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사 |
2008-09-07 11:16:23, 조회 : 49, 추천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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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탑에 사리를 봉안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어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이레 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과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선사가 절을 고쳐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자장은 귀국 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을 지내며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문수진신을 친견하는 꿈을 버릴 수 없어 오대산으로 들어와 모옥을 짓고 문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원녕사(元寧寺), 갈래사(葛來寺)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도를 했다.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 사자산에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이 창건된 것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다. 중대에 터를 잡고 그 위에 적멸보궁을 지은 것도 자장 율사의 간절한 구도심과 관계가 깊다. 오대산은 중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의 오류성중(五類聖衆)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산명(山名)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동대에는 관세음보살, 서대에는 아미타불, 남대에는 지장보살, 북대는 석가모니불, 중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대는 자장이 친견하고자 했던 문수 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었으므로 가장 소중한 정골사리를 이곳 적멸보궁에 모셨다. 중대를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향각은 조선 초기 태종대에 깎아지른 절벽에 석축을 쌓아 올린 뒤 중건하였다. 보궁의 불사리를 공양하는 분수승(焚修僧)이 머무르는 곳인 탓에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향각 앞에는 참배객의 눈길을 끄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근세 고승으로 추앙 받는 한암선사가 서울 봉은사에 머물다가 1926년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길 때 짚고 온 단풍나무 지팡이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 중앙에 우뚝 서있다.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도량 적멸보궁, 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보궁 어느 곳에 불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보궁 뒤에 약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소담하게 서 있으나 이 불탑도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불탑이요,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오대산에 오류성중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적멸보궁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정근이 행해지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정골사리봉찬회가 주관하는 대법회가 한 달간 열린다. 이 때가 되면 보궁참배를 위해 영동 지방은 물론 전국의 불자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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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0월에 봉정암으로 성지순례 가는것 다들 아시죠.많이 참석합시다
자안 처사님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다들 힘들다 그래서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체력에 따라 다르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너무 겁 먹을 필요가 없다는..) 물론, 걷는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인터넷에 찾아보면... "할매가 고무신 신고도 간답니다".. 물론,,, 도반님들께서는 등산화로...
오늘에서야 마음 단단히 가다듬고 올려주신 글월을 새겨 읽었습니다......마음은 벌써 봉정암을 오르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불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