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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회 소식 스크랩 [사진] 제주도와 제주사람들 이야기 - 두모악
혜도짱 추천 0 조회 49 07.05.10 19:1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제주도와 제주사람들 이야기 [두모악 - 2001/03]
 



한라산을 베고 바다자락에 발 담그며 돌 많고 바람많은 땅을 지켜온 생명력


제주도를 지켜온 토박이들은 한라산을 한복판에 세워 놓고 그 가장자리에서 바다와 땅을 의지해 살아왔다. 제주도의 자연부락은 대체로 산간 마을과 해안 마을로 나뉜다. 중산간 마을은 비가 오면 물을 사용하며, 해안 마을은 물질을 주업으로 하면서 해안 용수를 사용한다.


제주도는 식수 중심의 사회다. 제주도의 모든 하천은 물이 고이지 않는 현무암층이 지반이므로 물 없는 개천이다. 연중 높은 강수량과 한라산의 울창한 삼림은 풍부한 수자원을 마련해 주는데도, 정작 물의 대부분은 금새 땅 밑으로 스며들어가 버린다.


이런 까닭에 극심한 폭우가 닥쳐도 일시적인 하천의 범람으로 그칠 뿐, 하늘이 개이면 하루도 못가 또 다시 물없는 하천이 되고 만다. 땅 밑으로 스며든 물줄기는 해안 또는 해안 바다에서 지하용수로 솟아오르는데, 이렇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려 2백년이 넘는다. 해안선 2백 킬로미터 안 지역에는 1백 50개의 용천수가 있다.


이 용천들을 중심으로 자연 부락이 형성된 것이다. 제주도 전체가 한라산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다. 행정 구역으로 따지면 2시, 2군, 7읍, 5면을 거느려, 도(道)를 이룬다. 제주도는 마흔 아홉 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섬으로 서북쪽에 상·하추자도와 횡간도, 추포도를 두고 있고 동쪽에 우도, 남쪽에 가파도와 마라도, 서쪽에 비양도를 거느린다. 나머지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들이다. 제주도를 지켜온 토박이들은 한라산을 한복판에 세워 놓고 그 가장자리에서 바다와 땅을 의지해 살아왔다. 제주도의 자연부락은 대체로 산간 마을과 해안 마을로 나뉜다. 중산간 마을은 비가 오면 물을 사용하며, 해안 마을은 물질을 주업으로 하면서 해안 용수를 사용한다.


제주도는 식수 중심의 사회다. 제주도의 모든 하천은 물이 고이지 않는 현무암층이 지반이므로 물 없는 개천이다. 연중 높은 강수량과 한라산의 울창한 삼림은 풍부한 수자원을 마련해 주는데도, 정작 물의 대부분은 금새 땅 밑으로 스며들어가 버린다.


이런 까닭에 극심한 폭우가 닥쳐도 일시적인 하천의 범람으로 그칠 뿐, 하늘이 개이면 하루도 못가 또 다시 물없는 하천이 되고 만다.

열도, 중국, 한반도에서 표류해온 여러 종족들이 초기의 제주 사람을 구성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 오랫동안 의지하며 살다 보니 독특한 언어와 풍속, 기질을 공유하는 한 종족이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는 본토에서 가하는 압력 때문에 모진 시련을 겪어 왔다. 삼국 시대는 신라와 백제의 간섭을 받아야 했고, 고려시대에는 1백년 가까이 몽고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조선시대로 넘어 와서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이때도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수탈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저 혹독한 제주 현대사의 아픔으로 기록되는 4·3사건이 일어나 상상하기조차 싫을 만큼 많은 양민들이 유채꽃 흐드러지는 계절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제주도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만큼 물이 귀하고 땅은 척박하고 바람이 거칠어서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이런 악조건 아래 제주도의 토박이들은 짓밟히고 쓰러지면서 자신들의 땅을 지켜왔다. 한숨과 눈물로 지켜온 이 땅의 소중함을 며칠 동안 건성으로 제주도를 둘러보고 마는 여행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편견 없는 진솔함과 인내심을 동원하여 보고 들고 느껴야 한다. 제주도를 지켜온 토박이들은 씨족사로 따져보면 제주도를 개척한 고, 양, 부, 삼을나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육지에서의 난을 피해 제주도로 도망쳐 온 사람들의 후손과 당쟁의 화를 입고 유배되어 온 정객들과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 생활을 택한 사대부 후손들이다. 그밖의 표류자들과 귀화인들이 이들에 포함된다.

제주도의 시작은 화산 폭발과 함께 시작 되었다. 이 와중에 동굴이나 암벽 밑에서 용암의 흐름과 화산재의 무더기로부터 살아난 잔존자들이 제주 사람의 시초를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와 삼성 씨족 개국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 한라산 북쪽 기슭, 광야지 모흥혈에서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세 사람이 솟아 나왔다.

 

벽랑국(일본)의 왕이 세 자매와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보내 준 것이 온평리(일출봉 근처)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개국 신화의 줄거리다. 어째든 화산의 활동은 1200년대에 멈추었지만 제주도의 자연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시련을 안겼다. 태풍이나 폭풍 또는 거친 눈, 비, 바람은 수평선을 넘어와 한라산을 뒤덮고 한라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가한다. 날이 좋아지면 밭에 나가 돌을 고르고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제주도의 자연은 심술을 부렸다. 아니 두려움의 대상이다. 기껏 가꾸어 놓은 곡식들을 비바람이 쓸어 버린다. 잡초들과 수많은 야생 조류들도 이같은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모질고 억세다. 가뭄이 몇 년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사람들은 최소한의 음식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허식도 불필요하다. 제주도의 환경 자체가 그러한 인간의 허식을 받아 들이는 여유를 베풀지 않는다. 제주 토박이들의 의 생활을 보더라도 어디에도 허식이 없다. 추위와 더위와 비바람에서 몸을 보호하고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위해서 옷을 입었을 뿐이다.

 

그래서 화려한 옷이 없고 내핍을 상징하는 노동복만이 보일 뿐이다. 실상 노동복과 일상복의 구별도 따로 없다. 노동의 일터나 잠자리를 가리지 않고 갈옷을 입었다. 이렇듯 갈옷은 제주토박이들의 의생활을 대표한다. 광목이나 베에 설익은 감물을 들여서 햇볕에 바래 적갈색의 뻣뻣한 갈옷을 만든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7 - 8월의 선감을 따다가 짓이긴 것을 옷감에 넣고 주물러 감물이 천에 스며들게 한다음, 이슬을 맞히며 햇볕에 바래는 것이다. 갈옷은 땀에 젖지 않으며, 옷에 흙이 묻어도 쉽게 털리며, 빨래하기도 좋다.

제주도의 살림살이는 독특하다. 장가 든 아들과 늙은 부모가 같은 담 안에 살지언정 살림은 따로 한다. 부모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자식들에게 봉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기 몫의 양식을 해결한다. 조상의 제사 또한 큰아들이 도맡아서 하는 법이 없다. 아들들 모두 똑같이 힘을 보태 제사를 치른다. 제주도 토박이들의 절약과 검소함은 처절할 정도로 매섭다. 가뭄이나 폭풍우로 흉작이 연이어 3년이 계속되어도 굶지 않도록 가족의 비상 식량을 집안 어딘가에 반드시 숨겨 놓는다. 토박이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허리끈을 졸라 매고 최소한의 음식으로 목숨을 이어나갔다. 보리밥이나 조밥을 큰그릇에 담아서 밥상 한 가운데 놓고 온가족이 둘러 앉아 떠먹는다. 그대신 국그릇은 사람마다 돌아간다. 그들의 음식은 초라하다. 맹물에 된장을 풀고 삶은 푸성귀를 넣어 휘젖은 것이 그냥 국이다. 반찬에도 거의 양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노동은 끝이 없다. 사는 것이 고되고 심드렁해져도 스스로 위안을 찾는 수 밖에 없다.

“제주산은 악산이네, 보리밥을 밥이라 먹어, 제주 난 일이 원통하네. ' 이렇게 시름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노래말의 대부분이 신세를 푸념하는 내용이 많다. 제주도 밭이 온통 자갈투성이인 것은 화산회토로 된 땅의 겉흙을 바람이 쉴새없이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박이들은 씨를 뿌린 후 풀을 덮고 단단히 밟는 밀파를 했다. 밀파는 바람과 비와 야생조류들로부터 곡식의 씨앗을 보호한다. 이렇게 공들여 척박한 땅에서도 얼마간의 곡식을 얻었다. 제주도의 자연은 독특한 생활 양식을 만들었다. 물을 아끼기 위해 좁쌀, 보리쌀을 거의 씻지 않고 밥을 짓는다. 바람 때문에 부엌의 아궁이도 뭍과는 전혀 다르다. 돌을 양쪽에 올려 놓고 솥을 얹어 사용한다. 온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굴뚝은 바람이 타지 않는 곳에 페치카처럼 만든다. 연가가 빠지는 연통도 마루 밑이나 마당가에 빗물이 들지 않을 정도의 높이만 두어 낮게 만든다. 그리고 변소 안에는 돼지를 길러 인분을 돼지가 먹게 하고 돼지에서 나오는 똥은 비료로 쓴다.


제주도의 주거 문화도 제주도의 자연으로부터 나왔다. 초원에 널부러진 새로 지붕을 올리고 굵은 새끼를 꼬아 얽어매, 거친 바람을 대비한다. 집을 보호하기 위한 담은 무너지지 않도록 돌에 틈새를 두면서 낮게 쌓아올려 태풍에도 거뜬하게 견딜 수 있다. 토박이들은 집보다도 밭에 더 애착을 지니고 있다. 아침 일찍 차롱에 점심을 싸들고 밭에 나가 일하다 어둑해져서야 돌아오는 이들에게 집은 자라는 아이를 재우고 밥해 먹고 잠을 자는 공간 구실을 할 뿐이다.

제주도에서는 어디에나 집을 지을 수 있다. 집의 규모도 크지 않고 특별한 노동이나 자재, 경비가 소요되지 않았다. 산에는 집 지을 재목이 많고 돌은 지천에 널러져 있다. 마을 장정 몇 사람만 부르면 몇일 사이에 막살이집 한 채가 들어선다. 밭의 종류는 여러가지다. 마을 안에 있는 좋은 밭은 가름밭, 마을 밖의 보통밭은 중난정, 그리고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메마른 밭은 난전밭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난전밭도 산간 지대의 메마르고 돌투성이인 휴경지보다는 월등히 기름진 땅에 속한다. 논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제주도의 바다는 농토와 같다.

 

마을마다 바다를 따지는 경계가 엄하다. 물질을 한다고 해서 아무나 바다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해녀들만이 물질을 할 수 있다. 해녀들이 물 속에 들어가 물질을 하는 시간은 2분 안팎이다. 비교적 숨이 긴 사람은 3분 정도 물에서 버틴다. 얼마나 바다 깊이 들어가고 오래 견디느냐와 소라 전복을 잘 캐느냐에 따라 해녀들은 상군, 중군, 하군으로 그 이름이 달라진다. 상군 중에서도 기량이 빼어난 해녀를 대상군이라고 한다. 제주도 여자들은 야생초보다 질기다. 그들의 생활력은 두려울 만큼 강하다. 성깔 사나운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고 틈만 나면 돌무더기 땅에서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곡식을 거둬 들인다. 제주도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노동량이 훨씬 많다. 노동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해낸다.여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것같이 집안에 들어앉아 살림을 하며 음식을 장만할 한가한 틈이 없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면서 그 틈을 이용해 빨래를 한다. 차롱에 밥을 싸가지고 밭에 나가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다 돌아온다. 대강대강 밥 한 덩어리와 미지근한 국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 잠을 청하는 것이 하루 일과이다. 제주도 여자들의 노동량이 남자들보다 많은 것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다. 몽고나 고려, 조선의 실력자들에 의해 남자들은 강제 징역을 살러 징발된 까닭에 가정일을 여자가 맡기 시작한 것이다. 근세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아치나 유배인들이 그들 자신은 한가로운 여가를 즐기는 대신 여자들에게 생활의 짐을 떠맡겼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는 4·3사건이 일어나서 남자들이 현저하게 감소하고 말아 다시 한번 여성 중심의 생활이 뿌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돌투성이의 척박한 땅에서는 남자가 노동하는 것만으로는 먹고 사는 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주도에서는 농사가 시직된 당시부터 남녀 구분없이 함께 노동을 했다. 씨를 뿌리면 새가 쪼아 먹고 가뭄에 말라 죽고 거름이 부족하여 제대로 열매 맺지 않는 것을 감안하여 한층 넓은 밭에 씨를 뿌려야 하니 노동력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주도 여자들을 평생 얽어맨 것은 힘든 노동이었다. 밭을 일구고 돌담을 쌓고 가축을 돌보고 밤이면 맷돌에 곡식을 빻는 등, 일 속에서 한을 삭이고 슬픔을 이기며 오직 자연 속에 순응하며 거칠고 모진 삶을 살았다.


제주도 여자들은 바다에 남편을 잃으면 자신의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밭에 빈부덤을 만들고 맺힌 한을 남 모르는 눈물로 풀어야 했다. “저승 삶은 천년 만 년이요. 이승 삶은 꿈이로구나. ‘ 삶과 죽음의 공존 의식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극복했다.


문밖이 저승길이라고 위안하면서 고통스런 현실의 삶이 머지 않아 끝나리라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살았다. “쨍쨍한 여름볕에 이 등허리 벗겨지네, 집에 가면 물 한 모금 없고 어린 새끼는 울려 하는고, 이처럼 한세상 살아 무엇을 할꺼나” 한라산의 생김새는 설악산이나 지리산과는 사뭇 다르다. 그 모양새가 비동양적이고 비한국적이기까지하다. 이런 것과 함께 제주도의 자연과 사람 그리고 그 역사의 마디마디들이 제주도를 이국적이게 한다.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생긴 기생 화산을 제주도에서는 오름이라고 한다. 그러니 오름은 화산재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고 오름의 꼭대기에는 분화구가 있다. 한라산은 크고 작은 3백 60여개의 오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도의 전통 초가지붕과 함께 부드러운 곡선미가 뛰어난 오름들이야말로 한라산의 진풍경을 이루는 독특한 요소들이다. 몰론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부악)도 하나의 오름 위에 있는 분화구다. 한라산의 전설을 보면 한라산을 인격화한 것이 설문데 할망인데 이 할망이 헌 치마폭에 흙을 가득 담고 한라산이 있는 자리에 옮겨갈 때 헌 치마폭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흙이 새어 지금의 수많은 개생화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說)에서는 설문데 할망이 일곱 삽의 흙을 떠다 부어 지금의 한라산을 만들었다고 하고 제주도의많은 오름들은 그녀의 나막신에서 떨어진 한 덩어리씩의 흙이라는 것이다. 오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은 제주도의 동부와 서부에 펼쳐져 있는 넓은 초원지대다. 이곳의 넓은 초원은 목초지로만 이용되는 것은 아니고 밭으로도 이용된다. 제주도의 방목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성 개국 신화에서부터 방목에 대한 얘기가 모인다. 온평리에 도착한 세 공주와 가축을 삼성인이 나누어 취했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방목이 시작된 것은 몽고의 지배하에 있던 1267년의 일이다. 몽고때는 1백 60마리의 몽고말을 수산평에 풀어 놓았다. 이 말들이 번식하여 중산간 넓은 초원은 말들의 세상이 되었다. 몽고가 지배하는 2 - 3만 필이 방목되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짐작된다. 몽고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소와 양 낙타까지도 제주에 실어와 길렀다.


몽고인들이 물러난 후 제주도의 목축은 민간 규모로 바뀌었고 일제 식민 시대에는 일본 군부가 1백여 개의 목장을 만들어 키웠다. 중산간 넓은 초원은 보통 목장으로 사용하다 십여년이 지나면 이른 봄에 불을 지른 뒤 한 달 뒤나 여름에 흙을 갈아 메밀을 심는다.


다음해에는 이땅에다 밭벼인 산도를 심고 삼년째에는 조나 수수를 기른다. 이같은 삼년작을 두번이나 한 번 반쯤하고 나서 지력이 떨어지면 다시 2년 동안 목초를 심는다. 그다음에는 십여년 전의 방목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때는 초가지붕에 얹는 새를 방목장에서 얻는다. 그러니까 십여년 주기로 인의적인 생태계가 순환하는 것이다. 어린 목초가 돋아날 무렵에는 초원에 소나 말을 풀어 놓는다. 방목한 가축에게는 최대한 자유를 주는데 중산간 초원 지대뿐만 아니라 해발 1천미터가 넘는 산악 지대에서도 방목이 이루어진다. 한라산 고원의 목장에서는 마을 단위로 소와 말을 방목한다. 귀에 표식을 달거나 엉덩이와 표인을 찍어 서로 자기 소유를 확인한다. 그리고 특정한 개인에게 마을의 소와 말을 위탁하여 감시하게 한다. 이른바 위탁목동은 보통 마을의 극빈자가 맡으며 천재지변 때의 손실 책임은 면하지만 여타의 감시 소홀은 엄중하게 문책당한다. 제주도는 많은 강수량과 고온다습한 기후 조건 탓에 목초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해마다 11월에서 3월 사이에 산성 토양이 많은 중산간 마을에서는 초원의 목초를 태우는 화입이 행해졌다. 이는 진드기 등 목초지에 자라는 해충을 없애고 새로 돋아나는 목초가 잘 자라도록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한 자연 시비법이다. 중산간 초원 지대의 오름들에 나무가 없는 것은 해마다 화입을 한 탓이다.

제주도의 바람은 잦으면서도 사납다. “바람 불어 휘어진 나무가 봄비가 온다고 일어나나.” “정월 바람에 쇠뿔도 휘어진다.” 제주 바람이 사납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속담이다. 남지나에서 몰려오는 태풍과 저기압의 길목인 제주도는 언제나 바람 자는 날이 드물다.


가을부터 늦봄까지 바람의 기세가 맹위를 떨치는데 그때의 바람은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을 만큼 헝클어져 불며 동풍이 많다. 제주도가 바다에 둘러 싸인 섬이면서도 어업이 발달하지 못한 까닭도 모두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소나기를 데리고 올 경우엔 우산이나 비옷, 도롱이 따위로는 막을 수가 없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지 모를 정도로 사납기 때문이다. 태풍이나 폭풍이 아니더라도 소방호소로 물을 뿌리듯 쏟아 붓는 눈비바람은, 바로 앞의 자동차 라이트도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그런날이면 한라산도 없어지고 수평선도 지평선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런 날씨가 어떤 때는 한 달 가까이 계속된다. 또한 안개도 끼었다 하면 며칠씩 계속된다. 제주도의 문화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농업과 축산업의 궁핍 때문이다. 문화의 저변을 떠받쳐 주어야 할 생활 문화가 윤택하지 못한 현실 때문이다. 한편 바다를 건너와 제주도에 접목된 외래문화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많은 침략자, 탄압자, 지식인들이 제주에 들어와 문화를 함께 가져왔지만 제주의 어떤 것들하고도 융화하지 못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제주도의 민속 문화는 그 고유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제주 토박이의 문화 속에는 그들만의 감성과 지혜, 아픔, 한과 눈물이 담겨 있다. 음력 2월은 영등달이다. 이달 보름까지는 영등할망이 전복 해삼을 먹는다고 해서 해녀들은 물질을 하지 않고 바다물에 빨래조차 하지 않는다. 영등할망이 돌아가는 때를 맞춰 마을마다 영등제인 당굿을 벌인다.

 

이때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외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까지 참여한다. 제주도의 당굿은 토박이들의 삶에 대한 지혜의 결집체다. 당굿에서 행해지는 기원은 복을 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삶의 불안감을 떨쳐내는 치유의 기능을 하므로써 사회적 장애에 대한 안전판 역할을 한다. 제주 당굿은 뭍의 마을제보다 더 강하게 축제의 성격을 가짐으로서 마을 공동체의 정기적인 통합 행사가 되고 있다. 집안 곳곳에 있는 많은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 자리를 비우는 기간을 신구간이라고 하는데 대한 닷새 뒤부터 입춘이 되기까지 한 일주일 정도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신구간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집안일을 처리한다는 습속에 따라 1년 중 가장 추운 이때 집을 고치거나 담안을 손보거나 이사를 한다.제주 토박이들은 외떨어진 섬의 외롭고 고달픈 삶이 심드렁해질 때면 이어도를 생각하고 애타게 이어도를 부른다. 이어도는 제주도 남서부 동지나해(제주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는 환상의 섬이다.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다. 토박이들은 이어도를 극락이며 무릉도원이라고 믿었다. “이엿문은 저승문이네 이어도의 길은 저승길이네. 가면 올 줄 모르더라. 신던 버선에 볼 받아 놓고 입던 옷에 풀하여 놓아 애타게 기다려도 다시 올 줄 모르더라.” 제주도 토박이들은 무덤을 집 옆이나 밭 가운데 만들어 놓고 먼저 길을 떠난 부모나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한을 삯인다.

 

저승길 떠나는 날 상봉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현실의 고달픔을 잊으려 한다. 돌투성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허리가 아프면 허리를 펴고 무덤을 바라다본다. 그 그리움이 다시 목을 치밀면 목이 아파올 때까지 이어도를 반복해서 부른다. 애달픈 노래가락을 듣고 죽은 자가 올아와 말동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기척이 없으니 야속하기만 하다. 김을 매던 손이 둔해지고 몸이 무거워 가누기 힘들면 무덤가에 놓아 두었던 차롱을 펼쳐놓고 허기를 추스린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밥을 먹는다.





사진 , 글 : 김 영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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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5.12 10:49

    첫댓글 김영갑 갤러리는 제가 즐겨찾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맛이 예술가로 통해 새롭운 분위기로 태어나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곳입니다. 언제 오시면 제가 이곳 안내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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