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성 요한(48:29)
여러분 안녕하세요.
기독교와 신비주의 (Christianity and Mysticism)
이 시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제 8번째 시간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에 대해서
우리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그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그 시대,
그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의 생애인데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상류 계급에 속하였고,
본래는 유대교로서, 유대계로써 기독교로 개종한 가정이었습니다.
요한은 소년 시절 예수회 계통 학교에서
문법과 수사학, 형이상학, 라틴어 및 스페인 고전 등을 공부했습니다.
21살이 되었을 때에 요한은 메디나 델 캄포에 있는
성 안나 수도원이라고 불리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기 위해서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요한은 신학뿐 아니라 음악, 문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고,
가르멜 수도회의 엄격한 규칙과 고행도 함께 병행했습니다.
1567년 요한은 사제로 서품되었고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과 테레사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설립을 위해서 힘썼고
함께 수도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개혁적인 성격 때문에
갈멜 수도원은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엄격파와 완화파가 서로 대립을 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로 1577년 겨울,
완화 가르멜 수도회의 수도사들에 의해서 납치되어
톨레도에 있는 수도원에 감금되어 감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톨레도의 감방에서
'영혼의 노래'의 일부와 몇 편의 단편시들을 저술했습니다.
톨레도의 감옥에서 탈출한 후 요한은 안달루시아에 있는
엘 칼바리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이 됐습니다.
이때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과 '영적 권고' 등을 집필했습니다.
1579년에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바해자의 맨발 가르멜수도회의
최초의 신학원인 성 바실리오 콜레지오를 세우고 초대 원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수도회의 요직에 있으면서 행정업무를 맡았고,
1591년 멕시코에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진출하게 되자
이것을 돕기 위해서 멕시코로 파견되도록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로 가기 전 몸이 약해져서 요양을 하다가
1591년 12월 13일 4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726년에 시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요.
1926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교회의 박사, 교회의 박사로 선포를 했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먼저 '영혼의 노래' (Spiritual Canticle) 1584년에 쓴 것이고요.
그 다음에 '가르멜의 산길' (The Ascent of Mount Carmel) 1585년,
그 다음에 '어둔 밤' (Dark Night Of the Soul) 역시 1585년이었고요.
그 다음에 '사랑의 산 불꽃' (The Living Flame of Love)
1585년에서 1587년까지 이 책을 저술을 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 그 시대의 영적인 배경을
우리가 먼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사벨라 여왕의 개혁 운동이 있었습니다.
1474년 이사벨라가 카스티야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을 때
스페인 교회의 상태는 시급한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각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위 성직자들은 성직자이면서 또한 대영주로서
성직자 본연의 삶,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이러한 본연의 성직자의 삶보다는
전쟁과 정치적인 음모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수많은 하급 성직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미사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수도원마저 타락할 대로 타락을 해서
수많은 수도원들과 수녀원들은 왕실의 귀족들의 사생아들이 거기 모여서
사치스러운 여가를 즐기는 그런 곳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이사벨라는 교회를 개혁하기로 굳게 결심을 하고
우선 고위 성직자들의 임명권을 교황으로부터 받아냈습니다.
고위 성직자의 임명권을 통해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더욱 더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지메네스 대주교를 임명해서 그를 통해서 개혁을 실천했습니다.
지메네스는 성서를 강조하고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지메네스는 엄격한 교리주의자여서
많은 사람들을 종교 재판에 회부했고 또, 유대인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의 개혁은 순수하고 경건한 모습도 있었지만
동시에 배타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Ignatius Loyola(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의 운동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 대부분의 교회와 수도원이
대부분 타락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소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또, 이러한 수도원의 타락상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수도회들을 낳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수도회들을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수도원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16세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전자의 형태,
즉 전통적인 수도원의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고자 한 이 형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의해서 성립된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후자,
새로운 시대의 적응하고자 노력했던 이 후자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지도아래 있었던
'예수회'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예수회'는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을 하고자 했던
수도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군대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한 고통과 절망을 달래기 위해서
경건 서적들을 탐독하다가 환상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런 몬 테레사에 있는 한 수도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개인적인 수도 생활을 떠나서
교회와 그 사명을 동시에 헌신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장년에 달한 그의 나이도 돌보지 않고
대학교 등에서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의 열정적 신앙에 끌린
일단의 추종자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게 되었고
(10:01~
그는 그 추종자들을 이끌고 1534년에 청빈, 순결,
그리고 교황에 대한 순종, 순명을 엄숙히 서약하고
예수회 제수위트(Jesuit) 수도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새로운 수도회의 원래 목적은
성지의 터키인들 사이에서 사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3세가 이들을 공인해 주었던 1540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위협, 다시 말해서 루터를 시작으로 일어났던 종교개혁,
그 위협이 너무나도 증가해서 결국 카운터 리포메이션(Counter Reformation),
가톨릭 안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운 하나의 개혁 운동이죠.
이 개혁 운동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선교에 대한 임무를 잊지 않았고,
수백 명의 회원들이 극동과 신세계에 보내져서
거기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응해서 예수회는
교황청의 손에 들려준 강력한 검과 같았습니다.
군대를 따른 이들의 조직은 각종 도전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해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그런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가르멜 수도회입니다.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의 카스티아의 아빌라에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데레사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살이 되던 1535년,
아빌라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를 하게 됩니다.
데레사는 많은 신비주의적인 체험과 환상, 환시를 경험을 했는데
그 내용은 그녀의 저서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환시에서는 기도하고 있던 데레사에게
갑자기 손에 불로 만든 창을 든 천사가 나타나서
사정없이 그녀의 가슴을 찌름으로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아픔을 느꼈고,
그로 인해서 데레사의 심장에 성흔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 결정적인 환시를 체험한 데레사는
1560년 초창기에 엄격한 수도생활의 규율로 돌아갈 것을 주장을 했고,
그래서 그녀가 속한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을 단행해서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원을 세울 계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1562년에는 특히 2월에
로마 교황청의 새 수도원 창립을 위한 청원을 했고,
같은 해 8월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고
13명의 수녀들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1567년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두루웰로의 남자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했습니다.
이렇게 데레사는 총 15개의 남자 수도원과
17개의 여자 수도원을 창립했습니다.
데레사는 스페인 전역에
가르멜회의 쇄신과 개혁을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1575년 총회는 그의 개혁을 제한했고,
1580년까지는 가르멜회 내부에 보수파와 개혁파 이렇게 나누어서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맨발의 가르멜회가 정식 승인을 받음으로써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데레사는 1582년 10월에 사망했습니다.
1617년 스페인 의회는 그녀를 스페인의 수호자로 선언했고,
그녀의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서 시성, 성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데레사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교회의 박사에 임명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16세기 스페인 영성의 특징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먼저 종교적인 개혁입니다.
16세기 초에 스페인에서는
영성의 황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열렸습니다 .
그리고 그 시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본 것처럼 이사벨라 여왕,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데레사 등의 개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체계적인 묵상기도, 영신수련이라고도 하는 것인데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내면적인 감각,
특히 상상력에 집중을 함으로써 묵상의 내적 훈련을 발달시켰습니다.
이 조직적인 묵상은 그 시대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에서 발달되어 나온 것이 상상적 관상으로서 이것에 의해서
예수님의 삶의 여러 장면들, 그의 수난, 그의 죽음 등이
내면에 재현되도록 한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제 큐티(QT)를 하는데 개신교에서 하고 있는 큐티는
이 로욜라의 영신 수련에서 사실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고
거기서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침잠의 기도입니다.
침잠의 기도는 1480년경에 수도원에서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향심기도, 센터링 프레이어(centering prayer)라고도 하는데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의 일상적인 인식수준을 뛰어넘어
자아, 즉 마음속에 내재된 하느님을 발견하고 만나는 체험이자
골방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고요해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슴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고요해지며
고요한 마음 속에 영혼이 고요해 진다라는 것입니다.
분주한 일상과 바쁜 삶 속에서
자칫 껍데기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주인이 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기인식, 그리스도를 본받음 그리고 하느님과의 합일입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특징은 하느님과의 합일,
또는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인데
그것은 지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과 영혼의 합일은
두 개의 불이 하나가 되는 것, 또는 물방울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해를 본격적으로 해 보겠는데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화, 정화에 대한
그 사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제 정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밤'이란 단어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데
그의 저작 속에 '밤'으로 상징되어 나타나는
그런 그 단어들이 많이 나오게 되고요,
이 '밤'을 잘 이해해야 우리가 요한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영혼이 떠나는 여정에
출발점과 과정 및 종착점을 '밤'이라는 단어로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밤'의 의미는 영혼의 정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순수함에 다다르기 위한
정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밤'이라는 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밤'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0:01~
요한은 그의 저서 '갈멜의 산길'을 통해서
영혼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과정을
세 가지 '밤'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감각의 밤'으로
감각의 밤, 영혼이 이제까지 품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욕정을 부정하여
끊어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부정과 끊음이 인간의 온갖 감정에게는
'밤'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성의 밤'으로
영혼이 하느님과의 합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방법으로 가야 하는데,
믿음의 길은 이성에게는 어두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밤'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기억과 의지의 밤'인데 종착점인 하느님 편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영혼에게는 어두운 밤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빛, 영광이시죠?
그 영광의 빛은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 빛 앞에 설 때 인간은 마치 눈이 먼 것과 같고
인간은 밤을 마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은 이 세 가지의 '밤'을
'밤'의 세 부분으로 비유를 하는데,
다시 말하면
감각의 '밤'은 어둠이 시작하는 초저녁이고,
이성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이며,
기억과 의지의 '밤'은 태양이신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가는
새벽녘에 비유됩니다.
이 '밤'은 양상에 따라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감각 및 영혼의 능동적인 밤'과
'감각 및 영혼의 수동적인 밤'으로 나눕니다.
이 두 가지 '밤'은
하느님과의 합일 과정에서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영혼의 활동이 우세한 '능동적인 밤'과
하느님의 활동이 우세한 '수동적인 밤'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능동적인 밤'이 하느님과의 합일의 과정 중
감각적인 부분과 처음 단계에 우세하다면
'수동적인 밤'은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갈수록
우세해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정화의 과정은 감각에서 영혼으로,
능동에서 수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능동적인 밤은
인간이 완덕에 이르고자 완덕의 정상에 서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벗고, 끊고, 버리고,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 무(無)에 이루고자 투쟁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벗고, 끊고, 없애버리는 그 모든 행위는
전부를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전무(全無),
앱솔루트 낫씽(Absolute nothing)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전부이신 하느님을 얻고자
에브리씽(everything)이신 하느님을 얻고자,
영혼이 자신을 무(無)로 돌려 스스로 '밤'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능동적인 밤'은
'벗고 끊고 버리고 없앰'이라는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
능동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 때문에
또 다른 하나의 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동적인 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수동적인 밤'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밤'은 하느님과의 합일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수동적인 밤'은 '능동적인 밤'과 동시성을 띠고 작용을 합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취할 때부터 영혼은 순종해야 하며
그 요구에 응답을 해야 합니다.
이제 그러면 두 번째로
밤의 단계와 특징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는데,
먼저는 '감각의 밤'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첫 단계인 감각의 밤에서
어두운 밤의 의미가 무엇이며,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서
왜 이 밤을 거쳐가야 하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감각, 즉 인간의 욕망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밤'은 육의 모든 즐거운 것을 끊는 것이며,
욕망을 씻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느님과 결합하는 과정의 첫 출발점이
이제까지 품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욕정을 부정해서 끊어버려야 하는데,
이 부정과 끊음이 인간의 온갖 감정에게는 '밤'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온갖 맛있는 것을 먹는 사람이,
온갖 세상의 재미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그것을 한번 끊는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영혼에게는 이것이 '밤'과 같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을 통해 사물을 보듯이 우리의 영혼은 욕구를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맛봅니다.
이런 욕구가 꺼지면 또는 이런 욕구가 극복이 되면
영혼은 욕구에 대해서 어둡고 비어 있는 것이 되는 것이죠.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끊고
맛 없애기의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집, 애착과 집착이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 어둠을 둘러싼 영혼이 먼저 어둠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대하여 애착과 집착을 가질 때
하느님과의 순수한 합일과 결합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은 영혼에게서 하느님의 얼을 빼앗아 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마음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욕망은 영혼에게 괴로움과 피로, 고통, 상처를 주며
마음을 어둡게 하고 눈을 멀게 함으로
하느님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합일에 도달하려면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없애버려야 합니다.
감각의 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에서 맛과 힘을 얻으면 사랑의 맛,
사랑의 그 힘을 얻게 되면 세상에 대한 욕망 일체를 거뜬히 부정할 만한
그것을 끊어버릴 만한 용기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뜨겁고 큰 사랑이
본능의 멍에를 벗고 감각의 밤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다음은 이성의 밤입니다.
감각의 밤이 하느님과 합일를 위한 첫 단계이며, 준비 단계라면
이성의 밤은 관상에 이르기 위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의 밤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끊어버리는 것이라면
이성의 밤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이성, 사고, 사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성의 밤은 감각의 밤보다 더 캄캄합니다.
믿음은 이성과 감성의 모든 빛을 잃게 합니다.
믿음의 빛은 너무 세기 때문에 다른 빛들을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버리고 어둡게 함으로
이성에 대해서 비우게 합니다.
감각의 밤이 인간 외면에 관한 것이라면
이성의 밤은 인간의 내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더 깊고 더 어두운 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비움은
하느님의 지식과 정신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과 정신으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알아들을 수 있고,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이 밤 속에서
영혼의 능력을 비우고 벗어버리는 일이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성을 비움으로 채워진
하느님의 지식이며 정신인 것입니다.
이성의 밤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이성이 지각하는데
보다 더 외면적이고 감각적인 것일수록
하느님의 것이라는 확실성이 덜하기 때문에
피하거나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30:01~
이런 것을 간과할 경우 믿음이 줄어들고
더 이상 어둠 속을 나아가지 못하고
영의 해탈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기억의 밤'입니다.
하느님과 합일을 하기 위하여 정화해야 할
다음의 영혼의 기능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자연적인 것, 상상적인 것, 영적인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기억의 자연적인 것이란 감각을 통해 기억이 형성한 지각이며,
상상적인 것은 초자연적 경험이 형성한
초자연적 이미지와 지식입니다.
이것은 다른 지각과는 달리
형체의 영상을 지니지 않으므로 육신의 감각에 딸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연과 초자연의 지각을 용납하지 않고
그 바닥까지 부정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영적인 것은 자기 안에 간직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더하기 위해서
상계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워야 합니다.
기억의 비움은 영혼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이것은 고요 속에 들므로써
영혼이 성령에 의해 쓰임 받고 가르침을 받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상이나 체험에도
동요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되 메이지 않아야 하며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영혼은 혼동과 자만을 불러 일으킵니다.
다음에는 '의지의 밤'입니다.
이성의 밤에서 이성을 비워 믿음의 터를 닦아도
사랑으로 의지를 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느님과의 합일이 생명과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한 의지로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힘은 그 기능과 감정과 욕구에 있고
이 모든 것은 의지로 다스려집니다.
따라서 의지의 비움이 필요합니다.
의지는 4가지 감정으로 구별되는데
기쁨과 바람과 슬픔과 무서움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얽혀져 있어서
의지가 무엇을 기뻐한다면 그만큼의 바람이 있는 법이고,
따라서 기뻐하는 그 무엇에 대한
슬픔과 무서움이 함께 포함이 됩니다.
따라서 반대로 의지해서 기쁨이 비워진다면
다른 것도 함께 비워질 것입니다.
영혼의 의지가 가지는 기쁨은
무엇을 끔찍이도 알면서 가지는 만족을 말합니다.
알지 못하고 만족도 주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기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현세적인 것, 자연적인 것, 감상적인 것,
윤리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영적인 것에서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지의 집착은 비워져야 합니다.
의지의 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합치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갖고 싶은 마음이 없이 즐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즐기지만,
갖고 싶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두루 즐길 수가 없습니다.
의지의 밤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에 자유를 줍니다.
사랑의 일치는 강압적인 것이 아닌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그리하여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일치로서
하나를 이루게 합니다.
세 번째로 정화의 과정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대하여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별을 하는데,
자연적인 합일이란
하느님이 모든 영혼 안에 항상 실제적으로 존재하면서
그 존재를 존속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식을 하고 있든지 하지 못하고 있든지
하느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바로 이제 그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초자연적인 합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에로의 참여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초자연적 합일은 인간과 하느님의 의지가 상반됨이 없이
하나로 합쳐질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식적인 행위뿐만이 아니라 잠재적 습성까지도 온전히 끊어 버릴 때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합일은
일체의 것을 끊어버린 순결한 사랑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하게 하는 사랑은
영혼의 수동적인 밤을 통해서 정화된 사랑입니다.
사랑이 순수하게 정화되어
은총으로 하느님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인도와 소망의 보호를 받으며 가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합일은 자기를 촉국해서 초자연에로 치오름,
혹은 옛 자아가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은총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합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먼저 감각의 능동적인 정화입니다.
이것은 정화의 과정 중에서
제일 첫 번째로 오는 단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한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묵상과 추리와 같은 감각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며,
자연적인 인간이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감각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조명된 이성의 법칙에
감각을 예속시키는 것입니다.
회개와 동시에 영혼 안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들어서게 되고,
영혼은 믿음에 의지하여 정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영혼 안에 있는 마음과 욕망입니다.
이것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얼,
즉 성령을 앗아가며 영혼에게 피로와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또한 영적 진보에 있어서
하느님과 자아에 대한 진리의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정화해야 할 마음과 욕망의 원인은
'이기심'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덕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겸손한 자에게 내리십니다.
두 번째로 영혼의 능동적 정화입니다.
감각의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피조물들에 대한 마음의 이탈이 이루어지게 될 때,
영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고자 하는 노력에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가 영혼의 능동적 정화입니다.
이 영혼의 능동적 정화는 영혼의 세 가지 능력,
즉 이성, 기억, 의지의 정화를 말합니다.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세 가지 능력은
이성에 따른 믿음, 기억에 따른 소망, 의지에 따른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은
하느님과 합일하도록 하는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영혼의 능동적 정화는
이 세 가지의 능력을 비워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이성에 있어 아는 것을 비우고 어둡게 합니다.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져서 깜깜해질 때
믿음은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소망은 기억을 지웁니다.
기억이 주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비우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의지에 있어 모든 것을 비우게 합니다.
모든 것에 대한 일체의 의지를 다 버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감각의 수동적인 정화입니다.
요한에 의하면 꾸준한 기도와 묵상 안에서 맛보는 기쁨으로
세상의 맛을 잃고 하느님 안에서 영의 힘을 기른 영혼들이
감각의 수동적 정화에 들어가게 됩니다.
(40:01~
그런데 아직 감성의 맛과 기쁨에 좌우 되어
수많은 결점과 여러가지 불완전성을 지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친히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묵상과 추리를 통한
감성의 맛과 기쁨 마저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거 좋아하고 추리하는 거 좋아하고
그렇게 묵상과 추리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것은 아직도 얕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의 깊은 수동적인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미 건조함과 감각적인 실현을 통해서
하느님은 감성을 영혼에 적응하도록 하십니다.
여기에는 외적, 내적 감각과 추리 행위를 하는
추론적 지성까지 포함해야 됩니다.
감성이 끊기고 고요해지면 영혼은 영적 진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조명의 길' 혹은 '주부적 관상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영혼을 기르시고 손수 먹이시기 때문에
영혼은 어떠한 능동적인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영혼의 수동적인 정화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은 영혼의 완전한 합일을 위해
영혼을 그 자연적 및 영적 무지와 불완전에서 정화시키려고 하십니다.
이 단계에서 하느님이 조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데
이 조명의 빛은 영혼이 지니는 나약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영혼에게는 곧 어둠이요 괴로움과 아픔입니다.
이 빛은 영혼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온갖 악들을 환히 비추어주며
이러한 불완전의 악을 불로 나무를 태우듯이 정화시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영혼의 고통은 영혼이 지닌 나약함과 불안전에서 오며
불완전한 요소들이 모두 타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영원히 정화를 거듭할수록 사랑에 불타게 됩니다.
이러한 정화는 반복해서 그 깊이를 더해가며
영혼을 순결하게 하지만
그 깊이로 영혼은 더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반복되는 정화의 고통으로
영혼은 모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고요함을 얻고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영혼을 비우며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지식으로 사랑이 불타게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오늘 공부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먼저 하느님과 합일을 하려는 영적 진보의 과정은
그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는 정화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과정은 한 번에 끝나는 과정이 아니고
한 번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요.
계속해서 정화되고 정화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합일의 단계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화는 인간이 활동하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능동적 정화 활동과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수동적 정화 활동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렇게 정화된 인간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정화의 목적은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고통을 포함하는
영적인 변화의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이 정화의 과정과 결과는
하느님과 합일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반응이 함께 만들어내는 합작품입니다.
합일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인간의 자기 비움이며
인간의 그 대상을 향한 자기 변화입니다.
그리고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 완성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하느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
그래서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과
이렇게 합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이 보여준 하느님과의 합일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정화의 과정은
하느님 앞에서나 시대의 요구 앞에서
우리 기독교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정화의 삶을 요구한다는 것이죠.
사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이 시대의 교회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화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하느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도전을 정화를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끊고 없애라는 그런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 요한은 합일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그 사랑으로 이웃과도 함께 해야 되고, 이웃과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를 향한 이기심을 버리고
내 안에 하느님과 이웃이 함께할 자리를 비워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요구에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아가서 하느님과 사랑으로 합일하려는 사람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도 합일 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인류는 생태계의 파괴라는 심각한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극지와 고산지, 빙하의 해빙,
그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 가뭄과 한발, 생태계의 파괴,
자원의 고갈 등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창조한 이 세상과도 합일해서
생태계를 보존하고 인간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성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와 생태계와의 관계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느님과 합일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생태계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강의를 한 페이지로 요약해서
저에게 메일로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
<성 요한의 사상>을 잘 이해하게 되니
[ 자신의 모든 것을 100%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100% 하느님께 내맡기는 그 행위로써,
이미 그 두 가지의 밤을 다 거치게 이끌어 주시며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으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니
거룩한내맡김의 영성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긴> 영혼들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관상기도를 통해서 어렵게 깨달은 깨달음을
다 깨달을 수 있게된다 ]는
지도사제의 말씀을 실감하며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며
늘 빛 안을 걷는 우리에게는
밤이란 단어도 어둠도 없음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21세기 진정한 사랑학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녹취에 수고해 주신 기회실 보조교사님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무화.보조.고문단(SG)
[ ★창화살
제2부 18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
2010. 04. 16.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이,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信仰이란 ‘하느님을 앙모(공경과 사랑)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최고, 최선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훌륭한 성인들이 행했던 저마다의 방법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결과’들이다.
그 방법대로 살기 위해
성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척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살면 힘이 덜 드는 것이다.
<성인들도 순리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사셨던 것이다.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리하여 하느님께 먼저 내맡기셨다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게 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몰랐을까?
그렇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인들도 처음엔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것’
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하느님께 내맡기면
순교를 하든, 고행을 하든, 수덕 생활을 하든,
자선 사업을 하든, 희생 생활을 하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려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살면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살아 주시기에
설령 힘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힘이 들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1요한 4,19 참조),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성인들도 많을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밤'의 의미는 영혼의 정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순수함에 다다르기 위한
정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밤'이라는 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정화의 고통으로
영혼은 모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고요함을 얻고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영혼을 비우며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지식으로 사랑이 불타게 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느님과의 합일이 생명과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한 의지로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부님,그리고 녹취로 이끌려드린 보조교사님들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지도신부님께서 지리산 마리아처럼 피정의집에서
미사중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에서 내맡긴영혼들이 성인들보다 앞자리에 앉게 되신다고요.
오늘 그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맞구나로 다가옵니다.
감각의밤,이성의밤,기억과의지의밤을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기위해
없애고 끊는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온전히 내맡겨 드리면
저절로 그리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아버지께 내맡겨드리면 됩니다> 입니다.
어찌 저희가 내맡김의 화살기도 하나로
'2) 수동적인 밤
- 마지막 단계로 갈수록 우세.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상태-무화님댓글'
바로 마지막단계에 진입하였는지 탄복과 감탄뿐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성요한도 모르는 무식쟁이였는데 말입니다.
지도신부님의 100프로 내맡기지 못했을 때 어두운 밤이 있을 뿐이라는 말씀에도 정말 눈시울 뜨겁게 아멘입니다.
정말입니다.신부님,
그리고 감사함으로 먹먹합니다.
0.000001%라도 내뜻이 있는 순간이 어두운 밤 맞습니다.
다만
너무나 부족한 저희들은 크고 작은 어둔밤(정화=세탁기)을 아버지께서 불가피하게 허락하셔서
더더 순도 높은 내맡김으로 이끄시는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매순간 100프로 내맡기면 어두운 밤은 없겠지만
아버지께서는 내맡긴영혼들에게 교만치 않도록 이끄시려고
부족함을 남겨두시는 것도 아니신가
저의 부족한 깨달음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부족함을 알때 마다 다행이며 감사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도 환한 낮도
이제 모두 아버지것이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뿐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기도로 사는한 계속 빛으로 인도하심은 자명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주신 아버지께 흠숭과 감사뿐입니다.
사랑합니다.아버지!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정화의 과정은 감각에서 영혼으로,
능동에서 수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능동적인 밤은
인간이 완덕에 이르고자 완덕의 정상에 서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벗고, 끊고, 버리고,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 무(無)에 이루고자 투쟁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벗고, 끊고, 없애버리는 그 모든 행위는
전부를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전무(全無),
앱솔루트 낫씽(Absolute nothing)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전부이신 하느님을 얻고자
에브리씽(everything)이신 하느님을 얻고자,
영혼이 자신을 무(無)로 돌려 스스로 '밤'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밤'은 하느님과의 합일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수동적인 밤'은 '능동적인 밤'과 동시성을 띠고 작용을 합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취할 때부터 영혼은 순종해야 하며
그 요구에 응답을 해야 합니다.>
<정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영원히 정화를 거듭할수록 사랑에 불타게 됩니다.>
<반복되는 정화의 고통으로
영혼은 모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고요함을 얻고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영혼을 비우며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지식으로 사랑이 불타게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사랑하는 주님~! 제가 당신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 하였더니,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고 나날이 조금씩 정화시켜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지도사제에게
주신 선물 <끊임없는 내맡김기도>를 저도 따라쟁이하듯 기도하였더니,
저를 변화시키고 아버지와 사랑으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이 은총의 바다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뜻입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아버지의 크신 은총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저와의 결합을 위해
모든 것을 이끌어가시는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든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제가 이곳 무형성전에 온 것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정화되고
합일하시는 것을 원하셨기에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십자가 성 요한의 <정화의 과정>을 통하여 또 한번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은총의 바다에서
제가 죽을때까지 기꺼이 아버지 손에 저의 모든것을 내맡깁니다.
제가 제 뜻 제 애고가 올라오려 할때는
제가 하게 하지마시고, 아버지께서 하소서.
아버지 사랑과 일치하여 사는 삶으로
이끌어 주신 아버지께 늘 감사할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인간창조주 목적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하시려, 이땅에 외아들을 보내신거와 같이
성부,성자, 성령께서 <완전한 사랑>으로 합일하신거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 뜻을 이루소서.
이 복된 영혼을 통하여 찬미영광 받으시고,
부족한 저와 모든 사제와 무형성전에 모든 식구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세세대대에 영원무궁히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능동적인 밤은
인간이 완덕에 이르고자 완덕의 정상에 서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벗고, 끊고, 버리고,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항상 궁금했던 신앙의 삶을 쉽게 이해 할수 있도록 동영상과 녹취로 수고 해주신
신부님과 보조교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능동의 삶을 수십년간 살아 오며 스스로 애써 벗고, 끊고, 버리려고 애썼습니다.
그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어둠속 고통으로 지쳐버렸지요.
<수동적인 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수동적인 밤'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밤'은 하느님과의 합일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능동과 수동적인 밤으로 이끌어 주시어 <거내영> 삶을
살게 하시니 아버지와 합일하여
어둡고 불완전했던 제 영혼은 완전하고 쉽고도 단순한 안전한길
주부적영성의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은 아버지의 뜻으로 여기며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
100%로 아버지께 내맡겨 드리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 책을 오래전에 읽었지만 그땐 이해 할수 없었습니다.
이제 <거내영> 안에서 삶을 살도록 특은을 베풀어 주시어
영안이 열리고 빛가운데 머물게 되었습니다.
<거내영>은 영성의 최고봉임을 더더욱 확신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끊없는 자애심의 미로에서 벗어나 오직 아버지만을
죽도록 죽기까지 따르렵니다.
모든사제와 수도자들과 < 거내영 > 식구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먼저 하느님과 합일을 하려는 영적 진보의 과정은
그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는 정화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과정은 한 번에 끝나는 과정이 아니고
한 번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요.
계속해서 정화되고 정화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합일의 단계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화는 인간이 활동하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능동적 정화 활동과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수동적 정화 활동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렇게 정화된 인간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
이런 글들을 읽을 때면 더더욱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탁월함에
탄복을 하게 되고 거내영으로 이끌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미 예수님이 이겨 놓은 결과를 알고 있기에
우리의 모범이신 스승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거내영은 가장 먼저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나머지는 아버지의 뜻대로
저절로 이루어지기에 그대로 이끌려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정화되고 정화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합일의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은,
그래서 이렇게 정화된 인간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많은 사람들이 중도 탈락하거나 아예 시도하기도 사실 어렵습니다.
또한 참회개도 모르고 신앙의 기본 순서도 모르면서 하는 정화는 사실 정화도 아닙니다.
무지하고 부족한 저는 그냥
[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요한 9, 10-11) ]
위 성경 말씀처럼 '내맡김 영성글'에서 하라는 대로 하여 하내영이 되고
끊임없는 아버지 사랑가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였더니
내 안에 임하신 아버지가 통회든 정화든 성화든, 나를 만드신 분이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가 나에게 꼭 맞는 방법과 알맞은 때에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때론 왕창 이끌어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시는 것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거내영은 참으로 이 시대 최고의 위대한 영성이며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하내영은 참으로 복중의 최고의 복을 받은 복덩어리, 은총 덩어리입니다.
녹취해주신 님들께 감사드리며
뜨거운 아버지 사랑으로 불 타 오르신 십자가의 요한 성인님,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가 더욱더 뜨겁게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소서.
거내영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그 불꽃은 영혼의 활력과 힘의 척도가 된다.
영혼은 열정이 더욱 강렬해지고 커짐을 느끼며, 사랑이 이 열정으로 순화됨으로써,
지상과 천상의 높은 곳, 깊은 곳 안 미치는 데 없이 모든 것을 사랑에 잠기게 하는
사랑의 불바다가 자기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한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혼에겐
우주 전체가 사랑의 바다처럼 보인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의 산 불꽃 11,9)-
[ ■ 내맡긴 영혼은 내맡겼다는 것은 도대체?
지도사제 10.10.13 17:46
...
100% 내맡겼다 해서 그 사람이 저절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은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의 전과 후의 차이는 엄청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내맡기기 전의 나의 부족함은 내 안에 있었고,
내맡김 이후의 나의 부족함은 하느님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맡김 이후부터는 나의 부족함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부족함마저도 완전히 다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맡김 이후부터는 나의 부족함을 관리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내맡긴 영혼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살며,
자신 안에 일어나는 모든 부족함과 죄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아직도 부족함 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하면 겸손할 수록 하느님이 빨리 당신 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무조건적으로 충실합니다.
그래서, 내맡김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보잘 것없는 자신의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들이대지 않습니다.
내맡김 이후의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며
주시는 "느낌"을 매우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느낌을 통하여 내맡긴 영혼을 이끌어 주십니다.
느낌을 소중히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쉽게 이끌려 나갑니다.
마침내, 느낌은 "영감"으로 변화합니다.
"영감"은 성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영감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선물입니다.
영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내맡김은 진정한 자유의 삶입니다.
우리를 "내맡김의 길"로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 번 더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이끄심에 충실한 "내맡긴 영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수동적인 밤'은 '능동적인 밤'과 동시성을 띠고 작용을 합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취할 때부터 영혼은 순종해야 하며
그 요구에 응답을 해야 합니다. >
< 초자연적인 합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에로의 참여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초자연적 합일은 인간과 하느님의 의지가 상반됨이 없이
하나로 합쳐질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식적인 행위 뿐만이 아니라 잠재적 습성까지도 온전히 끊어 버릴 때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합일은
일체의 것을 끊어버린 순결한 사랑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하게 하는 사랑은
영혼의 수동적인 밤을 통해서 정화된 사랑입니다. >
< ■ 내맡김 영성 ■
6. '내맡긴다'는 말의 의미는? (2)
지도사제 09.12.20 16:42
'내맡기는 것,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것'은 2%의 남김도,
아니 1%의 남김도 없어야 한다.
완전히! 100%! 0.00001% 한 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맡김!
'내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만 남은 상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소유한 상태!
소위, '無我(무아)'의 상태! 無我之境(무아지경)!
그것이 바로 '내맡김의 영성'이다! >
< ■ 내맡김 영성 ■
7. 내맡김의 영성의 수준은? (1)
지도사제 09.12.21 10:20
내 것들!
나의 모든 것-내 생명, 내 자식, 내 배우자, 내 재산, 내 일, 내 취미,
내 명예 특히 내 뜻 등-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려, 내 것이 없어진 상태!
그것이 '무아(無我)'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그 상태를 '무아'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저에게 빨리 알려 주시길 바란다. 그것은 분명 '무아'이다.
내가 없어졌으니, 남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누구한테 맡겼는가?
하느님께! 하느님만 남은 것이다.
완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겨 드림으로
소위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무아가 됨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가 된다." 라는 깨달음!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神)이 된다." 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깨달음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하느님만이 남는 것이다.
하느님께 내맡긴 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그저 단순히 하느님(色)께 내맡기기(空)만 하면 된다(無我).
진리란 단순한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하면 진리가 아니다.
하느님께 내맡기는 방법!
이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
< 하섭내 4-2
무화 19.05.05 23:27
제 4 장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2. 내맡김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면, 모든 피조물에서 이탈해야 한다.
창조된 것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는 단계에까지 가야 한다.
이러한 영혼은
지나가 버리고 마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변함없고 무한하신 하느님 안에 휴식을 얻으며,
피조물에 신뢰하며 그 안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이 원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사용하신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의 모든 원의를 벗어나서
자기 식으로 선택하고 취하는 것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바라 보신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한 무관심 속에 죽어 묻힌 상태이다.
이때 하느님은
당신의 주권을 남김없이 영혼의 그윽한 깊은 곳에서 나타내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분은,,,,,,,,,,
피조물의 모든 구별과 차이점을 없애 버리는,,,,,,,
섬멸의 그림자를,,,,,,,
모든 피조물 위에 흩으신다.
그리하여
이들 피조물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전부 잃고
자신의 모든 활동력을 상실하게 되어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도 갖지 않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위대함만이 우리의 모든 능력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 있고
다른 것도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소멸하게 된다.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영혼을 구하며, 또 영혼을 위해 피조물을 살리는 일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
[ 지도사제 18.01.03. 08:14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단 1%의 남김도 없이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절~~~때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설령,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가 인정하는 聖人聖女들처럼>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
★ 맡김은 첫 걸음 ★ 이라 하셨겠습니까,
하느님 뜻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절~~~대로
<두 번째 걸음>으로는 발을 뗄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
[ 지도사제 13.11.06. 08:51
100% 몽땅 다 내맡기시기 바랍니다, 부디, 부디~
내가 가진 거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 1%를챙기고 있습니까,
얼마 후 사라질 보잘것없는 그 1%를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그 1%를 다 내맡겨 드리면 100%를 다 채워주시는데 말입니다,
100%를 말입니다.
올바른 순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이 달라집니다, 삶이~~~
부디, 부디~~~ ]
아멘 아멘~!!!
성인님들이 살아온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시대를 잘 타고난 부족한 저의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힘들고 힘든 과정들을 자처해 겪지 않아도
이렇게 아버지하느님과 합일을 이루고 하나 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감사의 마음을 가득 실어
아버지만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따르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찬미합니다.
아버지와 하나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
많은 이들을 내맡겨 드립니다.
< 거매영 >과 모든 사제와 온전히 내맡긴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며 거룩하신 아버지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반복되는 정화의 고통으로
영혼은 모든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고요함을 얻고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영혼을 비우며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지식으로 사랑이 불타게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오늘 공부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부족한 제가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내맡긴 영혼 되어
제가 하는 모든 일상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길을 걷다니요!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제가
지도사제의 정화의 도구인 < 끊임없는 아버지기도 >와
아버지께 사랑의 댓글을 올리는 항구한 교육, 충실한 참자녀로
살아온 세월 속에서 < 십자가의 성 요한 >의 영성까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일상과 영성이 따로 있지 않는 하나임을,
살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배우고 익히며
머리와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삶으로 피어나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위로부터 태어나 정화된 인간으로
아버지와 사랑을 회복하여 아버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었네요.
그토록 내뜻으로 노력하여 벗어나려 했던 것들을
항구한 아버지기도와 곰담묵으로 내맡겨드림으로
정화의 단계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정화의 고통으로 얼마나 헤매고 울고불고했던지요.
제 영혼은 아버지기도로 눈물의 강을 몇 번 건너오면서
고요함도 지유로움도 얻고 하느님께서 제 안에서 하나되어 감을 느꼈습니다.
정화되지 않았던 제 뜻과 에고와 자애심을 몽땅 비울수록
하느님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사랑으로 저와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고 불타오르는 아버지 사랑이 내면 밑바닥의 어둠을 태워주셨지요.
내뜻과 고통을 아버지 뜻으로 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다가설 수도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딸아이와 가정 안의 어려움들을 통하여 아버지 뜻에
몽땅 내맡겨드리며 성장해온 부족한 저의 거내영의 걸음은
그동안 무딘 모든 감각과 영혼의 능동적인 정화 과정을
거치고 거쳐서 지금 여기까지 함께 해주셨다고 여겨집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게 허락하신 모든 일을
아버지께서 하시고 사심을 느끼며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기도로 내맡겨드리면 불타오르는 아버지 사랑이
제 감각과 영혼의 수동적인 정화 과정까지 다 알아서
해주심을 믿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더더욱 내맡기며
아버지 사랑이 제 안에 가득 흘러들어와
아버지께서 저를 사니니 참평화를 숨쉬어 갑니다.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거내영의 은총의 길, 정화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을 내맡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아멘,아멘!
십자가 성요한 성인님에 대해
전혀 무지 그 자체였던 저는 거내영에 와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웠습니다.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부족한 저는 유치원을 진짜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남들은 유치원에서 인간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식과 태도의
모든 것을 배운다는데 부족한 저는 '무형의 성전'이라는
지상최대의 명문학교에서 신앙인과 인간으로써의
기본 중에 기본을 몽땅 배우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과 참인간이 되는 것을 분리 사고하고 연결시키지 못했던 제게
<거룩한 내맡김>은 참인간이 되는 길이 참신앙인이 되는 길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 성인님이 말씀하신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정화의 어둔 밤을 알지 못해도,
감각의 능동적인 밤과 수동적인 밤을 몰라도,
영혼의 능동적인 밤과 수동적인 밤을 몰라도,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하게 되어
아버지와 하나되어 지금여기 에서부터
땅을 밟고도 누리는 지상천국의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했던 '사랑의 삶'을
<거룩한 내맡김>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내뜻'으로 감각의 모든 것을 벗고 끊고 버리고 없애지 않고,
'아버지뜻'에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이끌어 주시는대로
현상계와 절대계를 무경계로 넘나드는 셋째하늘의
이 참자유, 참평화, 참사랑의 삶!
'나'를 보지 않고,
오직 사랑 그 자체이신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삶.
사랑하는 아버지는
부족한 제게 바로 단 하나, <거룩한 내맡김>을 원하셨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느껴지는 이 복되고 거룩한 삶에
참으로 참으로 엎드려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뜨겁게 뜨겁게 올려 드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불로 내맡긴 영혼들을
정화의 고통이 아닌 감사와 사랑과 찬미만이 뜨겁게 타오르게
이끌어 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의 감각, 이성, 기억과 의지의 모든 것을
몽땅 싸그리 내맡겨 드립니다.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거내영과 모든 사제와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영성교육 (마처예함)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88)
무화16.09.03
88.
[문] 언제 나는 자유롭게 될 것인가.
[답] 너로부터 <나>라는 이 에고가 사라질 때이다.
나, 내것------이것은 무지다.
당신, 당신의 것-----이것은 지혜다.
진정한 구도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이여, 당신은 내 생명의 주인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입니다.
나는 당신 손에 쥐어진 한낱 악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시키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영광입니다.
이 집이며 이 가족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의 명령에 따를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
[ 지도사제12.11.21. 04:14
<하느님의 거룩한 이끄심>을 한 번이라도 맛본 이들은,
도저히 하느님의 이끄심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이끄심에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게 됩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은 <수동 = 굳은 결심 봉헌>을 통한 <능동 = 이끌림>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능동)에 대한 충실한 이끌림(수동)처럼
탁월한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곧 <화살기도>입니다.
화살기도를 통한 하느님에 대한 <집중>과 <몰입>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제2부 내맡김의 비법과 진리
18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
2010. 04. 16.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다른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면 정말로 감사하겠다.
사랑만이 답이다. 정답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더 유리하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살아 주신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하라, 하지 말고 하라!
하지 마라, 네가 하지 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 없이 살라!
살지 마라, 네가 살지 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제가 강의를 들으면서 참으로 놀랐습니다.
강의를 거듭 들으면서 거내영의 탁월함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말씀하셨다는 감각의 밤, 이성의 밤, 의지의 밤이
거룩한 내맡김의 삶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겪어내고 통과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로 구분하고 어쩔 것도 없이,
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하고 아버지께 모든것을 몽땅 내맡겨드리면 될 일이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오늘 공부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먼저 하느님과 합일을 하려는 영적 진보의 과정은
그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는 정화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과정은 한 번에 끝나는 과정이 아니고
한 번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요.
계속해서 정화되고 정화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합일의 단계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화는 인간이 활동하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능동적 정화 활동과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수동적 정화 활동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렇게 정화된 인간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정화의 목적은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도록
인간의 감각과 영혼의 고통을 포함하는
영적인 변화의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이 정화의 과정과 결과는
★하느님과 합일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반응이 함께 만들어내는★ 합작품★입니다.
합일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인간의 자기 비움이며
인간의 그 대상을 향한 자기 변화입니다.
★그리고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아멘아메아멘!
이 강의의 결론이 바로 거내영의 핵심이네요!
하느님과 합일하려는 인간의 노력 중 가장 탁월한 방법이
나의 모든것을 아버지께 내맡겨드리는 일이고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위무위 신부님께서
<거내영은 수동 +능동 >의 영성이라고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모든것을 버림으로써 가장 소중한 것을 얻게 하시고
그 가장 소중한 하나가 모든 것이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하느님을 소유하여 하느님과 하나되어 살게 하시며
아버지와 하나되는데 방해되는 것들 마저
아버지 사랑의 불로 태워 없애주심을 경험하게 되니
@옴니아.보조.기조실
그저 아버지의 이끄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던져
최선을 다하여 이끌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나날로 커져감을 느낍니다.
바보같은 에고가 가끔 괴롭다고 지껄여 대어도
이제 그 지껄임과 몸부림 앞에 초연할 수 있음을 봅니다.
가르멜 산을 너무나 쉽게 오르게 해 주시니 감사드리고
어둔 밤이 힘들고 괴롭지만은 않도록 안배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를 소유하는데 이 정도 훈련의 고난을 감수할 마음이 없다면
그 어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는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거내영의 모든것과 모든 사제를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합일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인간의 자기 비움이며
인간의 그 대상을 향한 자기 변화입니다. >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처럼
고행과 교회의 조직적인 반대를 이겨내야만 한다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고행 없이 맹세 수준의 내맡김과 댓글만으로 천국을 확신하는
지도사제와 보조교사들을 보내주시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행동이 변하기란 어지간해서는 어렵습니다.
사회와 믿음을 바꾸기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진 16~7세기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한 고행과 희생이 기폭제가 되었다면
19세기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과
사랑만으로 단숨에 천국에로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 거내영 >은 그 보다 더 쉬이 천국 뿐만 아니라 성인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거룩한 내맡긴 영혼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아버지 세탁기 안에서 정화를 거쳐 성숙해 가듯이 교회의 역사 또한
아버지 섭리 안에서 점점 성숙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스스로 변하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하느님께 위탁하면 변할 결심, 마음 하나 내면 가능합니다.
제 뜻대로 살다가 아버지께 위탁할 결심 하나를 내었더니
천국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강해질수록 영적으로 배타적이고 우월한 생각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또한 내맡기기 전에는 겸손한 척, 안그런 척하며 살 수 있었지만
내맡긴 영혼은 척하며 거짓 평화 속에 더이상 살 수 없지요.
오히려 치열한 영적 전쟁터로 내몰리곤 합니다.
< 영혼의 고통은 영혼이 지닌 나약함과 불안전에서 오며
불완전한 요소들이 모두 타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
그러나 영적 전쟁터에서 죽을지언정
도망치거나 출전하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좌충우돌 사건과 사람들을 통하여 영혼의 때를
벗겨주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제 정화가 고통스럽기 보다는 담담함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빨리 물처럼 바람처럼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내맡기기 전 제가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기에
승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상대의 허물을 찾아 탓했습니다.
@빈손.보조
그러나 내맡김 후에는 오히려 나약함의 기준이 희미해지고 무뎌진 대신
사건 뒤에 계신 아버지의 작용하심을 더 굳게 믿습니다.
<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
가진 것이 많고 믿음이 약한 현대에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초기 교회로 돌아가려는
사막 은수자의 삶이며, 황폐했던 중세의 종교개혁입니다.
영적 중세에서 < 완전한 내맡김 >은 제가 낼 수 있는 한 마음이며,
아버지께서 이끌어 가시는 < 완전한 영성 >임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직접 이끌어 주시는 정화세탁기
< 무형의 성전 >을 통하여 당신 홀로 찬미영광 받으소서.
사제와 < 거내영 >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맡겨 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영상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공부에 이어
소화 데레사 성녀의 실천적 사랑의 기저가 된
두 선배인 아빌라의 대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요한 이야기와
16세기 영성의 흐름에 대해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면서
저의 무지의 안개에 가려져 있던 소화 데레사 성녀를 있게 한 시대적 배경이
안개가 걷히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중세 수도원의 타락상과
그를 개혁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선지자들의 활동들도
모두 아버지 섭리 안에 아버지의 세계를 창조해가고 있는 과정이겠지요.
가르멜 수도회를 중심으로
완화파인 예수회와 엄격파인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의 태동과 차이점,
대데레사 성녀와 성요한 사도의 활동과 영성도 이 강의를 통해
어렴풋이 파악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둔밤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여러번 듣고 또 들었는데, 아주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감각의 밤과 이성의 밤, 기억의 밤과 의지의 밤에 대한 설명과
자연적 합일과 초자연적 합일,
능동적인 정화와 수동적인 정화에 대한 내용에 집중하여
요약 정리하며 읽었습니다.
모든 설명의 결론은
<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합니다. >로 요약되었습니다.
지도 신부님의 가르침인
< 오직 사랑만이 답이다. >란 말씀과 같았습니다.
< 감각의 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뜨겁고 큰 사랑이
본능의 멍에를 벗고 감각의 밤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
< 이성의 밤에서 이성을 비워 믿음의 터를 닦아도
사랑으로 의지를 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느님과의 합일이
생명과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한 의지로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
<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연과 초자연의 지각을 용납하지 않고
그 바닥까지 부정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기억의 비움은 영혼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이것은 고요 속에 듦으로써
영혼이 성령에 의해 쓰임 받고 가르침을 받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
< 갖고 싶은 마음이 없이 즐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즐기지만,
갖고 싶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두루 즐길 수가 없습니다. >
<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묵상과 추리와 같은 감각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며,
자연적인 인간이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감각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영혼 안에 있는 마음과 욕망입니다. >
아멘!!!
아멘!!!
어둔밤에 이루어지는 정화과정을
이젠 조금 알 듯 합니다.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태워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는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오로지 아버지만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화 과정, 어둔 밤을
능동적으로 드리는
끊임없는 화살기도와 댓글 사랑 고백과 온전한 벗음과 비움으로
아버지의 가슴팍 속살로 직진합니다.
그 가슴팍 사랑이 이끄시는 대로 이끌리는 수동적 사랑,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사랑만을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삶으로 이끌어 주셔서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