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NFL이 인정하는 콜츠의 창단은 1953년인데 원래는 AAFC라는 독립리그가 NFL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AAFC의 팀과 선수들을 NFL이 넘겨 받을때 3개의 구단이 통합이 되었다. 브루클린 타이거스와 MLB 야구팀과 동명이었던 뉴욕 양키스, 그리고 댈러스 텍산스[1] 3개 프랜차이즈를합병해 볼티모어에 창단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1953년 볼티모어 콜츠로 창단하였다.
3개 팀을 합쳐서 NFL에 등장한 볼티모어 콜츠는 위브 유뱅크라는 헤드코치와 1956년 시즌부터 NFL에 등장한 레전드 쿼터백 조니 유나이타스의지휘아래 빠르게 강팀으로 성장했고, 1963년 취임한 NFL을 대표하는 레전드 헤드코치인 돈 슐라의 지도가 합쳐지면서 NFL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물론 슈퍼볼 3에서 조 네이머스를 앞세운 뉴욕 제츠에 일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1970년 5회 슈퍼볼에서는 댈러스 카우보이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레전드 헤드코치 돈 슐라가 1970년 시즌을 마치고 마이애미 돌핀스로 이적하여 거기서 전설적인 팀을 만드는 동안 돈 슐라와 조니 유나이타스를 잃은 콜츠는 3년의 리빌딩을 거쳐 리델 미첼을 앞세운 공격으로 75~77년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했지만 전부 1라운드 탈락했다. 그러는 동안 팀의 전력은 쭉 약체로 내려갔고 78년 이후로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고, 그동안 볼티모어 시와 맺었던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임대 계약만료가 다가오고 있었다.
원조 야반도주 ¶
1972년 시카고 출신의 사업가이자 원래 로스앤젤레스 램스의 소유주였던 로버트 어세이는 램스를 매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볼티모어의 구단주였던 캐롤 로젠블룸에게 1900만 달러와 램스의 소유권을 주고 볼티모어 콜츠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캐롤 로젠블룸은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임대연장시 임대료를 올려 받으려는 볼티모어 시측과 대립이 있었고, 이 때문에 로젠블룸은 자기 부인이 서부로 가고싶다는 요청에 따라 램스를 소유한 로버트 어세이와 구단 소유권을 트레이드 한 것.
볼티모어 시 역시 볼티모어의 오래된 풋볼구장이자 콜츠와 임대계약 만료를 앞두고있던 메모리얼 스타디움 대신 볼토돔이라는 7만석 규모의 돔경기장을 조성하여 팀을 크게 키워볼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시장을 비롯한 정치가들과 구단 오너들간의 대화가 있었고 당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을 같이 쓰고 있던 야구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와 같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이너 하버, 그러니까 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구장 캠든 야드의 위치에 건설할 생각이었고 그를 위해 자금을 모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7만석 규모의 돔경기장이라는게 미국에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뚝딱 지어지는게 아니라서 구장 건설계획은 현재 많은 광역시와 한국 프로야구팀이 겪고 있는 갈등 그대로 누가 돈 더내라, 돈이 얼마가 더든다 같은 문제로 인해 최종협의가 연기되고 있었고, 그동안 볼티모어 콜츠의 팀 성적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메모리얼 스타디움 역시 노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협의가 늘어지는 동안 1979년 오리올스의 구단주는 팀을 워싱턴 D.C출신 변호사 에드워드 베넷 윌리엄스에게 매각하고 결국 볼토돔 건설건은 사실상 백지화 된다.
로버트 어세이는 이런 결정에 실망하고 그와중에 메모리얼 스타디움 리모델링하니 2500만 달러를 건축비로 내놔라는 볼티모어시의 요구에 반발해 그때부터 팀을 싱싱한 새 구장이 생기는 지역으로 팔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원래 소유했던 램스의 연고지인 LA나 풋볼팀에 관심이많던 남부지역 도시들, 멤피스, 잭슨빌, 피닉스등등이 후보에 올랐는데 NFL팀 매각의 떡밥을 문 도시는 인디애나주의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폴리스 시장이 1979년부터 풋볼팀 유치를 위해 6만석 규모의 돔경기장을 세울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로버트 어세이는 기회는 이때다 하고 인디애나폴리스시와 협의를 해 1983년 완공된 인디애나폴리스의 RCA돔(처음 이름은 후시어 돔이었다.)이 입주가능하게 되고,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임대계약이 끝나는 1984년 NFL 사무국과 입을 맞춘뒤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보안유지를 통해 아무도 몰래 인디애나폴리스 연고 이전을 결정한다.
콜츠의 연고지 이전 루머가 확산되자 분노에 찬 볼티모어 팬들은 콜츠의 이사트럭 앞에 드러누워서라도 못가게 하겠다라고 협박을 했고, 메릴랜드주 의회측은 콜츠의 이전을 놓고 콜츠의 소유권이 볼티모어 시에 있으며 콜츠의 이전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률까지 통과시키려 했다(...). 콜츠 구단 측은 그 법률이 통과되기 하루 전인 1984년 3월 29일 새벽 2시에 구단 사무실의 모든 집기를 컨테이너 트럭에 빼돌려서 도망을 갔다. 그것도 메릴랜드 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트럭들의 진로를 각각 다른 루트로 통하게 하는 꼼수까지 썼다(...). 한술 더 떠서 트럭들이 인디애나 주 경계선에 진입할 때 인디애나 주 경찰이 경계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사트럭을 호송하는 등 리얼월드에서 첩보영화를 찍어댔다.이 사건은 미국 프로팀의 연고이전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당시 콜츠의 구단주였던 로버트 어세이는 볼티모어 주민들에게 거의 을사오적급 취급을 받는다. 일부 옛날 팬들은 "죽어도 용서못한다"고 이를 득득가는 정도(...).
결국 1984년 9월 정식으로 콜츠는 인디애나폴리스 콜츠가 된다. 당연히 볼티모어 콜츠팬들은 멘탈붕괴에 빠져서 콜츠의 이전을 무효화하려 했지만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집단고소정도.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의 새출발 ¶
그렇게 새로운 프랜차이즈에서 출발한 콜츠는 볼티모어 시절 망가진 전력 복구하느라 몇년을 리빌딩에 들어갔다. 그리고 LA 램스의 스타 러닝백이자 지금도 단일시즌 최고 러싱야드 기록을 보유중인 에릭 디커슨을 영입해 전력 상승을 노렸지만,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정도는 되지 않고 5할 승률의 중간급 팀으로 남았다. 디커슨의 시대가 가고 90년대에 돌입했을때는 1994년 전체 2위로 입단한 마셜 포크라는 명예의 전당 러닝백과 스탠포드 출신 쿼터백 짐 하버 現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헤드코치를 중심으로 전력을 재편한다. 이때인 1995년,1996년 플레이오프에진출하지만 두번 모두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해서 탈락한다.
이렇게 아쉬운 플레이오프 탈락을 뒤로하고 팀의 스타 러닝백 마셜 포크는 FA가 되어 더 큰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고, 1997년 구단주 로버트 어세이는 1995년부터 앓아온 뇌졸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구단주 자리는 아들인 짐 어세이에게 돌아가며 짐 어세이는 팀의 구단주가 되자마자, 슈퍼볼 4연속 진출에 빛나는 86~93년 최전성기 버팔로 빌스를 만들어내고, 신생팀 캐롤라이나 팬서스를 거친 명 GM 빌 폴리안을 팀에 앉힌다.
페이튼 매닝 시대 ¶
페이튼 매닝과 토니 던지
빌 폴리안의 첫 드래프트는 버팔로 빌스가 짐 켈리를 지명했던 것처럼 뛰어난 쿼터백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 그의 구미에 딱맞는 최고의 쿼터백유망주로 꼽히던 테네시대학교 출신의 페이튼 매닝을 전체 1순위로 지명하고, 뉴올리언스 세인츠에서 성적부진으로 해임되었지만 수비를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던 헤드코치 짐 모라를 영입한다. 그리고 페이튼 매닝은 데뷔와 동시에 주전 쿼터백으로 1998년 시즌을 시작한다.
그리고 빌 폴리안은 젊은 유망주를 뽑아 팀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다. 팀의 스타 러닝백이지만 고액연봉을 요구하던 마셜 포크를 세인트루이스 램스[2]에 트레이드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러닝백 에저린 제임스를 지명해 젊은 피를 수혈하고, 와이드 리시버 레지 웨인, 타이트엔드 댈러스 클락을 뽑아내고 수비에는 수비엔드 드와이트 프리니, 세이프티 밥 샌더스등 젊고 능력있는 선수들을 뽑았다.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빌 벨리칙과 톰 브래디를 앞세워 슈퍼볼 3회 우승을 거둘동안 콜츠 역시 페이튼 매닝을 중심으로 전력을 상승시켜 AFC의 치열한 상위권 경쟁에 끼어들었다.
2002년 시즌부터는 90년대 후반부터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를 강팀으로 변모시켰지만 결국 우승에 실패해 성적부진 이유로 벅스에서 해임[3]되었던 흑인 헤드코치 토니 던지를 영입하여 팀을 완전히 페이튼 매닝, 토니 던지의 팀으로 바꾸고 끊임없이 전력 보강에 힘쓴 끝에 강력한 우승후보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꺾고 2006년 41회 슈퍼볼에 진출해 NFC 우승팀인 시카고 베어스를 대파하고 인디애나폴리스 이주후 첫 슈퍼볼 우승을 거머쥔다. 빌스에서 끝내 우승에 실패한 폴리안이나 항상 톰 브래디에 비교당하던 페이튼 매닝이나 모두에게 의미있는 첫 우승.
앤드류 럭 시대 ¶
2012년 1라운드 1픽 앤드류 럭... 몇십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재능이라고 불리운다.
페이튼 매닝이 리그에 들어온 이래 콜츠는 98년과 2001년 딱 두시즌만 빼면 매년 10승 이상을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2002년부터 2010년까지 9년 연속 10승+플레이오프가 포함되어있었다. 그야말로 AFC 최강팀의 면모. 하지만 주축선수들의 연장계약을 위해 많은 돈을 뿌린콜츠는 샐러리캡문제에 봉착했고 샌디에이고 차저스를 포함한 라이벌들의 등장으로 점차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페이튼 매닝의 뛰어난 리더쉽과 실력으로 막아내던 상황. 거기다 2009년 페이튼 매닝의 맹활약으로 44회 슈퍼볼에 진출했지만 드류 브리스를 앞세운 뉴올리언스 세인츠에 통한의 패배를 당하면서 이제 리빌딩을 준비해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2006년 우승이후 페이튼 매닝은 팀과 연장계약을 하여 NFL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지만 2008년 무릎부상이 악화되어 수술을 한 이후 점차 몸상태가 나빠지더니, 2009년 아쉽게 두번째 슈퍼볼 도전에 실패하고, 2010년 오프시즌 목부상으로 큰 수술을 하게 되어 2011년 시즌을 완전히 결장했다. 당연히 페이튼이 없는 콜츠는 리그 최하위 2승 팀으로 전락했고 꼴찌로 전체 1위 드래프트지명권을 받는다. 그리고 빌 폴리안은 콜츠의 GM을 사임한다.
공교롭게도 그해의 전체 1번으로 신인시절 페이튼 매닝에 비견되던 스탠퍼드 대학교의 쿼터백 앤드류 럭이 등장했다. 그리고 큰 수술을 두번이나 한 페이튼 매닝은 30대 후반의 노장으로 점점 기량이 쇠퇴할 것이 눈에 보이는 상황. 거기다가 이미 맺어놓은 5년 9천만달러의 거액 계약에달린 로스터 보너스가 수천만달러에 달해서 럭과 페이튼은 공존이 불가능했다.
이 리그 최고의 노장 쿼터백 vs 리그 최고의 유망주 쿼터백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고민에 빠진 콜츠는 수많은 이슈거리와 막말을 남기며[4]결국 팀의 미래와 페이튼에게 지불할 거액의 로스터 보너스를 지불할수 없다는 이유로 페이튼 매닝을 포기하고 앤드류 럭을 1순위로 지명하고 98년도처럼 그를 중심으로 리빌딩의 길에 들어갔다.
앤드류 럭의 첫 시즌인 12-13시즌 11승 5패로 반등에 성공했다. 앤드류 럭도 리그 7위인 4374야드를 던지면서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인터셉션이 18개로 공동 3위에 오른것이 흠.[5]
기타 ¶
여러모로 리그 최초인 것이 많은 팀. 미식축구 최초로 치어리더를 도입하기도 했으며, 1958년 뉴욕 자이언츠와의 리그 챔피언쉽 경기는 NFL 역사상 최초로 TV중계가 되었다. 아직도 볼티모어 시절의 역사를 놓고 레이븐스와 갈등이 있다. 특히 조니 유나이타스를 놓고 갈등과 대립이 심한데 콜츠 측은 콜츠를 대표하는레전드이므로 자기들이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레이븐스 측은 볼티모어를 대표하는 레전드이므로 자기들이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구단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볼티모어 시절의 역사를 계승하는 콜츠에게 유나이타스를 자기 팀의 레전드로 기념해야할 권리가 있지만 위에서 콜츠가 볼티모어에게 저지른 짓 때문에 볼티모어 팬덤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상황. 정작 인디애나폴리스의 팬들은 볼티모어 시절의 스타라서 그다지 감흥이 없는 것도 콜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198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위 지명권을 얻었지만[6] 그 지명권을 "서부지역 팀이 아닌 다른 팀을 가느니 차라리 뉴욕 양키스에 가서 야구를 하겠다"[7]고 엄포를 놓은 존 엘웨이를 강행지명하는 데에 썼다. 존 엘웨이는 끝끝내 콜츠 입단을 거부했고, 할 수 없이 콜츠는 덴버 브롱코스와 3대1 트레이드로 애써 행사한 드래프트 전체 1번 픽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존 엘웨이의 활약에 대해서는 본인의 항목을 참조. 어쨌거나 이 일로 존 엘웨이는 한동안 풋볼 팬들에게 까임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 까임을 본인의 실력으로 극복해서 마침내 레전드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존 엘웨이와 트레이드 된 3명의 선수는 쿼터백 마크 허만과 공격라인맨 크리스 힌튼, 다음해 1라운드 지명권이었는데, 마크 허만은 볼티모어에서 주전 획득에 실패하고나서 2년 뒤에 트레이드 되었다. 크리스 힌튼은 프로볼에 7번 출전할 정도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으며, 1라운드로 지명한 공격 라인맨 론 솔트는 프로볼 1번 선발된 가드였다. 완전히 손해를 본 트레이드는 아니었지만 전체 1번 픽을 날리고 그 쿼터백으로 덴버의 거의 15년 이상을 책임졌다는 걸 감안하면 왜 쿼터백이 미식축구를 대표하는 포지션인지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이미 팀 레전드로 취급받는 페이튼 매닝의 동생 일라이 매닝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일라이 매닝 항목을 참조. 페이튼 매닝을 지명할 때도 혹시나 페이튼이 콜츠를 맘에 안 들어해서 존 엘웨이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8] 염려하여 차라리 라이언 리프[9]를 선택할까 고민도 할 정도였다. 그 때 그랬으면 콜츠는 완전히 망했겠지. 하지만 성실한 페이튼은 순순히 자신의 진로를 받아들였고 콜츠를 강팀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밀려 콜츠를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페이튼의 진로는 또다시 덴버 브롱코스였고, 페이튼이 덴버로의 이적을 결정하게 한 건, 콜츠를 버린 덴버 브롱코스 단장 존 엘웨이였다. 뭔가 기묘한 인연으로 얽히고 섥힌 관계.
[1] 캔자스시티 칲스의 전신이었던 그팀과 무관. [2] 램스로 간 마셜 포크는 쿼터백 커트 워너, 와이드 리시버 토리 홀트, 아이작 브루스, 공격태클 올랜도 페이스등 역대 최고의 공격진의 축이되어 맹활약하고 1999년 34회 슈퍼볼에서 테네시 타이탄스를 꺾고 우승한다. [3] 공교롭게도 던지가 떠난 2002년 탬파베이 버캐니어스는 존 그루덴을 헤드코치로 영입한뒤, 그 그루덴이 4년동안 지도해온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37회 슈퍼볼에서 대파하고 첫 우승을 거둔다. [4] 특히 구단주 짐 어세이가 트위터에서 무리수를 많이 넣어서 욕을 엄청 먹었다. 미국의 대표적 트인낭 인사로 찍힐 정도. [5] 뉴욕 제츠의 개그맨 쿼터백 마크 산체스와 같은 수치이고 공동 1위인 드류 브리스 - 토니 로모와 한개차이다. 근데 마크 산체스 말고 나머지 셋은 패싱 야드 순위권이고 특히 드류 브리스는 5천야드를 넘기면서 전체 1위이니 어쩔 수 없는 면이라고 봐도 뭐...4600야드를 던지면서 11개밖에 안뺏긴 페이튼 매닝같은 양반이 괴물인거다. 그 페이튼도 신인때 28개의 인터셉트를 당하기도 했고. [6] 즉 전년도 시즌에 리그 전체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 [7] 존 엘웨이는 야구선수로서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우익수 겸 투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때도 야구실력을 인정받아서 1979년 드래프트 18라운드에 캔자스시티 로열즈에 지명받았고, 대학 진학후인 1981년 드래프트에서는 뉴욕 양키스에 2라운드 지명되었다. [8] 일라이 매닝 항목에 있지만 이들 형제의 배후에는 과거 뉴올리언스 세인츠의 명쿼터백이었던 아버지 아치 매닝이 있었고 아치 매닝은 자신의 아들들이 진로를 정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둘째아들인 페이튼에게는 그다지 관심도가 덜 했는지 대학부터 프로까지 진로선택에 큰 간섭을 하지 않은 반면 막내인 일라이의 진로에 대해서는 상당수준으로 간섭을 했다. [9] 풋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 스포츠에서 손꼽히는 먹튀 오브 먹튀다. 콰밥만훈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