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혹시 회원님들중 새고려신문이라고 아시나여...?
러시아에서 유일한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이라고 하더라구요
지난 여름 사할린에 결혼하러 갔을때 여권을 잘못 번역해가서
긴급히 다시 번역할만한곳을 알아보다 우연찮게 새고려신문사를
알게되어 색시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나에 대한 사연을
설명하고 번역과 공증까지 부탁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후 색시가 한번더 번역문제로 신문사를 찾아가 신문자 기자인
한 아주머니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 아주머니가 우리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다고하여 색시가 다시 한번 신문사를 방문, 인터뷰하여
이렇게 2006 . 6 . 02 날짜 새고려신문에 한페이지를 대문짝(?)만하게
장식을 하였습니다.
기사내용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사할린 아가씨 한국청년과 인연을 맺아
내가 김 야나를 알게 된 것은 작년 8월이었다. 야나가 남편될 한국인 김동진이와 혼인신고를 하려고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호적등록소(Загс)를 찾아왔는데 러시아어로 된 혼인신고서에 동진이가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 잘 몰라 밖에서 둘이 고민하고 있는 참이었다. 바로 이때 필자가 그들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으므로(전에 "새고려신문"사는 시호적등록소가 자리잡은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었음.) 나한테 방조의 손을 빌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야나는 한국말을 자유롭게 못하므로 혼인신고서에 적혀있는 질문내용을 동진이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밝은 미래에 대한 포부를 안고 호적등록소를 찾아 온 젊은이들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슴지 않고 그들을 도와나섰다.
드디어 9월초순에 희망하고 기대하던 결혼증명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때 그들의 가슴은 감격과 환희의 물결로 넘쳐 흘렀었다. 홈스크구역 야블로츠늬부락에 거주하는 야나의 부모님도 기뻐하였다. 그러자 수일후 동진은 직장일 때문에 조국으로 돌아갔다. 야나는 여기에 남아 한국에서 결혼신고를 할 수 있는 여러 서류들을 수집해야만 되었다.
나는 야나와 동진이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결혼까지 하기로 마음먹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이번에도 기자의 직업적 호기심이 앞섰던 것이다.
… 김 야나는 1981년에 홈스크구역 야블로츠늬부락에서 부친 김만익과 모친 김춘애씨의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홈스크시상업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 남자 친구가 그한테 "한국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는가"고 제의하였다. 오랫동안 생각하던 그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갔다. 그때가 2002년 9월이었다.
처음 그는 안산시에서 정수기를 생산하는 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이미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일하고 있었으니 낯선 선조의 땅에 왔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일은 힘들었다. 콤베이어 식으로 생산되는 정수기 부속품들을 손빨리 만들어내야 되었다. 그러나 야나는 하루의 피곤을 친구들과 함께 웃음과 농담속에서 풀어나가면서 열심히 일하였다. 돈벌이도 사할린에 비해 괜찮았다. 그런데 1년후 야나는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새 직장의 노동조건도, 돈벌이도 나쁘지 않았는데 얼마후 부도가 나 회사가 폐사되고 말았다. 물론 야나는 고민을 하였다. 다행히도 그당시 그의 어머니도 안산시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가 일하는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계속하였다.
야나가 새로 입사한 (주) 아성프라텍 경영지원본부는 승용차에 필요한 부속품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여기에서도 사할린에서, 러시아 대륙에서 온 젊은이들이 일하고 있었으니 그들과 함께 힘겨운 일을 담당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하루 친구가 야나를 보고 "첫눈에 너한테 반한 한국 총각이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설마?"라고 생각한 야나는 당황해 하였다. 그것은 한국말을 자유롭게 못하는 자기에게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 청년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한국의 남녀청년들도 일하고 있었으나 퇴근후 러시아에서 온 젊은이들과 어울러 다니지 않았으며 별로 사귀지도 않았다.
며칠후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야나야, 저기 저쪽에 서있는 청년이 너를 좋아한단다. 똑똑히 보기나 해라…
야나는 자기도 몰래 얼굴이 붉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설레이었다. 야나는 슬그머니 청년이 서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수일후 친구가 다시 찾아와 "야나, 오늘 퇴근후 그가 너와 만나보고 싶다고 한다. 어찔래?"라고 묻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그래 만나보지… 사실 나도 만나보고 싶구나…"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2004년 5월 30일 첫만남을 갖게 되었다. 김동진은 야나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특히 겸손하고 조용하고 순박한 모습이 야나의 마음을 쏠리게 하였다. 비록 둘 사이에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상대자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첫 란데뷰가 있은 후 그들은 자주 만나 여유시간을 함께 보냈다. 만나면 만날수록 동진이와 야나간의 정이 깊어갔으며 차후에는 사랑이 꽃피기 시작했다.
야나의 어머니는 딸애가 동진이와 사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한국을 방문한 부친도 "착하고 믿을 만한 청년"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드디어 김동진은 사할린을 방문하고 야나의 부모님과 일가친척들과 만나보았으며 야나와 혼인신고까지 한 것이다.
…당년 29세인 동진은 일찍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와 출가간 두 누님의 슬하에서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컸다. 오늘 현재 (주) 아성프라텍 경영지원본부에서 계장(사무담당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야나가 한국에 들어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그는 매일같이 전화를 해요. 제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고… 저도 하루 속히 가고 싶은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혼인신고하는데 필요한 여러 서류들을 한글로 번역하고 공증소, 블라디보스토크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인증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나의 불찰로 그것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수일전에 인편으로 모든 서류를 동진에게 보냈으니 곧 제가 떠나가게 될 것이예요-야나는 조용히 말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동진이가 앞으로 같이 살게 될 집을 마련하여 필요한 가구를 사서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면서 동진이가 집안을 자세히 찍어 보낸 사진을 보여주었다.
-부모형제를 여기에 두고 한국에 가서 한평생 살기 외롭지 않겠는가?-라고 나는 물었다.
-물론 외롭겠지요. 그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인연을 맺고 산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닙니까? 그리고 한국이 제 마음에 듭니다. 동진이의 형제들도 저를 반갑게 받아들였어요. 단지 한국말을 잘 못해서 걱정됩니다.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야나의 예쁜 얼굴에 행복의 웃음이 떠올랐다.
야나는 앞으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 것을 꿈꾸고 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배영숙기자)
첫댓글 잘 됐네요. 유명세 탄 것을 축하드려요.^^
^^
ㅎㅎㅎㅎ 고생한거로도 유명한데,,좋은 커플 탄생,자알 사실겁미다,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ㅊ
ㅊㅋㅊㅋㅊㅋ
축하드립니다 더욱 행복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 *^^*
동진아...잘지내지...나오늘들어왔다...넌..아직도..연락없니.....조만간에한보자..
이쁜 사랑 영원히하시길............^^*~
행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