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할머니의 곰방대
엄마와 아재라는 사람이 나를 데려간 곳은 점촌 재골이라는 동네였다. 점촌은 이름 때문에 깊은 산골 마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의 문경시다. 그 때는 경북 문경군 점촌읍이었는데 문경군보다 점촌이 먼저 시로 승격되었다가 문경군과 통합되면서 문경시로 지명이 바뀌었다. 점촌읍이었을 때도 문경군의 모든 관공서가 점촌에 있었다. 이름만 촌이지 점촌은 문경군에서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교육, 상업이 발달한 소비도시였다.
점촌에서도 중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재골이라는 언덕 마을에 자그만 초가집이 할머니 댁이었다. 나를 업어주던 할머니와 달리 처음 보는 할머니는 무서운 인상이었다. 부지깽이처럼 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후 불 때마다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한참 연기를 몰아내다가 더 이상 연기가 안 나오니까 재떨이에 밤톨만한 쇠종지 속 담뱃재를 재털이에 탕탕 쳐 털어냈는데 몹시 화가 난 듯했다. 목소리마저 커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엄마도 무뚝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할머니와 가짜 엄마가 보고 싶어지면서 눈물이 났다. 울음을 참으려 해도 자꾸 눈물이 났다. 무서운 할머니가 곰방대를 탕탕 치면서 "콩알만한 가시나가 재수없게 왜 울고 지랄이야, 뚝 못 그치나!" 하고 야단을 쳤다.
도망을 치거나 숨어 버리고 싶었지만 낯선 곳이니 어디로 가야 숨을 수 있는 지도 몰라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날이 저물었다며 엄마는 내일 다시 오겠다며 서둘러 일어났다. 오늘 하룻밤은 할머니와 자라고 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풀먹인 이불 호청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책장을 넘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코를 골며 잠든 후에도 혼자 몰래 눈물을 흘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무서운 꿈에 놀라 잠이 깨었는데 엉덩이가 축축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떨렸다. 나의 기척에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놈의 가시나가 새 이불에다 오줌을 싸?” 하며 철썩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때렸다. 엉덩이가 따갑고 아픈 것보다 처음으로 듣는 욕설과 폭력에 놀라서 울었다.
“이 놈의 가시나가 뭘 잘했다고 울어, 젊은 년이 어디서 애를 데려와도 오줌도 못 가리는 게으르고 미련한 년을 데려와서는..... 이 엄동설한에 이 이불을 어쩔래?”
할머니의 호된 꾸지람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울며 떨었다. 가짜 엄마 집에서는 잠에 자다가도 일어나 요강에 오줌을 잘 눈다고 칭찬도 들었다. 나는 오줌이 나오는 줄도 몰랐고, 왜 오줌을 싼 것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건 할머니 말처럼 게으르고 미련해서 싼 건 아니라는 거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는 것 밖에는 모른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젖은 이불에 화가 나 어쩔 줄을 몰라했으므로 나는 울기만 했다. 내가 계속 울자 할머니는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며 곰방대로 내 등을 후려쳤다. 순간 등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자지러지는 비명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할머니는 못 참겠다는 듯이 내 두 손목을 잡아올려 그대로 마당으로 던졌다. 나는 서러워서 울고, 아파서 울고, 슬퍼서 울었다. 하늘도 땅도 따라 우는 듯했다. 울면서 할매를 불렀다.
나를 보러 오겠다던 할머니가 내 울음 소리를 듣고 마술처럼 나타나기를, 나를 업고 집으로 데려가 주길 바라며 울고 또 울었다.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얼마를 울었을까 온몸이 떨리고 추웠다. 울음도 마른 바람소리처럼 변해갔다. 할머니가 무섭고 미웠다. 할머니의 곰방대는 더 무섭고 싫었다. 곰방대에 맞으면서 느꼈던 엄청난 아픔, 마치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 순간 할머니는 무서운 마녀였다. 마녀 할머니의 곰방대, 그 매의 고통은 죽을 것 같은 고문이었다. 특히 다섯 살 어린 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문이었다.
꽃신에 혹해서 엄마를 따라온 그 날 밤이 내 다섯 살 인생에 가장 큰 악몽의 밤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아직도 모를 것이다. 무서운 할머니 곁에 데려다 놓고 엄마는 어디론가 가 버린 그 밤, 처음으로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불안과 공포, 내가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말고 아무 것도 없다는 막막함이 두려워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그 두려움은 꿈속까지 이어져 오줌을 싸게 했다. 내가 게을러서 일부러 오줌을 쌌다며 담뱃대로 마구 때렸지만 참으로 억울했다. 곰방대가 그렇게 아픈 줄도 처음 알았다. 그것은 뼈에 깊이 사무쳐 내가 내 아이를 거의 때리지 않고 키우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날 할머니의 곰방대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여린 내 몸에 뱀처럼 부풀어오른 멍든 살을 보면서 다시는 오줌을 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불안으로 이어져 조심하면 할수록 더 오줌을 싸는 치명적인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다.
나를 품에 안고, 업어주던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고, 찾아가는 법을 모른다는 절망감에 울고,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에 울고 그렇게 그치지 않고 울다가 운다는 이유로 또 맞고, 그날 나는 어떻게 할머니 집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충격이 컸던 만큼 다른 건 기억에 없다. 엄마는 한 숨을 많이 쉬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점촌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더 들어가는 산북면 서중리라는 조그만 마을이다. 커다란 산자락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아마도 산의 서편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서중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게다. 마을 앞, 신작로로 하루에 완행버스가 다섯 번 오갔다. 버스는 앞 뒤로 길게 흙먼지를 일으켰기에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 버스를 타고 엄마는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집은 넓고 깨끗했다. 마당에는 돼지우리도 있고, 뒤뜰에는 닭장도 있었다. 마루가 너무 높아 오르내리기는 힘들었지만 할머니의 초가집보다 훨씬 큰 기와집이었다. 엄마는 키가 크고 잘생긴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며 인사를 시켰다. 아버지, 그 호칭을 처음으로 듣고 불러본 날이었다. 마녀 할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왠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 좋은 아버지의 엄마인 그 무서운 할머니를 엄마는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킨 시어머니라고 지금도 원망하며 흉을 본다. 엄마가 지금 몸이 아픈 건 다 새색시 때 그 할머니가 시집살이를 모질게 시켰던 게 원인이라고 말한다.
모질기로는 엄마도 할머니 못지않았다. 때리는 회초리가 곰방대가 아니었다는 것만 다를 뿐 엄마는 내가 꼭 잘못을 해서라기보다 속상한 일만 있으면 매를 들었다. 할머니 때문에 화가 나도 나를 때렸고, 아버지 때문에 기분이 상해도 나를 때렸다. 그럴 때마다 그 이전에 내가 잘못한 것들이 다시 소환되곤 했다. 한 가지 잘못을 하면 두고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해서 매 맞을 이유가 되었다.
매 맞는 것이 싫었으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잘하려고 애를 썼다. 할머니의 곰방대에 맞아 멍투성이가 된 그 날 이후로 난 자주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 끝에 오줌을 싸곤 했다. 오줌을 쌀까봐 잠을 자는 것도 겁이 나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심지어 국물도 잘 먹지 않았다. 그래도 여름에 수박을 먹거나, 단술을 마시는 날은 긴장을 했고 긴장을 하면 또 악몽을 꾸고 어김없이 오줌을 쌌다. 할머니의 곰방대에서 시작된 채벌은 엄마에게로 이어졌고, 멍 삘 날이 거의 없는 나는 늘 집에서 도망치는 꿈으로 하루를 살았다.
첫댓글 아동 학대를 당하셨군요. 에공~ 어쩌나~할머니와 엄마까지...
그 때는 다들 그렇게 맞으며 자라는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