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江華郡]
설화·민요
대표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손돌목 이야기이다. 강화로 피난 오는 왕족을 실은 손돌이라는 사공이 위험한 곳에 진입하자, 왕족은 손돌의 행위를 의심해 그의 목을 베고 위험을 벗어났다. 그 뒤 이 곳을 손돌목이라 불렀으며, 해마다 그 날이 되면 갑자기 추위와 바람이 닥쳐오는데, 그것을 손돌이추위·손돌바람이라고 한다. 또한 ‘마니산전설’은 마니산·혈구산·진강산·고려산·능주산 다섯 형제가 중국에서 떠내려 왔는데, 마니산은 맏이이므로 가장 높고, 지금도 꼭대기에는 그 때 쌓은 성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충렬사유래담’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 역부족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원임대신으로서 왕족을 모시고 강화로 왔던 김상용이 화약고에서 자폭했는데, 그 때 신발 한 짝이 떨어진 곳이 지금의 충렬사가 위치한 곳이라고 전해진데서 유래한다. 선두포 둑에 얽힌 이야기는, 둑을 쌓는 공사가 몇 년이 걸려도 완공되지 않자, 어떤 중이 나타나서 “사람을 하나 바다에 집어넣으면 쉽게 완성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인부가 그 중을 떠밀어 넣어서 둑을 완성시켰다는 내용이다. 이 지방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벌대총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효종이 사랑하는 명마 벌대총이 죽자, 이를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양천(陽川)의 사또가 “벌대총이 누운 지가 사흘이요, 눈 감은 지가 사흘이요, 먹지 않은 지가 사흘입니다.”라는 보고를 해 위기를 벗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양천 원 죽은 말 지키듯 한다.’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 밖에 병자호란 때 왕자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잡힌 곳이어서 ‘부군리(扶君里)’라는 지명, 귀양을 가면 머리가 희도록 못 돌아간다는 ‘모로도전설(毛老島傳說)’, 동네 부녀자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문무정전설(文武井傳說)’, 여자에게 속은 목수가 화풀이로 만들어 추녀에 붙였다는 ‘전등사나녀상의 유래담’ 등이 이 고장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고장에는 노동요를 중심으로 의식요·동요 및 비기능요인 타령요류 등이 골고루 구전되고 있다. 노동요는 이 고장의 역사적·지리적 배경 때문에 성을 쌓을 때 부르는 축성요와 어업 노동요가 중심이 된다. 고려 때부터 군사상의 요지였으므로 여러 차례 성이 축조되었는데, 이 때 동원된 인부들에 의해 불리다가 일반화된 것이 축성요라 할 수 있다. 가락이 4·4조의 연첩으로 단조롭고 힘을 모아야 하는 노동요의 형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은 민속놀이의 일부로 불리고 있다. 성을 쌓을 때 부른 노래 중 「터 다지는 노래」는 다음과 같은데, 그 특징이 잘 나타난다. “어이어라 성터로다/(후렴)/어이어라 성터로다/천지는 동남이요/(후렴)/국호는 대한민국/(후렴)/경기우도 삼십칠관/(후렴)/강화군이 닥쳤구나 (후렴)……” 어업 노동요는 출어에서부터 각 작업 과정마다 노래가 있는데, 가락은 단조롭고 느리면서도 힘차나 애조를 띠고 있다. 특히 유명한 것이 시선뱃노래이다. 시선은 고기를 잡기도 하지만 주로 잡은 고기를 운반하는 배이다. 시선의 근거지가 이 고장이고 목적지가 서울 마포였으므로 「한강 시선뱃노래」라고도 한다. 강을 거슬러 가면서 노를 젓는 단순한 작업 때 부른 것이므로 같은 노래를 자주 불러 노래나 창자가 모두 세련되었다.교환창임에도 불구하고 메기는 노래나 받는 노래가 모두 다양한 리듬으로 되어 있는데, 메기는 노래의 사설이 조금 더 길 뿐이다. 메기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달은 밝고 명랑헌데/에야져차/고향생각이 절로 나네/에야져차/어허이야 어허허 이얘/어거덩차어그드르나어거야/……” 비기능요 중 이 지방 특유의 노래는 「강화도 큰애기」이다. 이 노래는 강화의 모든 면을 일일이 돌면서 특산물·자연환경·명소 등을 후렴에 나열해 향토적인 특성을 잘 나타낸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길상면 큰애기 절놀이로 나간다/올타 그렇다 거짓말이 아니다 전등사가 유명해서 그렇지/…하점면 큰애기 화문석 짜기로 나간다/올타 그렇다 거짓말이 아니다 능오리 화문석이 유명해서 그렇지/…” 이 밖에도 후렴이 흥겹고 빠른 가락에 구절 뒤를 길게 뽑는 「강화도 어랑타령」도 있다. 의식요로는 고사 지낼 때 부르는 노래와 상여소리 등이 있고, 동요로는 동물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많다.
산업·교통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지역별로 30% 이상의 인구가 집중해 있는 강화읍을 제외한 기타 면 지역에서 전체적으로 인구감소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내가면·하점면·교동면·삼산면 등이 높은 감소를 보이고 있다. 전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 지역이다. 내가면에 고려 저수지, 길상면에 온수리 저수지 등이 있어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간척에 의해 확장된 농경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도면 일대의 가릉평·선두평, 내가면·하점면 일대의 망월평, 삼산면 일대의 송가평, 교동면 일대의 염주평 및 영산평 등에서는 벼농사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벼농사 발달에 필수적인 농업용수는 낮은 땅들이 모두 방조제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소하천의 물이 최대한 활용되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어 쌀이 생산되고 있다. 기타 주요 농작물로 맥류·서류·두류 등이 생산되고 있으며, 수도권과의 근접성에 의해 무·배추 같은 원예작물의 생산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강화순무’라는 무는 인기가 있다. 임야지역에서는 도토리·밤·버섯·호두 등도 생산되고 있다. 경지면적은 군 전체 면적의 40%가 넘는 165.17㎢이며, 이 중 논이 126.73㎢를 차지해 논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강화의 특산물로서 가장 이름이 높은 작물은 인삼이다. 인삼 재배에 적당한 화강암 풍화토가 널리 분포되어 있고, 기후 조건도 적당한 강화 지역에는 20세기 초부터 개성 지역으로부터 인삼 재배기술이 전파되어, 1970년대 중반에는 전국 수요의 절반이상의 인삼이 강화 지역에서 공급되는 등 화문석과 함께 강화 경제의 핵심을 차지해 왔다. 현재는 재배면적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농가소득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화문석은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 지역의 우수한 왕골을 원료로 생산되었던 또 하나의 특산물로서, 품질이 우수해 해외로 많이 수출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입제품에 밀려 명맥만 이어질 정도로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강화만 연안 일대는 좋은 어장을 갖추고 있어 새우·조기·가무락·숭어·도미 등 수산업이 발달했으나, 내륙에서 발달한 농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총 인구의 6%만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내가면 외포리는 수산업의 중심 어항이며, 백합·굴·김 등의 양식업도 일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2차 산업의 경우, 한때 견직과 면직물을 생산하는 섬유공업이 활발했으나, 지금은 전체적으로 발달이 매우 미약해 1차 산업 중심의 산업구조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염하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분리되어 있어 과거에는 주로 수운을 통해 서울 지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현재 육지 및 서울로 연결되는 유일한 도로망인 4차선 48번 국도는 김포를 지나 강화대교를 통해 강화읍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에 개통된 강화대교는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길이 694m의 다리이다. 최근에는 수도권에 인접한 역사, 문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교통 수요가 폭증해 만성적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강화대교의 개통으로 정기버스노선이 대폭 증편되어 1982년 이후 서울방면은 150여편, 인천방면은 100여 편, 수원방면은 80여 편 등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1997년 8월 30일강화·서울 간 4차선 도로 확장, 너비 19.5m의 4차선 신강화대교 개통, 서울 및 인천과 서해안 고속도로로 연계되는 서울 88제방도로 및 외곽순환도로와의 연결은 강화 발전에 가속도를 붙여주고 있다. 또한 2002년 8월강화 초지대교가 개통되었으며 해안순환도로도 2009년에 완공되었다. 내가면 외포리는 수산업의 중심지이면서 아울러 석모도·교동도 등 인접 섬으로의 연결되는 여객 해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8-1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