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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부 한국시 한바구니
그릇 · 1(외 2수)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인간의 길
-그릇 16
잘못 배달된 봉투 한 장,
문간에
던져져 있다.
누가 보낸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터부,
하나의 주문,
밝혀선 안 되는 신의 언질.
길 잃은 편지는 절망하므로
하나의 사물이 된다.
갚잎도 길을 잃었을까
스산히 지는 낙엽,
꽃잎도 길을 잃었을까
분분히 지는 낙화.
출근 시간
잘못 배달된 봉투 하나 주워들고
나는 문을 나선다.
행방이 불확신한 인간의
길.
강 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 1942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상시문학 수상. <현대시>동인.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
간고등어 한 손(외 2수)
유안진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 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 마리씩 줄 지은 꽁치 곁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해온 듯
쩔어든 불안이 배어 올라가 푸르러야 할 등줄기까지 뇌오랗다
변색될수록 맛들여져 간간 짭조롬 제 맛 난다니
함께한 세월이 길수록 풋내 나던 비린 생은
서로를 길들여 한가지로 맛나는가
안동 간고등어요
안동은 가본 적 없어도 편안 안(安)자에 끌리는지
때로는 변색도 희망도 되는지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다가 뇌오랗게 변색되면
둘이서도 둘인 줄 모르는
한 손으로 팔리는 간고등어 한쌍을 골라든
은발 내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반백의 주부들.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 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누이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영계영계하는 친구들이
업어 키운 막내동생처럼 대견스러워지는
여자 오십의 이 합자연증(合自然症)
누가 들어도 하품할 이 나이에는
반나절은 눈이 쉬고 반나절은 귀가 쉬는
겨울산하가 되고 싶다
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빵빠르를 울리며 출현해서는
젊을을 요절내듯 결단내듯
치닫는 신세대도
어리광 받아주듯 손뼉 쳐주고 싶다
비범은 고사하고 평범도 밑돌아서
굳이 있음 없음을 가릴 필요조차 없는
누구에게나 흉허물없는 사이이고 싶다
슬플 때 간절해지는 고향 같은 이름으로.
유안진 : 1941년생 경북 안동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수상. 시집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봄비 한 주머니> 등,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그리운 말 한마디> 등.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종(외 1수)
신협
층계를 밟고 올라간
하늘 맨 꼭대기에
종은 높이 매달려있다
꿈에 나는 키가 부쩍 자라
탑신을 밟고 올라
종을 치려고 팔을 휘젖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날개 부러진 까치떼가 몰려와
머리로 부딪쳐
종소리는 꿈처럼 길게 늘어지며 울었다
종은 어제 스스로 울어
마침내 바람을 울리고
바람은 나무잎을 울리고
산과 바다와 가슴도 따라 울었다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에서
다 타가는 초불을 보았다
한평의 어둠을 밝히고
확인하려는 몸짓이였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조약돌을 보았다
깔리고 깎인 부분과
남은 부분의 안스러운 헤여짐이였다
앙상한 가지 끝에
빠알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나무 사이론 높푸른 하늘
다시 새로워 보이는 풀잎들
빈 가슴으로 가볍게 걸어모는 가을 들길
포플라 가로수 곧게 뻗은 신작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또
나무 끝에 매달린 락엽을 보았다
핏빛 노을 사이로 보이는
먼 새벽길을 걷고있었다
신협: 1938년, 한국 충남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집 “변명” 외 5권 출간. 현재 충남대학 명예교수.
갈채하는 숲(외 2수)
리헌석
총 끝에
참새를 올려놓았다
방아쇠를 당기면
저들의 체온은 어디로 갈까
어디로 사라질까
겨운 참새의 심장에
독립군을 향하던 일제의 총탄이
둥둥 떠 있다
스페인 일렬횡대 총구가
잉카인의 웃음을 허물고 있다
팔레스타인 핏기 잃은 길이
베트남 나라 앗긴 뱃고동이
어지럽게 돌고 있다
총구를 내리며
호흡을 풀고
신선한 날개를 파닥이는 방생을 본다.
상기되어 타오르며
갈채하는 숲을 본다.
하마트마 간디의 걸음걸이
꺼지는 생명의 불씨 앞에서
구세주의 복음을 떠올려 보며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말라하시던
구세주의 깊은 뜻을 가늠해 보며
구할 입이 없는 선인장
찾을 눈이 없는 선인장의
기력 없는 부르짖음을 만졌습니다.
내 투명한 인정의 바람소리
그 확고한 삽날의 신념이 살아나서
물 주어 가꾸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둥치에서
푸릇푸릇 함성이 살아나고
마하 트마 간디의 조용한 걸음걸이가
윤기를 찾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디디울나루 달맞이꽃
목마른 사랑을 아는가.
가슴에 흐르는 이슬을 받아
샘물처럼 그대는 냇물처럼
뜨거운 사랑을 식히다가
꿈결에도 물소리로 나를 적신다.
무량의 세월을 손꼽아
메아리로 눈뜨는 사랑
사랑하기 전엔 깜깜했던 길
이제 꽃불로 환하게 밝히는구나.
그리운 이여
내 강ㅌ코 푸른 하늘을 기도하는
결 고운 피리소리로
새벽의 창문을 두드리며
먼먼 기다림
보고픈 한 송이 꽃으로 피는가.
리헌석 : 1951년 한국 충남 공주 출생. 공주교육대학교, 한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시집 《갈채의 숲》, 《디디울나루》, 《반 내림을 위하여》, 《새소리는 덤이다》, 문학평론집 《한국 현대 서사시의 신 지평》, 《우리 시의 얼개》, 《불심이 깃든 시 산책》 등, 계간 《문학사랑》 발행인 겸 편집인. 사단법인 한국 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대전 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바람불어 좋은 날 (외 2수)
서지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땐들 우리가 한식구 한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 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위 시 <바람불어 좋은 날>은 2008년 대한민국 합창가곡제에
게명대학교 음악대학 임우상교수에 의해 민요조 합창가곡으로 작곡됨.
우리 朝鮮사람들은
우리 조선사람들은
물맛을 배맛으로 보고 살았습니다
먹물 창호지에 아른아른 배어나듯
그렇게 먹 갈고 살았습니다.
비오는 날은 도롱이를 쓰고
봇도랑으로 나갔습니다
초승달이 석류나무 가지 위에 뜨는 저녁답
자주댕기 남끝동 다 큰 처녀가
몰래 담을 넘고
오오래 길들여진 나귀가 주막에 드는 밤
호롱불처럼 쑥꾹새는 밤새 울었습니다
천 년 강물 허리에 두르신 어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아버지는 걸어서 타관백리의 산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조선낫처럼 有情해서
물맛을 배맛으로 보고 오래 오래 잘 살았습니다.
울고 가는 저 기러기
밤하늘에
달빛 새는 마른 갈대의
저희들끼리의 밤하늘에
꺼이꺼이 떼지어 울고가는 저 기러기
긴 모가지에
하나도 서러울 것 없는 無罪에
그들은 왜 깊은 밤의 강물이
출렁이면
떼지어 꺼이꺼이 울고가는 것일까,
섬돌밑에 쌓인 달빛도
짙은 골짜기일 때
사람들은 저마다 뿔뿔이 돌아눕고
뿔뿔이 헤어진 영혼일 때.
서지월 : 1955년, 5월 5일 한국 대구 달성 출생.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심상』신인상, 『아동문예』신인문학상, 한하운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悲願(외 2수)
김세웅
목숨을 바쳐서
마음이 평안하다면
바쳐지이다
한 컵의 물에 풍랑이
물을 비움으로써 조용해진다면
비워지이다
내 속에 배 저어 가는
당신의 노가 부러져야만
천둥같은 물소리 그칠 수 있다면,
당신을 닮은 놋대라도
부러뜨리겠습니다
아아, 누군들
스스로를 위해 살아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배 저어 간다는
당신의 빛나는 놋대를
부러뜨립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두워지기 전에 낙조는
짧으나 가장 아름다운 세상으로
우리를 들게 한다
내 안에도 잠시 그런 세상의 빛이
느껴지는 때가 있음은,
편안한 어두움을 예고하는 것일까
빛은 아름다우나 어지러웁고
어두워지는 모든 방법은 어지러우나,
막상 어두움은 편안하고
주검은 단정하다
오늘도 내 속에선
피가 피를 나무라고,
뼈가 살을 뒤집어 이렇게
찬란하도록 어지러운 것은
편안한 어두움을 예고하는 것일까
칼
내 칼은 연못에 빠졌다
겨울이면 두터운 얼음 아래
윙윙 소리내어 울고
봄이면 눈썹처럼 수면 위에 떠올라
고르지 않은 봄바람에
고운 털을 나부낀다
녹슬게 되면
더 이상 칼은 울지 않으리라
수면 위로 떠올라
스스로 어쩌지 못해 고개 숙이는 법도
없으리라
내 칼은 연못에 빠졌다
빠질 땐 객기로,
연못을 두 쪽으로 가르며 빠졌다마는
무엇을 두 쪽으로 가르는 만용은
더 이상 없으리라
드디어 숨쉬지 않을 때까지
가끔 울고,
봄이면 수면 위에 떠올라
어쩔 수 없는 눈썹처럼 나부끼리라
김세웅 : 1953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시집,『삼중주』,『날이 갈수록 별은 보다 높이 뜨고』, 『돌아가는 길』, 『칼과 연못』 등. 에세이집『바람으로 지은 집』발간. 현재, <낭만시> 동인. 세종이비인후과 원장.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외 2수)
리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감자떡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
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쪄서
우리를 먹이신다
내일로 가는 소
산 넘어 가시덤불
어둠 밟고 가는 힘을 보아라
지치고 외로운 길 가며
먹은 것 꺼내 씹는 분노를 보아라
자라는 뿔을 보아라
굽을 보아라.
썩은 말뚝에 몸 부벼 대는
내 고삐의 사랑을 보아라.
이 나라 콩 깍지 개밥풀 누르고 설운 꽃 먹고
밥이 되는 커다란 똥을 보아라
산 넘어 가시덤불
어둠 밟고 가는 힘을 보아라.
리상국: 1946 강원도 양양 출생. 민족예술인상, 제1회 백석문학상, 유심작품상 수상. 시집 <동해별곡(東海別曲)>,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등 있음. 현재, 백담사 만해마을 근무.
고딕과 명조, 흰색과 검은색(외 2수)
강 경 호
출판사에서 오래 책을 만들다 보니
남은 것은 고딕과 명조뿐
젊은날의
간지럽고 화장품 냄새나는 글씨
시끄러운 노래같은 글씨
낡은 듯 그러나
모든 글씨의 기본이 되는
고딕과 명조만이 기품이 있다.
그림을 오래 그리다 보니
남는 것은 검은색과 흰색 뿐
한때 뜨겁고 날씬하고
쌈빡하고 현란하던 색들 모두 버려지고
담백하고 차분한
수묵향 먹색이나 백색만
내 마음의 파렛트에 남아 있다.
처음 누군가 그었던 선이
글씨가 된 고딕이나 명조,
맨 처음 누군가 바위 벽에 그렸던
먹색이나 백색,
가장 낡았지만
가장 오래된 글씨와 그림
마침내 갑골문자처럼
내 깊은 곳에 남아 살아 있다.
태초의 흑백 상형문자들.
교회와 모텔 사이
교회와 모텔 사이
오래되고 작은 그의 집이 있다.
더럽고 구겨지고 찢어진 것만 먹고 살아온
그의 집에
밤업소 아가씨들 속옷
인부들의 땀에 배인 작업복
신사들의 신사복
고백성사라도 마친 사람들처럼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다.
밤이 깊고 어둠이 깊다.
기도를 드리던 교인들 오래 전에 돌아가고
아가씨들 히히덕거리던 소리
주정꾼들 혀 꼬부라진 소란마저 지나간
오줌 냄새 질퍽한 골목길
가로등만 적요하다.
거기 교회와 모텔 사이에서
늦게까지 다리미질하는
피곤한 그의 어깨 눈부시다.
세기말에
술취한 세기말의 황혼 하나
휘청휘청 서산을 넘네.
길가엔 즐비한 러브호텔과 가든
새소리도 멈춘 숲속엔
어지러운 환락의 노랫소리들 들리네
더 이상 숲 속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없는 이곳
배고픈 이리며 승냥이떼
울부짖는 소리 멈추지 않네.
나는 늘 도망쳐 다녔네.
가시넝쿨 속으로, 길 아닌 길로
무화과나무 아래 음침한 곳으로
뱀처럼 숨어 다녔네.
내 속의 나를 배반하고
나로부터 멀리 도망쳐 왔네.
문득 내가 그리워지네
나는 왜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야
뼈를 부수는 후회를 하는가.
생이 깊도록 수배자처럼
나를 피해 도망다니다,
나를 떠난 후에야
내가 가엾어지는가.
병이 이슥해서야 드는 철이라니!
밤이 어두울수록
수많은 별에 등불 하나씩 걸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밝히는
내 속의 나를 바라보네.
이제 나는 나를 배반하려 하네.
술에서 깨어 가시넝쿨 우거진 숲을 지나
떠나온 유년의 마을로 돌아가려 하네.
황혼의 노을 비장하게 사르며
처음 떠나온 곳으로 가려 하네.
강경호: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광주대학교 졸업.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광주대 문예창작과 강사.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평론집 ‘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등. 계간 '시와 사람' 발행인 겸 편집인. 종합문예지 ‘서정과 상상’ 주간.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소장.
꽃 길(외 2수)
윤 홍 조
한 사람이 꽃길을 걸어온다면
그도 꽃이 아니겠느냐
꽃발꽃발 걸어오는 저 향기
우듬지에 피워낸 꽃이 한 나무의 상처라면
내 목울대 울리는 내 사랑도
상처의 꽃이 아니겠느냐
사태진 꽃길을
꽃발꽃발 걸어가는 한 사람
내 몸이 걸어간
저 환한
상처의 길
빈 들
저 빈들을 보아라
얼마나 희망이 넓고 깊은가
그리하여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는
저기 저 돌아서는 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황홀한가
스스로 몸 던져 뛰어내리는 한순간의 잎새들이여
새들이 날아간 적막
벼 포기 사라진 저 광활함
비로소 가득한
소리 소문 없는
저 빈들을 보아라
매미소리
삼복더위 속
대차게 뚫는 매미소리
맴맴맴맴―――
소리의 폭포수 쏟아진다
내 몸
시원하다!
나도 살아가면서 저렇게
삶의 체증이 뚫리도록
마구 소리쳐 울어본 적 있긴 있었던가
윤홍조: 한국시협회원. 부산시협 회원. 한국작가 회원. 계간 시전문지 「시와사상」편집장 및 편집기획위원역임.
부처골 풍경소리(외 2수)
혜봉스님
깊고 고요한 밤
소쩍새 울음소리 즐기는
이 여유로움의 공간
그대는 아는가
물이 흐르듯
구름이 가듯
어디에도 물들임 없는
자유로운 이 낙(樂)을
그대는 아는가
머뭄 없는 본래의 자리
티가 없으니
드러나고 홀로 드러나니
땡그랑 그랑, 땡그랑 그랑
바람소리 풍경소리
한 쌍의 꽃과 나비로다
조각달 허공에 흐르고
인적 없는 산사 고요한 밤
새벽 예불 목탁소리 하늘은 게이고
새벽별 요요하게 뜰을 밝히네
두 눈썹 일월(日月)은 밝아
조각달 허공에 흐르고
인생의 희노애락
꿈인 줄 이제야 알았네
생각이 무량겁이니
무량겁이 곧 한 생각이네
무소유
여보시게 뭘 하시는가
세상사 혼자 다 지고 가려는가
욕심도 많으이
그냥 훌훌 털게나
누가 자네더러 지고가라 하든?
아무도 그 짐 가져가라 하지 않네
무겁다 낑낑거리지 말고
그냥 두고 가게나
바람 불면 가슴 열고
비가 오면 눈물어리니
폭풍우 친다 해도
뒷일 걱정 말게나
무슨 미련
그리 많을꼬
청산을 짊어지고 가겠는가
그냥 두고 가게나
東山 혜봉스님: 시인. 수필가. 부처골 지장선원 주지. 불교문인협회 회원.달마문인회 회원. 시집 <천년의 신비 부처골> 간행.
길상사 꽃무릇(외 2수)
리윤정
분명 한 뿌리에서 오는데
꽃과 잎이 서로 숨고 숨어
백석인듯 진향인듯,
두 사람의 타는 가슴인듯
길상사 마당 가득 핀 다홍빛 혈서
꽃이 오면 잎이 없었네
잎이 오면 꽃이 없었네
일생토록 서로 보고파만 하면서
서로 애터지게 그리워만 하면서
열매 한 알 맺어보지 못 하고 지는 꽃
한 몸이 될 수 없었던 그 한풀이
온통 붉은 혈서로 가득하네.
봄눈
나뭇가지에 새살이 돋아나려나 했는데
뒤늦게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가는
발걸음이 바쁜 봄눈은
인적 없는 외딴 집 지붕위에도
고단한 나의 뜰에도 해 마다 잊지 않고
몸으로 말하는 눈이 내린다
목젖까지 뜨거운 그리움
그 멀리 하늘에서 땅까지 찾아 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소리 없이 찍어 놓고
사라지는 것, 깨끗이 물러나는 것을
내게 알려 주면서 내리고, 녹고 하는 눈
녹아야만 다시 하늘로 가는 눈은
살기에 지친 나의 때꾼한 눈길을 끌어당겨
잊고 싶은 내 나이를 짚어 봐 주고 갑니다
폐차장 앞 골목
땅 끝 까지 얼어붙은 추운 겨울 날
폐차장에서는 폐차작업이 한창이고
그 앞 골목엔 철없는 남편의 발길질에
한 여자가 폐타이어처럼 굴러 간다
끈적한 남편의 양말을 빨아주던
한 여자가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머리통, 가슴통을 내리 치는
남편의 발과 주먹은 일급 폐차기
그 폐차기 앞에 쏟아지는 비명은
바늘이 되어 내 귓속을 찌른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북어와 여자는
사흘에 한번씩은 두들겨 줘야 한다는
그 말의 참뜻을 잘못 알아들은 한 사내가
폐차하듯 부셔놓는 여린 아내의 몸뚱이
오오!
개똥밭의 참외도 저렇게
함부로 밟아대지는 않고
쓰던 차도 저렇게 막 부수진 않지.
리윤정:
코리아나 TV 대표, 코리아나문학회 회장. 퇴계학연구원, 박약회 회원.
은둔의 도시(외 2수)
김형효
모든 것이 멈추어버렸다.
멈추어버린 죽음의 기억으로
날갯짓하는 하루살이를 보았다.
그 파닥임이 애처롭다.
그래서 촛불을 들었다.
정지된 사유로 바라본 세상은
검은 밤, 바다를 건너가는
등대를 반짝이는 불빛처럼 보였다.
세상을 건너 가버린 사유
바다를 건너 가버린 등대를 반짝이는 불빛은
더 이상 살릴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그냥 그 자리
우두커니처럼
그래도, 그냥 그 자리
어처구니처럼
모든 것이 멈추어버렸다.
삶을 산다 말하지만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도시에서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가?
죽음의 도시와 정지된 도시에서
은둔을 시작한 사람들
오늘도 그들의 어깨에
반짝이는 별 밤이 내리고
아침 햇살이 내리고 있다.
그 사이에 은둔을 시작한 나그네가 중얼대고 있다.
"내일이 두려움이라면 지금도 두려움이다."
삶
바람이 불어와 맥없이 날개를 폈지요.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다
맥없이 눈물을 떨구었지요.
날개 편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기에
제 자리에 섰지요.
그렇게 맥없이 날개를 펴고 눈물 흘리다
제 자리에 서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생이겠지요.
꽃 걸음
수많은 꽃들이
같은 꿈을 향해 줄달음한다.
같은 줄에 서서 멍하니 기다린다.
수많은 꽃들이
같은 길에서 다른 향을 피워낸다.
아지랑이 꽃 같은,
중얼거림 같은 사람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꽃 향이 되어 퍼지는 날이다.
사람들이 중얼거리고 있다.
입을 다문 사람들이 중얼거리고 있다.
김형효:
1965년 전남 무안 출생. 시집 <사람의 사막에서> <꽃새벽에 눈내리고> <사막에서 사랑을>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한국네팔문화예술교류협회 사무국장, 시사랑 (http://www.sisarang.com) 운영자
세탁기(외 2수)
천향미
가출에서 돌아온 아이
한뎃잠과 함께 벗어놓은 허물이
근심처럼 쌓여있다.
저 혼자 은둔했던 시간과 더불어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얼룩을 밀어 넣고
세탁기는 목하 숨고르기 중이다.
불안에 얼었던 몸
눈꺼풀 타고 떨어지는 얼음부스러기
매 학기를 넘길 때마다
칭찬한번 듣지 못한
소음덩어리 1989년산 전자동세탁기
중심 무너진 지 오래다.
내신, 수능 물기 없이 탈탈 털어 말릴
논술에 대비해
엄마가 풀어놓은 고농도 세정액이
아이의 꿈까지 말갛게 씻어버린,
뭉게뭉게 흔들리는 세탁기 앞에서
몇 번의 소용돌이가
반복되고 난 뒤 찾아온 정적
어둠속에서 오도카니 혼자였을
아이의 옷,
탈수된 어둠이 햇볕 들기를 기다린다.
뿔
나는 뿔이 갖고 싶었다.
이른 봄 머위햇순처럼 모 없이 둥근
뿔 하나 갖고 싶었다.
내 뿔에 들이받힌 상처부위마다
솔솔 향기 퍼지는
그런 뿔 하나 갖고 싶었다.
어릴 적 풀 먹이던 우리 집 뿔난 염소
길고 무섭지만 뿔끝이 돌돌 말려
어느 누구에게도 뿔질한번 못해본
허울뿐인 어머니 뿔
자운영꽃잎 같은 재롱 한 묶음 뜯어다
어머니 앞에 내밀면
벅찬 실의에도 치머리 흔들지 않는
어머니 뿔, 삶의 비애가
버선목이라면
홀라당 까뒤집어 보여주고 싶다던
어머니의 뿔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머니 버선코에서 자란
눈물 비친 뿔 하나를 보았으니
내안에 숨은 가시들
뾰족한 뿔로 자라고 있었으니
그것이 어머니를 들이박던 뿔이었음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으니
빙하의 계절
냉장고 속에 물을 넣는데
삐걱거리는 문짝 비집고
신음 소리 흘러나온다
차가운 몸으로 산 세월동안에도
언뜻언뜻 뜨거웠던 기억
식히느라 밤새 윙윙거렸을까
머리맡의 자리끼를 더듬듯
달빛 기우는 새벽녘 옆자리 더듬다가
나는 화들짝 잠을 깬다
자는 듯이 가고 싶으시다는 할머니 숨소리
끊, 어, 질, 듯,
이어지고 있다
움츠린 내 어깨 토닥이며
이불을 덮어주시던 할머니 손길
따습던 그 손, 마디 마디에
성에가 쌓이는 걸 보면
숨가뿐 시절을 지나 빙하의 계절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집 고물 냉장고 속에 든 눈물은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
천향미:
2007년 계간『서시』신인상 수상. 부산 윤동주사상선양회 사무국장. 부산시 해운대구 좌3동 효성. 코오롱아파트 104동 701호
옛날 가는 길(외 1수)
박찬승
잎맥을 바람에 다 내어주고
옥수수 대공 만 을씨년스레
소록길 결에 서서 겨울 손 흔드는
시골집 싸리나무 얼기 울타리 틈새로
가마솥 메주콩 익는 내음이
나그네 발길 묶네요
어리던 날엔
메주 익는 내음에 깊어가는
겨울이 오고
안방 윗목 횃대에
메주를 짚으로 매달아 놓고
긴 겨울을 할머니 옛날이야기 들으며 났지요
쩍쩍 갈라진
틈새 론
검게 익어가는 메주 속이 보이고
겉은 하얀 곰팡이가 겨울을 풍경화 그리는 밑으로
냄새는 왜 그리도 퀴퀴하던지
그 냄새를 영양 삼아
초가집 웃음이 싸리울을 새어 나와
찬 눈길을 헤쳐 밤 마실 가던 그 무렵
우리 옛날은 메주처럼 내놓을 품새는 없어도
훈훈한 정을 뭉개는 겨울을 화롯불 다독이며 자랐지요
가을 안개
무엇을 가리자는 건가
익어진 계절은 산마루에 선
굴참나무 우둠치 끝 노란 단풍이
하늘을 휘 그리고 넘는
산 아래서
골짜기를 타고 오른 물안개 번지는 아침 산
밤새 산 그루를
흉물처럼 할퀴어 논
산돼지의 발자취와 방금 배설한 분뇨
솔개가 뜯다 만 산비둘기의 깃털과
청설모 밤새 씨앗 파다 흘려버린 솔방울밑에
깔린 남색 용담꽃 여린 대공
물 내린 갈나무 밑
찬 서리 가려 피어 있는 구절초
뿌연 연무 속 헤치며
마지막 가을을 줍고
지난 허물을 묻으며 계절을 넘는 나그네
가리는 건 헤치고서
뭉친 성을 다 풀어내리라
처다 보는 우둠지 끝 뿌연 하늘엔
흰서리 등에 진 산 까치가
가을에서 겨울로 날아가고 있다
박찬승:
한국 제천 송학 출생. 《시집 초승달과 나눈 이야기》, 《 갈빛 신매나루》등.
논에서 아버지를 읽다 (외 1수)
김일용
가을이 삭둑삭둑 잘려나간 논바닥
벼 그루터기들 문자로 박혀있다
자음과 모음을 몸으로 깨우치며
모국어만을 이토록 써오신
아버지의 일기들
쓰다보면 허튼 생각에
받침하나 빠뜨릴 수도 있을 텐데
급행열차처럼 달리는 세상
글자 한자 놓칠 수도 있을 텐데
살다보면 빈곳도 있으련만
여유의 미덕도 부릴 수 있으련만
저토록 또박또박 판 박은 대장경
봄이 오면
못다 부른 후렴을 써보리라
전화, 나는 걸려있다
하늘은 냉천리와 통화중이다
어제는 함박눈 이야기를 들었고
오늘은 햇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용히 교신중인 나무들
떠들며 통화하는 새떼들
물속 고기떼는 더 은밀할 것이다
벌 나비는 빛깔 있는 말에는 관심이 없다
향기로운 말만 따 모은다
반짝거리는 별들의 대화
찡긋! 윙크로 주고받는 달의 대화
쇠방울처럼 달고 다니는 전화기
나는 너에게 걸려있다
김일용 : 경주 외동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농학과 졸업. 신라문학대상 시부문 당선. 제16회 한밭시조백일장 대상 수상.
바둑을 두면서
김운향
갈 곳 몰라 헤매다가
호구에 들어가서 얌전히 잡히고
축에 몰려 발버둥치며 추락되곤 했었지
피땀 어린 정성으로 집을 지어도
고작 옥집,
가없이 방황하는 우리들의 얼굴은
얼마나 일그러졌을까
오그리고, 뛰고, 부딪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새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
눈에 불 밝히고 마지막 별빛을 모두 마셨지
대마싸움에 패라도 생기면 어찌할까
어복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뻗혀야만 하는
허허로운 벌판의 까마귀와 해오라기
이긴 자, 진 자도 없이
어귀찬 사랑으로 살 수 없을까
아. 우리들의 어둠에 대하여
반항에 대하여 가슴 앓는 영웅들
매화 육궁, 도화 오궁, 포도송이 송이로
소리 없이 기진한 무리들
불평 없이 은혜롭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흑돌들.
약력:
경남 산청 출생.1987년 『表現』誌 신인 작품상으로 등단.1999년 미국 '에피포도Epipodo 문학상' 수상 시집 『구름의 라노비아』(1999) 외 공저 다수 한국문인협회.국제펜클럽, 한국현대시인협회 전통문화 위원,
비와 함께… (외 1수)
남선현
당신의 눈물이 받쳐든 우산 깃에 스며
가슴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고
전율처럼 느껴진 속삭임 불 같은 노여움도
환청인지 빗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그리움 속에
보고픔을 빗물에 흘리고 있다.
하나 둘 찍힌 발자국도 세상의 허잡스런 사치듯
쓸고 지나간 자리에 흐르는 물 보라가
애처롭게 허무함을 그려놓고 가물거린 저편으로
사라지려 할 때 천둥은 빗물을 자극 하고 있다.
세상에 헐고 바람에 찢긴 우산 속 가련함이
비를 피해 발버둥치는 쓰라린 영혼에 버물려
모든걸 훨훨 벗어버리고 쏟아지는 빗소리에
온몸을 맡겨놓고 한발 또 한발 딛고 있다.
별박이
사무친 그리움 뒤 언저리에는
글썽이는 눈물과 가녀린 흐느낌
켜켜이 묻어둔 쓰린 상처 들춰
되돌아 보니 별박이처럼 가물거린다.
어스름한 여운 산허리에 걸친 초생 달
밝음과 어둠의 조화 잡히지 않은 현실
요동치는 갈증이 스산한 바람 만나
흐늘흐늘 알록달록 스치고 있다.
밤과 낮이 실체를 상실케 하고
별이라고 우겨대는 하늘 향해
조소를 보내면 엉킨 줄 한 움큼
정신에 뿌려 멀어진 얘기를 들려준다.
약력
시집(문 , 나와 함께 한 모든 것) 공동시집(밤은 소리로 살아있다, 사람의저녁)외 다수. 현 고흥작가회 사무국장, 창작21 회원
퉁소소리
이기형
연연 절절
천년한을 쏟아내는
저 퉁소소리!
제 가슴은 찢어집니다
어머님은 귀띔해 주셨습니다
내 두 살 때
아버님은 스물하나 애띈 꽃나이
이세상 마지막 하직할 제
사력은 다해 퉁소를 불으셨다고
아버님의 애절 망극한 사연
소자는 긴긴 세월 자나 깨나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은 생을 마감하는 처절한 순간 장엄무비한 아름다운 사력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진한 백발 메다 꼰지고
조국통일과 시창작에 서렁서렁 폭포치는
놀라운 힘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아버님!
절명곡 비탄의 음향
오장육부에 눈물의 시 샘이 솟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자는 머리 조아려
통한의 큰절을 올립니다
약력: 1917년 함남 출생. 1947년 <민주조선> 시 발표. 시집 <지리산> <해연이 날아온다> 외 다수. 창작21작가회 고문.
도시의 밤(외 1수)
정 다 정
손에 손에 촛불을 켜들고 인의 물살을 이룬 종로 네거리
불의 물결, 거대한 고대도시도 휩쓸어버릴 것 같은
노도는 어둠에 묻히고
밤이 되면 거리는 자동차 불빛으로 현란하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떨어지는 불빛 끌어안고
반복되는 우울 앞에 기를 피지 못 한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우는 비정한 갈림길에서
누추한 식솔들은 누워 있다
그렇게 도도한 밤은 흘러가고
새벽이면 성당의 종소리에 눈을 뜬다
조용한 거리 어제의 광기는 찾아볼 수 없다
빵 같은 공기 같은 물 같은 소녀들이 나부끼는 거리엔
구름은 모여와 뒹굴고
아이들은 철없이 바라보며 순수를 노래한다
미래의 주체들, 꿈의 질량 보듬어 안고 거리를 누빈다
칼을 갈고 독을 품고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일상 속에서도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허름한 사고를 걸치고 밤거리를 활보하는 군중들은
재색빛깔의 옷을 입고 항상 느린 걸음이다
먼지와 소음, 기억과 상실, 매춘이 난무하는
도시의 밤은 깊어가고
유리창에 흘러내린 질퍽한 불빛들
도시인들은 불안하다 좌절한다 흐느껴운다
고독을 품고 사는 시니피앙들
1
고가古家의 마루에 앉아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농부는 점심을 기다리고
노파가 밥 준비에 분주하다
농부가 나를 보고 창녀가 있는 마루에서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이런 모욕이
어디가 있냐고 대들었다
농부는 슬그머니 논에 나가 타작을 한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농부의 모습이 평화롭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들녘을 걸었다
한가로운 내 모습이 처량하게 보였다
오죽하면 농부가 창녀라고 할까
나는 혼자다 할 일이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
2
대열에 끼어 길을 가고 있었다
빈 터가 있는 동네 앞을
일렬종대 줄을 지어 올라갔다
도중 우물에서 한 대원이 물을 길러가고 있었다
나는 두레박으로 퍼 올렸으나
워낙 바닥이 얕은 흙물이라 쏟아버렸다
나는 곧장 대열에 합류 했고
다른 대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쉬고 있었다
누군가 아는 척 했으나 모르는 여자였다
거리의 군중들이 산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무 없는 산 중턱을 무리지어 가고 있었다
3
허공 속으로 튕겨져나간 자아
내 의식 세계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을 매꾸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자아를 불러들였다
이 자아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수단으로
어쩔 때는 빈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기도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방향을 몰라 허둥대기도 한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때려주었다
그렇게 능청 떠는 놈이라면 멋대로 살아
나는 또 하나의 자아를 불러들였다
이 자아는 눈물 흘리며 내 옷자락을 붙들고 통사정한다
배가 고파 외양간 소를 잡아먹고
뼈는 땅 속에 묻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깊은 곳에 묻었어요
약력: 2007년 계간<창작21>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분영하는 달>. 창작21작가회 회원.
저, 손놀림 눈부시다(외 1수).
최순섭
마음 으스스한 날,
수서에서 대화까지 먼 길 와서
이제 내릴 사람도 없다
막다른 길, 딱히 갈 곳 없어
나, 다시
떠나는 사람들 틈에 슬그미 몸을 끼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은 다시금 깃을 세우고
난 또 다른 생의 밀물을 찾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의 깨끔한 방황
가끔은 영혼이 고장 났다고 생각할 때
깊은 그늘 싣고 온 종착역에 무기력하게 졸고 있는 폐기물들
무가지 수거하는 노인의 분주한 손이
흥얼흥얼 이정표를 달고 있다
그래, 진정 고장 난 삶의 조각을 그러모아
재생의 길 열어주며
신바람 일으키는 저 손놀림
참, 눈부시다
도시의 길
저 봄날의 연인들
울상이어라, 나들이 길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애인 손잡고
딱딱한 길 걸어보면 안다
한 줌의 흙도 용서 할 수 없다는 듯
시멘트로 압사당한
죽은 길 걷다보면
애인의 발
금세 아파온다는 걸
애인의 콧노래
금세 시들어 버린다는 걸
최순섭 : 충남대전출생, 78년 시밭 동인지 활동. 고양작가회, 창작21작가회회원. 열린시조학회 민족시사관학교회원. 서울특별시동작교육청근무
관해령 연가(외 1수)
백점례
절벽을 안고 굽이치는 고갯길에
푸르게 목이 쉰 사내가 있다.
칡즙을 갈아주는 어깨 너머로
숨어 울던 부끄러움이 낮달로 뜨고
여편네 하나 간수 못해
여태껏 몸도 비우고 사랑도 비운 참나무
발목에 엉켜오는 넝쿨들을
돌려 세우고 쳐내며 지천명 고개를 지키고 있다
더께 앉은 시름은 벌레 먹다 일찌감치 단풍이 들었다
날마다 태양을 들어올리는
바다의 힘찬 파도소리가 산 너머에서 들려오고
해 다진 산그늘 울음이
시린 계곡물로 버려지는 골짜기
포장집 들마에 사내는
슬그머니 삭정이 같은 하루를 접어
동해바다로 나가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몸을 구부려 넣는다.
24시 편의점에서
가계 안은 언제나 환하다
오늘도 구할 것이 많은 어떤 이가 들어오고
무엇인가 고민하던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떠난다
어두움이 누추한 골목에서부터 시작되고
문이 열릴 때마다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음마다 밝은 불빛을 찾고 싶은 이들이
간이 탁자 위에 지친 하루를 풀어 놓을 때
마지막 버스는 바람처럼 지나간다
독한 미련을 달래 주는 한 병의 술과
자꾸만 허기를 느끼는 일회용 밥그릇은
저들의 가슴속에 등불만한 위로라도 될까
피곤한 시간을 쉽게 마무리 하지 못하는
불면의 사람들 사이로 달빛만 평온하다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어디로 가는 길인지
컵라면 하나를 사서
추운 속을 채우는 어느 남자의 등뒤로
말간 여명이 신선한 또 하루를 데려오고 있다
약력: 충남 부여 출생. 경주문예대학 수료.『 시대문학 』 신인상 당선. 제9호l 전국 가사 시조 창작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경주문협, 경북문협 회원, 시대시 동인.
까치집(외1편)
정이랑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으리라
저 가파른 모서리에 집 한 채 들어섰음을
밤낮 가리지 않고 흐르는 고압선 무시하며 지은 집
무슨 말못할 사연 싸락눈 같이 뿌려놓고
언 손등 비벼가며 이사를 온 것일까
전봇대 올려다보면
늑장 부리며 걸어가는 떼구름 속 하늘이 흐려온다
너희인들 산밭뙈기 팽개치고 싶었으랴
미루나무 밤나무 마당 깊은 집에 사는 감나무
몇 차례 쫓겨 다니다가 어쩔 수 없어 마지막
어금니 물고 실한 나뭇가지 끌고와 설계했으리라
칭얼대는 아이의 입안에 사탕 하나 넣어주며
동지섣달 찬바람 짊어지고 양식을 찾아 나서는데,
그래도 새집에서 산다는 것이 좋았을까
저들끼리 입술 모아 조잘대고 있다
종
공중에 집 짓고 사는 자여
온종일 떡하니 벌린 입술
무엇을 토해놓고 싶은 것이냐
말 많은 사람들 세상 내려다보며
그들이 스스로의 마음에서 멀어질 때
목젖까지 드러내고 꾸짖는 커다란 음성
머리 위에는
손잡은 바람과 구름, 밤이면
어둠과 별빛마저 한곳에 묶어놓고
또 무엇을 섞어놓고 싶은 것이냐
이곳 저곳 기웃거리기만 하는 나를
네 몸통 후려치던 힘으로
출렁이는 바다 한 척 배같이
밀어 넣고 싶은 것이냐
정이랑 :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불교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동인.
빗방울들 즐겁다(외1편)
정경진
참새떼처럼 줄줄이 앉아
서로 안부 물으며 재잘거리며
빨랫줄에 앉아있는
빗방울들 즐겁다
찌푸린 얼굴로 흔들어
우수수 떨구던 구름속 빗줄기들
땅에 쌓일수록 얼굴은 점점 밝아진다
가지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홍시처럼
밝아진 얼굴 바라보며
빨래줄에 쉬고있는
저 물방울들 즐겁다
겨울 송화강에 와서
폭설 걷어내고
맨손으로 다가가면 쩌억 쩍!
하나로 들어붙는 눈빛 속에
현상되지 않은 필름이 들어 있다
조각조각 동화마을로 인화되어
내딛는 발자국마다
한 장씩의 꽃잎 같은 것
난생처음 와 본 곳에서
어디 갔는지 사공의 노젓는 소리는
빈 들에 바람만 목놓아 울고 가듯
내가 배경이 되어 찍히고 있다
정경진 : 1954년, 부산 출생. 동아대학교 원예학과 졸업.『시현실』신인상.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불교문인협회 회원. <사림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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