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과 함께 떠난 옛길기행 - 통영별로 12 |
[오수-전주] 33km
겨울 걷기. 오수역-말치-임실-오원역-슬치-노구암-만마관-남관-신원-완주 상관 |
오늘따라 돋을볕이 드리우지 않아 창문을 여니 도둑눈이 소복하다. ‘비 온다고 우산 쓰는 짐승 사람밖에 없다.’라고 했듯이 여름엔 장대비도 마다치 않고 실컷 맞아봤으나 눈은 이제가 처음이다. 그러니 이 녀석이 기쁨일지 맵짤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앙상한 겨울에 하얀 옷을 갈아입힌 강산은 눈앞에서 담뿍하다.
‘꼬르륵.’ “아빠, 배고파.” “거지가 몇이기에 아침부터 요란 떨어?”
옛길여행은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풀숲도 헤쳐야 하기에 강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어제도 몇 번 허탕 치다 한참을 걸어 옛길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도 없어져 가지 못할 길을. 이러니 먹고 먹어도 배꼽시계는 쌩쌩 돌아가 뱃속 거지가 울부짖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깐 빨리빨리, 어제 백반 먹었으니 오늘은 딴 거 먹자!” “그럼 네가 골라.”
삼겹살, 설렁탕, 순댓국집이 늘어섰지만 맛난 음식을 찾는 행복에 밥집 고르기도 어려워 마침, 커피 마시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달려가 물어보기로 한다.
“이 동네는 뭐가 맛있어요?” “보신탕.” “예? 개고기요??” “왜, 먹을 줄 몰라? 얼마나 맛있는디.” “여긴 개로 유명한 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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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가 잘못들은 줄 알고 귓구멍을 후벼 팠다. 오수는 술에 취한 어떤 사람이 들에서 잠든 사이 불이 나자 데리고 갔던 개가 그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는 곳인데, 그런 데서 보신탕이라니!! 으으, 머리가 다 띵해 온다.
“뭐가 좋대?” “개고기래! 아빠도 먹어봤어?” “세 번.” “야만인.” “그래서 예전에 프랑스 어느 여배우도 우릴 야만인이라 했잖아.” “그것도 잘못됐어. 제 나라는 거위 간이 좋다고 억지로 먹여 간을 크게 한다며? 동물을 잔인하게 혹사하는 걔네하고 기르던 개를 먹는 거하곤 달라. 또 이건 문화 차이니 간섭해도 안 돼.” “그럼 우리는 먹어도 된다는 거야?” “으으, 앞으로 먹지 말자는 얘기지!”
난 개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강아지를 좋아하고, 가족이라 생각하기에 음식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소도 먹으면서 왜 안 되냐고 하는데 귀엽고 충성심 강한, 식구와 다름없는 개를 야만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먹느냔 말이다. 동네에 큰 잔치가 있어야만 고기 한 덩어리를 얻어먹던 시절엔 고기를 보충하던 동물이었다는데, 그땐 그때고 지금은 먹을 게 많아졌으니 이제 제발, 보신탕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침부터 단단히 골이 틀린 아이를 달래 엊저녁 밥집으로 손님 아닌 동냥치로 찾아가 푸지게 배 채우고는 곁에 맞붙은 의견비를 둘러본다.
‘거령 사람인 김개인은 기르는 개를 몹시 어여뻐했다. 어느 날 일찍 밖을 나서는데 개도 따라 나왔다. 그러다 개인이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멧불이나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개는 냇가로 가 몸을 적셔와 풀에 빙 둘러 뿌리길 되풀이해 불길은 막았으나 자기는 그만 지쳐 죽었다. 술이 깬 개인이 일어나 개가 한 짓을 알자 슬피 묻어 장사 지내고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이 지팡이가 잎을 돋아 다시금 살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을 오수獒樹라 했고 고려 악보에도 견분곡犬墳曲이 있다.’ 고려 때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을 최자崔滋가 보태 쓴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글로, 최충헌 아들인 진양공 최우崔瑀가 베푼 사랑은 갚을 줄 알아야 한다며 이를 세상에 퍼트렸다고 토를 달았다. 빗돌은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깎였기에 1955년에 다시 만들었다는데, 아침부터 개고기로 말씨름을 벌였듯이 볼거리보단 충성스런 개가 피운 나무라는 뜻을 새겨 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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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망루 (등록문화재 제188호)
한길로 나오니 붉은 벽돌로 둥글게 휘감은 소방망루가 곧게 솟아있다. 1940년 무렵에 세웠다는데, 2.4미터 지름에 키는 12미터이고 육모로 돌린 머리는 벽마다 창구멍을 내 밖을 살피도록 했다. 망루에서는 오수가 또 어찌 보일까 싶어 파출소에서 받은 열쇠로 닫힌 문을 젖히니 비둘기 똥이 동산을 이뤘다. 딛고 서니 돌돌 말린 출렁쇠 계단만으로도 멀미나는데, 놀란 비둘기마저 물찌똥을 내깔기며 매몰차게 쫓아낸다. (등록문화재 제188호)
“오수역은 들어보셨어요?” “오수역? 저깃지.” 건성으로 던진 대꾸가 귓전을 때린다. “예전에 말 빌려주던 곳이요!” “말? 그건 모르겠는디 역은 저짝에 있어.”
주억거림인지 도리질인지 모를 낯놀림도 그랬기에 설마한들 찾아갔더니 옛 기차역이다. 물음과 대꾸 사이에도 끊어진 동안이 감춰 있다.
조선 때 남원 땅이던 오수에 오수찰방역이 있었다. 딸린 역은 창활昌活, 동도東道, 응령應嶺, 인월引月, 잔수潺水, 지신知申, 양률良栗, 낙수洛水, 덕양德陽, 익신益申, 섬거蟾居이며 통영별로는 인월, 응령, 동도를 거쳤다. 역은 병조가 맡았으나 찰방역도 관아처럼 육방이 있고 종육품인 찰방은 현감과 같거나 군수보다 낮지만, 관아에 없는 말을 거느렸기에 곳에 따라 힘겨룸을 빗기도 했다. 역이 하던 일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하나가 기차역이다. 그랬기에 여태 헐지 않았다면 그럴싸하지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통학할 때 그 모습 그대로라 지난날을 피워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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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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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는 깨진 병이 뒹굴고 쓰레기로 얼크러졌으나 아무렇지 않게 표를 사 나간다. 역무원은 집게를 딸깍거리며 표에 구멍을 낸다. 밖으로 나와 기적만 들려오는 가직한 기차가 어디쯤일지 고개 빼다 급자기 어안이 벙벙해진다. 바닥을 아스팔트로 죄다 덮어 다시는 기차가 오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기차를 타던 곳엔 짚인지 억샌지 모를 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 네 채 있는데, 쓰임새가 무얼 팔고자 했음 직하다. 그러니까 이곳을 어찌 해보고자 손댔으나 그 끝이 귀살쩍은 꼴이 되었는데, 지난날 그대로에 기차 박물관을 보태 볼거리와 탈것을 장만해야 알맞춘 곳이라 안타깝다.
오수는 요즘 보기 어려운 일본 다락집이 여러 채 있고 함석 빈지문을 단 1960년 무렵에 지은 집도 군데군데 남았다. 그런가 하면 하늘을 찌르는 아파트도 둘씩이라 남사리 옛집에 이곳을 잇대면 오늘 집까지 에둘러 보여준다. 그 한가운데를 지키고선 망루만으로도 두드러진 오수다. 그러나 오랜 집이 많다면 더 낫게 나아가질 못하고 멈췄다는 뜻이기도 해 여느 고장보다 기운은 자못 가라앉았다. 빛바랜 칙칙한 아파트 벽도 그렇거니와 거리 낯빛도 왠지 모를 시름이 서렸다. 한때 이 언저리를 아우르던 시장이 오그라지며 벌잇줄이 마르면서부터일 테다. 그렇다고 마냥 팔짱 끼고 앉았을 텐가. 오수역도 아스팔트를 걷어내 철길을 다시 깔자. 할 일 마친 기차를 모셔와 방으로 꾸미고 먹게도 한다. 또한, 관아가 없던 오수는 찰방역이 가장 큰 관청이었으니 마구간을 지은 역을 되살려 곁들이면 더욱 좋다. 그래서 말과 기차가 한 고리임을 보여주며 말과 마차를 태워준다. 온 나라에 찰방역을 되살린 곳도 여태 없기에 그 바탕만으로 와보고 싶은 고장이 되지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마음자리 깔아 본 씩잖은 생각이지만, 겨레라면 누구고 어디건 잘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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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의 어제와 오늘
아직도 골골 샅샅이 다녀보지 못해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오수는 뒷바라지를 다하고 뒤란으로 내앉은 가냘프고 여린 어머니 같다. 땅안개 그득한 찻길에 자동차는 없으나 살얼음판에다 없는 갓길로 총총걸음인데, 그 어머니 등 뒤에서 오도카니 기대앉아 배웅한다. 찬찬 감아 딛고 가라잉.
둑길을 오가다 널따란 찻길로 얼마 걷노라니 길가에 김개인과 개를 만들어 세운 정자에서 처음 쉼을 하며 다음 갈피를 헤아린다. 다음이 고개인데, 지도에 금도 흐릿하여 넘을 수나 있는지 조바심이 잔뜩 깔렸다. 더군다나 대동여지도는 마치馬峙이나 해동지도는 말치末峙, 다른 데는 두치斗峙로 ‘말’이라는 소리 따라 한자가 다르고, 붙박이는 말치라 하나 바르게 짚어주질 못해 더욱 성긴 고개다. 물어볼 데를 두리번거리니 때맞춰 학원 차가 개으름뱅이 아이를 기다리느라 코앞에서 털털거린다. 방학인데도 맘껏 뛰놀지 못하는 애들에게 어떤 앞날을 주려는지 모르겠다. 헐레벌떡 뛰어온 코흘리개 오누이를 아름으로 안아 올리니 차 부리는 아줌마도 갚음으로 이모저모 알려준다. 고개는 바퀴도 굴러 넘는다기에 한시름 놓으면서도 때 올라 재미없을까 걱정도 든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길 욕심만 철철 낸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했다. 넓은 길은 사람에겐 몹쓸 길이나 자동차는 신바람 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찻길은 자동차가 네 활갯짓으로 우쭐거리라 하고 좁은 길로 접어드니, 까만 거죽마저 하얗게 덮인 눈이 걸음마다 뽀득뽀득 장단치고 멧기슭에 솜처럼 안긴 마을은 눈구름과 숨바꼭질하며 맵시를 뽐낸다. 말치 가는 밖목도 요렇듯 사람답게 펼쳤다.
얕은 기울기지만 길이 좋다고 마구 휘둘린 다리가 힘들다며 적잖이 투정부릴 즈음에 가파른 고갯길이 벌떡 일떠서는데, 흙이다.
“윤희야, 포장길 반대말이 뭘까?” “그야 비포장 길이죠!” “에이, 언니야 그건 흙길이지.” “응? 그러네! 넌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아빠가 단골로 물어보는 말이거든.”
모든 길은 흙이 임자였으나 아스팔트에 빼앗겼기에 흙길을 보면 비포장이라 짜증낸다. 하늘이 준 우리 가슴도 그만큼 두꺼운 땟덩이에 눌려 산다. 쉼도 물리쳐 한달음에 들어선 바보 흙길, 눈구멍을 밟으면 흙이 시샘하고 흙을 디디면 숫눈이 눈 흘긴다. 옛길마다 고갯길이 있다. 동으로는 대관령과 죽령, 문경새재가, 서쪽은 장성갈재가 으뜸이고 남도 땅은 한퇴와 이 고개가 어금버금하다. 그런 고개, 추임새 없이 올라서야 되겠느냐며 나무가 말 붙인다.
“여보게, 시 한 수 읊을 만하지 않소.” “시는 못한다잖소, 아쉽다면 사살 하나 늘어볼 테니 들어보겠소?”
청장관 이덕무는 선비 마음과 몸가짐을 어찌 갖춰야 하는지 힘빼물어 말한다. 밥 먹을 때와 말할 때, 절할 때는 어쩌고 옷 입기는 어때야 한다. 손님과 방을 같이 쓸 때 아무리 추워도 밖에 나가 오줌 눠야지 요강을 쓰면 안 된다고 미주알고주알 썼는데, 시시콜콜하다 못해 잔소리만 빼곡하니 선비 노릇도 쉽지 않았겠다. 세속에서는 이마가 벗어진 사람이 일찍 출세한다고 여겨 상투 틀고 망건 맬 때 잔뜩 죄어 빨리 벗겨지게 하거나 굳이 족집게로 머리털을 뽑기까지 했다. 또 늘그막엔 대머리 되어 갓 쓰기 어려울까 근심하여 덧댈 머리카락을 미리 깎아두었다고도 한다. 청장관은 속 좁은 어리석은 짓이자 부모가 준 몸을 받들 줄 모른다고 꾸짖으며, 그때 선비가 어땠는지도 살짝 엿보게 한다. 구슬 같이 꿰인 글은 때가 바뀐 이즘도 비길 데 없다. 길에서는 이래 걸으라 했다.
걸어 큰길을 갈 때 반드시 가장자리로 가라. 복판으로 걷다가 수레와 말을 이리저리 피하지 말고, 빨리 걷지 말고 너무 천천히 걷지도 말며, 팔뚝을 흔들지도 말고, 소매를 드리우지도 말고, 등을 굽히지도 말고, 가슴을 툭 튀어나오게도 말고,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무엇을 가리키지도 말고, 좌우로 흘끗흘끗 보지도 말고, 느리게 신을 끌어 뒤축을 흔들지도 말고, 발을 어지럽게 오르내리지 말고, 머리를 위아래로 까불지 말며, 해가 얼마 남았는가를 보아 걸음걸이를 정하라. 길에 떨어진 불을 보면 기어이 끄고 엎어진 신짝은 뒤집어 놓으며 종잇조각은 줍고 흘린 쌀을 보거든 반드시 쓸라. 아침에는 왼쪽으로 다니고 저녁나절에는 오른쪽으로 다녀 그림자를 밟지 마라. 벼슬아치 갈도를 듣거든 빨리 말에서 내리고 걸을 때는 으슥한 데로 몸을 숨기라. 부인이 탄 가마는 쳐다보지 마라. 어떤 이는 고운 옷 입은 부인을 만나면 곁눈질로 흘끔거리는데, 지저분한 버릇이니 마땅히 멀게 돌아 내 몸을 삼가 가져야 한다.
글 가운데 갈도가 눈길을 끈다. 갈도喝道는 높은 벼슬아치가 지날 때 앞잡이가 얼른얼른 길을 트라는 외침이다. 꾸물거리다 망신당하지 말란 말인데, 선비도 그랬다면 여느 하찮은 상놈은 잡동사니로 채이고 뒹굴었을 테다. 물러설 곳 없는 외길에서 이런 벼슬아치와 맞닥뜨렸다간 더욱 딱해져, 영남대로 황산잔도 같은 데서는 강으로 떼밀려 죽은 사람도 숱했다고 한다.
솔가지에 상고대처럼 쌓이던 눈이 제풀로 떨어지느라 덩싯거린 떨림이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밀려온다. 춥지 않아 날씨로 땅거죽은 축축한데, 발목쟁이엔 숭숭 구멍 난 여름 신짝이 감겼다. 집 떠나며 변변찮은 싸구려 신발이 켕겨 여름 신도 챙겼는데, 아닌 게 아니라 하루를 못 버티고 바꿔 신어야 했다. 추위야 두꺼운 양말에 기댔으나 젖은 데선 재주 없다. 몸이 천 냥에 눈이 구백 냥이면 걷는 여행은 발이 백 냥에 신발이 구백 냥이다. 가장 대수로운 신발을 얕본 값을 톡톡히 받는데, 감발한 짚신도 다르지 않았을 테니 까다로운 선비 흉내는 벅차도 옛사람 시늉은 절로다. 신발은 내 탓이나 궁둥이가 젖을까 걸터앉지 못한다면 이건 누굴 탓하나?
이 고갯길은 임실에서 걷기 좋은 길을 이루고자 흙을 그대로 두었단다. 그러면서 쉴 곳도 갖추지 않았다면 계면쩍으니 구슬땀을 더 쏟아야겠다. 걸상이야 말할 나위 없고 정자를 짓고 갖가지 장승을 세우자. 곳곳에다 장돌뱅이, 방물장수와 지게 진 옛사람을 그럴싸하게 그려내 숨을 불어 넣는다. 이몽룡이 남원 얘기만은 아니니 어사또로 내려오는 모습도 괜찮고 변학도면 또 어떠리. 그 틈으로 엄청난 짐을 맨가슴으로 홀로 뒤짊어진 이순신이 둘째 아들 열을 데리고 뚜벅뚜벅 내려간다. 이만으로 세차고 거센 길이지 않나. 길 박물관이다. 첫 마을에서는 쑥불 피운 황토방에 잠재우며 시골살이로 찌든 때를 씻긴 몸을 여기에 쏟아낸다. 거듭난 옛길은 그들을 얼싸안고 덩더꿍 한판 춤을 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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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말치
묏등이 드러나자 이름 없다 이름 얻은 마른 풀포기와 돌멩이가 죄다 몰려와 아쉽다고 몸짓 떤다. 그래, 오늘은 우리가 외로움만 나누다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땐 너희도 바빠질 거야 그때까지 몸성히 잘 있게.
저 너머는 또 어떨까? 이 땅이 늘 그랬듯이 여기 못지않은 동무가 있겠지? 그렇게 잔뜩 바람 들어 마루에 섰는데 이건 또 뭐람, 벌판이나 다름없는 데로 엄벙뗑 처지른 내리막뿐이다. 말벗이라곤 손수 만들어 쓰다 고개턱에 버린 작은 짐자동차 하나인데, 이 녹슨 짐차가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잖아 그러니 너무 허전해 하지 말라고. 미립이 트인 줄 알았던 이 강산, 메주 밟듯 더 걸어보란다.
그나저나 좀 앉아야겠으나 앉지 못하는 이런 때도 딱한데, 마침맞게 홑집이 눈에 뜨여 달뜬 몸을 냉큼 떠맡기니 빈집이다. 부엌은 연기로 그을린 벽에 그릇 없는 살강이 우중충하나 바라지로 들이치는 빛살에 여물 쑤는 할머니 뒷모습은 또렷하다. 그 옆 외양간에서 꺼칠한 혀로 입맛 다시며 보채는 누렁이와 할아버지가 뚝딱거렸을 어리에서 강샘하는 꼬꼬닭. 한 칸짜리 방벽에는 꼬맹이 글씨가 삐뚤빼뚤 가득한데, 농사일을 빼곡히 적은 달력이 여섯 해를 넘기니 이젠 초등학생쯤 됐겠다. 전기계량기도 살짝 돌다 멈춰 호롱불에서 어린 손자를 돌보다 전기 맛을 본지 얼마였을 늙은 부부. 단칸살이나마 오순도순 꾸려가던 보금자리를 털고 어딜 갔을까, 가신 곳은 좋은 나라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마룻바닥에다 눕히니 가시지 않은 몸내가 물씬거려 펼쳐 놓은 찐 달걀이 더 오달져 한다. 겨우 신을 벗으니 퉁퉁하여 구겨지다 못해 산줄기를 빼닮은 살 거죽에 새 양말을 덮어주니 포근해하나 그러면 뭘 해, 나서다 허방 디뎌 고작 몇 걸음이다.
도랑물도 느릿하게 흘려보내던 내리막이 잠깐 멈칫하는 곳이 평다리 마을, 여기서 길이 갈려 옛길은 마을로 꺾이고 임실현을 가려면 찻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실개울을 따라가던 옛길은 임실기차역 앞에서 국도를 만나는데, 얼마라도 자동차에 부대끼니 널찍한 걸음을 놓겠다면 평다리에서 임실로 길을 잡는다. 우리도 기차역까지 옛길만 살펴보고 이도리 미륵을 보려 걸음을 튼다.
“하하, 호호.”
수정마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낸 미륵을 보자마자 모두 웃는다. 어른 두 키만 한 몸집으로 엉거주춤 굽어선 돌미륵, 몸짓만도 우스꽝스러운데 얼굴에 드리운 낯꼴을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소냐. 부드럽고 점잖으면서도 굳센 돌부처는 숱하게 보았으나 이런 낯은 처음이라 볼수록 실실거린다. 젖먹이가 옹알이하는 해맑음이다. 꾸중 받을까 아양 떠는 개구쟁이 얼굴짝이기도 하고 두발로 꼬리 치며 혀 빼물고 달려드는 강아지 같다면 버릇없다 하겠다. 이곳은 운수사라는 절집. 산기운이 세 불이 자주 나자 액막이로 나무 심어 산을 가리고 절을 세웠다는데, 요즘엔 숲도 절도 없이 미륵만 홀로 남아 까닭모를 웃음을 뿌리고 있다. 이렇듯 웃음 주는 미륵이면 부부나 동무와 다퉜거든 만나보면 좋겠다. 지친 사람, 기운 꺾인 이가 찾아와 얼굴 맞대면 찌푸린 이맛살이 펴지고 닫힌 마음도 스르르 열리지 않을까. 백제 때로 알려진 이 미륵이 왜 옛 지도마다 빠짐없이 그렸는지도 이로써 알만하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웃다 보니 배도 고파 때 지난 밥집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며 이번엔 뭐가 아니라 어디서 먹을까를 고른다. 이순신이 현감 홍순각에게 시중 받으며 먹고 잔 곳이 객사일까 원님 살림채였을까. 기꺼이 찾아온 임실이기에 살걸음에 달려가 마주하려 하나 어디라 짚어주는 이 없다. 어림으로 펼쳐 바라본 구름으로 헛배 불리고 입가심한 시냇물 따라 대충 떠나야 한다. 이순신이 예우를 다한 선비라고 추어올린 홍순각은 정작 남원이 짓밟히자 고을을 팽개치고 청주 집으로 꽁무니 뺐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며 죽음으로 싸우러 가는 이와 사냇값도 못하고 달아난 두 사람처럼 얄궂은 임실이다.
군청을 거쳐 향교 옆 고갯길로 임실을 벗어나면 기차역에서 온 국도를 잠깐 타다 용산마을로 꺾어 용은치龍隱峙를 넘는다. 고개는 생각과 달리 언덕이나 다름없는 농삿길이다. 이런 야틈한 언덕배기에 이름까지 붙였을까만, 등짐 진 방물장수는 십리 발품부터 팔아야 하고 수레라면 막걸리 한 동이는 풀어야 괴여들 사람과 밀고 당기며 용 썼으리라. 옛사람이 되어야 오늘을 보이고 그러므로 써 내일을 알리는 옛길이다.
용이 숨었다는 뜻답게 제법 기다란 등마루를 지나면 그 용이 뛰놀았을 드넓은 벌판인데, 함께 뒤엉켜 놀겠다는 옛길마저 논배미가 질러먹어 자취가 없다. 한겨울 논고랑이라 걷지를 순 있지만 뻗친 개울물이 헤살 부리겠고 에돌자니 곱빼기다. 찻길은 싫고 왼쪽인 예원 대학교로는 걸음이 먹혀 망설이다 길도 줄이고 재미 얻고자 군부대로 늘어진 기찻길을 고른다. 그러나 모든 일에 거저 없다고 온몸이 핑핑 내둘리는 높은 다리를 건넌다. (들에 옛길은 있었다.)
관촌 들목, 찻길에 기와를 얹은 우람한 관문에 ‘사선대’라고 쓰였다. 바로 옆 산비탈로 올라간 꼭대기가 사선대四仙臺다.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 때, 마이산과 운주산에 살던 산신 넷이 이곳에 모였다가 경치에 홀려 바위를 거닐고 멱도 감으며 놀았다. 그러자 까마귀가 날아오고 선녀도 내려와 함께 어울리다 온다간다 없이 사라졌다. 그 뒤 이들이 해마다 왔다 하여 사선대고 까마귀가 놀아 오원강이 되었다. 사선대는 1934년에 토박이 김승희 씨가 논 사백 석을 팔아 정자를 살포시 올려놓아 보는 즐거움을 보탠다. 조선이 아닌 때에 조선 얽이로 세워진 마지막 정자인지 모를 운서정雲棲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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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대 위 운서정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
| 사선대와 운서정, 깎아지른 벼랑과 물가에 있는 영벽정을 아우르면 마치 대동강 을밀대 같다 하였는데, 갑작스레 삼팔선이 그어져 평양을 가지 못하자 여기를 을밀대 삼아 ‘고구려의 혼’이라는 영화를 어렵지 않게 찍었다고 한다. 그만한 곳인지라 이웃 고을 장작은 으레 여기로 올 땔감일 만치 구경꾼으로 북적였다는데, 그 등쌀에 전주나 임실보다 물가가 비싸져 토박이는 못살겠다고 볼멘소리를 달고 살았단다. 일부러 찾아왔는데도 어찌 주머니 터는 재주가 그토록 서툴렀기에 달갑잖은 손님이 되었을까 싶을 때다. 그 뒤 사선대국민관광지가 되면서 더 많이 그러모으겠다고 여기저기 손댄 이적이건만, 며칠 몸살 앓다 일어난 고림보처럼 어딘지 모르게 핼쑥하다. 톺아보니 낭떠러지에 부딪히며 감돌았을 물줄기를 돌리고 고쳐 닦아 못으로 뭉개버렸다. 간직할 신선 놀이터를 통째로 앗았으니 가장 볼만한 밑밥도 덩달아 물 건넜다. 그런데다 찢어발기는 노래로 귀 긁는 저 놀이동산은 또 뭐람. 들어선 자리도 눈엣가시다.
추운 땅에 시원한 풀빛이 도드라진 축구장에 핏발 선 눈망울이 쏠린다. 잔디밭은 어린 학생들이 서로 머리 디밀어 공을 튀기다가 다릿짓으로 주고 몰며 뜀박질해댄 땀방울로 질펀하다. 우렁찬 몸짓을 잠자코 내려 보다 문득 생각 하나 떠올린다. 잔디 깔린 마당을 더 장만해 열두 달 내내 공차는 소리가 떠나지 않는다면, 저 애송이들이 꿈을 펼 그날로 거침없이 내달리게끔 탄탄한 멍석을 깔아주면 어떨까. 어설픈 관광지보다 축구 마당이나 체육 마을도 좋을 곳이니, 새롭게 얻은 기운으로 더 높이 날아야겠다. 사선대, 산신이 놀았을 만치 빼어나지 않고 평양을 가보지 못해 을밀대와 빗대보진 못하나 올라와 볼만은 하다.
내리막 가운데쯤에 낭떠러지로 내려뜨린 벼룻길로 내려가 쇠다리로 강을 건넌다. 물가를 따르면 운서정과 비슷한 때에 지은 영벽정은 끄트머리에 있다. 돌아서서 이를 아울러 다시금 바라보니, 띄운 배에서 풍기는 가야금 가락은 아슴푸레하나 은어 잡는 고깃배는 나타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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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대 아래 못, 본디 물이 흐르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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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돌아 나온 관문, 토끼 굴로 찻길을 지나서 옛 다리를 건넌다. 옛 지도는 이 다리가 오원교인데, 콘크리트로 다시 지어 이름도 그대론지 여쭤보나 세월을 못 이겨 기우뚱 쓰러진 머릿돌은 아무런 대꾸가 없다. 여기저기 둘러보노라니 자동차 수리소에서 어떤 사람이 시커먼 기름 장갑을 털며 다가온다.
“다리 답사 오셨나 보죠?” 딸애하고 다닐 때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윤희가 끼면서 학교에서 나왔다고 여겼는지 벌써 세 번째다. 그리고는 묻지 않은 얘기를 한 움큼 꺼낸다. “저 철교요, 처음엔 저거보다 낮았거든요.” 철교, 쇠다리는 흔히 기차가 건너는 다리를 뜻했으나 요새는 죄다 콘크리트라 철교란 낱말도 사전에서 지워질 날이 머지 않다. “그 높이면 큰물에 잠긴다고 했는데 통 안 듣더라고요.” “잠겨요? 그래서요.” “아, 넘쳐 버렸죠.” “잉?” “자재도 강턱에 두지 말라 했건만 깡그리 떠내려갔어요.” “이런.” “그래서 짓다 말고 몽땅 헐어버리고 다시 놓은 게 저거예요.”
2006년 일이란다. 토박이가 물이 어디까지 차는지 알려주었는데도 네깟 게 뭘 아냐고 깔봤다가 된통 얻어터졌단다. 돌다리도 두들기라는 옛말이 새삼스럽지만, 다리 놓는 솜씨만 으스대지 말고 어디서 공사판을 벌여도 곱씹어볼 본보기다.
“저 다리는 아직도 화물트럭이 다녀도 끄떡없어요.” “겉보기보다 정말 튼튼하네요.” “저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많아요.” 물살에 패인 다릿발 아랫동아리도 바닥을 나와 속살을 드러냈는데, 콘크리트를 채우느라 울을 친 소나무 말뚝도 고스러졌을 뿐 멀쩡하다. “물속에서 썩지 않고 저리 버텼다니…….” “그래서 이 다리를 보려고 가끔 찾아와요.” “잘 건사할 다리네요.” “그런데 낌새가 머잖아 헐릴 거 같아요.” “그러면 안 되죠. 제가 무너지겠다고 하기까지는 꼭 지켜내야 하는데요.” “그래야죠.”
나이 먹었다고 모다 고려장인가. 젊다 못해 어린 성수대교도 와르르 무너뜨리면서 할아버지 나이되도록 탈 없는 다리를 왜 헐려는지. 부드러우나 매서운 옛 손끝과 엄벙덤벙하는 요새와 빗대볼 잣대로도 거뜬한데. 여남은 꼬맹이를 태운 꽃수레가 다리를 건너온다. 놀이동산을 가려나 보다. 그런데 마차도 아니요, 달구지도 아닌 꼬락서니를 트랙터가 끌며 붕붕거린다. 오늘이 어떤지 보여주려는 듯해 괜스레 언짢은데,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오원천은 입 다물고 제 땅만 적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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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오원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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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사근 베풀어준 토박이가 아니었다면 속내 놓쳤을 다리를 건너 찻길마저 건너려니 또다시 손바닥 내저으며 달려온다. 건널목이 없는데도 마구 지르다가 자동차에 넋을 뺏긴 사람이 여럿이라는데, 꼭 그렇게 생겨먹었다. 제대로는 네거리이나 길을 막아 다리 밑으로 다니게 했다. 영문 모르고 온 자동차는 두리번거리다 제 길을 찾아가나 사람은 열에 아홉이 그냥 건너지른단다. 딱히 이래야겠나. 바퀴가 잠깐 멈춰 가는 게 그리 힘드나. 큰물이 질 땐 또 어쩌라고. 모두 걸음을 하찮게 여겨서이지만 관촌을 벗어나며 겪게 될 일에 대면 새발에 피다.
임실은 남원과 전주 한가운데고 그 사이에 오수와 관촌이 징검다리처럼 들어앉았다. 그러다 보니 고을이고 마을도 고만고만한데도 이곳에 있던 오원역에서 아침곁두리를 먹는 이순신을 찾기는 수월치 않다. 전주에서 여기까지 찻길로는 22킬로미터이나, 구불구불한 옛길을 헤아리면 요즘보다 더 멀었을 길이다. 여섯 시에 떠났다면 네 시간 남짓 걸려 닿았을 이순신, 몸도 고됐겠지만 배도 매우 고팠겠다. 삼례도로 접어든 오원역烏原驛은 여느 곳처럼 있던 자리를 알지 못해 그저 기찻길 아래쪽 어디겠다는 어림으로 관촌을 빠져나오는데, 앞서가던 딸애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악마가 나타났다!
“아빠, 이거 어떻게 건너라는 거야?”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는데, 발을 내딛으려니 막상 발밑에는 건널목이 없다. 건널목은 길가 끝에 있게 마련이지만 여기는 건너에서 한가운데 있는 삼각형으로 된 노란 선까지만 놓였고 우리 쪽에는 아무런 금이 없다.
“저 노란 건 뭐야?” “안전지대라고, 차고 사람이고 들어가지 말라는 곳이지.” “그런데 건널목이 어째 저기로 가 있어? 그나마 저기까진 또 어떻게 가라고?” “…….” 건너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황당하지만, 안전지대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웃음만 실실 나온다. 가만, 여기 오다 사고 나면? “아빠 여기 오다 사고 나면 어떡해?” “할 수 없지 뭐.” “할 수 없다니? 누가 책임지는 거야?” “건널목이 아닌데 건넜으니 사람이지.” “말도 안 돼! 아무 표시도 없잖아.” “건널목이 아니니까.” “그러면 백날 백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차 없을 때 대충 건너라는 뜻이겠지.” “그러다 사고 나면!” “사람 책임이라고 했잖아.” “야!! 뭐 이래. 이렇게 생긴 건널목은 태어나 처음 본다.” “인석아 네가 얼마나 살았다고.” “처음이니까 처음이란 거지!” “아빠도 첨이긴 하다.”
건널목은 안전하게 건너라는 곳인데 반은 무단횡단을 하란다. 그러다 사고 나면 우리더러 책임지라 하고.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이해 못하겠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될 일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번엔 신호등이 또 문제다. 건너편에서 볼 신호등이 우리 쪽에 없어 찾아봤더니 엉뚱한데 걸렸다. 어두운 밤중에 그 신호를 따라가면 찻길 한가운데로 가게 된다. 그러다 사고 나면 또 사람책임이라고?? “도대체 누가 이런 건널목을 만들었대? 이게 악마지 뭐야?”
처음 통영에서 건널목이 없는 갈림길인데도 막 건너며 아빠가 말했다. 교통법규를 지키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나도 여기까지 오면서 착한 길이 무엇이고 나쁜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게 나쁜 길, 사람 잡아먹는 대표적인 악마의 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책에나 나오는 악마가 탈을 쓰고 인간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걸 이곳 군수도 알고 있을까? 가만히 보고 있던 아빠도 심한 욕을 하였다. 혼잣말이었지만 똑똑히 들었다. 산청에서 시각장애인 점자보도를 중앙선처럼 깐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만 그때도 욕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빠도 흉악한 악마를 보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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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 곳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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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터 국도가 외길이라 엔간히 시달리려니 했는데 그런 길은 얼마였고 나머지는 휘파람 부는 호강으로 왔다. 그러나 여기부터 더 옥죄이는 골짜기라 덤덤하게 지도를 살피다 전라선을 찾아낸다. 이 기찻길은 여기저기 굴길로 곧게 펴 옮겨갔으나 지도는 아직 그대론 데, 남원에서 골탕먹이더니 여기서는 걸음을 부풀게 한다. 찻길에서 자동차를 등지면 몸을 맡기는 꼴이니 맞서 걸어야만 대드는 자동차를 살필 수 있다. 이 건널목도 자동차와 마주하느라고, 아예 자동차와 다투지 않을 기찻길로 가려다 오지게 겪는다.
‘농기계 전용 도로’로 널찍하니 숨을 이어가는 기찻길, 이대로 전주까지 가자는 바람으로 들뜬 보리밭 밟듯이 지르밟는 슬치 마루터기가 또 굴길이다. 한 재미로 달려가나 자물쇠 굳게 물린 광이 들어차 아기자기하게 넘겨주진 않는다. 올라선 마루는 또 어찌나 펑퍼짐한지 마을이 통째로 앉았다. 슬치는 사자산과 백운산 사이인 호남정맥 줄기라 여느 등성마루 같겠다던 생각도 희멀개진다.
백두대간 장안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나와 장수 주줄산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갈래 쳐 북쪽으로 금남정맥이, 남으로는 이곳으로 흘러온 다음 전라도 땅을 두루 돌아 광양 백운산에 닿는다. 금남호남이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장안산부터 호남정맥으로 치기도 하는데, 그러면 얼추 470킬로미터 되는 산줄기다. 그런데 두 정맥이 갈라지는 산인 주줄산珠崒山은 언제부터인지 주화산珠華山이 되었다. 최남선이 쓴 산경표를 보면, 처음엔 주화산이라 하고 이어진 쪽엔 주줄산이라 적으며 ‘추줄崷崒’, ‘주이珠耳’라고도 한다는 토를 달았다. 또 이를 1913년에 조선광문회에서 펴낸 책엔 추줄은 ‘주추珠崷’로 고쳤다. 추줄과 주추산은 고산 땅에 있던 같은 산이며 여러 지도에도 나오나, 이를 뺀 나머지 지도나 문서는 오로지 주줄산인데 뜬금없이 주화산이 튀어나왔나.
주화산이 근대 지도에 처음 나오기는 장지연이 1907년에 쓴 ‘대한신지지’에 딸린 지도다. 뒤이어 산줄기를 갈무리한 산경표가 그대로 따랐고, 뒷사람도 따져보지 않고 불러 오늘이 되었다. 활자가 아닌 붓으로 쓴 ‘崒줄’을 얼핏 보면 ‘華화’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서울대학교 규장각 누리집도 ‘줄’을 ‘화’로 푼 곳이 더 많다. 그때도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 풀었다는 어림이다. 어언 백 년이 된 지도와 산경표를 모른 체할 순 없지만 무턱대고 쫒아도 옳지 않다. 이름이 바뀐 까닭이 밝혀지기까지 주화산은 없으니 주줄산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산길과 들길을 걷는 사람은 무릇 달라도 우리 땅을 사랑으로 밟는 걸음은 다를 바 없다. 산사람 몫이다.
고개 이름도 못지않게 헷갈린다. 슬치瑟峙 고개 마루터기 마을이 소치掃峙다. 고산자도 슬치가 아닌 소치라 했다. 또 언저리에 실치도 있기에 모두 슬치에서 갈린 말이겠지 싶었으나 아니라는데, 이번엔 노구암이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한다. 노구암爐口巖, 노구바위라니 뜯어보나 마나 바위다. 다만, 바윗덩어리냐 벼랑에 붙은 바위벽이냐가 궁금할 뿐이었는데, 이도 저도 아닌 마을 이름이란다.
“노구바위가 어디 있죠?” “저짝 건넛마을.” “마을 어디쯤요?” “저 마을이 노구바우여.” “바위 아니었어요?” “마을 이름이여.”
묻고 또 묻는 게 언짢은지 성까지 낸다. 여든 줄인 토박이가 그렇다니 믿어야 하는 뒷골은 띵하다. 고개를 내려오다 보면 맞은쪽 멧기슭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마을이 늙으신네가 산다는 산정이고, 노구바위는 찻길 건너 고작 다섯 채뿐인 마을에 외롭게 붙어 있다.
노구바위 바로 앞 골짜기가 만마관萬馬關이다. 찻길에 기찻길을 더해도 20미터가 안 되고, 물줄기도 땅속으로 흐르게 할만치 좁다. 가파르게 떨어진 벼랑 위에 활 쏠 군사와 돌덩이를 올려두고 지키면 쉽사리 지나지 못할 긴한목이기에 가히 관문이라 할 만하다. 옛 지도마다 성곽이 있어 휘둘러보나 아무런 자국이 없다. 성곽은 없었지만 관문이란 뜻으로 그리 그린 듯도 한데, 정약용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동관을 지나다 한숨 쉰다. 산이 생긴 대로 지켜 싸워도 훌륭한데 왜 관문을 따로 지었느냐고. 이곳도 관문을 따로 둘만한 곳은 아니나 1813년에 새로 쌓았다는 기록은 있다. 정약용은 임진왜란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라듯이 혼쭐나 지은 관문이라 더욱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조동관이 이적도 한숨짓게 하니, 되살린 다락이 예전과 달리 너무 크게 올려버려 제 모습대로 살리질 못했다. 그런가하면 제1관문 옆에 죽은 전나무를 설명하면서 옛 사진을 큼직하게 걸었는데, 사진을 뒤집어 놓아 나무 있던 자리를 바꿔버렸다. 작은 거 하나 탐탁히 다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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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마관 앞 옛 기찻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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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바뀐 만마관엔 자동차만 몰아친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떼가 저럴까. 지키던 군사도 놀라 내뺄 저 검질긴 자동차와 엇서려니 끔찍하다만, 아는 만큼 보여주듯이 길도 애쓰면 안겨준다. 기찻길이 있다. 내려온 고개 끄트머리에 알맞추 앉은 찐빵집도 발길 당겨 쉬어가란다. 들어가니 벽마다 빼곡히 글이 걸렸다. 이 집 임자가 쓴 시라는데, 잘 썼는지는 몰라도 찐빵 맛을 돋우는 데는 그만이다.
다음 마을인 남관초등학교 앞 네거리 귀퉁이에 남관진창건비南關鎭刱建碑가있다. ‘관찰사 두 사람이 잇따라 남고산에 성을 쌓고 진장鎭將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으며 또 남관에도 성을 쌓았으나 아직 덜 갖췄다. 마저 끝내려 하나 돈이 없어 그렇지 못하고 예순한 해가 흘렀다. 그 뒤 낙재 대야 이공이 네 해 동안 관찰사로 와 임금과 대원군에게 아뢰어, 계유(1873년) 4월에 남관성을 먼저 손 보고, 남고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은 샘도 흐르기에 진을 두기도 알맞아 관아와 광, 장대를 지었다. 남으로는 화포청이 있고 서쪽으로는 무릇 백여 칸이 덮였는데, 그 뛰어난 모습이 자못 하늘이 베푼 험준한 요새라 가히 촉도蜀道(촉나라에 이르던 벼랑길)와 겨룰 만하다.’ 남관진은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처음 삽을 떠 박윤수朴崙壽가 이었고 이호준李鎬俊이 드디어 틀지게 끝냈다. 이호준은 일곱 달 동안 요란하지도 번거롭지도 않게 일을 마쳤으며, 관찰사를 물러나서도 참 정치를 펼쳤노라 한껏 추어올리고는 1873년 9월에 빗돌을 세운 구실아치 아홉 사람을 새긴 빗돌이다. 남관성은 만마관을 말하니 때가 때였던 그 무렵엔 다시금 성을 두었나 보다. 이호준도 남쪽 오랑캐를 막으려고 마음 다했으나 그예 부질없어진 빗돌, 물과 별이 바뀌어 남관진도 산바람만 휘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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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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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옛 기찻길로 들어서니 듬성듬성 뭉개져 끊겼다 말다한다. 어느 곳은 버섯을 키우고 어느 데는 뭉텅 들어냈다. 걷거나 자전거 길이어야 하고 어느 동안은 문경처럼 철길자전거도 괜찮으련만, 기차가 옮겨 간지 이마적인데 어렵사리 태어난 길을 너무 쉽게 죽인다. 전주부터 남원은 1931년에 깔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니 이만으로도 너끈히 간직할 만하다. 그나마 잔재미를 주던 기찻길도 죽림리에서 맞은쪽으로 건너 사라지며 그만 끝내란다.
죽림온천이다. 남관진창건비도 넉넉한 샘이 흐른다고 하였으니 그리 놀랄 바 없으며, 물 고장답게 여기부터는 전주천이 뒤이어 걸음을 기다린다. 기꺼이 물낯에 신발 띄워 두둥실 흘러 보내 원집인 신원新院이 있던 새원에 닿으니 발목을 잡는 어둠. 암만 걷기 좋은 길도 떨어지는 해는 비끄러매지 못한다.
자유촌 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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