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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카하시신지님의실천!팔정도!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팔정도
마음 (2)
육체의 지배자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영구히 전생 윤회를 계속하고 있는 의식이며,
혼(魂)인 것이다.
이 혼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기자신이며,
잠재의식 속에는,
과거세에서 배운 일체의 경험이 기억되어 있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희망하여 부모로부터 육체를 받아,
혼의 부조화한 업을 수정함과 함께,
이 현상계에,
인류의 마음과 마음의 조화에 의한 평화로운 평온이 있는
불국토를 건설하는 목적을 갖고,
인생 항로를 건너가는 수행자임을 알아야 한다.
즉 우리들의 인생은, 전생 윤회의 과정으로,
언젠가 실재계,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의 의지 아래에 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누구나 이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신불의 법칙이다.
하지만 육체라고 하는 배를 타버리면,
과거세에서 배운 체험의 일체가,
우리들의 잠재의식의 보고(寶庫) 안에 매장되어 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을 자기 자신의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에 의해 닫고 있다.
이 문을 열려고, 과거 사람들의 대다수는,
육체적인 고행에 의해 번뇌를 멸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다.
또한 육체의 형식적 규칙에 중점을 둔 수행에 의해,
깨달음에의 도달이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법에 적합한 평온한 마음을 얻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신리에 적합하지 않은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에 의한,
어두운 상념의 저항이,
불지(佛智)인 위대한 보고(寶庫)를 닫고 있음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산중에서 폭포를 맞거나,
단식을 하거나, 명상에 빠져 육체적인 수행을 해도
번뇌를 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에의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행위이며,
강한 집착심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意識).
의식의 중심에 있는 마음을 잊어서는 깨달음은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또 예를 들면,
정확히 전자가 핵(核)의 주위를 날고 있는 것처럼,
혹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 공전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 중심이 있어, 이 중심과 외부가 조화되어 있다.
앞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우리들의 의식의 중심이 마음이고,
몸 전체가 의식(魂)인 마음은 그 모든 것의 중심이다.
마음은, 정확히 유연한 소용돌이 모양의 공 같은 느낌으로,
감정, 이성, 본능, 지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음의 중심은 무한대의 우주 생명에 통하고 있음과 동시에,
우리들의 의식에 무한의 상념을 작동시키고 있다.
인생의 항로에 있어서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하는 이성,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감정,
신불로부터 주어져 있는 본능,
인생 경험과 지성,
이것들이 상호 조화를 유지하면서
우리들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조화되어 있어야 할 마음속이,
감정만 표면으로 나와 부풀어진 것이라면,
정서 불안정, 자기 보존적으로 되어,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수 없다.
상대방에게서 결점을 지적당하거나 하면,
금방 화가 나는 사람들이 많다.
" 자존심을 상처 받았다."라고 하며 감정적이 되어.
충고자의 결점을 역으로 찾아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보존이 강한 성격으로
부조화한 감정적인 언동에 의해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버린다.
하지만 스스로 만든 부조화한 말이나 행위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비와 사랑에 의해 충고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서,
자기 보존을 위한 부조화한 감정적인 상념 행위를 하면,
상대의 마음은 신불의 빛에 의해 뒤덮여져 있으므로 역 반사되어,
오히려 자신의 마음에 강한 반작용을 일으켜
더욱더 부조화한 어두운 상념에 뒤덮이기 때문이다.
'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
이다.
상대방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신불에게 상대의 불행을 비는 것 따위도,
그 불행의 현상은 자기 자신에게 튕겨져 되돌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쁜 상념 행위의 원인은,
스스로를 고난으로 몰아넣어,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된다.
올바른 자기 판단은, 솔직한 마음으로 타인의 충고를 듣는 것에 있다.
자기 보존을 위한 감정은, 자신을 상처 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또한 상처를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본능만이 표면으로 나오면,
자기 방어, 자기 본위가 되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본성을 잊고,
동물적 욕정의 포로가 되기 쉽다.
사랑을 잊은 육체적 본능은, 인간사회를 혼란으로 이끌고,
자기의 마음에 고통의 원인을 만들어 낸다.
그 때문에 깨달음의 길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우리들은 현상계의 영화를 동경하여,
세상을 즐기는 것과,
도를 즐기는 것은 스스로 별개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과거에 번영했던 나라들이 왜 멸망해 간 것일까.
약자들을 희생시켜 권력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부귀영화에 전념해, 동물적 본능이 통째로 드러남의 육욕적 행위에 정신이 팔려,
불성을 잃은 자아아욕의 화신으로 변한 것에 원인이 있다.
수행을 게을리하여 영화만을 즐길 뿐인 인생을 반성하고,
정법의 길을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구한 것이 주어졌을 때의 기쁨은,
어떤 것에도 바꾸기 힘든 것이다.
마음의 길은 심원하며, 깨달으면 이것에 이길 기쁨은 없다.
이 기쁨을 얻으려면, 모든 제현상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는 이성,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감정,
신불로부터 주어져 있는 본능,
인생 경험과 지성,
이러한 것들이 상호 조화를 유지하여,
마음에 사로잡힘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상에 대한 감사와 보은,
공양과 보시의 마음을 갖고,
신리의 실천 생활을 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창은 열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위대한 지혜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우리들은, 혼의 형제나 수호령, 지도령과 조화되어,
우리들이 보다 좋은 인생을 보내도록,
자비와 사랑으로 충만한 지도,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재계 저세상에서는
이 현상계의 양상을,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능력은, 인간의 누구에게나 있고,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가, 지위, 명예 빈부에 관계없이,
만상 만물에게 자비와 사랑을 평등하게 주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바른생활 노력 속에서 마음의 눈은 열리도록 되어 있다.
이 생활 노력도 신불에게서 주어진 본능이며,
의, 식, 주, 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인류는 기후와 환경에 대응해, 적응한 의복 생활을 고안해왔다.
육체 보존을 위해, 동, 식, 광물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도 알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자연환경으로부터 지키는 장소로서
주거를 갖는 것도 알고 있다.
이들 모두는 본능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또한 우리들이 경험해 온 지성만을 마음의 표면으로 낸 경우는,
그 경험을 과신하여,
세상사를 판단하는 경향이 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잃은 지성은, 인류를 불행에 빠뜨린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발전한 물질문명은,
공해라고 하는 큰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물질 경제 문명의 큰 비틀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신리를 알고 만상 만물은 상호관계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념을 중심으로 해서 감정. 이성, 지성, 본능의 밸런스가,
항상 이루어져 있는 마음속의 상태.
그것이 평온의 모습이다.
이성은 마음의 제어장치이며,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바르게 컨트롤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화한 감정적인 상념 행위는, 상대에 대해서도
좋은 영역(靈域)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마음의 안정과 명확한 견문에 의해 얻어지는,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깨달음이 인생의 큰 목적의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항상 번뇌에 휘둘려 무익한 유흥 놀이,
항상 평온함이 없는 불안정한 생활,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나 생(生)과 사(死), 물질과 경제 등
여러 가지 욕망의 바닷속에서 방황하여
신성 불성을 깨닫는 것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가진다면
이번에야말로 업의 수정을 이루어,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 오려고 누구라도 생각하고 오고 있지만,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전생 윤회의 과정에서는,
어떤 때는 왕자로서 대중 위에서 영화로운 삶을 보내며,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권력에 의해 자기 보존을 했기 때문에,
결국 돌아간 어두운 연옥 지옥에서,
인생에서 범한 죄를 수정하는 고통을 이겨내고
천상계에 겨우 올라 간 사람도 있다.
그리고 천상계에서 반성하고,
이번에는 가난한 사람으로서 태어나 열심히 일하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구해야 할 목적을 노력해 이루고,
실재계에 돌아가 빛의 세계에서 사는 경험을 맛본 사람도 있다.
각각의 사람들은 이처럼 천차만별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우리들은, 항상, 그 마음에 따라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올바른 법을 깨닫고 있으면,
번뇌에 대해서는 이성이 작용하여,
항상 상념 행위에 반성의 브레이크가 작용하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적다.
이처럼 우리들 의식의 중심인 마음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고통과 즐거움의 인생을 경험시켜 온 것이다.
우리들은 번뇌에 지배받기 쉬운 마음을,
정법에 귀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평온함과 조화된 불성을 자각하기 위해서도,
우리들은 불퇴전의 법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헌상계의 만상 만물은, 한시도 쉬는 것 없이 변하여,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어느 한 가지도 자신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육친도, 또 육체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갖고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이 현상계를 수행해가는 과정의 것에 지나지 않는
이것이 인생의 사실이다.
저 세상에 갖고 돌아가는 것은,
인생 항로에서 경험한 일체의 선(善), 악(惡), 기억된 상념과 행위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최선의 노력으로 후회 없이 보내야 할 것이다.
항상 반성하는 마음은,
인간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혼의 정화로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노여움, 비난, 끝없는 욕심, 우매한 마음을 벗어나
일체의 고통의 원인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의 악(惡)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음속의 악(惡)에의 사로잡힘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이욕(利欲), 영화에 이끌리는 번뇌를 버리고,
일념삼천의 마음을, 항상 빛의 세계,
즉 조화의 세계에 두어,
이해득실, 정욕, 지위, 명예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구한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덕에 의해 주어진 사람들은,
자기에게 엄격하고, 항상 겸허하며,
잘못이 없는 정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 경제 문명의 고도성장에 의해,
현대 사회의 사람들 대다수는, 마음을 잃고 있다.
우리들은, 올바른 마음을 되찾고, 자아아욕이 많은 마음과 싸워,
진실로 올바른 마음의 문명을,
물질문명의 위에 쌓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설사 타인에게서 비난을 받을지라도,
매를 맞더라도, 돌에 맞을지라도, 칼로 베어지더라도,
감정적이 되어 분노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인욕의 마음을 갖고,
일체의 제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부동의 마음으로,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도, 분노의 마음을 가져서는
신리의 생활을 지킬 수 없다.
마음이 정법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성취해서,
잘 인내하고, 베풀기 힘든 것이라도 자주 베푸는 것,
선행을 베풀어도 그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항상 갖고,
마음의 길을 구해 정진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인생의 목적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물질문명이 향상되어, 경제적으로 의. 식. 주 가 안정되면,
인간은 다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자나,
이것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상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 따위는
마음에 평온함이 없고, 마음의 격투가 계속되는 인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범하고 있는 죄에 만성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설(說)하는 사람들이, 사리사욕의 마음을 갖고 있으면,
더한층 어두운 상념에 지배되어
마음의 평온을 잃고,
육체적으로도 부조화한 현상이 나온다.
종교적 지도자 중에서, 언제나 병약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격투가 있고, 마음에 평온이 없고,
자기 자신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지(智), 의(意)에 의해 중생을 인도하는 것은,
그 마음을 망가뜨리게 된다.
믿고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보다 큰 죄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현상계에 있어서도 지옥의 생활을 체험하고,
게다가 저 세상에 돌아 간 후에도,
보다 혹독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 영능자는, 이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즉석에서,
가장 명쾌하게 알고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고 믿지 않는 것과 관계없이, 이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빛의 세계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심이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마음의 양식이며,
생활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인 공염불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다.
정법에 따라,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한
실생활의 노력을 한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술(記述)에 불신이 있다면, 기도하는 것만으로,
" 뜻밖의 행운"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리적 생활 이외에는, 인간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적인 종교적 행사가, 반드시 신리라고 할 수 없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경문을 올리는 것으로
진정 성불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형식적인 행사에 대해서도, 잘 반성해야만 할 것이다.
경문을 올리는 기도만이 신앙은 아니다.
마음을 잃은 근행 등은 생활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에 의해,
평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신리에 적합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도 빛의 세계에 살고,
부조화의 마음을 갖고 항상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지옥계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까지 어두운 생활을 체험하도록 되어 있다.
선조에 대한 공양은, 생존하고 있는 자손이, 바르고 밝게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조의 최고의 기쁨이며 최대의 공양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조는, 자손들의 마음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도 반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방황하고 있는 선조가 있기 때문에 불행이 생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불행은, 가족의 마음이 신리에 반한 부조화에 기인하고 있음을 반성하지 않는 한,
어두운 상념을 제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마음이 아름답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공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불행은, 살아 있는 인간이 만들어내며,
부조화한 상념 행위가, 방황하는 빙의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가족 일동의 마음이, 항상 정도를 걷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신불의 빛에 의해 뒤덮이고,
집도 또한 빛에 뒤덮이기 때문에,
방황하는 영은,
이 빛에 의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성불할 수가 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방황하는 영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역(靈域)을 바로잡는 것이,
자기 자신을 또한 구하는 것이 된다.
마음을 잃은 경문을 몇 만 번 올려도,
인내력과 성대의 연습뿐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목의 신리를 생활 속에 살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깨닫는 지름길인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투쟁이라고 하는 말은 없다.
" 원수를 사랑하라."
"인내"
"오른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라."
" 인욕" 등등
모두 조화라고 하는 것이 신리인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미담으로 되어 있는 원수 갚기, 등도.
신불의 자식으로서는 해야 할 행위는 아니다.
그것은 충동적 감정적 행위이며,
이 집념은 우리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인욕의 마음이 없고,
"부모의 원수" " 남편의 원수"라며,
항상 마음의 평온이 없는 생활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은, 상호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생겼던 것으로,
그 결과를, 감정적으로 당사자나 관계자가 응보 한다고 하는 것은,
한층 더 죄를 깊게 할 뿐이다.
응보는, 어두운 상념이 부조화한 결과를 일으켜,
언젠가 이 어두운 상념에 의해,
자기 자신의 몸에 부조화한 결과가 순환해 온다고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물리적으로 제재를 가한다고 하는 것은 안된다.
살해당한 부모의 원수를 갚은 시점에서,
원수의 자식은 또 부모의 원수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끝이 없는 것일 것이다.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상념은 아수라계에 통해서,
마음에 평온을 얻기는커녕,
어둡고 검은 자기 자신을 덮쳐, 지옥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지상계의 집념보다 한층 더 강대하게 되어,
연옥, 지옥에서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계에 있어서도, 노리거나 노림을 당하거나 하며,
몇 십배나 혹독한 환경 속에서, 불성을 깨닫기까지 수행받도록 되어 있다.
원수를 치기 전에, 그와 같은 결과가 된 것에 대해 그 원인을 추궁하고,
어디까지나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도의 입장에서 반성해 보는 것에 의해,
이성이 작용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지혜 있는 인생의 수행자라고 하는 것이다.
정법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상대를 증오하지 않고, 가련하게 생각해서
< 신이시여, 가련한 자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잘못된 상념을 고쳐, 마음에 평안을 내려 주세요.>
라며 상대의 죄를 용서한다.
" 원한을 가지고, 원한으로 갚지 않고"
의 심경(心境)이 ,
조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보살의 마음인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무례한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지위나 권력에 의해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자기 보존을 위한 어두운 상념은,
언젠가, 모습을 바꿔
자기에게 내리퍼붓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상념과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작은 문제라도,
그 원인과 결과를 잘 깨달아, 판단을 잘못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작은 어린이라도 바보라고 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장래, 우리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우습게 여겨서는 안된다.
작은 불은, 마침내 광대한 산야도 대도시도 다 태워버릴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빗방울의 힘도, 오랜 세월에는 딱딱한 대리석이라도 구멍을 뚫어버린다.
작은 실개천도, 큰 강이 되면 모든 사물을 쓸어내리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의 창이 열렸을 때에는
대자연이 인생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러한 것에 의해서도,
우리들은 진실된 인생의 기쁨에 잠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정법의 실천 생활 속에 번뇌가 멸해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인생의 중심이다.
마음이 이 현상계의 제 현상을 즐기면,
방황과 고통이 생기고,
마음이 정도를 좋아하면,
깨달음과 기쁨이 생겨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실천에 의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
자비와 사랑에 의해 사람들에 대한 보살의 마음의 행위를 하는 것,
보다 마음을 정화해 평온함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육체는 인생 항로의 배에 불과하며,
언젠가는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 혼은, 항상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여 변화하며,
모든 것은, 신불의 계획에 의한 인연에 의해 성립하고 있다.
전생 윤회의 법에 따르고 있다.
마음에 생기는 악의 원인을 끄집어내어,
현상화된 악의 결과를 잘 반성해서,
그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선(善)의 근원을 키우고, 정법을 믿고,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고,
항상 반성 속에서 마음을 정도에 통일하는 것에 의해
위대한 불지의 문은 열려간다.
자비는 자비를 키우는 것이며,
자비를 수행하는 것에 의해,
끝없는 욕심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슬픔은 슬픔을 돕는 것이며,
상대의 입장에 서서 중도의 판단을 잊지 않고,
슬픔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
분노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기쁨은 타인의 기쁨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것으로,
자기와 타인으로 사로잡히는 마음을 끊을 수 있다.
버릴 것은, 자신이 행한 행위의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
또한 은혜를 입지 않고,
은혜와 원한 어느 쪽의 사람에 대해서도 차별을 없애는 것에 의해
집착의 마음을 끊을 수가 있다.
그 결과, 중생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자비이며,
모든 것을 평등하게 차별하지 않고, 중생에게 환희의 마음을 갖고 대하는 것,
이것이 희사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키워 번뇌를 이기는 것은 어렵다.
정도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른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인생 위에서의 상념 행위의 하나하나의 거듭됨이다.
그리고 그 안에,
부동의 마음은 만들어져 간다.
마음의 발견 (과학 편) - 다카하시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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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카하시신지님의실천!팔정도!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