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9:1~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2023. 12. 24
존 포웰 (John Powell, 1963~ )의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Stories from My Heart)’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고액의 그림을 많이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에게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부자는 아들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월남전에 참여했다가 적군으로부터 날라 온 수류탄 때문에 전사를 해 버립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몇 달이 지나 한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한 점의 그림을 내어 놓는데, 죽은 아들의 초상화였습니다. 청년이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의 희생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나는 이름이 없는 무명한 신인 작가이지만, 그를 기리며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의 초상화를 보니 예술적 가치는 없었으나 아들의 특징을 잘 표현한 그림이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부자가 죽었습니다. 그가 소장하였던 유명한 그림들이 경매에 올라온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중개인이 부자가 생전에 모았던 뛰어난 그림들을 사기위해 경매장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경매를 진행하는데 첫 경매작품이 무명작가가 그린‘아들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런데 경매장에 모인 수 백명 사람들 가운데 아들의 초상화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런 가치 없는 그림을 작품이라고 경매에 내놓았느냐?”며 수군대며 비아냥거립니다.
그때 뒷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소 주인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던 부잣집의 정원사였습니다. 그는 ‘가진 돈이 20달러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아무도 이 초상화를 사지 않는다고 말하면 자신이 20달러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합니다.
잠시 동안 경매의 진행자는 법정 위임을 받은 변호사와 상의한 후에, 20달러로 이 그림의 소유자가 정원사가 되었음을 공포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모든 경매는 여기서 다 끝났다’는 선언을 합니다. 전혀 이외의 일이 벌어지자, 멀리서 귀한 그림을 구매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모든 사무를 위임받았던 변호사가 나서서 말합니다. “그림의 주인이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아들의 초상화를 구입하는 사람이 나머지 모든 그림도 다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언에 따라 모든 그림은 저 사람의 것이기에 경매를 종료한 것입니다.” 부자는 아들이 귀하기에 아들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모든 그림을 주겠다고 유언한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외동아들의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자신이 일평생 모았던 진귀한 모든 그림들을 다 양도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는, 아들을 너무나 끔찍하게 사랑하였던 사랑의 모습이 진하게 드러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에 대해 하나님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아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느냐? 여기 나의 아들이다. 보라. 나의 아들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자에게 내가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복과 은혜가 충만하게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모든 복을 주신다고 오늘 읽은 말씀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의 탄생과 통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무려 600여년 전인 이사야 시대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는 구절은 메시야 되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심을 가리키는 예언입니다. 성경 말씀을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야 탄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이 어떻게 예수님인가? 억측부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 구절에 보면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이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이사야는 “,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부른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말한 이 여러 가지 의미를 세부적으로 살펴 보도록 합시다.
1)‘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직역하면, 정부가 그의 어깨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더 쉬운 구어체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통치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땅에 있는 지상 나라의 권세를 뛰어 넘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천국백성인 것입니다.
2)‘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현대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한글 성경에 기록된 기묘자(奇妙子, 기이하고 묘한 사람), 모사(謀士, 꾀를 써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기묘자와 모사로 번역이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로 원어의 의미는 한 문장입니다.‘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NIV, 놀라우신 조언자, 또는 위대한 스승)’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실제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생 인생에 다가오는 고비고비마다 놀라운 조언으로 나를 이끌어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위대한 스승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분입니다.
3)‘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입니다.
4)‘평강의 왕(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든 성도들을 천국백성으로 맞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내 인생에 꼭 필요적절한 말씀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놀라운 카운슬러(상담가)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면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시면서 모든 성도들을 은혜로 채워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이 있을까요?
1. 인생에 찾아온 흑암을 없애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리라.”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원하지 않았지만 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암흑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둘러 싸고 있는 흑암이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면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에 고통 받던 자들을 둘러 싸던 흑암이 없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을 당하였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에 사는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갈릴리 지방처럼 영화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에 동감하는 사람이 없으며, 나의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내가 빠졌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빛으로 인도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며, 나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주시는 분입니다. 1절의 말씀의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도울 자가 없어 답답한 상황에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얼굴을 비추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으로 그늘진 땅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는 점을 절대 잊어서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흑암에 가득 찬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된 빛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나를 뒤 덮고 있던 칠흙 같은 절망과 흑암이 사라진다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는 영원한 영벌에서 빠져나와 영생을 얻고 누리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흑암에서 건지실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의 저자는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 1939~~ )입니다. 그는 84개국 7백여개 대학에서 천만명이 넘는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기 이전에 조쉬는 심각한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망쳐버리는 지름길로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나약한 자들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생각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조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참여했다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구세주로 모셨습니다.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고,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온갖 어두움들이 사라집니다. 어릴 때 성적으로 조시를 학대하였던 사람을 용서합니다.
알콜 중독자로서 수시로 어머니와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도 용서합니다.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에게 “조쉬, 나 같은 못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조쉬는 “아버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아버지를 미워했어요. 그런데 예수를 영접한 후 저의 삶이 변했어요. 아버지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합니다.” 그 후 아버지도 예수를 영접하고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개인이 바뀌고 가족에 드리운 흑암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면 흑암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생명이 살아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즐거움을 더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를 이끄시며 큰 족적을 남기셨던 김준곤(金俊坤1925-2009)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6.25 당시에는 아버지와 아내와 친척들이 눈앞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어린 시절 사랑하던 동생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다른 동생 하나는 집 근처 벌목 현장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치어 죽는 것도 눈으로 봅니다. 자신의 위암으로 고통을 겪다가 ‘두 어린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 참혹한 비극도 당했습니다. 동생과 제수가 죽고 막내 동생은 간경화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고아원을 차려야 할 정도로 부모 없는 자녀들을 떠맡기고 모두 떠났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상황입니까?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김준곤목사님이 겪었던 것 하나만 겪는다 해도 우리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힘겨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하루하루를 예수님의 즐거움으로 살자.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주님을 호흡하며 살자. 내게 깊은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슬픈 상처가 있어도 예수께 나오면 싸매주시고 즐거움을 더하여 주십니다.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장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유달리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라는 구절을 유심히 보십시오. 이 문장의 의미는 “하나님이 임재를 통해 즐거움을 부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즐거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재하시면 나를 당연히 그 즐거움을 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일 년의 모든 고생을 뒤로 하고 추수할 때에 추수꾼이 느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살아 승리한 한 후에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추수를 하여 얻는 즐거움,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은 인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합니다. 한 달의 수고와 고생 끝에 매월 받게 되는 월급의 즐거움은 직장을 가진 분들 만이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이런 즐거움도 귀한 즐거움들이지만, 이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 되지 못합니다.
3절 하반절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라고 말합니다. 추수의 즐거움, 귀한 물건을 얻는 즐거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귀한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주일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얻는 즐거움, 내 생활이 더 나아져서 얻는 즐거움, 내 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서 누리는 즐거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껴야 되는 즐거움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에만 빠져서 머무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정말로 소중하고 귀한 즐거움은 이 땅에 구세주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만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이라는 점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모든 분들이 이 믿음의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왜 모든 성도들이 누려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이 즐거움이 참된 평안을 성도들에게 주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신앙의 즐거움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7절 보세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기의 ‘평강의 더함’이라는 말은 “전쟁이 없고 모든 평화가 충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이사야 선지자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께서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분쟁과 싸움으로 일관된 이 땅에 참된 평화와 평안을 주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예수는 단지 육신의 평강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심령에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에 매여 있던 인간들을 죄악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평강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죽음 이후 심판을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상급을 바라보게 함으로 평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평강을 더하시는 예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탄주일이며, 내일은 12월 25일로서 성탄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습니다. 마음의 구유를 준비하고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즐거움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에 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는 평화’라는 은혜스러운 복음송가가 있습니다. 가사를 살펴 보십시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면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고 나를 평안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고백의 찬양입니다. 7절 말씀의 고백처럼 평강과 평안을 풍성하게 더 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다 함께 부는 평화를 부르면서 설교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