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이 뚫리면 조국이 뚫린다!”
김용배 준장
1921.04.17 ~ 1951.07.02
7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동락리 전투에서 활약한 김용배 준장이 선정되었습니다. 김용배 준장은 1950년 충북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적 연대를 통쾌하게 격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요. 1951년 10월 6일에는 38선을 돌파 후 초산에 돌입하여 10월 25일 압록강 변에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이로써 김용배 준장의 부대는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명예를 안았습니다.
동락리 전투는 1950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충북 음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인데요. 이 전투는 한강방어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국군 부대들이 평택과 안성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제6사단 7연대가 남진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격퇴하고 남침을 지연시킨 공세적 방어 전투인데요. 어떤 전투였는지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는데요. 북한군이 불법 남침을 한지 4일 만에 38선의 서부전선이 돌파되고 한강방어선의 구축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부전선의 국군부대들은 평택과 안성지역으로 집결했습니다.
1950 한국전쟁 당시 75mm 무반동총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_ 두산백과사전)
이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3번 도로 축 선(이천-장호원-충주축선)을 따라 북한군 제15사단이 계속 남침한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였죠. 그러나 제7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이 이미 장호원을 통과하여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행군을 정지하고 음성 북쪽의 소여리와 용산리 일대에서 매복작전을 실시하여 동락리로 집결중인 북괴군 제48연대를 기습하게 됩니다! 기습을 당한 적은 퇴각을 시도하였으나 제3중대가 발사한 60mm 박격포탄으로 인해 오고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죠.
당시 ‘무극리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 포진하여 적과 대치해 커다란 성과를 올렸습니다. 제1대대 김용배 소령이 포함된 제6사단 7연대가 전개한 이 전투로 인해 군수참모를 비롯한 적132명을 포회하고 각종 포54문과 차량 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습니다.
동락전승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_ 두산백과사전)
동락리 전투는 국군의 첫 승리일 뿐 아니라 북한의 불법 남침 이래 국군이 거둔 가장 통쾌한 승리인데요. 이 전투는 북한군의 음성진출을 1주일간 지연시켜, 국군이 진천-음성-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또한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도 적을 섬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던 전투이기도 합니다.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용배 준장은 1951년 7월 제 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토평리 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대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대하면서 작전을 지시하던 중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하였습니다.
6∙25전쟁이 지속 되었던 3년간의 시간 동안 많은 전투와 작전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락리 전투는 국군의 첫 승리로서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할 전투인데요.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김용배 준장과 함께 동락리 전투를 기억하는 7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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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6.25전쟁영웅 김용배 준장
(1921.4.17∼1951.7.2)
◈이곳이 뚫리면 조국이 뚫린다!◈
국가보훈처는 김용배 육군 준장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2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하여 1950년 충북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적 연대를 통쾌하게 격파하는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1950년 10월 6일에는 38선을 돌파 후 초산에 돌입하여 10월 25일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로써 김용배 장군의 부대는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명예를 안았다.
특히 6.25전쟁 개전 이래 국군의 최초 승리로 일컬어지는 동락리전투는 1950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충청북도 음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한강방어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국군 부대들이 평택과 안성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제6사단 7연대가 남진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격퇴하고 남침을 지연시킨 공세적 방어 전투였다.
7월 4일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은 제7연대는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정찰 중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대원들의 사격이 집중되었고 기습을 당한 적은 퇴각을 시도하였으나 제3중대가 발사한 60mm 박격포탄으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7월 6일 날이 밝아오자 교착된 기름고개의 동과 서에서 총격이 한층 가열되었다.
당시 ‘무극리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 포진하여 적과 대치해 커다란 적과를 올렸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이 포함된 제6사단 7연대가 전개한 동락리 전투는 개전이래 패배감에 젖어있던 국군에게 자신감을 안겨 준 가장 통쾌한 전투였으며, 북한군의 음성 진출을 1주일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이 진천-음성-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준 의미 있는 전투였다.
동락리 전투에서 제7연대는 적 제48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군수참모를 비롯한 적132명을 포회하고 각종 포54문과 차량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을 뿐 아니라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7연대의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전사의 귀감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전승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1951년 7월 2일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대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면서 작전을 지시하던 중 가까운 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