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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지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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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맛집 멋집 스크랩 어린 자녀와 함께 걷는 덕양 비봉산 효행길
대마왕(119동) 추천 0 조회 184 11.08.21 08:0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백두연맥 오룡정기 이 땅 이르니/ 역의암 충무 얼을 가슴에 안고
웅장하게 터 잡은 배움의 터전/몸과 얼 갈고 닦고 우리 동무야
사랑타 소라학교 무궁 만세

 

오룡산이 들어간 교가

개교 90년을 자랑하는 소라초등학교 교가이다. 여천군 시절 공회당이 있어서 모든 행사를 소라초등학교에서 개최하였다. 따라서 덕양은 여천군청 소재지나 다를 바 없는 중심지였다. 덕양 비봉산 효행길은 소라초등학교 교가에 나오는 오룡산을 지나 충무 얼이 가득한 역의암까지 걷는 길이다.  오룡산이 교가에 나오는 학교는 인근 여양중.고등학교도 있다.

 

 

비단같은 포구 소라면

외지에 가서 여수시 소라면(召羅面)하면 사람들이 반겨준다. 바닷가인 여수에 패류 소라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생각하니 긴 모래 사장에 소라 껍질을 귀에 대고 파도 소리를 듣던 여름 바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알려진 지명 유래는 조금 다르다. 비가 많이 오면 잘 넘치는 소라천에 주삼동에서 흐르는 주삼천과 율촌면 신풍리의 신풍천이 봉두와 대포 지역을 지나 함께 합쳐진다.

 

소라천에 유입되어 비단을 짜듯이 교차하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교류지 역할을 하는 포구였다고 하여 부를 소(召)자와 비단 라(羅)자를 따서 부른 소라포구(召羅浦口)가 생겼다. 조선시대에 이 포구 이름을 따서 소라포면(召羅浦面)이라 부른 데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또, 다른 유래는 한자 소(召)는 조라고 읽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 현재의 소라면과 화양면 지역을 합쳐서 조라포면이라고 하였다.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를 살펴보면 조라포면은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소라면 대부분 지역이 조라포면 하도였고 화양면 지역은 조라포면 상도에 속해 있었다. 소라의 본래 발음은 조라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조라를 소라로 읽기 시작한 것은 근대식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914년 이후이다. 

 

 

 

 

여수 발전 전망대 비봉산 효행길

비봉산 효행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한다. 소라초등학교 옆 오룡산 체육공원으로 오른다. 30m 정도 오르면 여러 체육 시설이 갖추어진 널따란 체육공원이 나무숲 속에 있어 운동하기가 좋다. 비록 오래 된 나무는 아니지만 잔목 사이로 파릇파릇한 잔디로 채워진 오솔길을 걸으면서 상큼한 기분에 빠진다. 크게 대접받지 못하는 리기다소나무라도 무성하게 자란 풀들과 함께 도시 주변 산의 숲을 만들어 공기를 맑게 해준다.

 

 

 

 

이제 조금씩 땀이 등 뒤에서 송알송알 맺혀지는 길이 나타났다. 우리가 오르는 길 말고 성재마을에서 오르는 길과 비봉산 정상을 오르는 길, 봉두재로 가는 길로 나눠진다. 이 때부터는 조금 가파르게 계단을 오르듯 바위로 된 길을 걸으면서 뒤에 사람이 차츰 쳐지기도 한다. 이 오르막을 채면 여수산단이 환히 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한창 공사중인 해산마을 교차로는 여수의 상징이 될 것이다. 해룡에서 시작하는 여수.순천 자동차전용도로, 국도 17호선 대체 우회도로, 여수산단 진입도로, 무선도로 등이 함께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된다. 다 완성되면 이런 것을 두고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할 것이다.

 

덕양은 조선시대 덕양역원이 있던 지역으로 역참의 이름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덕양역은 신풍쪽의 성생원과 무선지구 무상원 등과 함께 여수 지방에 있던 역참으로 조선 후기 전라도의 오수도찰방에 소속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오늘의 덕양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상들이 지형을 보고서 예측을 하였기 때문이다.

 

 

오룡산을 지나 비봉산 정상에 오르면 TV송신탑과 산불감시 카메라가 돌아간다. 자연산 복분자가 가지마다 하얀 분을 바르고 가시를 무기로 접근을 막지만 검게 익은 것을 따먹는다. 달콤한 그 맛이 역시 자연산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온통 정상 주위가 고사리밭이다. "이미 늦었지? 또, 내년에 이곳에 온다고?" 이렇게 놀리는 듯 고사리가 뻐기고 있다.

 

 

어머니 눈을 뜨게 한 주정준의 효행

이 비봉산 정상에 옛날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는 없지만 이 우물과 관련된 효자 주정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효행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갈수록 자식 사랑에 넘쳐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이 부족한 우리 시대에 큰 교훈이 될 것 같아 소개한다. 

 

유복아(遺腹兒)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주정준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40세 되던 해 느닷없이 눈병에 걸려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10년 만에 실명까지 이르렀다. 주정준은 어머니의 눈병은 이제 신령의 힘을 빌어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였다. 

 

 

매일 저녁 자정이 되면 인근 우물에서 첫 깨끗한 물, 정화수를 입에 한 모금 머금어다 어머니의 눈에 넣어주기를 1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간 100여 군데가 넘는 영험하다는 우물을 찾아 정성을 다 했으나 어머니는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백발의 노인이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어머니의 눈병을 고치려면 소라면 덕양 뒷편 비봉산 정상에 있는 금암수(錦岩水)를 넣거라.”

이에 용기를 얻은 주정준은 때가 엄동설한, 추위가 심한데도 그 날로 바로 금암수가 나오는 샘 앞에 단을 짓고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정상까지는 왕복 2㎞ 거리이고 때는 추운 겨울이었지만,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한 가지 마음으로 날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기도를 하였다.

 

옷이 마르지 않을 때는 젖은 채로 기도를 드렸는데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드디어 백일기도를 마친 날 그는 금암수를 입에 머금어 어머니의 눈에 넣었더니 신기하게도 시력이 회복되었다. 시력을 되찾은 어머니는 손수 명주 길쌈을 해서 누비버선과 누비토시를 만들어 기념으로 아들에게 주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 후손들에게 전수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런 주정준의 효성이 널리 알려져 구례에 거주하는 매천 황현 선생의 아우 황원(黃瑗)이 '주모안명가(朱母眼明歌)'를 지어 칭송하였다. 또 당시 3대 조선통감(朝鮮統監)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1910년 8월 29일에 상금 10원을 주어 효행을 표창하였다. 한일합방 후 초대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역시 보기 드문 효도에 감동하여 다시 금 10원과 함께 표창장을 주었다고 한다.

 

 

 

아홉등 고갯길

금암수가 있는 우물을 찾지 못했지만 가져간 물과 간식을 나누면서 주정준의 효행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제 길을 따라서 발길을 재촉하였다. 쟁기재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봉두재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은 송신탑 세우면서 만든 길로 자동차가 다닐만한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다.

 

 

 

 

 

산속에서 시내 로터리와 같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아홉등고개, 봉두재 쪽에 도착하였다. 교회공동묘지, 상세동마을, 원봉두마을, 백수동마을, 비봉산정상, 그리고 목적지 중승골 가는 길이다. 산등이 9개일 것 같지만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다. 이곳으로 다같이 모이는 길, 한 가운데 서있으면 모든 정기를 받는 것 같이 감동적이다. 옛적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순천에서 내려오는 길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간다.

 

 

 

 

 

아홉등 고개에서 맷돌산 맷돌바위로 가려면 0.6km이고, 중승골은 1.5km이다. 지금껏 숲 사이로 호젓하게 걸어다녔다면 이제는 따가운 햇빛을 벗삼아서 다녀야 한다. 멀리 발 아래로 아스라하게 봉두 마을과 사곡 뒷산이 보인다. 편평한 길에서 두 길로 갈라선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들어서면 상세동마을과 맷돌바위가 나온다. 산등성이를 따라 쭉 뻗은 길을 걸으면 백수동과 중승골로 빠지는 길이다.

 

맷돌바위와 상세동길

좀더 새롭게 길을 개척하면서 스릴을 맛보려면 맷돌바위로 가는 길을 택하면 된다. 때죽나무에 노란꽃 같은 것이 매달려서 가까이 가서보았더니 벌레들이 집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나를 쪼개서 살펴보면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사람이 다니질 않아 키를 넘는 풀들이 길을 막는다. 아마도 고압전선 송전탑을 세울 때 닦은 길인 것으로 보인다. 송전탑을 따라 내려가면 상세동골이고, 곧장 가면 맷돌산 맷돌바위가 나온다.

 

 

 

 

보기보다 상세동골은 굉장히 깊은 골이다. 따라서 아슬아슬한 벼랑을 따라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암벽 등산을 하는 산악인 처럼 바위를 타고서 없는 길을 만들면서 내려오면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을 만난다. 그리 높지 않은 맷돌산과 비봉산이 만들어낸 가는골, 상세동골이지만 워낙 산세가 가팔라서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계곡 사이로 ?지가 만들어지고, 그늘이 만들어지면서 습한 기운에 온몸이 젖어든다. 아마 고라니와 토끼들도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흐르는 땀을 씻었는지 모른다.

 

 

 

 

 

 

길을 헤치고 내려와 만난 상세동마을은 위치를 분간하기 힘든 산골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포근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공장들도 보이는 활기찬 마을이다. 예부터 세동마을은 금계포란지형이라 하여 암탉이 알을 품은 지세라고 하였다. 마을 북쪽으로 솟은 맷돌산은 이름 그대로 산꼭대기에 맷돌처럼 큰 바위 2개가 포개져 있다. 맷돌산 한자 이름인 마석산(磨石山)에 맷돌바위가 있어 맷돌에서 빻은 곡식을 산 아래의 주민들이 먹고사는 지세라고 한다. 역시 그래서 그런지 마을 곳곳에 시내가 부럽지 않은 멋진 집이 많았고, 지금도 그런 집을 짓고 있는 데가 여러 군데 보였다. 큰 길 가로 내려오면 2백년은 족히 된 은행나무 2 그루가 버티고 있고, 노거수 팽나무도 있어서 세동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하다.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중승골길

상세동길이 부담스럽다면 다정하게 대화를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중승골길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100 여 m 걸으면 누가 친절하게 '중승마을'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았다. 건너 대포 마을이 보이는 샛길을 따라 걸으면 먼저 반겨주는 것이 원추리꽃이다. 평범한 시골길을 걸으면 계절마다 우리와 낯이 익은 꽃들이 때를 맞춰 반긴다. 

 

 

 

 

중승골은 장세동골과 다르게 골이 깊지 않아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중승골이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중승암이라는 절이 있어 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을이 보이는 재 머리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대포 마을로 넘어가는 길과 산끝까지 이르는 길이다. 농장과 밭도 있지만 정겹게 또랑에 물이 졸졸 흐른다. 힘 들지 않게 산을 내려와서 뭔가 허전하게 느끼지만 가벼운 산행으로는 제격이다. 특히 어린 자녀 데리고 주정준의 감동적인 효행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걸으려고 한다면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중승골 마을에 들어서면 보기 드물게 연립 주택도 있고, 한옥 마을회관 겸 경로당이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더불어 사는 집' 노인 요양원이 있다. 늘 자동차로 다니는 사람들은 시외버스 정류장 안쪽으로 이렇게 큰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호국의 혼이 서린 역의암

 

덕양6구 마을인 중승골은 하세동의 일부로 속해 있었으나, 1997년 GS칼텍스 공장부지의 이주민과 연립 주택 건축으로 주민이 늘어나자 행정리가 되었다. 중승골에는 역의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정박했었다고 한다. 예전에 배가 정박했다고 하는 지점에는 2개의 비석이 있다.

 

왼쪽 높이 120㎝ 가량의 ‘행부사이후영세불망비’라 적힌 돌비석과 오른쪽 높이 100㎝ 가량 ‘수군절도사신공희택영세불망비’라 적힌 비가 나란히 서 있다. 두 비석은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마모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는데 지역민들이 세운 부사와 수군절도사의 선정을 기리는 불망비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곳에 있는 큰 바위가 바로 역의암이다.

 

역의암에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먼저 역의암(易衣岩) 전설은 여수읍지에 나온다.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신성포 왜교성과 장도, 묘도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중국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국제전을 치르고 있었다.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군 병사가 크게 늘어났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병사와 백성들에게 푸른 빛과 붉은 빛의 옷을 나누어서 서로 바꾸어 입게 하여 아군이 많게 보이도록 하였다. 이를 본 일본군들이 놀라서 도망가서  이 바위를 옷을 바꿔 입은 바위라고 불렀다.

 

또 다른 여기암(女妓岩)의 전설은 강남악부에 나오는 것이다. 기생이 이 바위까지 쫓아온 왜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왜군에게 겁탈을 당하지 않으려고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어서라도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 논개와 같은 비슷한 전설이다. 둘 다 덕양이 왜적의 침입에 맞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그럴싸 한 것이 1925년 고뢰 농장이 대포 간척지를 막기 전까지는 역의암 앞이 바다였고, 가까이에 순천 신성포 왜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 깊은 이야기가 서린 바위가 쓸쓸하게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도로에서 보면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올라가는 길도 제대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다.

 

 

 

 

덕양곱창과 할머니 추어탕

덕양은 1933년 4월에 소라면사무소가 관기에서 세동으로 옮겨오면서 부터 번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1970년대 이후 지역 발전이 멈춰버린 것 같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그 당시 상점들 모습을 영화 촬영을 할 수 있는 세트장처럼 되었다. 덕양역도 이제는 대포앞으로 이전을 해버렸다. 앞으로 이곳을 관통하는 화양면 힛도까지 국가지원도로가 뚫리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덕양이 될 것이다.

 

 

 

 

 

 

덕양에 우시장과 덕양장이 열렸던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곳이 곱창골목이다. 곱창축제를 열 정도로 특화된 식당가가 되었다. 곱창전골은 자주 먹을 수 있어서 복산식당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먹었다.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한 끼 별미로 자리를 잡고 있다. 돼지고기가 입에 당기지 않을 때 찾을 수 있는 곳이 덕양삼거리 못 가서 면사무소 건너 골목에 있는 할머니추어탕이다. 1인분에 7천원이고,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 손맛을 그리워서 찾는 곳이다.

 

덕양은 많이 지나는 곳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역사적인 곳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내와 가까운 덕양은 옛날의 덕양이 아니다. 가족과 함께 비봉산 둘레길을 돌면서 주정준의 효행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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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0.16 21:13

    첫댓글 할머니 추어탕집은 엊그제 처음 가봤는데 점심때 사람 많드라고요.. 창무 꽃다리식당 추어탕도 참 맛있고요...
    덕양 복산식당에서 잘하는 두루치기도 참 맛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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