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수양대군, 박정희……그리고 박근혜
당나라를 세운 황제인 고조(高祖)는 이름이 이연(李淵)이다. 그는 황후 소생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셋째아들은 일찍 죽었고, 나머지 셋의 이름은 각각 건성(建成), 세민(世民), 원길(元吉)이라 하였다. 나라를 세운 다음에, 건성은 태자로, 세민은 진왕(秦王)으로, 원길은 제왕(齊王)으로 봉해졌고, 모두 장안(지금의 서안(西安))에 있는 황궁의 바깥에 기거하면서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어렸을 때부터 말잔등 위에서 성장하였다. 즉, 아버지가 수나라에 반기를 들고, 그 영역을 넓힐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서 전쟁터를 누볐다.
그 가운데 세민의 전공(戰功)이 특히 뛰어났는데, 세민과 태자의 갈등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작되었다. 즉, 태자 건성의 입장에서 보면, 세민의 입지가 우월하므로, 자신이 태자의 자리를 계속 보전함으로써 장차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세민의 주위에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래서, 건성은 막내인 원길과 결탁하였고, 이 둘은 세민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피바람이 한 차례 불어야 상황이 종료되는 그런 형편이라서, 황제 이연도 걱정이 태산 같았으나, 그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지 9년 째가 되던 해였다.
세민이 건성 측에 심어놓은 첩자가 세민에게 고변하기를, 세민을 초대한 연회에서 태자측이 세민을 죽이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민의 막료들이, 선제 공격하여 태자측을 제압하자고 세민을 부추겼다.
세민은 먼저 황제에게 가서, 건성과 원길이 후궁들과 부적절한 관계라고 무고함으로써, 황제가 이들을 불러 질책하게끔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건성과 원길에게 다음날 아침에 황궁에 들어와 면담하라고 통지하였다.
세민은 이들이 들어오는 현무문(玄武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현무문은 궁궐의 북문 이름이다. 현무(玄武)는 북쪽 방위를 지키는 상징 동물이며, 현무문은 신무문(神武門)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복궁 북문 이름이 신무문이다.
황제의 통지에 대해, 원길은 건성에게 예감이 좋지 않다며, 입조하지 말자고 권하였다. 건성은 현무문을 지키는 장수가 자신의 심복이라는 점을 들어 안전문제에서 걱정할 게 없다고 원길을 설득하였으나, 이 장수는 이미 세민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무덕(武德) 9년(서기 626년) 7월 2일 아침, 건성과 원길은 말을 타고, 현무문 앞에 다다랐다. 그 때, 세민이 갑자기 나타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도망가려 했으나, 모두 세민이 쏜 화살에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사병들도 모두 제압되었다. 그리고, 건성과 원길, 그 각각의 다섯 아들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세민이 건성과 원길을 죽일 즈음, 세민의 모사(謀士)인 위지경덕(尉遲敬德)은 허리에 칼을 찬 채로, 황제 이연에게 다가가, 태자와 원길이 세민을 죽이려고 모의했으므로 이들을 처단했노라고 고하면서 겁박하였다. 쿠데타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상대에게 문제 있기에, 또는 상대가 먼저 반란을 저지르기에 어쩔 수 없이 반격했다고 둘러대는 것이다. 또, 먼저 최고권력자를 통제하여, 억지 재가를 받아내는 것도 다른 쿠데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박정희는 윤보선을, 전두환은 최규하를 찾아가 쿠데타를 사후 추인받았다.
역사는, 이 정변을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고 부른다.
정변 후에 이세민은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얼마 후에 아버지 이연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의 죽은 뒤의 묘호는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묘호란, 죽은 뒤 종묘에 위패를 모실 때 붙여주는 존칭이다. 즉, 살아있을 때는 세종이니, 세조니 하며 불리우지 않는 것이다.
그는 23년간 나라를 통치했는데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였고, 그 통치술은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다. 그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다가 패퇴하긴 했으나, 군신관계를 잘 조화시켜 당나라를 안정시켰기에, 그의 통치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요컨대, 현무문의 변은, 형제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피바람이 분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삼촌이 조카의 권력을 빼앗은 사건이 있었으니, 단종 때인 계유년에 일어난 정난이 그것이다. 정난(靖難)은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잡았다는 뜻이지만, 이 역시 쿠데타에 다름없다.
혁명은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쿠데타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박정희에 의해 주도된 5.16혁명이라 함은 그 주체들이 스스로 미화하는 말이고, 사실상 권력욕에서 출발했으므로 5.16쿠데타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임금(왕족)의 권력과 신하의 권력, 즉 왕권과 신권(臣權)이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하는 역사였다. 이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나 서양의 역사에 보여지듯 절대왕권 치하에선 신권이란 게 보잘 것 없으므로,서로 긴장하고 갈등할 이유가 없다. 힘이 일방적으로 쏠리므로 절대적인 주종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이나 서양 보다 앞선 문명을 가진 나라였다. 즉,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또는 선비의 나라를 지향하는 나라였다. 유교를 이상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신하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지향하는 게 당연한 듯 여겨졌으므로, 경연(經筵)에서 신하가 임금을 교육하고, 신하의 간언과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사림이 이런 신권을 바탕 삼아 이상정치를 구현하려다, 사화(士禍)로 꺾이었고, 조선시대 후기의 환국(換局)이 이런 긴장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은 그 묘호가 이세민처럼 태종인데, 그 역시 형제들을 죽이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 형제가 싸운 사건을 ‘제1차,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 개국공신이며 경세가인 정도전 등이 희생되었다.
이방원은 집권후 친인척까지 과감히 처단하면서 정권을 안정시켜서, 이를 세종에게 물려주어 세종으로 하여금 태평성대를 열게 하였다. 여기까지는 왕권이 계속 강화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세종의 아들인 문종은 신체가 허약하여 병치레 몇 년 만에 죽고, 그 어린 아들 단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니,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왕족인 양녕대군이나 그 조카인 수양대군이 보기에, 김종서, 황보인 등의 신권이 강화되어 왕권이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역성혁명, 즉 이성계 처럼 쿠데타로 고려왕조를 뒤집는 정도의 분에 넘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즉, 이들은 충신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왕권 약화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과, 개인의 권력욕 때문에 한명회, 권람 같은 소인배들과 더불어 정변을 일으켜서 김종서 등을 죽였다. 미리 살생부를 작성하고 있을 정도로,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쿠데타였다. 이것이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그리고, 나중에 아예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는데, 단종복위 운동과 관련하여 사육신을 죽이고, 자신의 형제들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였으며, 결국 단종까지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킨 후에 죽였다.
수양대군의 묘호는 세조이며, 그의 집권 기간 공적이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강한 왕권 아래의 정치가 더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가, 강한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여 이상정치를 펴는 게 더 좋은 일인가는 논란이 되고 있지만, 수양대군의 쿠데타 자체만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당태종은 그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었던 봉건시대에 상대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으므로 선제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나, 형제들을 살륙하고 정권을 차지한 탐욕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집권 뒤의 정치가 나름 괜찮았으므로 그 쿠데타의 잔인함이 많이 희석되는 듯 하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무력을 동원하여, 한강 다리를 건너, 당시 장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합법적인 정권을 총칼로 해체해 버렸으면서도, 혁명이라고 하면서 미화하였다.
박정희는, 4.19혁명후 사회가 혼란하고, 민주당 정권이 무능했으므로 쿠데타의 명분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민정이양 약속을 번복하고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를 차고 앉았다. 쿠데타 처음부터 의도가 불순했거나, 권력욕 때문에 중간에 대의를 버린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한 12.12쿠데타 역시 대통령의 재가를 거치지도 않고, 먼저 상관(정승화,정병주 장군 등)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서울의 주요 기관을 무력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 신군부의 쿠데타는, 결국 김영삼 정권 시절에 법의 심판을 받았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가 깨진 것이다.
봉건시대의 쿠데타는 성공하면 주모자가 곧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승자위왕(勝者爲王), 패자위구(敗者爲寇)라, 이기면 임금이고 지면 역적, 또는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었다. 승패로써 정반(正反)이 규정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의 쿠데타는, 국민을 주인으로 삼는 헌법 앞에 굴복되어야 한다. 그런즉, 이제는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도 주인은 여전히 국민이므로, 쿠데타 성공 그 자체만으로 그 집권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박정희에 의한 5.16쿠데타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심판 받지 않고 있다. 5.16쿠데타에 대한 심판은 이제 법적 심판의 문제라기 보다, 역사적 심판의 문제이지만, 아직도 이 쿠데타 자체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과(경제발전)로써 수단(쿠데타)을 합리화려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쿠데타를 벌인 사람들은, 역사가 나를 그 운명으로 밀어 넣었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합리화해선 안된다. 합리화가 반복되는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리지만, 그 부정적 평가는 그 개인적 이력 (친일, 남로당 경력), 그리고 합법정권을 뒤엎은 쿠데타, 18년의 장기집권과 유신독재, 인권 유린과 관련된다. 그 긍정적 평가는 경제 발전의 기반을 닦은 것과 관련된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그 쿠데타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에 의한 정권 장악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고서, 그 어디서 국민의 자존과 국가의 격을 논할 것인가! 그리고, 5.16 쿠데타는, 신군부의 12.12쿠데타로 이어지게 한, 첫 단추이기도 하다.
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씨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주목 받고 있다. 주목 받는 이 자체가, 아버지 박정희로 대표되는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정치인 박근혜는 박정희의 전체 이미지를 안고 살아야 한다. 즉 공(功)과 과(過)를 같이 투영받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공은 그대로 박근혜씨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요, 박정희의 과는 또한 그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박근혜씨는 이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저지른 업보를 그 딸이 감당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잘한 점으로 각광받는다면, 그 잘못한 점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반성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공적이란 것도, 잘못된 출발(쿠데타)로 결과된 일이다.
쿠데타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전반적인 과오에 대해 그저 침묵하거나, 회피할 게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민족사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헌법관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럴리 없겠지만, 만약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쿠데타조차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대통령 후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긍정할 것은 긍정하되,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다. 이는 또한 선거전략상 좋은 일이기도 하다.
내년 대선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아버지 시대에 대한 박근혜씨의 냉정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사과의 마음이 공식적으로 표명되기를 기대한다.
맹강현, 2011년 3월 28일 씀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최근 특히 김종필씨가 인터뷰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며, 쿠테타를 혁명으로 추켜 세우던데,
일견 그의 말은 멋있게 들리면서 현혹되기가 쉽더군요. 선배님의 글에서 그런 흔들림을 떨칠 만한 명쾌함을 느낍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과찬에 감사..
글이란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도,
또 항상 조금씩 앞서 나가는 것이라, 조심스러울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