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오롯이 담은 창녕 ‘성씨고가’ | ||||
김정일 위원장 처가 … 람사르총회 앞두고 말끔히 새단장 중 국제적 관광명소 부각 전망 … 체계적 육성 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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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고가’는 기와건물 37동 130칸 규모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상당 부분 소실됐다가 최근 후손들에 의해 대부분 복원됐다. □국내 양파 최초 도입에서 보급까지 ‘성씨고가’ 맡아 ‘성씨고가’에는 그리 길지도 않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성씨고가’의 여인인 성혜림이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여인이었다는 것과 국내 양파재배의 출발이 바로 ‘성씨고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그것. 오늘날 창녕군 농민들의 ‘효자상품’ 양파는 ‘성씨고가’의 우석(偶石) 성재경 선생 부자의 손에 의해 도입됐고 전파까지 이뤄졌다. 최초 도입은 1909년 경 성재경 선생의 부친인 성낙안 선생에 의해 이뤄졌다. 이후 아들 성재경 선생이 재배에서 채종에 이르기까지 체계화했다. 성재경 선생은 한국전쟁 직후 농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보리대신 환금(換金)작물로 양파를 재배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또한 1963년 김성수, 하재호씨 등과 함께 경화회(자발적 새마을운동)를 창립, 양파재배를 확대하는 일에 주축이 되어 나섰다. 그리하여 1969년 6,000여 농가가 재배해 그 면적이 1,000여 ha로 급격히 늘어나 창녕이 전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양파주산지가 됐다. □‘적선지가’ 몸소 실천한 성재경 선생 ‘성씨 고가’의 일원인 우석 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적선지가’(積善之家)를 실천한 분이다. 1941년3월 일본 동경 법정대학 경제학부 졸업했고 1942년에는 창녕군 대지면장에 취임했다. 면장 시절, 자신의 곳간을 열어 춘궁기에 처한 농민에게 곡식을 나눠주면서도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아무 부담갖지 말라”고 하는 등 선정을 베푼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선대 성낙안, 성재경부자의 교육사업과 적선지가로 인해 지역민들의 칭송을 받고있고 그 후손인 협성농산 성기상사장과 영원무역 성기학사장이 뒤를 잇고 있다.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이 사비를 들여 복원 ‘성씨 고가’는 한국전쟁 때는 미군 사단 사무실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화근(禍根)이 됐다. 미군이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서류를 없애기 위해 소각하는 과정에서 집도 불탄 것. 이 때 결국 문간채를 비롯한 일부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됐는데 후손인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이 사비를 들여 2001년부터 경상도 일대의 고가들을 매입해 옛 자재를 구입, 이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성씨 고가는 전체가 큰집, 둘째, 셋째, 넷째의 집으로 이뤄져 있고 부지는 3만3,000㎡(1만평)규모다. 그 중 셋째의 집은 썩은 목재를 교체하는 등 1999년 복원이 됐다. 성씨 고가의 후원에는 여러 볼거리가 있다. 우선 대나무 숲이 있다. 고택들에 대나무 숲이 있는 건 선조들이 직접적인 햇빛보다는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그 은은함을 특별히 좋아했기 때문이란다. 대나무 중에는 까만 대나무 즉 ‘오죽(烏竹)’도 있다. 절이나 능묘 등지에 세우는 석등도 볼 수 있다. 후원에는 ‘확대’라는 이름의 세숫대야도 있다. 수도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었던 그 시대에 후원 곳곳에는 무릎 높이 이상의 돌에다 둥근 모양과 복숭아 모양의 홈을 파서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것이 ‘확대’인데 둥근 모양은 남성전용, 복숭아 모양은 여성전용이었단다. 후원 다른 켠에 한반도 지도를 본딴 연못도 있다. 우석 선생이 고가 바로 앞에다 ‘지양강습소’를 세워 4년 정도 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등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으니 그가 나라 잃은 설움을 연못의 모양에 담아 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한때 ‘빨갱이 집안’ 손가락질 이 같은 ‘적선지가’에도 불구 ‘성씨고가’의 일부 가족은 좌익활동을 했다. 성씨 집안 둘째인 성유경은 좌익성향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성혜림 등 가족을 이끌고 월북했고 그 때 이후 ‘성씨고가’는 좌익집안으로 분류돼 5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됐다.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됐던 지난 시절, 주민들은 ‘성씨 고가’를 두고 ‘빨갱이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게다가 성유경의 딸마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부인으로 살았으니 ‘성씨고가’ 후손들이 받아야 했던 손가락질과 그 고난의 세월은 여북했을까. 성혜림의 일생도 한 편의 드라마다. 성혜림은 성씨 집안 둘째인 아버지 성유경과 그의 둘째부인 김원주 사이에 1남 2녀중 차녀로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김원주는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기자출신으로 신학문을 배운 엘리트였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혜림은 유년시절 방학 때면 ‘성씨고가’에서 마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창녕과 서울을 오갔다. 예쁘기도 하고 총명했던 어린 성혜림은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동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1948년 서울 풍문여중 1학년 재학 중 남노당원이었던 아버지 성유경을 따라 월북한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 평양예술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에는 월북 작가 이기영의 장남 이평(李平)과 결혼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분야인 평양연극영화대학 연출과에 입학한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성혜림은 대학 졸업반 때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의 첫 주인공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인민상’을 받아 북한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1960년대 영화 ‘백일홍’, ‘인민교원’, ‘안개 흐르는 언덕’ 등에서 주인공을 맡아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자리를 굳힌다. □성혜림의 강제이혼 … 김정일과 동거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드라마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67년 ‘김정일’이 성혜림과 그녀의 남편이자 동기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 평’과의 혼인생활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때 성혜림은 33세, 김정일은 28세의 나이였다. 요즘으로 보면 ‘김정일’이 연상녀이자 유부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듬 해인 1971년 5월 ‘김정남’을 출생한다. 그러나 이들의 숨은 아내(동거)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이들의 동거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않은 터여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이때부터 배우 성혜림의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성혜림은 기약 없는 비밀 동거생활과 ‘김정일’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폐쇄된 생활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됐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양차 모스크바를 자주 찾게 된다. 그녀는 80년대부터 모스크바에 장기체류하기 시작했는데 지병인 신경쇠약과 심장병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 2002년 5월 사망했다. 그녀 나이 65세때였다. □성씨고가 체계적 보존관리, 관광자원화 필요 50여 년 동안 방치된 ‘성씨고가’는 사실 개화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으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갓집이라는 이유로 인해 누구하나 문화재로 지정하자고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는 ‘뜨거운 감자’격이었다. 그러던 세월 속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난 뒤 남북해빙무드가 전개됐고 실 소유주인 성기상 협성농산 사장이 2000년 11월에 관리인을 두면서 깨끗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2008년 람사르총회를 대비, 2006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성씨 고가’에 대해 이 지역 출신 강모택 도의원은 “이제는 경남도나 창녕군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광자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국내 양파 재배의 시배지인 이곳과 인근의 우포늪을 연계하면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며 “창녕군으로서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전했다. □관광해설사가 직접 설명 ‘성씨고가’는 전문 관광해설사가 있다. 김량한(011-802-6535)씨가 그다. 이곳을 찾을 때 그와 만나기만 하면 1만여평 남짓 ‘성씨고가’에 대해 맛스런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어떻게 찾아가나 구마고속도로 창녕 나들목에서 내려 대구·현풍쪽 표지판을 따라 24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창녕양파시험장과 이방·대지 방면으로 길을 잡아 가면 오른편으로 대지초등학교가 보이고 조금만 더 가면 오른편으로 고가가 보인다. <자료제공 =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 정리 = 김동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