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봉황대상량문(鳳凰臺上樑文) 전주인(정종후손) 이면승(李勉昇,1766~1835)
◾<김산군읍지,1759> 新增봉황대 在蓮花提上
◾<김산군읍지,1895> 봉황대 二去. 辛卯(1771년) 春 郡守 金恒柱 重建. 在蓮花提傍去. 壬子(1792년) 夏 君守 李性淳 改建
◾이면승(李勉昇,1766~1835)[진1789][문1794]字계래(季來), 號문헌(文獻) 諡號문헌(文獻)
配반남인 박정엄(朴廷淹)[進]의 딸
*김산군수(1788.12.~1793.4.) 이성순(李性淳)의 아들로 *김산 봉황대상량문을 남김
*전라도 암행어사, 황해도 감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역임.
<김산군읍지,1895> <김천국역역사지리서> P321.참조 번역 김진곤
봉황대상량문(鳳凰臺上樑文)
전주인(정종후손) 이면승(李勉昇,1766~1835)
術夫, 名都占逰觀之區 因地之勝, 華構歴頹剝之運 待人而興. 豈但爲賁餙 風流亦所以修舉曠闕. 盖玆邑跨湖嶺之要 臺擅山水之竒, 門隣湧金 通遥矚扵十里蹄轂. 潭凝沉璧 櫬新彩扵一色菱荷.
서술해보면, 유명한 고을이 유람할 곳을 가지고 있는 것은 땅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건물이 무너지는 운을 겪으면 사람이 일으키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다만 꾸미기만 하겠는가. 풍류 역시 방치되었던 것을 수리하여 받드는 것이다.
대저 이 고을은 영호남의 요충지에 걸쳐있어 (봉황)대는 산수의 기이함을 차지하여, 가까이에 용금문이 있어 십리 밖의 말발굽과 수레가 아득히 보이고, 연못에는 벽이 잠겨 어리고, 마루(?)는 마름과 연꽃보다 새 빛이 난다.
*용금문(湧金門) : 남송(南宋)의 행도(行都)인 임안(臨安), 즉 지금의 항주시(杭州市) 서쪽 성문으로 서호(西湖)를 굽어보고 있다. 김산군 읍치에 용금문이 있다. *능하(菱荷) : 마름꽃과 연꽃을 아울러 이르는 말.
鳳凰篇名 依然詩仙之題詠, 龍蛇閱怯 久久地靈之護呵 那知物換而星移. 以致風凘而雨泐 赤壁破蘇子之夢 皜衣何人. 黃樓訴崔生之拳, 白雲此地 草塢苔逕 仍爲樵牧之場, 花榭藥欄 遂失觴詠之所.
봉황이란 편액은 시선(이태백)의 제영과 다름없어, 임진왜란 병화에도 오래도록 지령이 보호하였지만, 어찌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알겠는가. 비바람에 깎이고 씻기기에 이르니, 적벽에서 소부자의 꿈을 깨트리던 백의 문사는 누가 되겠는가. 황학루처럼 최생의 손을 호소하지만, 이 땅에 백운(세월)이 흘러 잡초무성한 담장과 이끼 낀 오솔길은 나무꾼과 목동의 놀이터가 되어서, 꽃피던 사대와 약초 울타리의 각영(觴詠) 장소를 잃어버렸다.
*赤壁破蘇子之夢(적벽파소자지몽) : 옛날 소순(蘇洵)이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데리고 악양교(岳陽橋)를 지나면서 「천하의 문장 두 아들을 데리고 이 다리를 지나간다.」라고 하였는데, 이귀(李貴)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을 지나면서 ‘옛날 소순(蘇洵)이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데리고 악양교(岳陽橋)를 지나면서 「천하의 문장 두 아들을 데리고 이 다리를 지나간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지금 천하의 절의(節義)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가니 어찌 소가(蘇家) 부자의 문장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을 비유. 김산군수로 부임하더 이성순은 문장이 뛰어났던 이면긍과 이면승 두 아들을 두었다. *黃樓訴崔生之拳(황루최생지권) : 〈황학루(黃鶴樓)〉 시를 지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처럼 뛰어난 문재(文才)의 소유자에게 호소한다는 의미.
逮夫 大人之莅郡 事無不舉 治有餘閑, 修養士之堂 制度復舊, 葺迎客之舘 棟宇咸新. 玆又相地之冝 爱始建臺之役. 贖民田而開基址 前巽後乹, 捐官廩而備瓦材 上損下益. 一面洲嶼 別是環山而繞流, 八角軒楹 非止累石而築土
아버지께서 군에 부임하기에 이르러,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없지만 다스림에 여가가 있었기에, 양사당을 수리하여 제도를 복구하고, 객관의 지붕을 다시 이어 동우를 모두 새로워졌다. 이에 또 마땅한 땅을 살펴 대를 짓는 공역을 시작하였다. 백성의 땅과 바꾸어서 터를 개척하니 손향건좌(前巽後乹)이며, 관의 창고를 들어 기와와 재목을 준비하니 위를 덜고 아래를 더하는 모양이었다. 한 면의 모래섬은 둘러싼 산과 구별하여 감싸 흐르게 하고, 팔각 마루기둥은 돌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흙을 채웠다.
*헌영(軒楹) : 마루의 기둥
工告上樑 序屬中秋. 鳳兮鳳兮來儀 二字舊額 翬如鳥如飛革 百尺新顔. 於是 彩架懸而衆舞爭呈 文榻列而嘉賓華至. 兩堤六橋之風物 何必讓美於西湖. 三山二水之形便 從此擅榺於南嶠. 雲飛雨捲 覩景熊之無雙 地秘天慳 悟興廢之有数. 玆成短引 助擧修樑
장인이 상량을 고하니 계절은 중추라. “봉황이여. 봉황이여” 하면서 의식을 시작하니, 편액의 두 글자가 꿩인 날아 가고 새가 놀라는 것과 같아, 높은 루가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단청한 보를 매다니 여러 사람들이 춤추며 다투어 올리고, 문탑(의자)을 줄지어 놓으니 아름다운 손님 모두 도착하였네. 두 제방을 연결한 여섯길(여섯개) 다리의 경치가 어찌 서호에 아름다움을 양보하겠는가. 삼산이수의 모습은 지금부터 영남에서 명소가 될 것이다.
비구름 걷히니 보이는 경치는 견줄 곳이 없고, 땅이 감추고 하늘이 아끼는 곳이지만 흥하고 무너지는 운수를 깨닫네. 이에 짧은 글을 지어 수선한 들보 올리는 것을 돕노라.
*비혁(飛革) : 춘추 시대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무너진 궁실을 다시 짓고 낙성을 알리니, 사람들이 송축하여 읊기를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으며,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으니, 군자가 올라가서 정사를 다스릴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詩經 斯干》
兒郎僞抛樑東 日出扶桑瑞靄中. 誰信湖山兼冨麗 杏花深處酒旗紅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들어보니 해가 부상(동쪽)의 상서로운 구름속에 떠오르네. 누가 호산이 부유함과 화려함을 겸했다고 믿으리. 살구꽃 깊은 곳에 주막 깃발 붉다네.
*행화(杏花) : 행화촌(杏花村). 술집을 가리킨다. 두목(杜牧)의 〈청명(淸明)〉 시에 “한번 물어보세 술집이 어디 있는지, 목동이 멀리 가리킨 곳 살구꽃 핀 마을.〔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兒郎僞抛樑南 高山天外落來三. 曽濆月出雲歸後 一片澄潭萬象涵.
어영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들어보니, 고성산 하늘 밖에 세 개가 떨어지네. 일찍이 달이 뜨고 구름 나왔다가 돌아간 후에, 한 조각 맑은 연못에 만상이 잠겨있네.
兒郎僞抛樑西 千丈黃山直欲齊. 詠罷美人歌一曲 半輪秋月入簾低.
어영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들어보니, 천 길 황악산 가지런하네. 미인가 한 곡조 읊기를 마치니, 가을 반달이 주렴 아래 들어오네.
兒郎僞抛樑北 天際雙垂九鳳翼. 斗下終南如何望 聖君齊壽祈宸極
어영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들어보니, 하늘가에 두 줄기로 구봉산일이 펼쳐있네. 북두성 아래 남산을 어찌하여 바라보나. 성군께서 가지런히 장수하기를 북극성에 기원하네.
*종남(終南) : 종남산(終南山).‘남산’의 옛 이름. *신극(宸極) : 북극성. 작은곰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천구의 북극 가까이에 있고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방위나 위도의 지침이 된다.
兒郎僞抛樑上 營室方中光欲放. 把酒登臨欲問天 太平行樂知誰貺.
어영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들어보니, 중앙에 집을 지어 광채를 뿌리네. 술잔 들고 올라서 하늘에 묻노니, 태평한 행락은 누가 주는 것인가.
兒郎僞抛樑下 門臨大道連平野. 使君之樂倘知不 日永花陰無訟者.
어영차, 대들보를 아래로 들어보니, 문은 큰길에서 평야로 이어지네. 사또의 즐거움이 하지(다투지) 않는 걸 혹시 아는지, 하루 종일 꽃 그늘에 송사하는 이 없네.
伏願上樑之後 一區之繁華稳占 四時之菑害永除. 軒構崔嵬 長留行客之指點. 笙歌縹緲 共和農勝之謳謠. 壬子 初秋 完山 李勉承 撰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는, 고을이 번화하고 사계절의 재해가 영원히 없게 하소서. 헌이 우뚝하니 여행객들의 지점이 되어 오래 머물게 하고, 생황 소리 아스라하니 풍년의 노래와 어울리게 하소서.
임자년(1792년) 초가을 완산인 이면승이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