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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칸 드림, 그 애환의 현장을 가다]<21>남아共(1)뒤바뀐 黑과白 | ||
꿈잃은 '희망봉'...요하네스버그는 '폐업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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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로 북적이는 콩고 킨샤사공항에서 '헤와 보라'항공을 탔다. '헤와 보라'는 현지 말로 '좋은 바람'을 뜻한다고 한다. 누가 이처럼 시적인 이름을 붙였을까. 땅이나 나라 이름을 앞세우는 항공사 명칭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이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간다. 인구 800만. 남아공에서 가장 큰 도시다. 20여일 전 아프리카 서북부 라스팔마스에서 시작한 취재 여정이 마침내 남쪽 끝 반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공항보다도 넓고 깨끗했다. 탁트인 도로망과 큼직한 도로표지판은 유럽이나 미국의 도시와 다름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도 빈부의 격차가 엿보인다.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는 도움을 호소하는 글을 든 걸인이 종종 눈에 띈다.
취재진이 여장을 푼 곳은 한인 게스트하우스. 1000평쯤 되는 대지에 세워진 2층짜리 주택이다. 푸르른 잔디밭 한 가운데에는 연못이 있고 오리떼 10여마리가 물속에서 한가로이 노닌다. 스피츠종 하얀 강아지도 3∼4마리가 있다. 주인 박석순씨 내외는 한때 서울에서 서양화 중개상을 했는데 이곳에 온지는 5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웃 주택들도 드넓은 대지 위에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어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이 지역은 치안이 좋은 백인 마을이다. 집집마다 담 대신 철망을 둘러 쳐놨고 보안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곳곳은 이처럼 치안이 잘 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구분된다. 치안이 좋은데는 백인 등 외국인이 많이 살고 집값도 훨씬 비싸다. 마을 입구를 경비원이 지키며 출입차량과 사람을 확인하는 고급 주택단지도 있다.
큰 빌딩이 많은 요하네스버그 도심은 얼핏 보아 무척 번화하다. 거리는 흑인들로 붐비고 있다. 예전 백인 통치시절 도심 거리는 저녁 6시만 되면 흑인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흑인들은 요하네스버그시 변두리 소웨토 등지에 격리돼 통금시간이 되면 도심쪽으로는 출입이 차단됐다. 바로 십 몇년 전의 일이다. 이같이 엄한 규제는 백인의 인종차별 통치가 끝나면서 사라졌다. 이제 흑인들은 아무런 제한 없이 도심을 활보한다. 그러나 가난한 흑인들에게 백인이나 아시아계 외국인은 곧잘 강-절도의 표적이 되고 있다.
"흑인통치 후 남아공에서는 치안문제가 큰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도심 사무실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요. 노른자위 땅인데도 건물 70∼80%가 비어 있습니다. 옛날 행세하던 백인 건물주들은 '억대 거지'가 됐습니다. 임대료 수입이 없어 세금조차 못냅니다. 상당수는 아예 건물을 버리고 도시 외곽이나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안내하던 박씨는 이곳 도시경제가 '빈혈증세'라고 말한다. 백인 통치시절 번영을 구가하던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 건물들은 최근 10여년 새 거대한 슬럼가로 바뀌었다. 깨진 유리창과 무너진 벽체를 방치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주인 없는 빈 건물들은 하나 둘 오갈데 없는 흑인들 차지가 되고 있다.
이곳에서 그나마 활기찬 곳이라면 흑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1∼2층 점포들이 고작이다. 박씨는 "한복판 8층짜리 건물값이 2억원 정도"라며 "헐값이지만 사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고 했다. 백인들은 치안이 불안한 도심보다는 비교적 안정된 북쪽 변두리로 옮겨가고 있다. 도심은 흑인이 차지하고 백인들은 변두리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는 것도 위험하다고 한다. 취재진은 몇군데서 얼른 차를 내려 사진 몇장씩을 찍고는 다시 차에 오르곤 했다.
갑갑증을 느낀 취재진은 모험에 나서기로 했다.
이곳에서 가장 높다는 칼튼센터의 '탑 오브 아프리카(Top of Africa)' 50층 전망대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인데도 강도 피해가 잦아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다는 곳이다. 전망대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썰렁했다. 취재진이 30여분 머물러 있는 동안 젊은 흑인 남녀 2명 외에는 관광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의류가게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식음료를 팔았을 식당도 텅비어 정적이 감돈다.
문을 연 곳은 기념품 가게 한 곳뿐. 이 가게 앞에도 "폐업 정리. 모든 상품 50% 이하 판매"라고 써붙인 글씨가 눈에 띈다.기념품점으로 들어서자 뜨개질을 하던 백인 할머니가 반색을 한다.
"가게를 정리하는 것인가."
"그렇다.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려고 한다."
"여기 온지는 얼마나 됐나."
"남아공에 온지 21년이고 전망대에서 장사한 건 19년이 됐다. 여기서 장사하며 아들 딸 넷을 키웠다."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왜 돌아가나."
"범죄가 너무 많고 인심도 흉흉해 살기가 싫어졌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고향 생각이 자꾸 난다. 고국에 가도 이젠 타향살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장사가 안되는가."
"예전엔 관광객이 많아 장사도 잘됐는데 보다시피 썰렁하다. 여기만이 아니다.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건물 상당수가 텅텅 비어 있다. 보수관리도 하지 못하고 전기세조차 못내는 건물이 수두룩하다."
W. 데이(67)라는 이 할머니는 전기기사로 일해 온 남편과 함께 20여년을 요하네스버그에서 살아왔다. 네 자녀 가운데 셋이 결혼했는데 손자손녀가 8명이라고 한다. 주름진 얼굴에는 오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허탈과 불안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그녀는 정부가 치안유지에 무능하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조금 지나면 좋아질까 하고 몇년을 기다려 봤는데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이다. 전망대에 있던 주위 점포는 그새 다 문을 닫았고 그녀의 가게가 마지막 남았다고 했다.
전망대 창을 적시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진다. 썰렁한 '탑 오브 아프리카'는 쏟아지는 빗줄기와 아프리카에서의 꿈을 접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백인 할머니의 허허로운 모습이 겹쳐져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비단 이 할머니만이 아니리라.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내온 백인 가운데 설 자리가 없어 유럽으로 귀향하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흑과 백이 함께 사는 터전을 일궈왔으면 좋았으련만….
1층에 다시 내려왔을 때 매표창구의 안내인은 취재진에게 몇번을 당부했다. "경비원과 동행해서 건물 밖으로 나가라. 가짜 경비원도 있으니 견장 색깔과 모양을 확인해서 동행을 부탁하라"고. 그는 우리의 카메라 장비를 누가 채가지 않을는지 무척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취재진은 잰걸음으로 건물을 빠져 나왔다. 비를 피해 모여든 사람의 이목이 많아서였는지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취재진은 며칠 뒤 이곳 50층 전망대에서 한국인도 여러 차례 강도를 당했다는 대사관 관계자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아共(2)요하네스버그 한인사회 | ||
알짜상권 장악 '코리아 넘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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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한인들은 요하네스버그와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 입법수도이자 희망봉으로 유명한 케이프타운 등지에 많이 몰려 산다.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1992년 12월 한국과 남아공이 수교한 뒤부터다. 처음 상사 주재원을 중심으로 시작된 한인사회는 그새 2000여명 규모로 불어났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한인이 불어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남아공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보다도 기후조건이 좋고 교통 통신 등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영어권으로 교육 여건이 양호하면서도 학비가 싸다. 이 때문에 유학생과 선교사같이 유동적인 인구도 많은 편이다.
한인이 많이 종사하는 업종은 가발 사진현상 무역 여행 민박 자동차정비 식당 등. 이 가운데 특히 가발업종은 한인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니나와 린다 등 5개 업체가 일찍부터 진출해 남아공 내수는 물론 주변국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 개인 사업으로는 사진관이 많다.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 등지의 한인 현상소는 17곳에 이른다.
요하네스버그 다운타운. 취재진은 그간 찍은 필름을 맡길 겸 우범지구 한복판에 자리잡은 염상진(44)씨의 사진현상소를 찾았다. 창구쪽은 흑인 손님들로 붐빈다. 현상기가 있는 사무실 안쪽 출입문은 늘 잠가 놓는다고 한다. 범죄가 많은 곳이다 보니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놓는 것이다. 마침 염 사장의 아버지 태준(72)씨 등 가족들이 안에서 준비해온 밥과 라면을 들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을 겸한 식사였다.
"현상소는 언제부터 운영했습니까."
"2001년 9월 말 개업했어요. 아들(상진)이 9년쯤 현상일을 해왔습니다."
"무척 분주해 보이는데요."
"낮 시간이라 조금 덜합니다. 아침 8시부터 10시쯤까지가 제일 바빠요. 필름을 맡기는 고객이 하루 150명쯤 되는데, 보통 한 사람이 2∼3통씩 맡기거든요."
"이쪽 출입문은 늘 잠가 놓습니까."
"그래요. 권총강도가 종종 찾아오거든요. 우리와 거래하는 '찍사'(자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며 영업하는 사람)들이 대개 위험 인물을 알기 때문에 그런 친구가 오면 미리 경고 신호를 보내줍니다."
현상소에는 경보시설이 있어 단추만 누르면 곧 부근에 있는 사설경호대가 출동하게 돼 있다. 위험스럽긴 해도 현상소가 강도에게 털린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운영해온 서울식당은 최근 몇년 새 5차례나 권총강도를 당했다. 강도에게 반항하지 않으면 대개 돈만 가져가고 만다고 한다.
염씨 부자는 남아공에 왔다 실패한 한인을 많이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개 아프리카라고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현지 한인을 다리 놓아 사업을 하려다 종종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전 준비도 필요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해봐야 합니다."
"인건비가 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을 부리는 입장에선 좋지만 일자리를 찾는 입장에서 보면 돈벌이 될 일감이 적다는 뜻이니까요. 미국 같은 데서야 무슨 일을 해도 웬만큼 돈벌이가 되지만 여긴 사정이 딴판입니다. 막연한 생각으론 안돼요. 쉽게 떼돈 벌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한인이 있다. '이든글렌 모터스'와 무역회사 '영 인터내셔널' 대표 안영호(52)씨다. 1977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85년 남아공에 지사 창설차 파송됐다. 4년 뒤 직장을 그만둔 안씨는 92년 이곳 주유소를 샀다.
그의 주유소는 이든베일의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근 주민은 대부분 백인 중류 가정이다. 부자 동네에 비하면 마음이 따뜻하고 사정이 잘 통해 장사하기도 좋다.
주유소 사무실. 취재진이 앉아 있던 뒷벽에서 간간이 "철커덩" "퉁" 하는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릴까.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안씨는 "사무실 금고에 돈다발 떨어지는 소리"라고 설명한다. 돈을 바깥에 두면 강도에게 다 털릴 수 있기 때문에 500랜드(약 6만원)씩 그때그때 안쪽으로 집어넣게 돼 있다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사무실로 통하는 출입구엔 튼튼한 철문이 '불청객'에 대비하고 있다.
주유소는 24시간 영업을 한다. 남아공에는 주택가 골목마다 따로 가게가 없어 이처럼 편의점을 겸한 주유소가 많다. 주유소는 거래 물량은 많아도 이윤은 8%선. 편의점 이윤은 30%나 돼 훨씬 실속이 있다.
안씨는 주유소와 편의점은 매니저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많이 한다. 몇년째 법정 통역으로 한인을 위해 자원봉사를 해 왔고 올해 부터는 이 지역 한인회장도 맡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땐 법원 구경조차 못해 봤는데 여기선 수시로 들릅니다. 그새 '반(半)변호사'가 됐습니다."
취재진과 만나는 날 아침에도 그는 공항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한인을 만났다.
대형 이민 가방 2개에 모자를 잔뜩 담아 왔다가 세관에 걸린 한국인이었다. 누가 봐도 장사하려고 가져온 물건인데, 그는 세관에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탓에 결국 다른 비행기편으로 되돌아가는 신세가 됐다.
그가 만나는 한인은 이처럼 주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기 피해자, 나이키 등 유명상표를 붙여 가짜 물건을 대량으로 팔다 걸린 사람, 불법 체류 '조선족' 등등. 특히 남아공에는 불법 체류하다 수용된 중국동포가 많아 수시로 이들을 만난다.
그는 법원에서 통역하기 전에 이들의 사정을 많이 듣는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현지 한인교회에서도 여러 교민이 중국동포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등 어려움을 더는 데 힘쓰고 있다. 안씨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지난해 9월 그는 요하네스버그 동북쪽 스와질랜드에서 한국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구급용 경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해보니 그는 이미 뇌사상태였다.
도요타 자동차 정비과장으로 일하던 김모씨였다. 병원에 사흘 머무르는 동안 안씨는 가족에게 김씨의 장기 기증을 권했다.
객지에서 비명에 가는 것을 섧게 여기던 가족들은 처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땅에 묻히면 몸뚱이는 썩습니다. 장기를 떼어주고 가면 죽어가는 사람 여럿을 살릴 수 있습니다."
안씨의 설득에 유족은 결국 마음을 비웠다. 김씨의 안구와 간 폐 신장과 뼈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됐다. 이국의 환자들에게 소생의 길을 열어 주고 그는 하늘나라로 갔다. 떠난 이도 유족들도 모두가 '아름다운 한국인'이었다.
안씨 자신도 이미 장기기증을 서약해 놨다. 마지막 가는 길에 다른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야말로 숭고한 봉사의 기회라고 그는 믿는다. 그의 부인 박경숙씨는 오랫동안 한글학교 교사로 일해왔고 둘 사이에는 딸 셋이 있다.
남아共(3)완구류 수입 케니민 사장 | ||
공동구매-직판...'현지화' 성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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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헐한 노동력과, 액세서리에서부터 의류 완구 잡화 타이어 등 값싼 중국상품으로 아프리카 시장 곳곳을 공략하고 있다. 10여년 전 섬유류 잡화 등을 수시로 몇 컨테이너씩 수입해 팔며 재미를 봤던 한국인들은 요즘은 거센 중국인 물결과 중국상품에 밀려 설 땅이 좁아졌다. 이 때문에 한인 가운데는 제조업에 나서거나 현지에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개인사업을 모색하는 이가 늘고 있다.
케니 민(한국명 민경준.55)씨는 중국 완구류 수입과 도-소매로 기반을 넓힌 사업가다.
요하네스버그 시내 폰틴블로에 있는 그의 '하영 장난감-선물의 집' 매장은 약 800㎡(약 260여평). 진열대 위로는 인형이나 로봇, 모형 자동차에서부터 무선조종 헬기 등 첨단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제품이 빼곡이 쌓여 있다. 큰 창고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물량이 보관돼 있다.
최근 몇년새 그의 사업은 성장을 거듭해 왔다. 민씨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수입하는 장난감 물량은 연간 40피트 컨테이너 40∼50개에 이른다. 시내 5㎞쯤 떨어진 곳과 인근 프리토리아시에도 직영 점포가 있고, 같은 이름의 프랜차이즈 점포가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 등 여러 곳에 생기고 있다. 올해 말까지 남아공에서만 7∼8곳쯤 생길 예정이다. 멀리 동부아프리카 말라위 등지에서도 프랜차이즈 신청이 들어오고 있다. 이들 프랜차이즈 점포에는 그가 물건을 대주므로 점포수가 늘면 늘수록 그의 수입-도매 물량도 커진다.
그가 아프리카에 온 것은 1990년. 돌아보면 처음 8년은 갖가지 탐색의 과정이었다. 자동차 수입, 돌 가공, 선물가게 운영, 도토리 수출 등등. 지금 기반을 다진 완구류 사업은 일찌기 한국에서 경험을 쌓은 분야다. 결국 오랜 탐색과 모색 끝에 가장 잘 아는 '전공분야'로 복귀한 셈이다.
한국에서 80년대 후반 봉제완구 공장을 운영했던 그는 90년 공장을 정리했다. 값싼 중국산 완구가 밀려들면서 조만간 봉제완구가 사양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기에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재봉틀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넘겨주고 새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유럽 여기저기를 둘러본 뒤 그는 남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 첫발을 디뎠다. 여기서 그는 자동차 사업에 관심있는 친구를 위해 인근 모잠비크에 한국산 버스 140여대 수입건을 주선했다.
한국과 남아공이 수교를 맺자 93년 그는 가족과 함께 요하네스버그로 왔다.
"처음 잼스톤 자수정 같이 값나가는 돌을 수집, 반가공해 일본에 파는 일을 해봤어요. 그런데 유통되는 돌 중엔 광산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장물도 적잖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더라고요."
호구지책은 될지언정 사업거리론 마땅치 않다고 여겨지자 이를 그만두었다. 이어 민씨는 김명환씨와 함께 도토리를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묵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도토리는 남아공에선 지천인데도 그냥 버려지고 있었다. 이들은 흑인들을 고용해 도토리를 대량 수집한 다음 이를 건조시켜 수출했다. 5년쯤 해온 이 사업은 민씨가 완구류 사업에 나설 즈음 동업하던 김씨가 모두 인수했다. 현재 케이프타운에 사는 김씨는 도토리 농장을 조성해가며 이 사업을 독자적으로 계속 키워가고 있다.
민씨가 완구류 도소매에 나선 것은 99년부터. 한 완구점 대리인의 권유를 받고 시작했다. 처음엔 한 컨테이너를 수입했다. 때마침 요하네스버그에서 무역전시회가 열렸는데, 샘플만 전시한 그의 조그만 부스가 뜻밖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첫해에는 수입 완구의 절반쯤이 한국산이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산이 대부분이고 한국산은 10%도 안됩니다. 중국산은 고장이 잦아 고급제품을 찾는 이에겐 한국 물건을 권하죠. 하지만돈이많지않은아프리카인들은질을별로따지지않아요.우선값싼것부터찾습니다."
완구점을 차린 뒤 그는 기존 점포들과의 가격경쟁을 치러야 했다. 지지 않으려면 싸게 팔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제품을 보다 싸게 사려고 그는 공동구매를 시도했다. 현지의 여러 완구 수입업자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함께 사서 수입가를 낮추자고 제안했다. 이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의 구매량이 많아 다른 업자들도 공동구매에 참여하면 적잖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물건을 수출하는 쪽에서는 그가 워낙 큰 고객인 만큼 다른 업체보다 더 싼 값에 공급해 주었다.
그는 수입상을 통하지 않고 중국 상하이 광저우 등지의 생산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들인다. 거래물량도 많지만 신용을 잘 지키기 때문에 가격은 중국인 수입상보다 더 좋은 조건이다.
이 때문에 그가 취급하는 물건은 요하네스버그에서 가장 값이 싼 것으로 소문나 있다. 똑같은 제품인데 다른 점포에 비해 반값이 안되는 예도 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와는 가격경쟁으로 맞설 수 없게 된 것이다.
민씨는 남아공에 온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데다 이곳 교육여건이 좋아 자녀의 성장에도 보탬이 됐다. 그 자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돼 정신적으로도 거듭나는 기회가 됐다.
"한국 사람이 아프리카에 오면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자동차 정비업에서부터 금형, TV수리, 전기전파사, 용접까지 유망한 게 많습니다. 땅을 빌려쓰기 수월해 농사도 크게 지을 수 있습니다. 농업분야엔 중국인이 많지만 한국인에게도 전망이 좋다고 봐요."
그는 인근 모잠비크 쪽에서는 만성적인 기근을 퇴치하려고 넓은 땅을 거저 빌려주며 농업이민을 적극 유치하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남아공 등지에서 경제성 있는 특수야채나 화훼 재배, 수경재배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는 것이다.
"무얼 하든 현지인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기반을 닦는 게 좋습니다. '체면'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한국인끼리만 어울려선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는 중국인을 거울 삼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장사를 많이 하고 길거리에서 행상도 많이 한다. 물론 경제력이 약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을 쌓기 때문에 금방 기반을 잡고 일어선다는 것이다.
남아共(4)로빈 아일랜드 형무소 | ||
'아파르트하이트'장벽에 무혈혁명 꿈은 피어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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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타운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아프리카의 땅끝 희망봉, 원숭이와 타조 등이 자유로이 노니는 자연보호구역, 물개섬, 산 정상이 식탁처럼 평평한 테이블 마운틴 등등. 이런 볼거리를 찾아 1년에 300만이 넘는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
빅토리아-알프레드 선착장 주변은 활기가 넘쳤다. 식당과 바,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고 오가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트럼펫 연주와 함께 춤을 선보이는 거리의 악단도 보인다. 취재진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30분만에 로빈 아일랜드에 내렸다.
로빈 아일랜드. 케이프타운에서 11㎞ 떨어진 이 섬은 폭 2㎞, 길이 4㎞의 길쭉한 돌섬이다. 원래 이곳은 물개나 바다표범 펭귄떼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진출한 뒤 1658년부터 암흑의 섬으로 바뀌었다. 제국주의 식민정책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유형지가 된 것이다. 19세기 들어 영국인이 이 지역을 차지한 뒤에는 한때 정신질환자나 나병환자를 격리하는 수용소로 쓰이다 다시 정치범형무소가 됐다. 이곳에 수감된 정치범 가운데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도 ANC 간부들과 함께 파업투쟁을 이끌며 반란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이곳에 왔다. 그는 27년의 감옥생활 가운데 18년을 로빈 아일랜드에서 보냈다. 오늘날 이 섬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흑인차별의 실상을 증거하는 박물관이 돼 있다.
안내인은 "이곳 가이드 가운데는 과거 여기서 감옥생활을 겪은 이도 여럿 있다"며 "직접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생생한 체험담을 들을 수 있다"고 소개한다. 예전 남아공의 '아파르트하이트(흑인차별 정책)'는 유별났다. 죄수가 '백인'이냐 '유색인' 또는 '반투인(흑인)'이냐에 따라 감옥에서도 빵과 고기, 소금의 양에까지 차등을 둘 정도였다. 인도인이나 유색인 죄수에게는 설탕 한 숟갈과 빵 한 덩어리가 주어졌지만 흑인들에게는 설탕 반 숟갈에 멀건 야채죽이나 옥수수죽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특별한 날에 고기 한 조각이나 채소가 지급됐다. 죄수 가운데서도 정치범은 최악의 대우를 받았다. 감옥에서나마 흑백 차별 없는 표준식단이 마련된 것은 1979년부터였다고 한다.
로빈 아일랜드의 죄수들은 거의 흑인이었고 간수 등 관리자는 모두 백인이었다. 죄수들은 이른 아침이면 비위생적인 변기통으로 찬물을 받아다가 세수를 했다. 낮에는 섬 한가운데 있는 채석장에 동원돼 일을 했다. 두 사람씩 발목을 쇠줄로 묶인 채 뙤약볕 아래에서 대리석을 캐거나 돌을 깨고 이를 트럭 위에 실어나르곤 했다.
26년간 감옥살이를 한 엔드루 음란게티는 훗날 "무더위 속에서 돌 깨는 일을 하다 눈을 다친 사람이 많았다"며 "어떤 때는 하루에 일륜차 10대 분량씩 채워야 했는데 책임량을 해내지 못하면 교도관들이 며칠씩 굶기곤 했다"고 회고했다.
감방은 대개 가로 세로 2×2m쯤 되는 공간. 죄수에게는 매트 한장과 담요 두장, 변기통 겸 물통이 주어졌다.
감방마다 한쪽 벽에는 이곳을 거쳐간 죄수들의 증언이 써붙여져 있다.
"'다음은 저놈일 거야' '아냐 저놈이 확실해'-이런 말을 그(백인 교도관)들은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소나 말같은 짐승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놓고 내기를 걸었고 이를 즐겼다. 의사는 '이 놈은 이빨이 좋고 엉덩이가 괜찮아. 죽는 날 가져갈 수 있을 거야'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노동자들의 사보타지를 모의한 혐의로 10년간 복역한 인드레 나이도는 이런 증언을 했다.
"교도관들은 종종 모래밭 구덩이에 죄수들을 파묻은 뒤 목만 내놓게 했다. 그리고는 뙤약볕 아래 한나절씩 서있게 했다. 물을 청하면 교도관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그 안에 대고 오줌을 눴다. 그게 최고로 맛좋은 위스키라면서…."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이다. 더러 사람좋은 백인 교도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는 이처럼 악랄했던 모양이다.
백인통치에 항거한 주요 정치범들은 다른 흑인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일과 뒤 감방 점호가 끝나고 교도관이 돌아가면 이방 저방 죄수들은 벽을 두들겨 가며 신호를 보내고 굶주렸던 그들만의 대화를 나눴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감옥 속에서 그들은 고향과 가족, 해방의 날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장 즐겨 부른 것은 '자유의 노래'였다.
"티나 시즈웨, 티나 시즈웨, 이신순드…"
줄루 말로 된 이 노래를 한 두명이 먼저 부르기 시작하면 곧 우렁찬 합창이 되곤 했다. 노랫말은 이런 뜻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갈색의 나라. 우린 우리 땅을 원해요. 백인들이 빼앗아간 우리 땅을. 우린 아프리카의 후예들! 우린 우리 땅을 원해요. 그들은 이 땅을 떠나야 해요.…"
백인 정부의 아파르트하이트는 '아프리카 영웅들'에게 죄수의 낙인을 찍고 그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꿈과 신념까지 묶어둘 수는 없었다. 로빈 아일랜드의 안팎에서 인종차별 정책에 항거하는 흑인들의 외침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전체 인구의 10%밖에 안되는 백인들이 절대다수인 흑인 위에 군림한 채 온갖 이권을 독점하며 자행한 탄압과 규제의 사슬은 필경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정치범들을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로부터 4년 뒤 흑인들은 마침내 소수 백인정권을 밀어내고 넬슨 만델라 정권을 탄생시켰다. 쓰러졌던 자는 일어섰고 짓밟은 자는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없는 무혈의 선거혁명이었다.
로빈 아일랜드에 갇혔던 정치범 수백명이 복권됐고 최근까지 그 상당수가 남아공 정부와 의회 주정부 등에서 일해 왔다. 로빈 아일랜드는 이제 세계 사람들에게 피부색을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일깨우는 성지로 기억되고 있다.
남아共(5)드비어스社 창업 세실 로즈 | ||
'골드러시'꿈이뤄 육영사업 초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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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부 개척이 그렇듯 아프리카 개척도 '골드러시'에 힘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이주건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이건 그 밑바탕에는 황금에의 꿈이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드 비어사(De Beers Company)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지금도 남아공을 비롯해 아프리카 곳곳의 산과 바다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가공-판매해 세계 보석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를 창업한 세실 존 로즈(Cecil J.Rhodes.1853~1902)는 기업가이자 정치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의 영웅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불평등계약과 허위계약으로 온갖 보화를 가로채간 사기꾼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케이프타운 대학과 가까운 뮈젠버그의 해변. 네덜란드풍의 집을 개조했다는 2층짜리 '그루트 슈어(대저택)'는 잔디가 깔린 드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100여년 전 로즈가 살았던 곳이다. 그루트 쉬어 본관은 오랫동안 남아공 국가 지도자들의 관저로 쓰여왔고 최근까지 주마 부통령이 거주해왔다. 로즈가 마지막 숨을 거둔 해변의 저택은 공공박물관으로 바뀌어 로즈와 관련된 갖가지 자료와 책, 가재도구, 흉상과 기념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로즈는 어릴 때부터 심장이 약했다. 건강을 위해 그는 17세 때 기후가 좋은 남아공에 왔다. 광산업에 나선 그는 1887년 드 비어스사를 세웠고 그 뒤 몇년만에 세계 다이아몬드 물량의 90%를 공급할 정도로 벼락부자가 됐다. 20대에 이미 억만장자의 꿈을 이룬 그는 남다른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저 북쪽 카이로까지 철길을 깔겠다는 생각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잇는 1만㎞가 넘는 철길-이 길을 따라 열차가 달리고 수천년 잠들었던 검은 대륙이 깨어난다. 대영제국은 이로써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세계를 지배할 거대한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이런 야망을 키우며 케이프의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1890년 그는 37세의 나이로 마침내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이 됐다. 드디어 그의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는 림포포강을 넘어 짐바브웨 잠비아까지 땅을 개척했다. 광맥이 있는 땅과 드넓은 식민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원주민에게 헐값에 빌리거나 사들였다.
그러나 인접한 트란스발 공화국의 지도자 폴 크루거는 그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보어(네덜란드)계 주민은 목축업을 주로 했는데 거대한 금광맥까지 갖고 있었다. 북쪽을 개척하자면 먼저 이 땅을 제압해야 했다.
로즈는 크루거를 제거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 부근 위트워터스랜드의 백인 광부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비(非)네덜란드계 광부들을 앞세워 무장봉기를 선동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1895년 로즈의 측근 린더 제임슨이 이끈 원정대원들은 모두 붙잡히거나 사살됐다. 로즈는 이를 사주했다는의혹때문에총독의자리에서물러나야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계와 네덜란드계 주민 사이에 반감이 커진 끝에 결국 앵글로-보어전쟁(1899∼1902)이 터졌고, 여기서 승리한 영국은 이 지역 일대를 식민지로 편입시켰다. 당시 네덜란드계 주민 수만명이 영국군에게 학살 당했다. 식민지 쟁탈을 위한 백인끼리의 유혈극이었다.로즈의 말년은 불운했다. 그는 명예를 잃었고 몸도 쇠약해졌으며 그의 이름으로 환어음 등 문서를 위조한 라즈윌 공주와의 스캔들까지 불거져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02년 그는 49세 때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식민지 개척시절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스스로 '세계의 풍경'이라고 이름붙인 짐바브웨의 마토포 언덕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짐바브웨(예전엔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로 불리었음) 등 자그마치 100만 평방마일의 땅을 영국의 식민지로 개척했다.
그의 유산은 유언에 따라 대부분 옥스퍼드대에 로즈 장학기금으로 헌납됐다. 아프리카를 경영하려던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지만 명예는 부활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이 아니라 '영국의 세계경영'을 꿈꾼 거인으로, 국제적인 육영사업의 선구자로 재평가받게 된 것이다.
로즈 장학기금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옥스퍼드대에 유학하는 영연방국과 미국 등의 외국 학생에게 주어지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학구열과 비전, 헌신과 봉사정신을 가진 젊은이 5300여명이 그간 장학 혜택을 받았다.그는 짧고 굵게 살다 갔다. 식민지를 넓혀 대영제국의 터를 닦으려던 그의 야망은 장학사업으로 승화됐다. 세계의 인재를 키우는 평화사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기자는 아프리카의 남북을 철길로 이으려던 그의 꿈도 새로워져야 하지 않을까고 생각해본다. 검은 대륙에 거대한 물류와 정보 인프라를 깔아 아프리카가 신천지로 거듭나도록. 유럽이 유럽연합(EU)으로 하나가 돼가는 것처럼 아프리카연합(AU)이 뿌리내려 누구나 이 거대한 대륙을 종횡무진 오갈 날이 올 수 있도록.
<세계적 수준 '교육 낙원'>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이 적지 않다. 경영학 분야 명성이 높은 비츠대, 법학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 프리토리아대, 세계 최초로 심장이식을 성공시킨 케이프타운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샘존스대 등등.
이들 대학과 중고교에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수사 이미 300명이 넘고 있다. 일반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이는 물론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는 신학도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초-중등 학생이 많아져 이들을 부모 대신 돌봐주며 민박업을 하는 교민이 늘고 있다. 짧게는 몇달에서부터 1~2년씩 어학연수차 이곳에 오는 한국 학생도 연간 70~80명은 된다고 한다.
다음은 케이프타운에서 민박업을 하는 한 교민과 의 일문일답.
-아프리카 국가인 이곳에 유학생이 느는 이유는.
▲영국식 교육을 하고 있고 학비가 싸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승마 골프 같은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길 수 있다.게다가 도시에 유흥업소가 없어 학생들이 탈선할 우려도 없다.
-학비는 어느 정도인가.
▲같은 영어권인 캐나다나 호주에 비하면 훨씬 싸다. 사립 초등학교는 연간 1500~2000달러, 중고는 공립이 450~800달러, 사립은 2600달러쯤이다. 대학은 사립 2500달러, 공립의 경우 영주권자는 1200달러, 외국인은 8000달러 수준이다.
-유학생 상대로 민박업을 하는 교민이 많은가.
▲유학생이 늘면서 많아지고 있다. 초중등 학생만 10명쯤 전문적으로 보살피는 곳도 있다. 교민이 부모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준다. 아침이면 학생들을 자동차로 실어다 주고 수업이 끝나면 데려온다.
-학부모한테는 어느 정도 받는가.
▲학교에 내는 학비와 레슨비가 보통 월 300달러, 픽업등 각종 경비를 포함해 숙박비가 700달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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