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을 모시면 복이 굴러온다
김교원•양명해 가정
1. 성장과 가정의 환경 2. 입교 배경 3. 입교 후 달라진 내 모습 4. 약혼하기까지 5. 축복 및 시련 6. 꿈에 부푼 사우디 생활의 상처 7. 일화 입사 8. 두 아들의 출생과 환고향 9. 설레임과 환희의 환고향 10. 160가정 승리와 부도(不渡) 그리고 축복활동 승리 11. 수원에서의 버스기사 생활과 아내의 부교회장 임명 12. 꿈만 갔던 성길이의 2세축복 13. 천보가정 승리 14. 앞으로의 계획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김교원,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어머니의 정성, 무당 수양부모, 장님이 된 아버지, 어머니의 통일교회 강력 권유, 완성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신, 정성을 드리는 기쁨 체험, 강의용 원리 노트 정리, 안보단합대회, 이상적인 여성과 약혼, 목회의 꿈 포기, 사우디아라비아 근로자로 파견, 낯선 지역 및 기이한 문화 체험, 귀국 후 텅 빈 통장, 일화 근무 우수한 실적, 자녀 출생, 환고향, 제직회장 활동, 청평수련회 감동, 사업실패, 하늘과의 약속 상기, 9명 전도, 버스기사로서 훈독회 참석, 아내의 부교회장 활동, 협회 원리시험 합격, 자녀 축복, 가족 전체의 천보가정 승리, 43가정 실세화 승리, 2027년 비전 승리
1. 성장과 가정의 환경
나는 1954년 음력 3월 9일 충남 보령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37세로 상당히 늦게 자녀를 두셨다. 그러나 무척 엄하게 자녀를 키우셔서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종아리를 걷게 해서 회초리로 때리셨다. 또 친척이나 웃어른들께 꼭 큰절을 하도록 지시하셨다. 아버지는 키가 180cm 정도가 되는 장신이셨고, 힘이 장사였다. 매우 의롭게 사셨고 동네 궂은일을 다하셔서 칭송이 자자했고 꽹과리를 매우 잘 치셨다.
내가 우리 교회에 입교한 후 큰아버지께서 “우리 집안은 23대째 불교 집안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불교 정성은 지극했다. 1년에 서너 차례씩 어머니는 시루떡을 해서 방, 부엌, 장독대에 올려놓고 때로는 길가에까지 나가셔서 떡을 올려놓고 양손을 비비면서 절을 하고 비손 치성을 드리셨다.
나는 어렸을 때 혼절을 자주 했다. 그때 내 생명을 구해준 분이라며 수양어머니가 있었는데 무당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우리 동네에 무당 노부부가 이사를 왔는데, 이 분들이 아버지에게 수양아들이 되라고 권유했으나 아버지가 거절하셨다. 그러자 아버지의 승낙 하에 어머니를 수양딸로 삼았다. 그래서 우리는 2대에 걸쳐 모자가 무당을 수양부모로 두었다.
우리가 집은 보령 소재지에서 약 1.5km 떨어졌고, 청양 공주 대전으로 가는 버스 도로가에 좌우로 작은 마을들이 있는 교통요지였고, 주변에는 많은 논밭이 있었다. 동네는 무척 평화로워서 농번기를 제외하고는 저녁에는 동네 어른들이 몇 분씩 우리 집에 모여서 이야기로 저녁을 보내셨다. 우리 집은 동네 대화방이었다. 어른들의 생일이 되면, 서로 아침밥을 해놓고 불러서 자축하는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금을 채취하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 일당이 쌀1~2되에 불과했지만, 운이 좋은 날이면 쌀 몇 말 값을 벌 정도로 수익이 좋았다. 약간의 논밭이 있었으나 농사보다는 사금 채취에 열중했고, 당시로서는 부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집안에 우환이 닥치고 아버지는 시력을 잃게 되었다. 당시에 수술을 했고 시력을 회복했으나 의사는 “당분간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라고 강력한 주의를 하였다. 그렇지만 여름에 폭우로 인해 논과 밭의 둑이 무너졌고, 아버지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혼자 논밭의 둑을 힘들게 고치셨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의 시력이 점점 쇠약해지더니 그냥 시력 회복이 안 되었다. 그 이후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잘 도와드려서 시각장애인 남편을 잘 보필한다고 보령군수의 효부상을 수상하셨다.
2. 입교 배경
성장기에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 달라서 가슴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늘 내편에서 비위를 맞춰주셨다. 그토록 엄하셨던 아버지의 성격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오직 나의 일탈만 없기를 기대하시면서 내 모든 걸 들어주셨다.
1973년 6월 27일, 저녁에 이발소에 있는데 이웃 동네 김재성이라는 형이 “아, 오늘은 수요일인데 교회에 가야지.”라고 말했다. 사실 그 형은 평소에 내가 같이 교회에 가기를 은근히 바랐다. “형, 나도 교회 가면 안 될까?” 했더니 아주 기뻐하면서 “정말? 교원씨 정말이야? 그럼 같이 가지.”라고 해서 내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교회를 갔다.
나는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걸려있고 큰 성전이 있는 기독교회를 상상했다. 그런데 내가 간 곳은 교회라기보다는 가정집이었다. 대문 한쪽에는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보령교역>, 또 한쪽에는 <국제승공연합 보령군단>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 1칸 반 정도 넓이의 공간에서 우리를 포함하여 6명이었다. 설교가 아니라 아주 열정적인 칠판 강의였다. 나는 다른 교회도 설교보다는 저렇게 강의를 열심히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가 나에게 오시더니 “교원아, 너 어제 어디 갔었니?” 하시기에 “가긴 어딜 가요, 그냥 놀았지요.” 했더니 “너 교회 안 갔니? 어떻대, 좋지?” 하셔서 깜짝 놀라면서 “아이참 교회가 나하고 맞나요, 못 다닐 데가 교회지요” 하니까 어머니는 내 앞으로 바싹 다가오시면서 “교원아, 남자가 한번 교회 가봤으면 그래도 몇 달은 가보고 어떻다고 해야지 한번 가보고 좋다. 나쁘다 판단하니?” 하셨다.
내 행동이 미덥지 못하고 걱정이 되셔서 내 뒤를 추적까지 하실 정도의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신앙과 달라도 내가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 길이라면 교회라도 가도록 적극 권유하셨다. 또 아버지도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을 내비치셨다. 내가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않기만을 바라셨다.
아무튼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교역장의 설득으로 1주일 원리수련을 받게 되었다. 아! 대단했다. 당시 강사는 430가정 강사였는데 너무 열정적이었다. 다른 수련생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속된 말로 완전히 돌아버렸다. 그 후 또 원리수련을 받고 원리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고 “이왕이면 완벽한 통일교인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3. 입교 후 달라진 내 모습
나는 걸핏하면 친구끼리 대화를 나눌 때에 “미완성한 인간이 별 수 있겠어?” 또는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리를 알고 나서는 이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창조목적에 의하면 나도 “생육하라.”는 제1축복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즉 “완성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완성한 인간이 되겠다!”라고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면서 지속적으로 원리공부를 하였다. 나아가서 “제2축복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축복가정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나와의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디 원리적 신앙 생활하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 내 친구들은 나를 보고 “야생마 같다.”고 할 정도로 누가 나를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고 내 성격대로 행동하였다. 그런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정이었다. 나는 원리를 들은 후에 달라지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에게 중생 부활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간혹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고나면 탕감하는 의미에서 1주일 금식을 하면서 성격을 다독이고 정성 드리는 자세를 몸에 익히려 노력했다.
1월 1일 하나님의 날 행사를 마치고 식구들과 함께 성지에 갔다. 그 다음날부터 100일 또는 120일 혹은 여름이 다가오도록 성지기도를 여러 해 동안 했다. 그런 정성을 드리고 나면 기분이 상쾌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정성의 맛을 알게 되었다. 세속적 관심을 멀리하고 산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면서 도인의 생활을 하는 자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전단도 뛰었고, 개척전도도 했고, 교회 총무도 하면서 참된 신앙인, 참된 통일교인이 되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 달라진 내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해 주셨다. 특히 어머니는 어머니 방식으로 정성을 드리기 위해 시루떡을 준비 할 때에 내가 교회에 가져가도록 중앙에 사각형으로 떡을 떠 달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밥 할 때마다 성미를 떠 놨다가 매월 월말에 교회에 가져가도록 협조해 주셨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으로 나는 더욱 통일교회 식구로서 성숙해 질 수 있었다.
언젠가는 목회자가 되고 또 원리 강의를 가장 완벽하게 잘하는 원리 강사가 되려고 목표를 정하고, 원리강론을 정독하면서 완벽한 강의용 원리노트를 작성했다. 그러다보니 5번 정독을 하고 강의용 노트를 5권 작성했다. 참고로 노트는 순전단 조장이었던 1800가정 곽형근, 김창근 전 경기남부 교구장, 아내가 임지 나갈 때, 내 여동생 학사생활 할 때 전도용으로 주었다. 그리고 1권은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야말로 열심히 했고, 극성스럽게 생활했다. 여호와 증인과 성경토론을 3일간 했는데 결국 그들이 답변을 못하고 성경책을 덮었다. 그들은 앞으로는 오지 않아도 되고 성경 토론을 끝내자고 했다. 2~3일후에 이런 소문을 들었다. “통일교인 김교원과는 성경 토론을 하지 말라.”
또 한 번은 안식교회를 나가고 있는 최재순(6000가정)이 사촌 여동생과 가는 것을 보고서는 전도를 할 욕심을 내었다. “재림주님이 오신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 되지 않느냐?”고 하며 재림론을 잠깐 설명했다. 며칠 후에 안식교회의 전도사와 청년들 7~8명이 수요일 밤 예배 때 불쑥 찾아와서 토론회를 갖자고 하였다.
나의 재림론을 듣고 반박하기 위해서 왔는데 김창근 교역장께서 간단한 기도로 수요예배를 끝내고 둥글게 둘러앉아서 토론회를 가졌다. 내가 “오늘 이 자리는 나로 인해 시작됐는데, 먼저 나와 토론하고, 내 설명이 부족하면 우리목사님의 보충 설명을 듣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모두 동의하였다. 나와 그들 사이에 타락론, 말세론, 부활론, 재림론을 중심으로 토론했다. 두 말 할 것 없이 우리의 일방적 승리였고, 그로 인해 최재순이 교회로 나와서 6000가정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역장께서는 나를 더욱 신뢰하셨고, 대천에서는 “통일교회 하면 김교원, 김교원 하면 통일교회!”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경제개념이 아예 없었고, 오직 참부모님 증거에만 몰입하였다. 정상을 넘어선 열정을 발휘하였고, “교회에 미쳤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진리는 미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평상시의 태도로는 구도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부모님도 내가 교회에 열심히 하는 것을 만족해 하셨고, 은근히 지원하셨다.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식구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편하였고, 감사한 일이었다.
4. 약혼하기까지
1981년 3월로 기억된다. “심심산골 부락까지 곳곳마다 돌며 전 국민에게 승공교육을 시키라.”는 참아버님의 특별지시가 내렸다. <안보단합대회>라는 제목으로 승공강의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교역장은 원리강의보다 승공강의가 훨씬 쉽고 재미있다고 하시면서 당시에 승공강의로 대단한 명성을 날리시던 김도완 강사의 1시간반짜리 테이프를 주시며 연습을 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그 강의를 7~8번 듣고 압축하여 40분정도로 편집을 했다.
김창근교역장, 1800가정 이봉춘, 6000가정인 조규영, 나, 4명이 보령지역을 책임지고 승공강의를 하였다. 첫날은 청소면 성연리 마을회관에서 25명 정도의 주민들에게 강의했다. 처음 강의라서 잠시 긴장도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과 하나 되다보니 자연스러워지고 점점 강의를 자유자재로 재미있게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4월 10일로 기억된다. 승공강의 마치고 밤중에 교회로 갔더니, 교역장께서 웃으시면서 “김강사 수고했어. 이제 색시 만나러 가야지.” 하시길래 “좋지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교역장께서 “지금 약혼식이 진행 중이니까, 내일 중앙수련소의 약혼식장으로 가라. 그동안 열심히 활동했으니까 그게 큰 밑천과 실적이 되어서 좋은 색시를 만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차비 3만원을 주셨다.
그런데 그동안 보령인근의 교역장들을 만나 뵙게 되면 모두가 한결같이 “축복을 놓고 정성을 드려라. 정성을 드리면 그만큼 하늘이 응답해 주시고 때로는 색시를 다 보여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약혼을 위한 특별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고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당시에 교회의 기도방법은 “공적인 내용이 우선이고 사적인 내용을 자제하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의 대상에 관련해서도 공적인 입장에서 바람을 가졌다. “첫째, 간절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참 좋겠다. 둘째, 우리 부모님께 진심으로 효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셋째, 가능하면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하였다.
중앙수련소에 가서 접수하고 약혼식장에 가보니까, 약혼식장 안에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좌측은 여자, 우측은 남자가 빽빽하게 앉아있고, 중앙에 통로를 만들어서 참아버님께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짝을 지어주셨다. 여자 3명이 서 있으면서 참아버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틈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비비고 앉으려고 하는데 앉아있던 사람이 내 다리를 자꾸 툭툭 건드렸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고 내려다보았다. 그는 턱으로 참아버님이 계시는 쪽을 가리켰고, 그쪽으로 내가 시선을 돌렸더니 참아버님께서 집게손가락을 구부리신 채 나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나는 앉지도 못하고 불림을 받아서 기쁨과 놀라움이 섞여 “저 말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참아버님께서 “빨리 나오라우.” 하셨고, 나는 구름위에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얼른 중앙의 아버님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버님께서 애정 어린 손길로 내 멱살과 웬 키가 껑충한 아가씨의 멱살을 잡으시고서 내 팽개치듯 밀어내셨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협회 가정부장이 “얼른 참아버님께 경배 드리고 나가라.”고 하셨다. 경배를 드리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때 내 귓속에서는 선명하게 “신랑 참 좋다.”고 하시는 참아버님의 음성이 들렸다.
참어머님께도 경배 드리고 나와서 매점으로 왔는데, 각종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축하합니다.”고 하는 사람들, 나보다 앞서서 짝이 되어 나와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신랑이 마음에 안 드는지 울고 있는 여성, 등 정말 가관이었다. 참부모님의 초능력에 감탄하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잠시 둘만의 공간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내 대상은 키가 훤칠하고 상당히 순박해 보이는, “어쩌면 이렇게 티 하나 없이 맑은 인상일까?” 할 정도의 여성이었다. 나는 평소에 내가 전도해서 동생 4명이 모두 교회 나오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런데 대상은 우리 가정보다 훨씬 좋았다. 부모님은 기성가정으로서 교회 살림을 완전히 책임지시는 장로이셨다. 오빠는 1800 가정이며 역시 전 식구가 교회에 다닌다고 대상이 설명하였다.
나는 “어쩐지 맑아 보이는 인상의 배경에 이런 훌륭한 점이 있었구나.”하고 감탄했다. 대상이 매우 신앙적인 가정에서 자랐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감과 부러운 마음을 가졌다. “과연 그런 가정의 신앙생활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아주 좋은 대상을 만나는구나.”라는 기쁨도 몰려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짝을 찾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나른해졌다. 좀 쉬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하늘은 내가 소망했던 내용을 다 들어주셨다. 그 이후 축복가정으로서 40년 가정생활을 해오면서 아내는 늘 뜻을 우선으로 살아왔고, 절대순종의 길을 택했고, 또 아내의 시부모인 나의 부모님께 효성을 다했다. 아버지께서 성화하시기 직전에 나를 부르시더니 유언을 하셨다. “교원아, 내 말을 꼭 들어다오. 나는 네 아내의 효성 덕분에 여태까지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부탁인데 부부 싸움을 하지 말거라. 만일 부부싸움을 할 일이 생기면, 내 말을 꼭 기억해서 화날 때 꼭 좀 참아다오. 싸움을 하지 말거라.”
아내는 정말로 부모님께 효도를 다했고, 4명의 동생들 모두 “우리 형수님, 우리언니” 할 정도로 우리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잘했다. 게다가 키가 167㎝로써 훤칠하였다. 어디가도 나는 아내를 자랑하면서 자신감이 넘쳤고 행복했다. 이처럼 참부모님께서는 내가 소망했던 세가지 내용을 다 들어 주셨다. 정말 꿈같은 약혼이었고, 내가 축복가정이 되어 살아온 것이 감사 충만이었다.
5. 축복 및 시련
1982년 10월 14일, 6000쌍의 거대한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얼마 후에 남편들의 2박 3일 수련회가 있었고, “남편도 섭리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다. 협회 직원이 수련생들과 면담을 통해 <사업대원, 전도대원, 목회>등으로 분류하였다. 나는 순전단 수료, 개척전도, 교회총무생활, 교역 및 교구 원리시험 합격 등을 인정받아서 목회자 코스로 분류되었다. “교원씨는 목회 하는 게 어때?” “예, 감사합니다.” “그럼 교원씨는 귀가 후에 협회 21일 수련이 있으니까 수련 받고 목회 출발하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 기쁘고 은혜로운 수련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집에 오니까 은혜로움은 사라지고 걱정거리가 나를 짓눌렀다. 통일교인으로서 “목회의 길이 가장 의롭고 복된 길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나에게 큰 짐을 안겨다 주었다. 우리가정은 부모님의 경제력이 부족하여 내가 집안 살림을 맡아 생활해 왔다. 동생 2명이 고3, 고1이었다. 고3 남동생은 학년에서 1~2등, 고1 여동생은 학년에서 1등을 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모두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꿀 그런 상태였다.
결국 “내가 목회를 포기하고 동생들을 대학 졸업시켜서 축복받게 해서 세계적 인물이 되도록 하자.”고 나는 혼자서 이미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집에 오니까 그 걱정이 나의 목회 꿈을 움켜잡았다. 당시에 참아버님께서 “출가하는 자세로 동원이 되어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1일 수련회 연락이 왔다. 그러나 집안 걱정에 고민 고민 하다가 그날 못 갔고 또 그 다음날도 못 갔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무조건 부딪쳐 보자.” 하고 강남교구에서 임지생활을 하던 대상에게 전화해서 “내일 중앙수련소에 같이 갑시다.”고 했다. 집안일보다 하늘의 뜻을 더 중시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우리 부부는 만나서 목회의 꿈에 부풀었다. “앞으로 목회 나가면 생활비가 좀 힘들겠지?” “어차피 목회하면 교구장까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화를 나누면서 중앙수련소에 갔다. 직원이 대뜸 “전도부에 들렸다 오세요.”라고 해서 전도부에 갔더니 이틀 늦게 왔다고 꾸중하며 “이번 수련회 참여는 안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였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늦었고, 이번에 되돌아가면 다음에 못 올지도 모른다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직원은 완강하였다. “21일 수련회는 최소한 21일 정성 드린 끝에 21수련을 받아야하는데, 이미 정성이 깨진 것 아니냐, 원리강의야 아무데서나 들어도 되는데 이번 수련은 원리수련 그 이상이다.”라며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너무 너무 야속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금 같으면 무조건 순종하고 뜻대로 따르겠지만 당시에는 머리로만 아는 원리였기에 동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오랜만에 만난 지인 친구들이 해외취업을 했다가 귀국한 이야기가 머리 속에 번쩍 떠올랐다. “사우디에 가면 무조건 1년이면 통장에 500만원은 찍힌다. 교원이 너는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필체가 좋아서 사무실에서 근무할 테니까 잡부로라도 빨리 나가라.”라고 친구가 권유한 말이 떠올랐다.
복도를 걸어나오니까 대상이 내 얼굴을 보며 불안스러운지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틀이 늦었다고 안 된다고 한다. 차라리 다 집어치우고 사우디나 갈까?”했다. 그러자 대상은 단번에 하는 말이 “내가 아는 6000 가정이 사우디에 나가는데 일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하였다.
그 사람을 만났다. 처음 봤지만 6000가정이었기에 어색하지 않고 반가워했다. 그에게 내 입장을 설명하니까 그가 설득력 있게 차분히 말하였다. “내 생각으로는요, 현재 우리 통일교회 중에서 자립하는 교회가 과연 몇 곳이나 될까요? 그런데 목회 시작하면 평생 할 텐데, 1~2년 늦게 시작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해외취업을 해서 얼마간의 목돈을 마련해서 조금 늦게 목회를 시작해도 오히려 목회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 하네요.”
그래 맞는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내 입장에 딱 맞게 정확한 안내를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깍듯이 고맙다고 말하고, 속으로 “그래 내가 가야하는 길은 오직 사우디 행이다.”라며 다짐을 하였다. 나는 성격이 뭐든지 결론을 내리면 물, 불 안 가리고 무조건 앞으로 돌격하는 코뿔소 스타일이다. 따라서 사우디행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나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사우디를 갈까 골몰하고 있는데 우연히 나보다 5~6세 연상인 지인을 만났다. 그때까지 별로 아는 체 안하고 지내던 사이인데 나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차 한잔 하자.”고 하였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가서 차를 마시며 “어떻게 지내냐?”고 하니까 “사우디 갔다가 며칠 전에 귀국했는데 2~3개월 쉬었다가 또 나갈 것이다.”고 하였다. “나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이라고 반기며 말했다. 그를 만난 것도 내가 모르지만 배경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 사람 덕분에 사우디에 가게 되었다. 3개월 준비를 하고, 5~6명이 상경해서 주식회사 삼환기업의 하청업체인 P.C 팀에서 면접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합격했다. 면접관은 내 손바닥을 보자고 하더니 “손이 너무 곱다. 일 좀 하고 오라.”며 불합격시켰다. 그 후 3개월 후에 그 지인이 “지금도 해외취업에 관심 있으면 P.C팀 하청업체 000상무를 찾아가서 인사하라.”고 조언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우디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동한 여수교육장의 전화가 왔다. “여수교회에서 학생부장으로 발령 났는데 왜 안 오느냐?” 나는 이미 해외취업에 마음을 굳혔기에 “죄송하지만 준비가 안됐습니다.”며 거절했다. 만일 그때에 학생부장으로 출발했다면 나의 운명은 아마도 지금과는 아주 다른 입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중에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6. 꿈에 부푼 사우디 생활의 상처
1983년 12월 16일 서른살 나이에 처음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탔다. 무엇보다도 내 삶 전체를 걸다시피 했던 사우디행이었기에 무척 설레었다. 다란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절차를 끝내고 담맘지사로 갔다. 1983년도 우리나라의 겨울은 유난히도 엄청 추웠지만 사우디는 반팔 T셔츠를 입을 정도로 따뜻해서 살맛이 났다. 담맘지사에서 3일 묵으면서 건강검진 등을 마치고 수속을 끝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아침식사 후 회사버스를 타고 알바틴 현장으로 갔다. 시속 140km의 속력으로 달려서 오후 5시 40분쯤에 도착하는 먼거리였다.
가는 동안에 민가도 없고 산도 없고, 어쩌다 풀 한포기씩만 보이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사람을 보기가 드물었다. 가끔 유목민이 양떼를 몰고 지나갔다. 어쩌다 낙타들이 보일 뿐, 정말 신기할 정도의 사막이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신비스런 사막이고, 이게 그 부러운 산유국의 대표국가 사우디아라비아로구나!”를 실감하였다. 점심은 도로가에 주차하고 싸온 김밥을 버스에서 먹고 또 출발하였다.
알바틴 현장에 도착했다. 검문소가 있어서 신분확인을 하는데 그들도 해외취업 중인 케냐인이었다. 알바틴은 민가 한 채 보기 힘든 허허벌판 사막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도시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그런 공사인데 5층 아파트, 학교, 병원, 쇼핑센터, 체육관 등을 지어서 입주시켜 도시를 세우는 공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식사하고, 30분 후에 회사의 트레일러를 타고 현장에 도착하였다. P.C라는 콘크리트판을 조립해서 건물을 세우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공간, 철근자국, 바닥, 지붕 등에 실리콘을 쏘거나 시멘트 콘크리트로 매끈하게 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도 일은 편했다. 시간만 지나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P.C팀의 책임자가 나에게 왔다. “당신의 이력서를 봤는데, 앞으로 사무실에서 근무하면 어떻겠소? 사무실에 근무하면 전체 근로자의 평균급여에 각종 수당을 포함하면 현장근로자보다 급여가 나을 테니까 사무실로 오세요.”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며칠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때 현장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해서 빈소에 갔다가 우연히 처(아내)의 당숙을 만났다. 대단히 반가웠다. 그 분은 본사 삼환기업의 차장으로서 하청업체 기계팀의 감독관이었는데 나에게 “기계팀으로 오라.”고 했다. 기계팀으로 옮겼더니, P.C팀 책임자는 자기의 성의를 무시했다며 섭섭하다고 했고, 기계팀에서는 벌써 소문이 쫙 퍼져서 내가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처당숙이 나를 부르더니 새 현장으로 가라는 제안을 했다. “젯다라는 도시는 아랍 전체에서 가장 발달하고 아름다운 도시이고, 무엇보다도 해변이 있어서 너무 좋은 지역이다. 젯다 현장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고 하고 젯다로 갔다.
젯다현장은 건설 공사를 하는 곳이 아니고 지하4층 지상25층의 N.C.B 라는 은행건물을 관리하는 팀이었다. 총인원이 29명 뿐이었고, 전기팀에서는 전기부문을 총괄하고, 기계팀에서는 수도, 화장실, 냉방시설 등을 관리하였다. 나는 25층 맨 꼭대기에서 A.H.U 라는 냉방시스템을 매시간 체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 현장에는 태국, 필리핀, 네팔 등 동남아, 방글라데시아 인도, 파키스탄, 예멘 등 아랍, 그리고 케냐, 콩고, 이집트 등 아프리카에서 총 20여개 국가의 근로자들이 모였다. 한국 근로자는 가장 등급이 높은 편이었고, 우리 위로는 미국인, 영국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교수, 박사들이었다.
거기에서 사용되는 공통어가 영어였다. 아랍인들은 학교 교과서부터 아랍어와 영어를 공용으로 배우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영어를 사용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영어회화 공부를 억척스럽게 했다. 우리 근로자들 중에서는 내가 영어를 가장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나는 사우디인 살렘이라는 사람과 친했다. 그는 군출신이며 남예멘의 출생으로서 산업연수생이었고 순찰, 경비 등의 일을 맡았다. 또 컴퓨터 박사인 인도인 카심 과도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화를 체험하거나 또는 목격하였다. 알바틴에서 어쩌다 비가 한번 오면 온통 모래흙뿐이었던 사막에 갑자기 알 수 없는 풀들이 삐죽이 솟아났다. 그럴 때면 파키스탄 등 아랍인들은 그 풀이 몸에 최고라며 풀을 뜯어갔다. 또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은 들개를 잡아서 보신하였다. 막사 근처에 개밥을 몇 군데 놔두면 들개들이 와서 먹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와서 바짝 긴장하고 경계심을 갖추고 개밥을 먹는다. 그런데 며칠간 잘해주면 들개들이 경계심을 풀 게 된다. 그때에 갑자기 공격하여서 들개를 잡아서 보신한다. 개고기 보신탕의 문화가 중동 사막 한가운데서 이어졌다.
또 어떤 이는 사막에 나가서는 구덩이 같은 곳에 물을 부으면 어른 손바닥보다 큰 도마뱀이 나오는데 이를 잡아서 삶아먹었다. 그것을 공룡새끼라고도 불렀는데, 한국의 개구리와 비슷하였다. 인간은 창조원리에 의하여 고기를 먹고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기에 사막에서도 고기를 먹는 문화가 생겼다.
또 병원이나 쇼핑센터 등에 단체로 갈 때 줄을 서게 되는데 아랍인들은 모두가 아랍인 우선이라며 우리가 먼저 선 줄을 무시하고 그들이 먼저 들어갔다. 아랍인들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이스마엘의 후손이기에, 그들은 모두 조상을 믿는 생생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하루에 5번씩 예배를 드리는데 “알라, 알라.”를 외치는 방송이 나오면 상가든 병원이든 모두 문 닫고 예배드리고, 도로를 달리던 차들은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방석을 깔고 우리의 경배식 비슷하게 절을 하며 예배를 드린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일상생활은 산 신앙생활인 것 같아 보였다.
젯다에서 약 2년 정도 근무했다. 젯다는 해변도시로서 1980년대까지는 아랍전체에서 가장 발달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휴일이면 차를 타고 20여분 운전하여 바닷가에서 놀고, 바닷 속에 들어가 문어, 조개, 소라 등을 잡아와서 회식을 했다. 그런데 나는 몇 번 바닷속에 들어가 봤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고, 뭔가를 잡지 못했다. 해산물들도 현지인들의 눈에만 보이는가 보다.
은혜롭고 편하고 즐거웠던 31개월간의 사우디 생활을 마치고 1986년 7월 20일, 사우디를 출발해서 꿈에 부푼 귀국을 했다. 그런데 공항에 마중을 나온 아내가 내 품에 선채로 안기더니 어깨가 들먹일 정도로 울었다. 나는 이유도 몰랐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어깨만 꼭 안아주었다. 우리는 거짓말처럼 임지생활 할 때는 매일 편지를 1통씩 주고받았고 때문에 월요일에는 2통씩을 받았다. 또 사우디 생활할 때는 이틀에 한통씩 편지를 주고받곤 했었는데, 이 울음은 보고픔일까 서러움일까 아니면 원망일까?
집에 와서 보니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달 월급과 퇴직금만 남아 있었다. “그래 어차피 나는 하늘이 원치 않는, 혈기를 부리고 택한 길인데 무슨 돈이냐? 그냥 건강하게 귀국한 것만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나를 위로하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시댁을 위해 곤경을 극복하며 마음고생이 컸던 아내가 고마웠다.
그런데 동생 교두는 내가 7월에 귀국하는 것을 알고 결혼을 서둘렀다. 부모님은 “형이 귀국하고 나서 결혼하라.”고 그렇게 설득하셨지만, 동생은 내가 귀국하면 세상결혼을 절대 반대할 테니까 서둘러 5월에 결혼했다. 몇 년간 열심히 살았는데, 여러가지로 득이 하나도 없고 피해만 컸다.
22일에 대천 집에 왔는데 시차 때문인지, 28일까지 밤잠을 못 잤다. 뜬눈으로 세웠다. 28일 약국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사 먹고 나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불과 31개월 해외생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니까 국내 물정을 통 모르고 그저 어리벙벙했다.
7. 일화 입사
2개월쯤 쉬고 있는데 김창근 천안교역장의 추천으로 일화 천안영업소 창고장으로 10월 1일에 입사하였다. 참부모님께서 세우신 우리 기업체이기에 상당한 애착과 애사심을 가졌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우리 식구가 아닌 직원들은 괜한 피해의식을 가졌고, 또 관리자는 식구들에 대해 지나친 경계심을 가졌다. 보이지 않게 식구들의 피해가 컸다.
식구가 아닌 고려대 법대 출신의 소장은 겉으로 매우 청렴한척했다 그런데 출장 때마다 서무가 관습인양 교통비를 챙겨주는데 그때 마다 그게 나에게 노출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은연중에 경계하였다. 또 내가 수작업으로 상품 하차작업을 하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꼼짝 못 한 적이 3차례나 되었다. 그때는 지게차가 없었고, 사람이 무겁게 제품을 내리고 올렸다. 소장은 나에게 병가(病暇)를 권유했다. 나는 병가에 대해 잘 모르고 시키는 대로 2개월 병가를 냈다. 그 후에 복직하려니까 소장이 받아주질 않았다. 그제야 심각함을 깨닫고 지점장께 면담신청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화 본사 총무과에 찾아갔더니 업무계장이 나에게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럴 경우에는 병가가 아닌 공상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차이점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미 처리가 됐기에 어쩔 수 없으니까 다른 영업소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고 하였다. 순수한 심정에 아픈 상처가 생겼다. 원리를 모르는 이가 신사답지 못하게 사는 비겁한 처세술을 체험했다.
그런 연유로 입사 1년도 안되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안동영업소로 가서 근무하게 되었다. 안동영업소장은 1800가정 장상하 소장이었다. 그는 대단한 호인이셨고 나를 끔찍이 아껴주셨다. 영업에 관한 책도 주시며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는 나중에 목회도 하셨고 자랑스럽게 정년퇴직을 하셨다. 식구로서의 심정을 가진 소장과 그렇지 않은 일반인 소장과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비교할 수 있었고, 뜻을 아는 식구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인지하였고, 자부심을 가졌다.
나는 영업은 원칙대로 루트쎄일을 했고, 청송교도소를 개척해서 납품했다. 점주들 중에 기성교인이 있어서 일화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순교자의 자세로 불매운동에 앞장섰다. 그런 역경을 듣고 나는 필승하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내가 맡은 지역은 전임자가 판매실적이 7위였는데, 내가 2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내 루트가 가장 좋은 루트라고 평가가 났다.
영업소에는 공채 1기생들이 여러 명 있었고, 나는 그 공채 1기생들보다 나이는 위였지만 입사가 늦어서 주임 물망에는 늘 그들에게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영업실적, 애사심, 리더십 등이 인정을 받아서 점점 나를 주임 후보로 거명하게 되었다. 권주임이 음주운전사고로 퇴직처리 되었을 때 타 영업소에서 주임이 왔다. 이어서 다른 선임주임이 퇴사하면서 나를 주임으로 추천했고, 최소장은 나에 대한 주임추천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지점장께 추천하였다. 나는 첫 번째 관리자인 주임이 되었고, 소장의 기대에 부응하며 영업실적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본사는 판매실적 때문에 할인을 많이 했지만 영업실적이 좋지를 않아 비상체제로 돌입했다. 당시 특채된 영업 본부장은 각 영업소를 순회하면서, 주임과 소장의 브리핑을 받았다. 나는 우리 파트의 영업실적 거래비율, 타사와의 비교분석, 판매향상 대안 등을 브리핑했다. 내 브리핑 성적이 발표 자세와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최고 점수 받았다며 축하를 받았다. 소장 승진 1순위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영업본부장이 사정상 퇴사를 하는 바람에 그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 심히 아쉬웠다.
8. 두 아들의 출생과 환고향
아내는 자연유산을 두 번이나 하였다. 자녀 출산에 걱정을 많이 했고, 큰애 임신 중에 10개월 내내 입덧했다. 큰애가 1988년생, 둘째가 1989년생으로서 연년생이다. 첫째가 태어나자 온 세상이 우리가정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고, 둘째가 태어나자 이제는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진 듯 온통 복이 차고 넘치는듯했다. 안동교회에서는 777가정이신 이정승 교역장께서 우리가정을 대단히 어여삐 봐 주셨다. 우리부부에게 집사라는 호칭대신에 장남 이름을 따서 성길아빠, 성길엄마라며 아껴주셨다. 때로는 밤12시에 찾아오시어서 뭘 주고 가시는 등, 우리가정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다.
아내는 아이들을 정성껏 참으로 잘 키웠다. 8개월쯤부터 아이들에게는 참부모님께 경배 드리도록 했고, 식사시간에는 노래를 부르며 기도하는 습관을 키웠고, 또 옛날 동화를 들려주듯이 참부모님에 관해 설명해 주곤 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살까지 간다는 말을 늘 상기하면서 어려서부터 자녀들이 참부모님을 모시는 참자녀로서 곧게 성장하기를 바랐다.
제직회장이던 장상하소장이 퇴사하고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공석이 된 제직회장을 선출하자고 식구들이 모였다. 당시에 777가정, 1800 가정의 식구가 계셨지만 “뭔 투표야. 성길아빠 시키면 되지”라고 공동일치 하여서 안동교회에서 제직회장을 하게 되었다. 1991년 8월 29일로 기억되는데, 이정승교역장께서 성일 설교말씀에 “참부모님의 환고향 명령이 내려졌으니 모든 축복가정은 환고향을 해야 한다. 환고향 하려고 교역장 사직서 냈고 인근에 집 한 채 장만했다. 성길아빠도 여기에서 돈만 벌려고 할 게 아니라 환고향해서 가정교회장 활동을 해야 된다.” 라고 강조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당시에 원리수련을 받다보면 2세들은 우리의 육신만 빌렸을 뿐 참부모님의 아기들이라며 영재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전도활동과 일화 제품 영업외에는 도무지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도대체 무얼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나 눈앞이 캄캄했다.
예배 후 집에 와서도 온통 걱정뿐이었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환고향 어떡해야지?” 아내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해야지요.” 하였다. “그런데 환고향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훨씬 힘들지도 몰라.” “참부모님 명령을 받고 환고향 하는데 설마 목구멍에 거미줄이야 치겠어요?” “그래, 갑시다. 어쩌면 앞으로는 효도하고 싶어도 효도할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에 순종해서 꼭 환고향 해 효도하자구요.”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고 가뿐해졌다. 그래서 “우리 환고향 목표를 정합시다.” 했다. 나는 결정될 때까지를 심사숙고하지 결론이 나면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곧장 아내와 둘이 환고향 목표를 세 가지로 정했다.
첫째, 반드시 가정교회장으로 승리한다. 둘째, 환고향시대이므로 고향에서 반드시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셋째, 가정교회장으로 또 경제적으로 큰성공을 해서 협회 발령받은 목회자를 보필한다.
9. 설레임과 환희의 환고향
1991년 10월 31일, 설레는 마음으로 큰 꿈을 품고 환고향했다. 아내는 절대순종의 신앙생활, 모심의 생활을 하셨던 장인어른의 신앙을 그대로 본받아서인지 뜻길에는 망설임도 양보도 없이 무조건 “해야지요.”하였다. 그래서 뭘 물어보면 대답을 듣고 속이 가벼워지고 가뿐해져서 후련하다. 그것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하면 할수록 환고향 결정이 훌륭했다.
3년 동안 남편동원에 동참하지 못한 죄송함이 늘 가슴을 짓눌렀는데 환고향은 3년 동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온 가족의 숙식 문제를 비롯하여 각종 예측 할 수 없는 일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절대순종의 자세를 가진 나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또 옆에서 “해야지요.” 하며, 함께 해온 아내가 마냥 고맙다. 후에 부도가 나고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워졌지만 환고향은 생각할수록 은혜로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화대리점을 하게 되었다. 영세했지만 일단은 대리점 사장 직함이 있으니 몇년만에 환고향을 해서 활동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당시에는 환고향한 축복가정은 기존교회에 나오지 말고 본인가정교회의 성장,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반이 없고, 교회 소식을 모르면 우리가 손해라고 생각하여 대천교회로 나갔다.
신임교역장으로 3만 가정인 김종수 교역장이 취임했는데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교회로 나왔던 대천 출신이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뼛속까지 통일교인일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날 보더니 대번에 “형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송구스러워 그냥 김집사라고 부르라고 했다. 체격도 좋고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니 너무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교회를 살펴보니 그동안 거기서 목회를 하셨던 교역장 출신이 있었다. 그는 일요일 아침이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셨다가 오후에 교회에 들어와 계신다. 사모님은 식구가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시고 안 계셨다. “혹시 이분이 환고향 명령에 불복하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들었다. 김종수 교역장께 “왜 저분은 환고향 안 하시는가요?”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마도 이사경비가 없어서 못 하시나 봐요”라고 하였다. 갑자기 내 머리가 충격으로 띵 하였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이 짧을까를 자책해 보았다. 목회자의 고통스런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나 자신을 반성했다.
며칠 고민 끝에 김종수 교역장께 “이사경비문제를 식구들에게 의논해 보면 어떨까요?” 했더니 “누가 나서서 하면 좋지요” 한다. 그렇게 해서 일요일 예배 후에 몇 년 만에 환고향한 내가 감히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큰돈은 아니지만 특별헌금이 나와서 그 돈을 드렸다. 교역장은 그 돈을 보태서 조그만 한옥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 교역장은 이후에 나를 만나면 참 반가워하고 좋아하셨다.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대회를 앞두고 각 교회로 인원동원 목표가 내려왔다. 제직회를 해체해서 교회 행사에 누가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일이 추진이 안 되고 날짜는 자꾸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예배 후에 또 내가 나섰다. 당시 인원동원은 버스 12대 정도였다. 대략 소요경비는 아침 간식, 중식, 오후 간식, 석식, 버스 임대료 등으로 약70만원 정도였다. 내가 1대분을 헌금한다고 하니까 한 대씩 또는 헌금 얼마씩 해서 그 자리에서 경비헌금이 약정되었다. 그러자 누군가 제직회를 부활하자고 했고, 논의의 여지가 없이 내가 제직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렇게 해서 환고향해서 제직회장을 맡게 되었다.
환고향해서 첫째 목표가 가정교회장 승리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화산동 입구 도로변에 교회 짓기 좋은 나대지가 있어서 이곳에 500~800평의 땅을 사서 교회를 짓자고 아내와 결정을 하였다.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은 그 곳에 가서 기도를 하며 가정교회 성전건축 정성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드렸다.
그런데 제직회장 되고 얼마 후에 여성연합 시군대회가 있어서 대천교회는 6월 25일로 날짜가 정해졌다. 이 시군대회로 우리 가정은 한 단계 성장도 했고, 너무 은혜로운 대회였다. 인원동원 목표가 3,000명이었고 그때 우리 6000가정 부인들이 중심역할을 하였다. 교역장은 새 제안을 하였다. “일단 이번 행사에 어머님만 오시기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정성에 따라서 아버님도 동행하실 수 있으니 정성을 드리자.”라고 하셨다.
이를 위해 식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서 헌금 약정을 하였다. 우리 가정은 210만원, 아들 둘 각각 12만원씩, 동생들 4명 명의로 12만원, 부모님 명의로 12만원을 했고, 캔음료수 90개짜리 40박스를 기증했다. 그러자 아내가 조심스럽게 “친정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지금 이럴 때 신이 나서 활동 하실 텐데” 하기에 “우리가 예천교회에 장인어른 명의로 헌금 좀 할까?” 했더니 금방 얼굴이 환해지며 “그러면 좋지요” 해서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예천교회로 헌금을 했다.
아내가 제안을 했다. “행사 후에 참어머님 혹은 참부모님 양위분을 모시고 식당으로 가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쓰던 수저를 쓰셔야 하는데, 우리가 수저 세트를 준비해서 그 수저를 쓰시도록 하시죠.”고 했다. 나는 그 세밀함에 놀라며 당장 은수저 세트를 준비했다. 또 참어머님께서는 식음료로 탄산을 뺀 초정수나 녹차를 드신다 해서 일본에서 보내준 아주 구수한 현미녹차를 준비했고, 사놓고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다기 세트가 있어서 그것들을 준비해 올렸다.
또 부모님께 드릴 성물을 준비하라고 해서 의논 끝에 한산모시로 한복을 해 드리기로 결정하고 교역장께 보고하니 이미 누가 한산모시 한복을 하기로 했다. 다시 뭘 할까 고민 중에 아내가 현금으로 드리자고 했다. 결국 아들 둘의 주택부금에서 돈을 신권으로 빼서 하얀 화선지로 감싸고 매일 기도를 하면서 준비했다.
행사는 대단한 승리였다. 3,000명이 목표였는데 준비한 우산3,500개가 다 나가서 나중에 온 사람은 못 줬고 90개짜리 음료수 40박스가 다 나갔다. 인원목표는 초과달성했다. 또 아내는 행사에서 어머님의 말씀이 끝나신 후 결의문 채택을 하는 책임을 맡았고, 멋지게 잘 해내었다. 나는 박수를 많이 쳤다. 자랑스런 내 아내였다.
대회가 끝나자 참어머님께서는 대단히 흐뭇해 하셨다. 전체 행사를 마친 후 해수욕장의 식당으로 참어머님을 모셨고, 식사를 마치신 후에 가정별로 경배드릴 기회가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니까 서용원 충남 교구장께서 참어머님께 “허허, 이 부부가 애기들 통장을 털어서 어머님께 헌금을 한답니다.”라고 보고를 드리니까 어머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그 돈이 애기들 돈이 맞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예, 얘들 주택부금 들어가던 돈입니다.”라고 하니까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가 참아버님께 너희들의 정성을 꼭 보고 드리겠다.” 하시면서 당시 4살이던 둘째 아들 성원이에게 크리스탈 글라스에 담겨있던 포도를 주셨다.
참어머님께서 떠나신 후에 식기 등을 나누는데 우리가정이 준비해서 참어머님께서 친히 쓰셨던 수저세트, 다기세트, 또 참어머님이 주신 성원에게 주셨던 크리스탈 글라스가 우리 집으로 왔다. 다른 접시들도 나눠졌다. 참어머님께서 친히 쓰셨던 그릇들이었다. “정말 이게 가보 아닌가?” 지금도 그것을 볼 때마다 은혜가 넘친다. 그뿐이 아니라 6월까지만 해도 교두와 교일이는 내가 축복을 권유해도 완강히 다음에 받는다고 하더니 둘이 모두 축복을 받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참어머님대회 승리에 영계의 대역사임이 확실하다
어느 날 예배 후에 교역장께서 남자 중심식구들에게 잠깐 모여 달라고 하였다. 본인 가족들이 모여 재산을 나눠 상속을 받는 게 있는데, 그 돈으로 중고 승용차 한 대를 사려고 식구들께 보고 드린다고 하였다. 777가정 한분이 “만일 사고라도 나면 뒷수습을 식구들이 해야 되서 식구들이 막대한 부담을 안게 되니 절대 반대”라고 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모임이 끝나고 식구들 돌아간 후에 교역장께 “우리가 승용차를 사드리지 못해 죄송한데, 그냥 교역장님 돈으로라도 사세요.”라고 간청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우리가정만이라도 늘 목회자편에서서 목회자와 하나 되고 우리가정 한 가정만 보고도 목회 할 맛이 난다고 할 정도로 하자.” 그때부터 “무조건 목회자편에 선다.”는 기준이 정해졌다.
아내가 청평수련회에 갔다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그때까지 청평수련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인간은 육신을 쓰고 원리말씀대로 생활하면서 영인체를 성장시키면 성화 후에 자연스럽게 천국에 가는데 왜 청평수련이 별도로 필요하냐?”고 했다. 그러나 하도 아내의 권고가 심해서 청평수련에 참석했다. 대모님의 말씀은 내 원리기준으로는 확실한 영계의 메시지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시간되는 대로 청령수련을 갔고, 조상해원, 조상축복식도 하게 되었다. 김종수교역장 후임으로 이군주교역장, 장군익교역장이 취임하시는데 늘 목회자와 하나 되고자 노력했다.
10. 160가정 승리와 부도(不渡) 그리고 축복활동 승리
협회에서 160가정 축복식이 하명되었다. 초기에는 모두가 수안보로 가서 축복식을 하였다. 마을노인회장을 통해서 부부만 가도록 간곡히 요청했으나 무슨 약장사 속임수라며 믿지를 않아서 상당히 어려웠다. 겨우 노인회장을 설득해서 한 차 태워가서 축복식을 하려고 하면, 많을 땐 5쌍, 어떤 때는 2쌍도 있었다. 한번 갈 때마다 비용은 70만원정도 드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러자 이군주교역장께서 가정별로 일정액을 헌금하라고 하고 헌금한 가정부터 마을로 직접 찾아가서 면사무소, 또는 마을회관 등에서 부부를 초청 잔치를 하고 드레스를 입혀서 기념촬영을 해주며 축복식을 진행했다.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좋아서 160가정 축복식을 순식간에 완료했다. 역시 움직이고 활동을 해야 은혜롭고, 힘이 솟는 법이었다. 믿고 뛰는 활동하는 자에게 하늘의 역사가 있음을 체험하였다.
환고향을 했더니 지역 사람들을 내가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환고향 직후 친구가 나를 보더니 너무 반갑고 좋다면서 죽정동, 화산동 친구들로 청우회를 조직해서 내가 1~2대 회장을 맡았고, 청우부인회도 만들어 부부연합 모임이 되었다. 또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는 통일교인인 나를 좋아해서 또 다른 모임을 하나 새로 조직했다. 참부모님 덕분에 내가 환대를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형님이 보령시장에 출마해서 진생엎 3박스(300개)와 약간의 후원금을 냈는데 시장에 당선되셨다. 그 후 시장이 우리 교회로 당선사례 화분을 보냈다. 내가 세계평화청년연합 보령시 지회장을 하면서 보령문화원에서 창립대회 할 때 보령시장이 축사를 하여 상당히 성대하고 품격 있는 창립대회가 되었다. 해수욕장에 위치한 한화콘도에서 교회행사가 있었는데 이때도 시장이 와서 축사를 했다. 또 청년연합 주최로 핀란드의 헬싱키시와 보령시의 자매결연식 행사 때도 시장이 와서 축사를 하였다. 시장이 내가 잘 아는 분이다 보니 행사 때마다 시장이 축사를 해줘서 너무 품격 있게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나는 고향 시장매니아가 되었다.
연합회장직이 새로 생겼다. 보령에는 보령출신이시며 수도권에서 목회하시다가 정년퇴임하신 박영길목사께서 연합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 잘 업무수행 하시다가 갑자기 사임하셨다. 내가 환고향한 민모씨에게 권유를 했다. 그는 수도권에 약간의 투자를 해놓고 매일 세계일보 사무실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던 터라 여러 가지 조건이 적임자라 판단되어 부탁했다. 그는 “아니. 이게 뭔 말이야. 형님이 하셔야지”하고 난색을 표하더니, 1주일 후에 “형님 믿고 할 테니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돼요.”하면서 수락하고 식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취임했다.
몇 개월 후 연합회장 우선순위로 브라질의 자르딘 수련소에서 참부모님 모시고 참부모님과 함께 부부가 40일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 이분들은 큰 복을 받겠구나. 큰 영광이 함께 하겠구나.”라고 판단을 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령교역장으로 목회를 시작하였고, 지금 유능한 목회자가 되어 현역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참부모님은 복의 근원이시므로 모심의 태도로써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소자본으로 일화대리점을 운영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냥 혼자 일화 제품만 취급할 수도 있으나, 타 업체와 경쟁에서 지는 게 싫었다. 어차피 여러 음료수를 취급하면서 영업사원을 두고 크게 해야 승산이 있고 경쟁에서 이기려면 덤핑도 있어야 하였다. 나는 차츰 사채에 손을 대었고, 결국 망하고 은행에서 신용불량으로 거래가 중지됐다. 2곳에서 피소가 되고 돈이 없으니까 변호사 선임은 꿈도 못 꾸고 혼자 소송에 대응하다보니 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왜 망했을까?”를 곰곰이 원인분석을 했다. 영업 잘하고, 내가 검소하고, 거래처 관리 잘하고, 재고관리 잘하고, 망할 이유가 없는데 망했다. 그렇다면 “영업적인 문제가 아니고 원리적인 면으로 원인분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분석해보니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다. 원인이 밝혀졌다.
우리가 환고향을 결심하고 3대 목표를 정했는데 그 첫 번째 목표가 가정교회장으로의 승리였다. 환고향 직후 5~6개월은 교회부지매입 정성을 드리고 가정교회활동 승리 정성을 드렸으나 제직회장 및 청년연합 지회장 되어 여러가지로 신경쓰다보니 아예 가정교회장 활동을 잊어버렸다. 그제서야 망한 이유를 알았다. “목표를 정한 하늘과의 약속을 안 지키고 내 맘대로 했으니까 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가정교회장 활동을 했다는 조건이라도 세우고 넘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심기일전하였다, 아내와 의논했다. “여보 나 전도 활동 좀 할까?” “하면 좋지요.” “그래 축복식이 있어서 어쩌면 전도가 잘 될지도 몰라. 그럼 목표를 몇 명으로 정할까?” 그때는 3억 6000쌍 1차로써 이미 축복일자가 8월 25일로 정해져서 약 4개월 정도 남았었다. “3명 정도 하시지요.” “3명 하려면 아예 안하겠다. 4개월에 40명은 무리이고 21명으로 하자.”하고 그때부터 그동안 알았던 미혼자들을 만났다.
보령시 전역을 돌며 미혼자 명단을 작성해서 아침 점심 저녁 호명기도를 하며 활동했다. 그렇게 활동해서 1명이 축복비 포함 완전 서류 제출하는데 1달 반 걸렸다. 완려했으나 너무 힘들었다. 그 다음에는 7일이 걸렸다. 좀 쉬워졌다. 매일 전도 활동만 해서 여러 명 받았는데 활동을 마치고 교회로 가니까 장군익교역장께서 “수고 많았습니다. 지금 서류 몇 명 냈지요?” “9명입니다.” “서류를 오늘로 마감하시지요.” “2~3일 후에 또 2명 할 수 있습니다.” “협회에서도 준비기간이 필요하니까 오늘로 서류를 마감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전도활동한지 100일 만에 9명을 전도했고 후에 이들 9명 모두 약혼이 됐다. 중졸 2, 고졸 3, 전문대졸 4명이었다. 너무 은혜롭고 황홀했다. 엄마가 아기를 출산하는 기쁨 그 이상의 환희를 체험했다.
이때에 이기성 원장께서 충남교구장으로 계시면서 나를 기억하시게 됐고, 어느 날 나에게 “교구 전도부장으로 시무할 의향이 없으신가요?”라고 물으셨다. 며칠 곰곰히 고민 끝에 “너무 죄송하지만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때 전도부장부터 열심히 했으면 나는 지금 어떤 신분이 되었을까? “공적인 뜻길을 향한 선택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하며 자주 그 때를 아쉬움으로 반추해 보곤 한다.
11. 수원에서의 버스기사 생활과 아내의 부교회장 임명
아내가 입적 동원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해야하니까 택시운전을 시작했고, 포장마차 호떡장사, 활어유통업체 영업활동을 했다. 그때 수원에서 수입육 업자가 나를 보고 제안을 했다. “수원에 와서 자기를 도와주면 3년 후에는 삼겹살집 식당이라도 하나 내 앞으로 해 줄 테니까 인력관리와 세무관리를 좀 해 주세요.”
2002년 12월 23일에 수원으로 갔다. 하늘 뜻 받들어 환고향을 했는데, 결국 사탄에 굴복하고 하늘 뜻에 반하는 고향을 떠난다는 자괴감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하늘은 그래도 나를 기억하시고 보다 나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는 확신을 갖고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자고 나를 몰아세웠다.
수입육업체에서 부장직책을 맡았다. 사장은 매입자료가 210억이 넘는데 잘못해서 영업이익은 없고 종합소득세만 4억여원 부과했다고 자랑 겸 불만을 터트렸다. 안타깝게도 사장부부가 유통에 대해 너무 몰라서 나와 통 대화가 안 되었다. 거래처 관리, 개척방법, 판매 또는 세무관리 등을 너무 모르니까 이익보다 종합소득세를 많이 받았던 것이다. 서로 너무 안 맞으니까 불편하고 1년 만에 광우병 탓하며 퇴직하라고 해서 사직하고,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것이 버스운전이다.
2003년 11월, 날씨가 갑자기 너무 추워져서 혼자 대천에 계시던 영육축복 받은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더니 발음이 너무 어눌하셨다. 아무리 들어봐도 정상이 아니라서 주말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요일 어머니가 혼자 뇌경색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동사무소 직원이 발견해서 전화부를 보고 겨우 우리에게 연락이 됐다. 급히 내려갔으나 이미 어머니는 골든타임을 놓쳤고, 의식이 없고 그냥 혈전용해제만 주사하고 있었다. 분당서울병원으로 이송해서 1주일 만에 의식이 회복됐으나 지능은 4-5세 수준이며 가족 누구도 알아보질 못했다. 월 진료비가 330만원 정도인데 남동생 교두와 여동생 옥자가 둘이 진료비를 대고 6개월 후에는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퇴원을 해서 대천으로 갔다. 거기에서는 165만원 정도 들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진료비가 많이 감액됐다는데 나는 진료비를 부담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렇게 지내시다 끝내 어머니는 다행히 영육축복가정으로 2007년 7월 2일에 육신의 한 많은 생을 거두시고 성화하셨다. 성화식은 성대했다.
김창근 경기남부 교구장과 부교회장이 함께 하셨고, 장군익 강원교구장이 오셔서 권사직분을 주셨다. 대천교회 식구들도 많이 오셨고 내가 고향을 몇 년 동안 떠나있었음에도 소식 접한 친구들이 많이 왔다. 대천교회의 편길동 장로께서 이틀째도 오셨길래 “장로님, 바쁘신데 또 와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했더니 “당연히 와야지요. 김장로님은 대천교회의 산 증인이고, 산 역사인데 이런 때 우리가 꼭 와야지요.” 하셨다. 아! 그렇구나 이게 심정세계이고 이래서 매사에 성심껏 해야 하는 것을 절감했다.
성화식을 마치고, 조의금을 정리한 후 아내와 의논해서 대천교회 식구들이 한 조의금은 감사편지와 함께 전액을 대천교회에 헌금했다. 성화식 이후에 몇 년이 지나도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목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이지 내가 이토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목이 메일 줄은 몰랐다.
아내는 수원에 와서 집안 살림이 너무 급한 탓에 롯데마트에 청소부로 들어갔다. “왜 하필 청소부야?”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 물어봤더니 “뭐가 어때 급한데 뭐든지 해야지.”라고 하였다. 맞는 말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둘이 열심히 일해도 여전히 생활비가 한 달에 10~15만 원씩은 부족하였다. 따라서 채무를 정리할 여력은 없고 채권자들의 성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급여 압류 위험 때문에 어쩔 도리없이 법원에 가서 상담 후에 결국 우리는 2006년도 파산신청을 해서 2007년 6월에 확정판결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니까 교회식구들의 애경사에 동참하질 못했고, 그러다보니 교회 나가는 자체가 민망스러워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교회 안 나가면 아이들도 안 나갈 것이 뻔해 안 나갈 수도 없고, 얼굴에 철판 깔고 교회 나갔다. 아내는 청소부, 식당일을 하다가, 경양식당에서 주방장이 되어 근무했지만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 작은 수술을 하게 됐고 그 일로 인해 쉬게 되면서 이 기회에 직업을 바꾸려고 웃음치료강사, 치매예방강사, 요양보호사 등의 자격증을 땄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잘 어울리게 되었다.
요양보호사 센터장으로 나갈 준비 중인데 UPF에서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가고는 싶어도 급여가 너무 적어 고민하였다. 내가 “우리는 늘 교회에서 앞장서서 주인 노릇만 하다가 수원에 와서는 한발 비켜서서 있으려니 숨이 막혀 미칠 지경인데, 당신이 UPF에서 근무하면 그게 교회일이고 교회와 가까워지니까 하는 게 좋겠어.”라고 제안했더니 아내가 수용하였다. UPF에서 12년 정도 근무 하다가 이승일 교구장의 배려로 수원교회의 부교회장이 됐다.
2022년 최정환 대교구장께서 취임하시고, 많은 지도와 격려를 해주신다. 우리 가정이 목회가정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목회를 자꾸 피해가니까 마지막으로 아내를 목회자로 세워주셨 나 보다. 나는 그냥 너무 감사하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버스 기사지만 버스 기사라는 직업이 알려 질까봐 싫고 창피하다. 버스 승객 중에는 아주 친절하고 인격적인 분도 계신데 반해 약 15% 정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반말하는 게 너무 싫다. 그래서 버스 기사라는 게 싫다. 그런데 버스 기사이기 때문에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게 있었다.
2008년 어느 날 교회장께서 “내일 쉬시면 아버님께서 주관하시는 천정궁의 새벽훈독회에 참석해 보시지요?”라고 했다. 이게 왠 떡이냐 하면서 나는 꿈도 꿔보지못한 아버님의 새벽 훈독회에 갔다. 놀랍게도 그때부터 경기남부 훈독회 날이면 나에게 연락을 해주어서 아버님 성화하실 때까지 1년에 6~8회씩 총 30여회에 걸쳐 아버님 훈독회에 참여하는 은사를 입었다. 참부모님을 모시는 자세를 가지면 생각하지 못한 복이 굴러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게 모두 버스기사로서 쉬는 날이 있어서 가능한 혜택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일에 430가정 승리도 버스기사로써 쉬는 날이 있어서 가능했다. 내가 싫어하는 버스기사의 특혜였다.
내가 협회원리시험에 합격했다. 2013년 어느 성일 예배 시간에 김종출 교구장께서 우리 수원교회에 요시다장로가 협회원리시험에 합격했다고 발표를 하셨다. “나는 일본에서 온 요시다장로도 합격을 하는데 내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나도 도전하자.”고 결심하고 후반기에 도전했지만 합격소식이 없다. 도대체 어느 정도 부족한지 궁금했다. 더구나 전유상 감독관께서 답안지를 보시고는 “아이구, 장로님 대단하시네요. 합격되시겠네요.”까지 말했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래서 2014년에 다시 도전하였다. 그 후에 일요일 예배 때 김종출 교구장께서 합격 발표를 하셨다. “김교원 장노가 협회원리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협회 전도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원교회의 김교원씨가 누군가요? 지난번에도 협회원리 시험에 응시했는데 감독관 서명이 없어서 불합격처리 했는데 이번에도 감독관 서명이 없네요?’ 그래서 내가 얼른 도장을 보내어 감독관 서명을 하고 합격처분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셨다. 식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지상에서 살면서 말씀심판은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흐뭇하였다.
우리아이들은 초등학생시절부터 고3 졸업할 때까지 방학이 되면 여름이던 겨울이던 꼭 청평수련을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했다. 무엇보다도 방학 때가 되면 청령수련 갈 생각을 하는 아들들이 고맙고 또 방학 때 꼭 청평수련을 보낸 우리가정이 자랑스럽다.
성길이를 설득해서 순결학과에 진학하도록 했다 1년 후에 성원이도 순결학과에 갔다. 성원이는 순결학과보다는 다른 대학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가정형편상 어쩔 수 없이 반강제로 순결학과에 보냈다. 그로 인해 아빠에게 불만도 있었지만 그게 우리가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중에 성원이와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성원이의 서운함이 다소 해소되었고 성원이는 1학년 때 휴학을 하고 군입대를 했다.
12. 꿈만 갔던 성길이의 2세 축복
성길이는 2009년 11월 천일국 매칭 축복을 받았다. 며느리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환고향을 한 일본 6000가정의 딸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랐고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학교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유학생활을 한 4개국에서 자란 순결학과 학생이었다. 복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불변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더니 며느리를 통해 복을 주시는구나.” 하며 감사를 드렸다.
둘째 성원이는 2010년도 군생활을 하면서 일본아이와 천일국 매칭축복을 받았었으나 깨졌고, 그로인해 성원이가 이 아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성원이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아빠의 뜻에 거역하지 않아서 너무 고맙다. 전역 후에 축복을 받기위해 2-3개월에 한 번씩 프로필을 보며 미팅을 했으나 성사가 안 되었다. 얘기를 해 보니까 여성들이 “엄마가 나가라고 해서 나왔어요.” “아직은 축복받기가 이르다고 생각해요.” 등의 말을 했다고 하였다. 거기에서 성원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우리가 축복에 열심히 하는걸 조규조 교구장께서 보시고 직접 2명을 소개하셨고, 또 후에 하시는 말씀이 성원이를 당신 사위 삼으려고 생각도 하셨단다.
결국 황보국 2지구 회장께서 김창수목사의 딸 이선이를 직접 중개하시고, 회장 사모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축복을 받게 됐다. 물론 그 과정에 이선이의 현명하고 아름다운 지혜가 빛을 발했고, 그래서 이선이가 너무 고맙고 예쁘다. 그러다보니 이선이의 부모님이 한없이 고맙다. 5년 동안 20여 차례나 미팅에 나가기까지 여러 가지로 짜증도 났겠지만 아빠 말을 거역 안하고 계속 노력했던 성원이도 한없이 고맙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문에는 내 아내를 비롯해서, 며느리를 통해 복을 주셨다. 아버지가 내 아내를 그토록 칭찬하시고 증거하셨듯이 참으로 훌륭하고 감사한 며느리들이다.
13. 천보가정 승리
나는 남편동원 때, 협회21일 수련회를 놓고 목회자와 상담없이 혼자 고민한 것 또 사우디행을 놓고도 목회자에게 상담없이 혼자 결정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일일수록 반드시 목회자에게 보고하고 상담한다는 확고한 기준을 세웠다.
천보가정 승리는 전 과정이 은혜 그 자체였다. 우리는 KR00810번이다. 2018년 4월 지구사무실에 갔다가 황보국회장께 “430가정 승리가 신종족메시아 승리입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그렇습니다.”라고 하셔서 꼭 승리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승일교구장실로 찾아뵙고 “교구장님, 승리할 수 있도록 꼭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반가워하시면서 “해봅시다. 노인정, 경노당에 발송했던 협조전을 보십시오. 경노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지구회장사모의 설득으로 효정원을 먼저 모시고 출발했다. 새벽훈독회를 나가며 정성을 드리고 쉬는 날에 하루에 경노당 4~5곳을 방문하여 노인회장을 설득했다. 참어머님의 간곡한 말씀인 “정성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면 주변의 의인들이 현현한다.”를 가슴에 담고 용기를 내며 자신감을 갖고 활동했다.
2018년 5월 16일 첫 장소인 골말 경노당에서 시작했다. 아내가 웃음치료 강의를 간단히 하고 내가 세계적인 참가정활동의 전문가 라며 정문기목사를 소개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며 강의가 시작됐는데 중간 중간에 옳소! 아멘! 소리가 나왔다. “대성공이다. 대승리다!” 나는 속으로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쳤다. 노인회원들이 너무 좋아하고, 반응이 좋았다. 성주식을 하고 단체로 식당에 가서 갈비탕으로 점심 대접을 했다. 노인회원들은 아무 때나 와도 좋으니까 또 와서 강의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근무 끝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일찍 자면 새벽 1시 늦는 날은 새벽 2시반이 넘는 날도 있었는데, 새벽훈독회에 가려면 새벽 5시에는 일어났다. 잠을 주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효정원 앞에서 성초를 켜놓고 내일 활동할 경노당의 주소록 펴놓고 4~5곳을 정해서 간절히 기도하곤 잤다. 활동 기간 내내 전문강사인 정목사의 건강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오전 10시 반부터 예약된 곳에서 축복식하고 식당에 가서 중식을 제공하고 오후 2-4시까지 활동하면 꼭 한곳은 섭외가 성사되었다.
6월 29일, 한 달 반 동안의 아주 짧은 기간에 430가정 축복식을 완료했다. 식구 중에는 수원교회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완료했다. 430가정 승리 인증번호가 71번이다 전국에서도 꽤 빠른 순번인 것 같다. 너무 은혜로운 기간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 국민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었는데, 이번 활동 승리 기간은 그때 그 축제분위기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에게는 엄청 기쁘고 은혜로운 기간이었다.
어느 날 집에서 큰 며느리 유까리가 말했다. “아버님, 저는 우리 친정부모님의 신앙이 너무 좋으셔서 마음속깊이 존경하며 친정부모님의 신앙을 닮으려고 엄청 노력하여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간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하시는 활동을 보니까 아주 목숨을 내놓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 어머니 존경합니다.” “아! 그렇게 보였는가 보구나.” 뭔가 가슴 속에서 감동의 열기가 솟아올랐고, 보람으로 뿌듯했다.
나중에 식구들과 같이 430가정 활동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남궁재덕 형제가 “그때 김장로께서 활동하는 걸 보면 꼭 미친 듯이 했어.”라고 했다. “아! 그랬구나. 아마도 내가 열심히 하긴 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우리 큰며느리 유까리가 열심히 활동을 했고 여기에 큰아들 성길이도 적극 동참해서 천보가정이 됐다. 우리는 2대가 함께 천보가정이 됐다고 자랑하고 싶다.
14. 앞으로의 계획
아내와 같이 천보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여서 부부가 함께 세상으로부터 승리했다는 증거를 받고 싶다. 아내는 복귀된 집안의 딸로서 뜻길을 위하는데 있어서는 물불을 안 가린다. 아내는 사회 기관장들로부터 표창패를 많이 받았다. 수상 경력이 나보다 훨씬 화려하다. 보령시장, 경기도의회의장, 수원시장, 수원시의회의장, 권선구청장, 국회의원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그리고 통일교회와 가정연합의 목회자들로부터도 많은 감사패와 공로패, 표창장을 받았다.
나는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아내는 내가 소망하던 이상적인 여성, 딱 그 모습이다. 이런 여성과 짝이 되게 해 주신 참부모님께 무한한 영광과 찬미를 올린다. 그만큼 앞으로도 실적을 많이 만들어서 하늘 앞에 봉헌할 것이다.
우리 부부가 함께 상을 받았다. 1997년 9월 6일 160가정 축복 완료 협회 표창장, 2008년 1월 1일 교구장 만물봉헌상, 2019년 1월 1일 협회 효정가정상 및 공로패와 표창장, 2010년 천력 7월 27일 참부모님 표창장(참아버님 자서전 보급), 2021년 5월 10일 참부모님 표창장(참어머님 자서전 보급)을 받았다. 이런 자세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앞으로 3대가 같이 사는 모범가정을 더욱 알차게 이룰 것이다. 가정훈독예배 문화의 정착에 기여할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하는 훈독 모임은 영원한 천일국가정의 초석이 될 것이다. 2021년에는 지구대표로 3대 모범가정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천보가정으로서 43가정 실세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축복식 행사를 거행한 몇 곳을 선정해서 추석이나 설 명절 때마다 선물을 나누며 관리하고 있다. 경노당의 회장, 부회장. 총무 등과 너무 관계가 좋다. 이런 분위기는 43가정 실세화 승리의 초석이 될 것이다.
2022년 7월 19일 43가정실세화 인증가정으로 접수되었다. 우리가정이 제2지구내에서는 43가정실세화 인증가정 1호로 접수되었고, 아내가 참어머님께 꽃다발을 봉정하는 영광과 은혜를 받았다. 이 어찌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 무엇을 원할까? 이제 평식구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점이다. 남은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신통일한국 승리를 넘어서 20027년 신통일세계 승리를 위한 일원이 되어, 승리의 대열에 동참하고 주역이 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쁘고 가슴이 뛴다. 하늘부모님성회의 모든 식구들과 공동승리의 감격을 껴안고 싶다.
첫댓글 죄송합니다. 제가 지난 주 바쁜 일 관계로 깜박했다가 이제야 올립니다. 그래서, 올리는 순서가 성호복 박종숙 가정의 원고 보다 살짝 늦게 올렸습니다. 이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손기문님 댓글
김교원형제님의 자서전을 감명있게 잘읽었습니다. 청년시절 여호와증인과 2박3일에 성경토론, 안식일 신도들과의 토론을 승리하신 그 실력으로 목회를 나왔다면 훌륭하신 목회자로 명강사님이 되셨을텐데 ~ 아쉽습니다. 하늘은 형제님많이 받을수 았는 달란트를 몇번의 기회를 주셨지만 현실삶에서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어려운 고빗길에 삶을 살아오신것 같습니다. 그러나. 훌륭하신 사모님 때문에 모든걸 승리할수 있었고 현재 사모님은 누구나 함부로 갈수없는 실력자들만이 모인 수원대교구의 부교회장으로 시무하고 계신것에 대단하다고 달리 말할 표현이 없을것 같습니다. 온가족 늘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
정혁순님 댓글
김교원, 양명해 형제님 가정 너무 훌륭한 심정세계의 내용들 감동입니다. 다들 멋지게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워쩐대유... 내세울것 하나 없이 자서전을 썼네유.아이고, 부끄러버서...
전명자님 댓글
김교원장로님!
양명해부교회장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수원에서 함게 신앙생활
하고 귀감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심정과 정성의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