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와 명치유신 정부와의 대립이었던 서남전쟁(西南戰爭)에서 화력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유신군이 사쓰마(薩摩)의 지겐류 발도대(示現流 拔刀隊)에 고전한 일을 반성하여 명치유신 정부는 전쟁 직후 바로 경시청에 검술을 필수과목으로 집어넣고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경찰들에게 많은 류파의 장점을 살려 일률적이고 통일적으로 체계화된 새로운 검법을 교수하기 위해 많은 검객들을 초빙, 새로운 류파를 창시하도록 한다. 이때부터 검술은 차츰 케이시쵸류(경시청류. 警視廳流), 또는 켄도오(劍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현대 검도의 뿌리는 일단 일본이 19세기 말 명치유신을 단행한 후, 경시청의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교수한 이 경시청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경시청류는 그때까지만 해도 수백에 달하던 수많은 류파 중, 가장 유신정부와 관련이 깊고 명성이 높은 대류파의 유명인사를 초빙하여 많은 류파의 기술들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어느 류파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실전기술들만을 선별하여 일본의 검술을 통일시키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때 초빙된 인사들은 25명으로 대부분 오노하 잇또오류(小野派一刀流),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 타쓰미류(立身流), 쿄신메이치류(鏡心明智流), 타미야류(田宮流), 호쿠신 잇또오류(北辰一刀流), 쿠라마류(鞍馬流) 계통의 검객들이었고 이들은 고류 검술과는 다른 새로운 체계의 교수법과 수련법, 그리고 카타(形)를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치유신 이후 검을 착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 상황에서 검과 거리를 느끼는 신세대 경찰들의 교수법은 당연히 에도시대 무사들을 교수하는 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로 생긴 결정체가 바로 경시청류의 카타(형)이며 이 카타는 다이쇼, 쇼와 시대 (일제시대) 대일본 검도형으로 바뀌어 패전후 지금의 검도에서 채용하고 있는 일본검도형으로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경시청류의 카타와 현재의 일본 검도형의 카타에는 차이가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수정이 가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며 실전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카타를 이용한 경찰과 청소년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검의 이치를 교수하기 위해 일본 검도형의 카타는 과거의 그것과 비교, 기술이 많이 단순화되고 또 형식화되었다. 그러나 분명 경시청류의 카타와 마찬가지로 현재 검도형의 카타는 많은 류파중의 기본중의 기본, 그러면서도 극의(極意) 중의 극의만을 엄선해 놓았다는 점과 그 흐름이 분명 경시청류, 그리고 제국시대의 대일본검도형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경시청류의 카타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연무대회에서 원로검사들에 의해 선보여지고 있는데 카타 자체는 10본으로 짜여져 있다. 1본은 핫소(八相)로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에서 가져온 것이고 2본은 헨카(?化)로 이는 쿠라마류(鞍馬流)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쳐내려오는 상대의 검을 머리 위에서 받아 반원을 그리며 쳐내린 후 상대의 검선이 중앙에서 벗어난 사이 상대의 중앙을 찌르고 들어가는 실전기술이다. 현재 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러한 기술이 경시청류 카타, 그리고 초기 명치시대 검도에는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검도는 현재의 것과는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3본은 핫텐기리(八天切)로 이는 테이보잔류(提?山流)에서 가져온 것이고 4본은 마키오토시(卷落)로 타쓰미류(立身流)의 대표적 검기이다. 5본은 명치시대 검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호쿠신 잇또오류(北辰一刀流)의 게단노 쓰키(下段の突)이다. 자신의 목검을 땅과 평행이 되도록 한 잇또오류의 하단자세에서 상대의 명치부위를 타이밍에 맞추어 찌르고 들어가는 기술이다. 6본은 아사야마 잇텐류(淺山一?流)의 아덴(阿?), 7본은 유명한 지겐류(示現流)의 이치니노타치(一二の太刀)로서 팔상으로 겨누고 있는 상대의 왼쪽 팔꿈치를 전광석화의 빠르기로 베어 내리는 것이다. 8본은 신토무넨류(神道無念流)의 우치오토시(打落)으로서 상대의 검을 쳐 내리고 공격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 기술은 현대 검도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9본은 하세쓰(破折)로 이는 야규우신카게류(柳生新陰流)에서 따온 것이고 마지막으로 10본 이케쓰(位結)는 교오신메이치류(鏡心明智流)에서 도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0본 중 5본이 명치유신 이전 유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막부와 싸운 사쓰마(薩摩), 쵸오슈(長州), 토사(土佐)를 중심으로 한 시시(志士)들이 주로 수련한 류파(直心影流, 北辰一刀流, 示現流, 神道無念流, 鏡心明智流)라는 점이라는 것이며 초기 검도의 생성과 명치정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측면이라 생각된다.
여하튼 서남전쟁 후, 유신정부가 중심이 되어 케이시쵸오류(警視廳流)를 보급하고 평화시대의 경찰들을 위한 통일된 하나의 검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과 비슷한 때, 일본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겟켄(擊劍)이라는 새로운 오락의 장르가 생겨 경시청류와는 별도로 검에 대한 열기가 다시 한번 고조되기 시작했다. 명치유신 이전 도쿠가와 막부의 막신(幕臣)이었던 사카키바라 켄키치(?原健吉)라는 지키신카게류(直心影流)의 검객이 과거 도쿠가와 막부의 하타모토(旗本. 친위대)출신 전우들과 뜻을 함께 하여 검기를 민중들 앞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의 도래와 서양문물의 침투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급속히 과거를 잊고 있던 일본의 대중들에게 사무라이에 대한 향수와 오락을 제공해 준 겟켄(擊劍)은 대단한 흥행에 성공한다. 켄키치는 돈을 받고 지금의 도쿄(東京) 아사쿠사(淺草)부근에서 시합을 한다던지, 진검으로 투구를 두 동강 낸다던지 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이러한 격검의 성공은 유신이후 검을 잃고 가난과 실의에 빠져있던 많은 무사출신 빈곤층들에게 다시금 “검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일본 전역에 겟켄이 확산되고 정부차원에서 검도를 중앙체계화 시키기 시작하자 과거 막부시대 무사출신들은 도장을 열거나 겟켄 흥행에 동참하기 시작하였고 검도는 학교의 교육과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명치시대의 검도는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평화시대의 검도인 만큼 막부말기의 무사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연마하던 실전적인 검기보다는 경찰, 그리고 젊은 학생들에게 과거 무사계급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강인함과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심는 것을 그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검도와 비교해서는 아직도 많은 실전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과격한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명치시대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게 되는 20세기 초반, 중반의 다이쇼(大正), 쇼와시대(昭和時代)까지의 검도에서는 막부시대와 명치시대의 검도와 마찬가지로 시합중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던지, 상대와 엃힌 경우 유도식의 넘기기로 상대를 집어 던진다던지 하는 기술들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넘어진 상대 위에 올라타서 상대의 면호구을 벗기면 이를 잇뽄(一本. 한판)의 승리로 인정했다고 한다. 아마도 상대의 면을 벗기는 것을 전국시대 이전부터 무사들이 상대의 수급을 따는 것에 의해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고 명예를 얻었던 것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당시는 시대상황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두 전쟁을 일본이 수행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다른 열강들과 패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때였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젊은이들의 군사적인 교육목적(한국의 교련과 비슷하다고 할까)으로도 검도가 쓰여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검도가 교육적인 목적으로 정착하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하나의 요소로 다시금 사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자 명치정부는 메이지28년(1894년) 다이닛뽄 부도쿠카이(大日本武德會)라는 학교를 만들게 된다. 이 학교는 나중에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0年代-20年代 初)에 이르러 쿄토(京都)의 무도전문학교(武道專門學校)로 명칭을 바꾸는 검도, 유도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4년제 (초기에는 3년제) 엘리트 대학이다. 이 대학 출신들은 대체로 군대 엘리트 장교가 되거나 검도, 유도의 사범으로 지위를 인정받았는데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고 존경받는 고급인력들이었다. 이 학교의 지도자로서 유명한 검사들이 바로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 나이토 타카하루(內藤高治), 와타나베 노보루(渡?昇)등의 쟁쟁한 무사출신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명치시대 이전 막부시대 말기에 이미 무사로의 검명(劍名)을 인정받던 인물들이었고 특히 와타나베 노보루는 명치유신의 실현을 위해 여러 전장에서 막부군과 싸운 실전경험을 두루 갖추고 있던 일류급 검사였다.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는 신토무넨류(新道無念流)와 야마구치하 잇또오류(山口派一刀流)를 대표했고 나이토(內藤)은 호쿠신 잇또오류(北辰一刀流), 그리고 와타나베 노보루(渡?昇)는 오오무라 잇또오류(大村一刀流)의 검사였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초기 명치시대 검도에 잇또오류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쿄토의 다이닛뽄 부도쿠카이(大日本武德會. 무도전문학교)와 별도로 도쿄(東京)에도 비슷한 취지로 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라는 대학과정 검도교사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이곳에는 나카니시하 잇또오류(中西派一刀流)의 다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郞)가 지도자로서 발탁되었다.
이러한 검도지도자 양성학교는 정신적인 교양과 기본기를 철저히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검술이 명치유신 이후 조금씩 검도로 변화하던 때, 새로운 지도법을 만들어내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 나카야마 하쿠도, 다카노 사사부로, 그리고 나이토 다카하루의 생각에 의해 생긴 이러한 기본 위주의 검도교수법은 이후에도 일본검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입학 후 처음 2년간은 시합을 시키지 않고 언제나 키리카에시(切り返し。현대 검도의 연격. 좌우면과 면을 계속 치며 전진, 후퇴하는 기본연습)만을 중심으로 수련했다고 한다. 길이 50미터가 넘는 도장에서 약 1시간 반 동안 계속해서 키리카에시만을 시켜 10번 도장을 왕복시킨 후 수련이 끝나면, 잘 걷지도 못하며 휴게실로 돌아온 학생들의 소변에서는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다고 하며 강한 찌르기 등으로 인해 수련중 실신자나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스포츠화된 현대 검도의 분위기와는 분위기가 사못 달랐다고 하겠다. 또한 시합을 한다고 해도 현대 검도에서 잘 쓰이는 사시멘(さし面)과 같은 작은 기술은 인정하지 않아, 언제나 팔을 확실하게 올리고 치는 큰 기술을 중심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사실 무도전문학교와 고등사범학교는 전국대회같은 시합에서 예상보다는 좋은 성적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중심, 정통성 중심의 교육으로 무도전문학교(武道專門學校)와 고등사범학교(高等師範學校)는 다시금 일본의 검술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전통적인 기예인 검도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이러한 검도의 발전은 일본이 1945년 전쟁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공백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당시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돌격에 치를 떨었던 미군은 일본에 진주한 후 일체의 무도를 금지시키고 일본인들의 마음에서 무도 자체를 없애려 노력하였다. 일본군의 과감했던 작전의 이면에는 일본 특유의 정신교육이 있었고 그 교육의 중심에는 무도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차츰 일본인 뿐 아니라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무도(특히 검도)의 장점을 살려 패전 후 미국에 의해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탄생한 일본의 스포츠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검도는 패전 후 다시 한번 스포츠로 재탄생했고 제국주의 일본당시의 검도와는 아주 다른 무도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도를 다시금 인정한 미국의 일본 주둔군은 하지만 얼마동안 검도를 한다고 해도 기합을 넣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국 군정부가 검도나 다른 일본 무도에서 하는 기합을 일본 무사들의 정신력과 생사를 초월한 가치관이 나오는 원천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패전 후 현대 검도가 생긴 초기 단계에서는 기합이 없이 죽도만으로 탁탁 치며 시합을 하는 진풍경이 짧은 시간이나마 연출되었었다고 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검도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물론 과거 명치유신 이전의 고류 검술, 그리고 패전 이전의 초기 검도와는 이론과 목적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 검도형이라던지 기본기에서 보이는 고류검술과의 연계성을 통해 우리는 현대 검도가 일본의 고류검술의 후손임을 알 수가 있다. 현대 일본 검도는 단지 일본의 국기가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수련되고 있는 세계적인 스포츠이며 일본에서는 추우오 다이가쿠(中央大學)와 고쿠시칸 다이가쿠(國士館大學)가 검도의 메카로서 일본 대학검도계에 군림하고 있다.
내용출처: '고류검술과 아이기도'
첫댓글 일 해라!
큭~
메뚝아...너 같으면 이리 긴글을 읽겠나....? 읽다가 눈 튀어 나오겠다...
저는 읽었는데....
누군가가 간단하게 요약좀 해두면 좋을텐데요~~~~~^^.
이제 다 읽어간다..
읽을라고 클릭했다가 무작위로 내려서 꼬리말 달고 갑니다 ㅡㅡ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