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트랜드-모두님-
두 번째 글에서는 서울의 역사와 공간 변천사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현재 서울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와 자료정리가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서울의 공간이 어떻게 변해왔고, 왜 그런 과정을 거쳤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어떤 도시화 과정을 거쳤기에 서울이라는 작은 도시에 천만의 인구가 모이게 되었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먼 선사 시대부터 서울의 역사는 제외하더라도 서울의 도시역사는 백제 초기수도인 위례성이 서울 동남쪽에
입지했던 약 2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를 통해 서울의 지위는 기복을 겪었지만
한반도 중심이며 한강변에 위치한 입지적 특성으로 늘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서울이 오늘날 공간적 원형으로 확고히 정립된 건 14세기말 조선(1392-1910)의 수도로 정해진 후부터며 이렇게 형성된 서울은
조선시대 후반의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인구 20~30만의 규모를 유지 합니다.
(이때의 서울이란 북한산,남산,관악산의 테두리 안, 즉 4대문 안을 의미하며(현재의 서울도심) 근.현대에 들어서
도시 기능이 팽창함에 따라 4대문밖에 도심기능을 분화,담당하는 부도심이 형성되고 이를 모두 아울러 서울이라 부르게 됩니다.)
▲ 조선후기인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한양 도성도(都城圖ㆍ47.0 x 66.0㎝).
동국여도(東國輿圖)에 포함돼 있으며 서울대 규장각 소장품.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 들어 미,영,중국과 일본등 열강의 강요에 의한 개항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막 시작하게 되나
안타깝게도 개항은 곧 일제강점기(1940-1945)로 이어지며 이 기간동안 서울은 식민통치에 따른 급격한 공간변천이 일어납니다.
일본의 식민도시계획은 기존 도성의 구조와 도시경관 크게 변모시켰고, 공업화 과정을 거치며 노동력집중에 따른
급속한 인구유입과 공간 확산을 야기합니다.
1942년, 처음으로 서울 인구가 100만을 넘어섰고 늘어나는 인구로 도심 성곽을 허물고 전차노선과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를 확장시키게 되지요. 이에 도심기능은 더욱 우세해졌으며 한적한 교외였던 성밖지역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외곽주거지로 점차 변모하게 됩니다.
43년에는 일제에 의해 현재와 같은 구(區)제도가 도입되고 이때 7개의 구-종로구,중구,성동구,서대문구,동대문구,
용산구,영등포구-가 생기고, 44년에는 마포구, 49년에는 성북구가 신설되어 9개의 구가 한국전쟁 이전부터 존속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결과로 한국은 1945년 독립을 하지만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1950-1953)으로 서울은 도시전체가
급격히 황폐해집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나마 서울은 좀 더 나은 생존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지방의
궁핍을 피해 많은 이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이때 서울 인구는 약 400만으로 증가합니다.
1960년대에는 제 3공화국으로 알려진 독재군사정권이 등장하며 국가주도의 강력한 근대화,산업화 정책을 폅니다.
서울은 그 중심에서 제1의 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수년간은 매년 20~60만에 달하는 농촌인구가 일자리와
사회적 기회를 찾아 서울로 유입되지요.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 현상으로 인구의 자연적 증가도 가세하게 합니다.
서울이 제공하는 거의 독점적인 기회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깊어지고 이 격차로 서울의 도시화는 가속되는 한편,
밀려드는 인구로 인한 각종 도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체 서울은 급격한 외형적 성장을 계속합니다.
1963년에는 도심 외곽지역이었던 지금의 강남지역과 북동부 지역을 흡수하며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이 확대되어
서울은 기존규모의 두 배가 되지만, 새로 편입된 지역은 기존 구에 속하게 됩니다.
(이후 규모는 유지한 체 활발하게 구를 신설 재편해서 95년에 강북구 광진구, 금천구가 신설됨으로서
오늘과 같은 25개 구가 구성됩니다.)
1964년에 이미 서울의 과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인구집중 방지책이 주로 국가안보상의 이유에서 논의되었으나,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수도권인구재배치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공장·대학교·관공서 등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려는 시책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1977년에는 충청남도 공주 부근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구상함으로써 수도권 인구집중의 근원적인 해결을 시도한 적도 있었죠.
또한 1972년에 최초로 서울 주변부터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 설치되었고 1973년에는 주민세를 신설하는 한편,
무허가건물을 단속하여 성남과 같은 외곽지역으로 철거민을 이주시키고 서울로의 유입인구를 최대한 억제하려 했습니다.
이와 함께 서울-인천 간, 서울-수원 간의 전철이 1974년에 개통함으로써 이 두개의 교통축을 따라 안양·부천과 같은
위성도시가 급성장하며 수도권 인구가 점차 서울 주변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울 내에서 외곽으로 공해성 공장을 이전시키기 위해 반월(지금의 안산시) 신공업도시의 건설을 1977년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숨가쁘게 달리던 3공화국시대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막을 내립니다.
1980년대는 앞서 추진되었던 새로운 도시건설의 필요와 더불어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이라는 국제적 행사로
도시개선 및 미화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부각됩니다. 거기다 시가지가 서울의 행정구역을 초월하여
평면적으로 확대되고 통근거리가 개발제한구역을 넘어서면서 드디어 대도시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지요.
1981년에 수립된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는 수도권을 서울·인천·경기도 지역으로 확정하여
강력한 성장억제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지방의 15개 성장거점도시 육성전략‘을 폅니다.
그리고 1982년에 '수도권 내 공공청사 및 대규모 건축물 규제계획'이 마련된데 이어 수도권정비계획법(법률 제3600호)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말그대로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인구 및 산업의 적정배치를 유도하여
수도권의 질서있는 정비와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국제행사를 위한 도시미관 차원에서는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과 선수촌등 올림픽 관련시설이
들어서고 대대적인 한강정비사업도 시작됩니다.
한강유로를 넓히고 일부는 직선화시켜 도시공원으로 사용할 고수부지도 만들고, 한강변을 따라
도시고속도로를 건설하여 당시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 중심부 및 올림픽경기장을 한번에 연결했습니다.
이어 1984년에 순환선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고, 1985년에는 도심을 X자로 교차하는 3호선 및 4호선도 완공됩니다.
한편 도심내부에서는 슬럼지역을 정비하는 재개발이 활발해지고 점차 두터워져가는 중산층의 주택수요에
부응하기위해 엄청난 주택공급을 목표로 도심외곽에 위치한 강남, 목동, 고덕, 개포 및 상계지역을
주택용지로 전용하여 신도시급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합니다.
사실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단독주택을 제치고 아파트가 가장 인기있고 보편적인 주택형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택부족 현실에서 아파트건설에 높은 수익성이 있음을 간파한
민간 건설사에 의해 서울은 그야말로 아파트건설 붐이 일게 되지요.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해 드디어 서울인구는 1,000만 시대에 들어섰고 세계에서 인구규모가 큰 거대도시 중 하나가 됩니다.
이와 더불어 1인당 국민소득도 1만 달러를 돌파하지요.
(1,000만을 넘어선 인구는 1992년 1,092만명을 기록한 후 정체 현상을 보이며 이 후 1,000만 수준 유지)
정부는 계속해서 추가로 4개 지하철 노선확장(5,6,7,8호선), 새로운 교량과 고속도로,
공공 미술관과 음악당건설 같은 공공프로젝트를 서울시 사업으로 추진하였고,
민간부문에서는 수많은 고층건물 건설로 서울도심과 강남지역의 스카이라인을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는 여태까지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994년 37명의 사상자를 내며 한강의 성수대교가 붕괴되었고,
그 이듬해인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로 무너져 1,4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금융위기로, 다시 겪고 싶지않은 IMF사태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90년대는 서울이 새로운 도시여건에 놓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보편화된 자가용 보유와 고속도로망 건설에 힘입어 시가지는 그린벨트를 넘어 확산된지 오래였고
1992년부터 제1기 신도시인 일산, 분당, 산본, 평촌, 중동이 개발되기 시작하며 교외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수도권정비계획의 지속적 추진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 우선의 국가목표,
정부부처간의 비협조와 전담통제기구의 미약, 지방분산을 위한 수용기반의 미흡으로 인해
당초 의도한 국토의 균형개발이라는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지방과의 차이는 더욱 벌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정부나 민간기업의 중추관리기능은 대부분 서울에서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고급 전문직종의 고용기회도 수도권에만 구조적으로 집중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수도권 비대화의 요인과 심각성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만 국제화·정보화 시대를 맞아
동북아시아 경제권의 시각에서 본 수도권의 위상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수도권을 포함한 대도시권의 발전방향은 '지역간 분산'보다는 '지역내 분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며,
단순히 주택문제 해결만을 위한 신도시가 아니고 광역교통망의 구축과 아울러 21세기형 삶의 질과 생태계를 존중하는
자조적 업무도시를, 민간자본을 동원하여 다핵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학계나 전문가의 입장입니다.
마치기 앞서 간단히 2020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통해 서울의 공간구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2020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보면 서울을 1도심, 5부도심, 11지역중심, 4대 생활권으로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전 2011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에서는 1도심, 4부도심, 11지역중심, 54 지구중심으로 서울의 공간을 구분하고
2011년 이후 수색을 부도심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는데,
2020 계획에서는 기존 4부도심에 상암과 수색을 서북 생활권의 신부도심으로 추가하여 5부도심이 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찬찬히 잘 보시면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실수 있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blog.empas.com%2Fbtyflmh%2F33155039_520x365.jpg)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에는 서울과 경쟁 관계에 있는 몇몇 도시의 특성을 알아보고
이들과 차별화된 서울만의 특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 참고문헌:
서울 20세기 공간변천사 / 김광중[외저]; 서울시정개발연구원[편]; 2001
지표로 본 서울 변천 / 김광중, 강범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3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1~5권 / 손정목 저; 한울 출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