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자이언트’에 이어 또다시 색다른 TV 보기 체험을 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다시 본 것이다. 영화에서 N차 관람이란 게 있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오래 전 본 영화인 줄 잊고 있다가 다시 보게된 경우는 간혹 있지만, 드라마의 경우 전혀 없다. ‘파리의 연인’은, 이를테면 사상 최초로 유일무이하게 두 번 본 드라마인 셈이다.
구랍 28일 우연히 엣지TV에서 방송되는 ‘파리의 연인’(4회)을 보고 이내 본방사수를 결정해버렸다. 몰아보기(1월 1일) 재방송을 통해 처음부터 보지 못한 1~3회를 챙겨보았음은 물론이다. 모든 걸 미루고 평일 오후 1시 30분부터 2시간씩 ‘파리의 연인’을 보던 어느 날 이미 본 드라마임을 깨달았다. 아차 싶었지만, 15회까지 시청한 터라 마지막회까지 다시 보기로 했다.
두 번 본 드라마가 된 배경을 시시콜콜 털어 놓은 셈이 됐는데, 그렇게 기를 쓰고 ‘파리의 연인’을 N차 시청한 것은 높은 시청률 때문이다. 2004년 6월 12일부터 8월 15일까지 방송된 SBS 주말극 ‘파리의 연인’ 최고 시청률은, 한국강사신문(2021.12.27.)에 따르면 56.3%다. 평균 시청률 41.1%를 기록한 대박 드라마다.
당시 내가 쓴 글을 보면 “지난 5년간 방송된 드라마 가운데 가장 빠른 시청률 상승세를 보였”(장세진의 텔레비전 째려보기, 신아출판사, 2005.1.31.)던 ‘파리의 연인’이다. 어느 신문의 표현대로 “‘영웅’도 ‘무인’도 ‘장길산’도 사랑앞에 웁니다”이다. ‘영웅시대’ㆍ‘무인시대’ㆍ‘장길산’ 등 선굵은 목적점 뚜렷한 드라마들이 ‘파리의 연인’ 같은 멜로 앞에서 죽을 쑨다는 말이다.
이런 시청률은 요즘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로 집콕이란 말이 새로 생겨났지만, 그것이 꼭 드라마 보기로 이어지는 게 아닌 단적인 증거라 할까. 물론 ‘파리의 연인’이 국민드라마가 되던 2004년에 비해 방송환경이 변한 요인도 있다. 드라마를 지상파 TV로만 보던 시절에 누린 국민적 인기라 해도 무방하다.
‘파리의 연인’은 평범한 소시민 강태영(김정은)과 자동차회사 사장 한기주(박신양)의 사랑 이야기다. 백마타고 나타난 왕자와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 뼈대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윤수혁(이동건)과의 삼각관계로도 모자랐는지 태영을 좋아하는 두 남자는 숙질간,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간이다.
참으로 무섭고 놀라운 이야기 얼개다. 그런데도 대중일반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것은 결국 대리만족이다. 현실에 없는 한기주 같은 남성상에 대한 환상 뭐 그딴 것 말이다. 예컨대 문윤아(오주은)와의 약혼식장에서 중지하라며 뛰쳐나온 기주가 그렇다. 태영이 타고 가는 버스 옆으로 자가용을 몰고 가며 불러대는 것에 이어 차를 버리고 올라타기까지 하는 기주가 또한 그렇다.
현실에선 말도 안 되는 액션들이고 약혼식을 파투낸 날 태영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는 건 너무 억지스러워 거슬리지만, 많은 여성 시청자들로선 뭔가 짜릿하고 심지어 감동마저 느낄 법하다. 특히 어리바리하면서도 할 말은 따박따박 해대는 태영 캐릭터에 대해선 나보다 못한 일종의 안도감이 작용해 높은 시청률을 견인한 게 아닌가 한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온갖 것들도 시청률 견인으로 이어졌지 싶다. 이성간 친구는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수혁은 그만두더라도 사실상 기주할아버지인 한성훈(김성원)의 갑질이 그것이다. 가령 “애라도 가졌냐?”, “돈도 주랴” 따위 태영으로선 평생 안들어도 될 재벌의 막말에 시달리는 식이다. 태영에 대한 연민과 동정, 안타까움과 울분 등 시청자 성선(性腺)을 건드리는 짓들이다.
그럼에도 태영은 씩씩하고 당당하다. 태영은 수혁의 “이 안에 너 있다”는 고백에도 “너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 조카였으면 좋겠다”며 기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상 기주 엄마로 드러난 한기혜(정애리)의 노골적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영은 사랑을 향해 마냥 직진한다. 윤아의 이해할 수 없는 기주와의 결혼 들이대기에도 당당하게 맞서는 태영이기에 그 사랑이 오히려 맺어지길 바라는 여성 시청자들이 많았을 법하다.
그랬던 태영이 기주를 떠나기로 한 건 윤아의 다 까발리겠다는 협박 때문이다. 태영은 “인내, 희생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며 기주의 출생 비밀을 지키려 한다. 거기에 다소 상투적으로 보이는 교통사고를 당한 수혁이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진다. 수혁의 교통사고는 기주의 태영을 향한 이별 불가 마음에도 제동을 건다.
그러나 기주의 “사랑하니까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 태영이 파리로 떠나버린 건 좀 아니지 싶다. 아니 거기까지는 대가(代價)를 치르는 셈으로 그렇다치자. 2년후 신차 출시 등 위기에 빠졌던 회사가 정상화되고 파리로 간 기주의 행보가 너무 뜬금없어 보인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제까지 그런 신산(辛酸)을 겪은 사랑에 대한 매듭치곤 너무 웃기거나 허망한 결말이라 할까.
무슨 수미상관 전개도 아니겠고, 파리에서 둘이 처음 만날 때 상황이 반복되는 건 다음 회를 기다리며 ‘파리의 연인’에 흠뻑 빠져들었던 시청자들에 대한 배신 내지 우롱이라 할 엉뚱한 결말이다.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고 하는 식의 코미디에 다름 아니다. 혹 형제간의 한 여자를 둘러싼 사랑 다툼이란 막장 설정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것과 다른 아쉬움도 있다. 허술한 극본이다. 가령 17세 미혼모로 기주를 낳고, 수혁이 아빠는 누구인지, 왜 지금은 혼자가 되어 아버지 집에서 사는지 등 기혜의 파란만장한 사연 묘사가 너무 피상적이다. 상대적으로 핍진감이 반감될 수밖에 없는 허술한 구석이다. 사보팀 직원인 윤아가 회사에서 항상 상반신 윗부분이 드러난 의상 차림인 것도 허술해 보인다.
허술해 보이는 건 또 있다. 다른 조연들은 그렇다쳐도 수혁이 교통사고후 임시주주총회 등에 회장인 성훈이 등장하지 않는 게 그렇다. 그가 태영과 기주에게 겪지 않아도 될 사랑의 고통을 안겨준 반동인물로서의 비중이 만만치 않은 조연이라서다. 태영의 짐싸기에서 함께 사는 사촌동생 강건(김영찬)이 한 번도 비치지 않은 것 역시 좀 아니지 싶은 허술함이다.
한편 최고 시청률 56.3%의 왕대박 드라마 ‘파리의 연인’도 발음상 오류를 피해가진 못했다. “아빠가 비시(빚이→비지) 좀 많아”(4부), “그 집에 사람이 며신데(몇인데→며친데)”(9부), “비슨(빚은→비즌) 다 청산했고요”(12부), “청소 깨끄치(깨끗이→깨끄시) 해”(16부) 등이다. 여러 배우가 발음을 잘못한 걸로 보아 대본의 문제로 보인다. 안타깝고 짜증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