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갈색에 고소한 맛
한반도를 점령해버린 일본차 중국차엔 없다.
찌거나 발효시키지 않고 그냥 덖을 뿐
요즘은 찻잎을 따는 시기다. <동다송>(초의선사
지음) 등 옛다서에는 해마다 곡우(4월20일) 직전에 따는 차를 '우전차'라
부르며 최상품으로 쳤다. 그래서 절이나 민가에서는 대개 곡우 전후부터
입하(5월5일)무렵까지 보름 동안 찻잎을 딴다. 그러나 오늘날 차나무의 종류,
차를 만들고 마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일본 '다도'가 이 땅을 점령해 우리
전통차가 밀려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녹차'라는 말 자체가 일본차를
가리키는 것이며, 현재 한국 차밭은 대부분 일본산 개량 '녹차' 야부기다종이
점하고 있다. 그 차밭엔 다수확을 위해 비료를 주니 찻잎이 부드러워져 벌레가
생기고 농약을 치게 된다. 찻잎은 씻거나 깎지를 못하므로 질소성분과
농약성분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런 차는 차가 아니라
독인셈이다.
차의 달인 초의선사를 둔 우리 전통차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으며, 한국 차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현재 한국 전통차의 맥을 완벽하게 이어오며 일본
다계로부터 현존하는 '다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지허스님(금둔사, 전남 순천시
낙안면 성북리)을 만나봤다.
정상적인 차는 약간 고습고 신선한 맛에 담백한 향기가 난다. 요즘 같은
춘궁기에 맛·향·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정말 좋은 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전차가 좋다'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차를 만드는 과정이 관건이다.
한국차의 고소한 맛은 일본이나 중국차에는 없다. 기후 풍토상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한국차는 '덖음 차' 중국차는 '반 발효차' 일본차는
'찐 차'다. 일본은 습기가 많아 차를 찌지 않으면 보관이 어렵다. 찐(데친)
차는 물에 부풀면 녹색이 되므로 '녹차'라 하는 것이다. 우리 차 고유의
'다갈색'과는 크게 다르다.
한국차는 덖는 과정이 중요하다. 찻잎은 '1창2지'라 하여 피지 않은 이파리,
덜 핀 이파리, 더 핀 이파리가 각각 하나씩 붙은 순을 17∼18살 먹은 처녀의
부드러운 손으로 힘주어 딴 게 제일 좋다. 그것을 불 땐 가마솥에서 손으로
저으면서 덖어 멍석에서 비비기를 8∼10회 반복한다. 수분을 증발시키고 차
성분을 함축시키는 일이다. 이때 순은 금방 말라버리고 작은 잎은 타버려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다. 비빌 때 어느 정도 힘을 줄 것이냐도 다년간
손에익어야 한다. 이파리가 다 익어 마지막 맛을 내는 과정은 '볶는다'고 한다.
차를 덖는 횟수와 차를 우려내는 양은 비례한다. "물을 80도로 익힌다"는
말은 찐 차의 이야기다. 한국 전통 덖음차는 끓는 물을 부으면 떫어진다.
예로부터 차와 향은 모든 악취 제거용으로 애용돼 왔다. 특히 차성분은
정신의 혼침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 그래서 찻잎을 씹으면 졸음운전도
막는다. 우리 차에는 또 선인들의 정신이 들어 있다. 외화손실을 막고
국민건강을 위해서 우리 차를 지키고 보급시켜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엔 '차'라는 말이 남용돼 요구르트까지 '차' 대접을 받는다.
감잎차는 '감잎 말랭이', 매실차는 '매실즙 우림', 모과차는 '모과탕'이라
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차'라는 말이 붙는 차나무는 한종류에 대·소엽이
있을 뿐이다. 기후 풍토에 따라 약간 잎 모양이 다를 수는 있다. 중국에
차종류가 많은 것은 차에 다른 향이나 맛을 가한 것이며, 일본에서 양 위주의
야부기다종이 나와 한국 차밭을 차지하면서 한국 차의 정체를 흐려놓고 있다.
그러면 한국 차는 언제 들어와 오늘에 이르렀으며, 중흥의 길은 없는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침류왕 원년(400년) 중국 사신이 와 차와
향을 놓고 갔다. 사용법을 몰라 전국에 방을 붙였는데 중국에 다녀온
아도화상(묵호자)이 나타나 쓰임새를 일러줬다.
그 당시 가장 먼저 차나무를 심은 곳이 지금의 전남 보성군 벌교읍 징광리와
나주시 다도면 일대다.
다도(찻길)면과 징광리에는 지금도 야생차가 무성하고 징광리엔 얼마 전까지
'천년 묵은' 아름드리 차나무가 있었다.
또 나주시 다도면에서 멀지 않은 담양 소쇄원 위쪽 대밭에도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 차나무가 있어서 이 지역이 오래된 차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를 가져와 하동 쌍계사 옆(차
시배지)에 심었다는 설(<삼국사기>)은 신라 위주의 역사왜곡이라는 게 지허
스님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