들면서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조금 후
그녀는 상체를 일으킨 다음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파리에는 유학생이 5천명쯤 될 거예요. 출국하기가
쉬워지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몰려들었죠. 그중 진지하게 학업에
열중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빌빌거리면서
세월만 잡아먹는 거예요. 저도 그 나머지에 속하는 빈혈증
환자죠. 유학생이 많기 때문에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아요.
누구하고 데이트만 한번 하면 소문이 다 돌아요. 처음에는 그런
소문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지금은 그런 거 묵살해 버려요.
그녀는 검정색 폴라셔츠를 뒤집어 뽑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옷벗는 모습을 뒤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브래지어를 걷어냈다. 살결이 유난히
희었고 어깨뼈가 앙상히 드러난 약간 야윈 모습이었다. 그녀는
벗은 옷들을 소파 위로 훌훌 집어던졌다. 거추장스럽다는 그런
태도였다.
처녀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몸을 빼고 하는 따위의 짓거리
같은 것은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망설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가 놀랄 정도로 거침없이 옷을 벗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오히려 시원하고 깨끗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던 헝겊조각을 마지막으로
벗겨냈다. 전체적으로 야윈 모습인데도 엉덩이 부분만은
탄력있게 살이 올라있었다. 그녀가 그 쪽으로 돌아서자 젖가슴이
흔들렸다. 놀랍도록 큰 가슴이었다. 야윈 몸매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묘한 느낌으로 그를 자극했다.
아직 처녀인가?
저는 스물 아홉이에요.
그는 드러누운 채 옷을 벗었다.
제 행동에 놀라셨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일단 마음 정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음을 정할때까지가 문제지요. 섹스자체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나는 흥분이 잘 되지 않아.
저도 그래요.
창문에 커튼을 치는 게 그런 일을 하는데 좋은줄 알면서도
아무도 일어나 커튼을 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큰 젖가슴 사이에서 흥분했다. 그는
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에 입을 갖다댔다.
임신시키지 말아요.
남자를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 벌써 허덕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자기를
다스릴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임신시키지 말아요.
그녀가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임신을 하건 말건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리를 떠나버리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는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런 식의 삶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무화는 남자의 목에 매달렸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눈송이가 거기에 달라붙었다가 이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현실을 잊어갔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버스를 타고 덜컹덜컹 흔들리며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그리고 가난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정년을 1년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몸을 가누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교장직도 내놓아야 했고 설살가상으로 그녀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4남매의 막내였다. 위로 오빠 둘과 언니가 있는데
오빠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고 언니는 고향 남자와 결혼해서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있었다.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오빠들은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꺼려 했고 그녀의 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형편이라
친정 아버지까지 모실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80이 다 된 할머니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역시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할머니는 먼저 죽었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을 텐데 하면서 60이 넘은 아들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손수 밥을 지어 입 속에 떠넣어주었다.
지난 여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가보았을 때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보다도 아버지의 처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몇번이나 자신에게 타일렀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키우는데
전생애를 바친 몸이었다. 자신들을 교육시키느라고 모든 수입을
써버렸기 때문에 집에는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자식된 도리로서
누군가 한 사람쯤 아버지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 마땅했다. 이제
자신이 아버지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뿐이었고, 결국 그녀는 도망치다시피 고향집을
떠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고향과 아버지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떠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때문에 학업을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대신
성취욕에 사로 잡힌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껏이
지나쳐 지금은 학업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었고 갑자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비틀거리는 빈혈증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몸져 누우면서부터 적은 돈이나마 송금도 끊겼기
때문에 그녀는 당장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파리
유학생으로서의 긍지나 낭만 같은 것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공항에 마중나가 황표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전과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카페 르
콜리세에서 그가 그녀의 손을 만졌을 때 그녀는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몸을 내맡기는 행위는 사실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 앞에서 그런
다는 것은 냉정한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존심을 꺾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 위에 헐떡거리며 자신의 몸뚱이를
짓이기고 있는 그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그녀가 좋아할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장점은 돈 쓰는
것이 헤프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돈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그 위력을 가지고 불안해 하고 있는 그 남자만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이 몸 속으로 분출하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는 자신의 욕구를 발산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옆으로 벌렁 눕는 것을 보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싫은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는 그래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느낌까지 들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배 위에 끈적거리는 남자의 땀을 시트로 닦아내면서
임신하면 어떡 하죠? 하고 물었다. 남자는 거칠게 숨을 내쉴
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그런 것을 물었다고 후회했다.
담배 한 대 주겠어?
한참 후 그가 말했다.
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담배와 성냥을 집어들었다.
두개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하나는 그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피웠다.
두 사람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로 방안은 금방 뿌옇게
흐려졌다.
무화는 아주 멋진 여자야.
그가 팔을 뻗어왔다. 그녀는 그의 팔안에 안기면서 그의
끈적거리는 땀이 자신의 몸으로 배어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이야말로 멋지신 분이에요.
그녀는 울고 싶었다.
샤워좀 하고 오겠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그 밑에 서서 물을 맞으면서 그녀는
소리를 죽여 울기 시작했다. 한번 터져나온 울음은 쉽게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르바이트로 파리에 들르는 한국인들의 관광안내를 맡으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몸을 허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단호하게 물리쳐왔었다.
이제 그 둑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자신의 처지가 가여웠다. 북받치는 슬픔을 입술로 깨물면서
그녀는 벽에다 얼굴을 갖다댔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