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7/31 마감)

[온달]

  

제2회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1. 기간 : 2019년 7월 1일(월) ~ 2019년 7월 31일(수)

2. 장소 : 황순원문학관 홈페이지

3. 대상 : 대학생 및 일반인

4. 시상식 : 2019년 9월 8일(일) 10:00 (제16회 황순원 문학제)

▷ 장르: 수필

▷ 응모자격 : 전국 대학생(휴학생 포함) 및 일반인(등단 작가 제외)

▷ 응모분량 :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10포인트 기준 A4 3매 내외)

▷ 응모방법 : 온라인 접수만 가능. 황순원문학관 홈페이지(www.sonagi.go.kr)에서 참가신청서 입력 후 작품 업로드

▷ 접수 및 당선자 발표

- 접수기간: 2019년 7월 1일(월) ~ 2019년 7월 31일(수)

- 당선자 발표: 2019년 8월 경 개별통지 및 홈페이지(www.sonagi.go.kr)에 공지

▷ 시상식 및 시상내역

- 시상식: 2019년 9월 8일(일) 10:00 황순원문학관

- 시상내역:

* 대상 1명 / 상금 100만원

* 최우수상 1명 / 상금 50만원

* 우수상 2명 / 각 상금 30만원

* 가작 약간 명 / 상품

▷ 유의사항

- 1인 1작품에 한해 개인자격으로만 참가 가능

- 국내외 타 공모전, 문예지 등에 출품되지 않은 순수 창작품이어야 하며, 표절 작품으로 판명될 경우 심사에서 제외됨. 수상 이후라도 표절 판명 시 수상 취소

- 당선작의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및 일체의 권리는 황순원기념사업회에 귀속됨

- 기타 사항은 황순원문학관 홈페이지 및 이메일(soonone2009@hanmail.net)로 문의/ 031 773 2299 (소나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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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회 대상작

뒤늦은 편지

당신에게

  몇 년 전 방 청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작한 대청소라 잊고 있던 물건들이 하나둘씩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장난감들과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 일회용 카메라 등 각종 잡동사니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지요. 그러다 책상 서랍 구석에서 먼지 쌓인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상자를 꺼냈죠.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어보니 편지봉투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작고 앙증맞은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봉투였어요. 그리고 그 봉투를 여는 순간, 잊고 있던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났습니다. 첫사랑에게서 받은 편지였어요. 그렇습니다, 당신에게서 받은 그 편지요. 내 생에 처음 이성친구에게 받아 본 편지였고 당신을 많이 좋아했던 터라, 서툰 솜씨로 상자까지 만들어 꼭꼭 간직했던 게 기억이 났어요. 그런데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했던 편지를 어째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신이 멀리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곤, 울면서 서랍 구석에 푹 밀어 넣었던 게 생각났어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당신의 부재와 함께 서랍 한쪽에 묻어두었던 편지였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잊었던 기억들이었는데, 고작 손바닥만 한 그 작은 편지가 저를 그 시절로 미친 듯이 끌어당겼습니다. 그리움과 후회로 뒤덮인 그때의 어린아이로 되돌려놓았죠.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편지를 받고 답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신을 싫어해서가 아니었어요. 단지 자신이 없었어요. 저를 더 깊이 알게 되면 당신이 실망할까 봐 두려웠거든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확신이 서면, 그때 제 마음을 담아 답장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당신은 떠나야 했죠. 제 우유부단함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바보 같은 제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어요. 당신의 흔적들이 눈에 띄면 눈물이 나 어쩔 줄 몰랐죠. 그래서 힘겹게 묻어두었던 편지였는데, 그 편지가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두드린 겁니다.

  그날 이후로 새로운 습관이 생겼어요. 당신이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편지를 쓰는 습관이죠. 편지를 쓰고 나면 그리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거든요. 편지지에 연필로 끄적이는 건 아니지만 틈틈이 휴대폰 메모장을 이용해 편지를 적었답니다. 라디오에서 당신이 좋아하던 음악이 흘러나올 때, 같이 군것질을 하던 분식집을 지나칠 때, 친구들이 첫사랑 연애담을 털어놓을 때 등 매 순간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두었죠. 그렇게 몇 년째 편지를 쓰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전해드리고 싶었거든요. 편지지에 직접 옮겨서요. 그런데 아직 당신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습관을 버리려고요. 문득 깨달았거든요. 당신에게 마음이 남아서 편지를 쓰는 게 아니라, 미련이 남아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제게 남긴 편지에 당신은 이런 말을 했어요.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리고 미소가 지어져.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매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죠. 당신 생각만 하면 설레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거든요.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사랑이란 감정이었어요. 당신이 제 첫사랑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렇게 당신 생각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요. 추운 겨울을 따뜻한 봄으로 바꾸던 당신 생각이, 입에 쓴 커피를 달달한 코코아로 느끼게 해주던 당신 생각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졌어요. 이제는 당신 생각을 하면 따뜻한 봄이 쓸쓸한 가을로 느껴지고,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가슴이 먹먹해서 먹을 수가 없어요. 미소가 지어지던 제 입가엔 애달픈 한숨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미련이 남아있던 겁니다. 저의 미련이 당신을 못 보내고 있던 거였어요.

  며칠 전 영화 한 편을 봤어요. 첫사랑에 대한 영화였는데 남자 주인공이 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는 여느 연인들처럼 첫사랑과 뜨겁게 사랑을 해요. 그리고 여느 연인들처럼 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행복했던 시절을 끊임없이 추억하죠. 그녀 생각에 몸과 마음이 지쳐가도 그녀를 놓지 못하고 기다려요. 남자는 그녀를 운명의 상대로 믿었거든요.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예상과는 다른 모습의 그녀였습니다. 자신과 결혼반지를 나눠 낀 그녀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기치 못한 현실에 남자는 무너지게 되고, 결국 그녀를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보내죠. 그렇게 남자는 사랑에 실패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그에게 또 다른 인연이 슬며시 찾아오게 됩니다. 단지 첫사랑이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을 뿐인 거죠. 그렇게 남자는 운명의 상대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철부지 어린애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흘러가는 계절을 묶어두려 했던 거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 계절은 그저 흘러가는 것인데, 여름의 찬란함이 떠나는 게 두려워 억지로 붙들고 있던 거죠. 고집쟁이에 불과했습니다. 여름은 여름만의 아름다움이 있고 가을은 가을만의 아름다움이 있듯이, 각 계절들마다 빛나는 색깔들이 있는데 그걸 몰랐습니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그리움을 달래고 싶다는 핑계로 당신께 편지를 쓰면서요.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순 없겠죠. 그래서 이 편지 쓰는 습관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번처럼 당신을 마음에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대를 놓아드리려고 해요.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쓰는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되겠네요. 이것만 여기에 남겨두고 나머지 편지들은 모두 지우려 합니다. 계속 간직한다면 진심으로 그대를 보내는 게 아니니까요. 많이 늦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께 편지를 건넵니다.

그 새벽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당신 떠난 그날의 새벽을요. 밤새 눈물을 많이 흘렸거든요.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찍 학교를 가는데 새벽 공기가 그렇게 가슴을 짓누르더군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무게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마 당신도 저와 같은 공기를 느꼈겠죠.

  그동안 많이 그리워했어요. 당신이 보고플 때면 우리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찾아갔죠.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나눠먹었던 편의점이나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던 놀이터 벤치, 그리고 같이 공부하던 독서실과 같이 타던 버스까지, 참 많이도 찾아다녔습니다. 더 이상 당신이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성거렸죠.

  꽃밭이 보이면 민들레를 한 움큼 움켜쥐곤 크게 숨을 내뱉기도 했어요. 어느 시집에 적혀있듯이 꽃씨들이 제 마음을 전해줄 것만 같았거든요. 그리고 밤하늘을 볼 때면, 그 하늘에 글씨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대가 한 번쯤 우연히 볼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제가 얼마나 그대를 애타게 찾고 있는지 말이죠.

  "좋아합니다." 이 말 한마디가 입 주변에서 매일매일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대 눈을 바라보면 그 짧은 한 마디를 차마 꺼내기 어렵더군요.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 깊이 꾹꾹 담아두고 있었어요.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그 말갛던 미소와 눈망울은 여전하겠죠? 그 고운 마음씨도 여전히 따뜻할 거라 생각합니다. 주변을 환히 비추던 당신의 밝은 모습이 항상 제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주었어요. 그대가 곁에 있던 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부디 그 어여쁜 모습과 함께 행복하길 바랄게요. 소심한 성격 탓에 이제야 답장을 하네요. 바보 같아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놓아드리겠습니다. 정말 미안했고, 고마웠습니다.

잘 가요. 나의 첫사랑.

안녕.

2018년 7월 31일

바보 같았던 현준이가

==================================================================================================== 2018. 1회 최우수작

첫사랑이 최고야, 바꿔봤자 뉘여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는지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다소 이른 시간인데도 아내는 벌써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오늘따라 밥 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들 둘이 결혼을 해 다 나가고 우리 부부만 살다보니 나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거실에서 잔다. 각자의 곳에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를 누워서 보다가 따로따로 잠들고 깨는 시간도 다르다. 우리 부부는 밥을 먹는데도 식탁을 마다하고 거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다. 아내도 나도 말없이 밥만 먹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늘그막이니 아내와 별로 할 말도 없기에 방송을 봐가면서 밥을 먹으니 서먹하지 않아 좋다. 마침 방송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늘 푸른 인생’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유명한 사회자가 나와 시골에 사는 칠십 된 노인 부부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아내와 또 결혼 할 거요?”

  남편이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야지. 다른 여자라고 별수 있겠어. 그래도 살아본 여자가 좋지”

  사회자가 반대로 아내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 할 거예요?”

  그러자 아내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을 내저으며 경악을 한다. 절대로 지금의 남편과는 결혼을 안 한단다. 사회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다. 어디 가서 어떤 놈을 만나도 지금의 남편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것이다. 방청객 모두가 배를 쥐고 웃었다. 나는 밥을 먹는 아내를 슬쩍 곁눈질로 보다가 이내 물었다.

  “당신은 어때?”

  “나도 저 할머니와 똑 같아.”

  아내는 주저하지도 않고 단숨에 대답했다. 혹시나 했던 나는 아내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먹던 수저를 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살아가며 뭘 그리 잘못을 했다고? 저 할머니처럼 다시 태어나면 나를 개비한다고? 바꿔봤자 별수 없어. 고르고 고르다 뉘 고르고 말테니까.”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뒤에 대고 구시렁거렸다.

 “그깟 농담도 못 받아들이고 꼭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농담이라는 말이 살짝 들렸으나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방에서 아내의 진심이 뭔지를 생각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서 힐끗 아내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아내는 예전과 별 다름이 없이 우산을 챙겨주었다. 오늘이 아내 생일이라는 걸 미리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 다 망쳐놓은 것이다. 저녁에 외식을 하자고 하려다 아까 한 말이 괘씸해 그냥 나왔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애들을 돌려보내고 책상에 혼자 앉아 있자니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몸이 선득거렸다. 이제 올해만 지나면 평생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다. 서글픈 마음에 커피 한잔을 타 마시며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옛 추억이 활동사진마냥 펼쳐졌다. 진한 커피향이 코끝에 와 앉으니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 말고 다른 여자는 알 틈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첫사랑과 평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똑같이 교육도시라 불리는 공주 금강 가에서 살았으나 서로의 동네는 좀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만날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지만 처음부터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72년 6월 6일 현충일 날이었다. 공휴일이기에 집에서 예비고사 공부를 하다가 심난한 마음에 금강 가를 걷고 있었다. 그 때만해도 공주의 금강은 이름 그대로 비단을 펼쳐놓은 듯 물이 맑고 아름다운 강이었다. 그 해에는 날이 가물었기에 물이 강 전체로 퍼져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강 가 한쪽으로 몰려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강 가운데는 넓게 모래톱이 생겼고 강 가로 흐르는 물은 깊어 사람이 건너 모래톱에 갈 수는 없었다.

 ‘공부하기 지겨운데 저 백사장에 발자국이라도 찍으며 걸어봤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고 3은 공부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잠시 아름다운 마음을 먹으며 강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구 없어요? 사람 좀 살려주세요.”

  강가 바위에서 빨래를 하던 아주머니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언덕 밑으로 달려 내려가 보니 물속에 사람 하나가 빠져 몇 번인가를 솟구치더니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여자의 산발된 머리가 맑은 물속에서 훤히 보였다. 순간 두려움과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고 물에 들어갔다가는 둘이 같이 죽는다.’

  금강이라는 물가에 살았기에 어려서부터 엄마가 주의를 주려고 늘 하던 말이었다. 그렇다고 수영을 할 줄 아는 내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망설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옆에서 애타는 엄마의 절규에 못 이겨 나는 엉겁결에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애의 힘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여자 애를 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해 여자 애를 떼어내야 했는데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를 끌고 헤엄쳐간 곳이 바로 강 가운데에 드러난 모래톱이었다. 뛰어 들어간 쪽으로는 물살이 너무 세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모래톱으로 나간 나는 너무 지쳤기에 한참을 백사장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여자애가 누워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물에 젖어 속살이 훤히 비쳤으나 여자애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학생, 가슴을 누르고 안 되면 입을 맞춰 인공호흡이라도 좀 시켜 봐.”

  건너편에서 외치는 어른들의 질책에 못 이겨 여자애의 봉긋한 가슴에 손을 대보니 왠지 내 가슴이 먼저 뛰었다. 가슴을 몇 번 누르다 이번엔 입을 맞추고 숨을 몰아넣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 묘한 기분이 들었지, 여러 번 가슴을 누르고 입을 맞추다보니 처음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 만에 여자애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창피한지 본능적으로 풀어진 블라우스를 여미며 수줍어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 가운데 백사장을 걸어 아래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야 했다. 아래쪽은 강물이 넓게 흘러 정강이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조금 전 생각대로 하얀 백사장에 둘만의 발자국이 찍혔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하늘에는 하얀 백로 한 쌍이 날며 내릴 곳을 찾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여자애는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너 몇 학년이니?”

 “중 3이예요.”

고 3이었던 내가 그날 중 3이었던 그 애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다만 강 한가운데 드러난 모래톱에 둘만의 발자국을 찍으며 힐끔힐끔 그 애를 보니 조금 전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때와는 딴판으로 예뻤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학교에 갈 때면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너는 그 때 금강에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예비고사 날 이잖아요. 시험 잘 보세요.”

  그녀는 찹쌀떡을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의 응원 덕분이었던지 예비고사에 합격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그녀는 고 1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고등학교와 우리 대학은 같은 동네에 있었으니 우리는 오고가면서 가끔씩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중 3일 때보다 많이 성숙해 있었고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다가다 한 번씩 만나다보니 언젠가부터 그녀가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한 번 만나자고 해볼까? 그래도 대학생이 어찌 고등학생을…….’

대학생이 고등학생과 어울린다는 건 어쩐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망설이다가 시간만 지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소망과 현실의 괴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충남의 시골로 발령이 나 3년의 세월이 흘렀다.

  3월의 첫 출근 날 신임교사의 인사가 있었다. 이제 겨우 교사 3년차인 나는 신규 발령을 받아 온 여선생님의 예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공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오후에 그녀가 우리 교실을 찾았다.

 “선생님 댁이 공주시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 모르시겠어요? 미선인데요.”

  나는 처음 본 여자이고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그녀는 나를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신을 모른다고 하자 여간 실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금강에서 빨래를 하다 물에 빠진 자신을 건져준 남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소녀는 자신을 살려준 그 남학생이 그리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후 그녀는 그 남학생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학교 가는 길목에서 기다린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했다. 어쩌다 그 남학생을 멀리서라도 보는 날이면 마치 자신의 몸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10살이 넘어도 부부가 되지만 당시 중3과 고3의 간격은 너무나 컸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감히 그 남학생 앞에 얼씬거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한 해가 지나자 차이는 더 벌어져 남학생은 공주교육대학의 대학생이 되었고 자신은 겨우 고1이라서 그냥 애만 태우며 남학생을 지켜볼 뿐이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다른 고등학교 남학생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어도 자신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단다. 오직 자신을 살려준 그 남학생 생각뿐이었단다. 그렇게 혼자 짝사랑으로 애를 태우며 남학생을 지켜본 지 얼마 후 남학생은 훌쩍 공주를 떠났다고 했다. 2년제였던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발령을 받아 서산의 어느 초등학교에 선생님으로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남학생을 만나려면 자신도 공주교대에 입학을 해야 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죽어라고 공부를 했단다. 결과 공주교대에 입학했고 주위의 친구들이 미팅이다, 연애다 희희낙락해도 자신의 마음은 오로지 한 곳에 꽂혀 있었다고 했다. 비록 짝사랑을 하는 처지였으나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불결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임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한 곳이 바로 여기이고 그곳에는 첫사랑인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그 때 중 3이었던 학생이 바로 선생님?”

  풋풋한 중학교 때 얼굴과 성인이 되어 화장품으로 덧칠해 놓은 얼굴은 딴판이었으니 알아 볼 수 없었다. 예전에 이름을 묻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이름도 몰랐었다. 또 대학 1학년과 고 1의 간격이 자랄 때는 무척 컸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자 3년의 간격은 그깟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고 물에 들어가면 같이 죽는다.’

엄마 말씀 또한 맞는 말이었다. 나는 물에 빠져 죽기 살기로 매달리던 그녀에 코가 꿰어 40여 년째 같이 죽고(?) 있으니 어른들 말씀 새겨들어야 하겠다.

  추억의 실타래를 다 걷고 나자 결혼 당시 아름답던 미선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이 당신 생일이잖아. 어디 분위기 있는 곳에 가서 둘이 저녁이나 먹자고…….”

식당에 나타난 아내의 블라우스 한쪽이 다 젖어 속살이 비쳤다.

 “예전 물에 빠졌을 때처럼 섹시한데…….”

 그러자 아내가 눈을 하얗게 흘기며 환갑이 넘어 주책을 떤다고 핀잔을 했다.

 “애들이 올 때마다 우산을 다 가져가서 우산살이 2개나 부러진 것을 쓰고 와서 그래요.”

 우리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와 우산을 찾았다.

 “누가 내 우산을 바꿔갔네.”

  아내가 식당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자, 손님도 다 가고 없는데 그냥 남은 것을 쓰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뛰면서 좋아했다.

 “앗싸. 새 우산으로 바꾸겠구나.”

 식당을 나온 아내가 우산을 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가 바꿔온 우산은 살이 거의 다 부러져 한쪽으로 완전히 처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아내는 화를 내며 우산을 땅바닥에 내 팽개쳤다.

“조금 전 내 우산은 그래도 살이 2개밖에 안 부러졌는데…….”

 아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더 좋은 우산으로 바꿨다고 입이 찢어지더니……. 그것 봐, 바꾸면 더 좋을 줄 알았지? 결국에는 뉘를 고르잖아. 그러니까 첫사랑을 믿고 내세에도 그냥 나랑 결혼해. 텔레비전에 출연했던 할아버지 말처럼 그래도 살아본 놈이 더 낫지 않을까?”

나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머쓱해진 아내는 하는 수 없이 내 우산 속으로 기어들어오더니 나를 꽉 잡았다. 예전 물속에서 나를 놓으면 죽는다는 듯 붙잡고 매달리듯이……. 나는 소녀를 안고 백사장으로 기어오르듯 아내를 꼭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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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회 우수작

찰나의 기억이 남긴 진한 여운

  p는 촌스러운 이름을 가졌다. 요즘 유행하는 도윤, 하준, 지유처럼 매끄러운 알사탕 같은 이름은 아니더라도 내 또래 남자들이 가진 이름에 비해 p의 이름은 유독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고심하여 지어주신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이 넘쳤고 그 자부심 자체가 p라는 사람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살면서 한 번도 내 혀끝에 담아본 적 없는 글자의 낯선 조합을 다정하고 유연하게 부르게 된다는 것, 그것이 p를 향한 내 사랑이었다.

  우리는 스무 살 늦가을에 처음 만났지만 연애를 시작했던 것은 그 다음해였다. 첫 만남은 소개팅이라는 이름하에 단 한 번의 만남이었고 첫 눈에 그를 마음에 들어 했던 나와는 달리 p는 당시 마음에 둔 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먼저 연락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냐 는 친구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때, p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누군가 마음에 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끊었다. 한껏 자존심이 상해버린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서 왜 소개팅에 나오느냐며 원망하고 미워하려 노력했다.

  다시 만난 것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p와 나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학과만 달랐으니 우연히 마주치는 것쯤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사랑에 빠진 이들이라면 사소한 우연에도 눈이 멀어 이것이 인연이요 사랑이라 믿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도 그랬던 모양이다. 학교 근처 골목을 지나다 우연히 친구들과 호프집에 앉아있는 p를 보았다. 비닐 장막 너머 불빛에 비춰진 그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아직 앙금이 씻기진 않아 흘끗 쳐다보고 지나친 게 전부였다. 그러나 나름 매몰차게 지나쳤던 내 뒷모습을 p도 보았던지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우연을 핑계 삼아 우리는 순식간에 단단한 성을 쌓고 연대를 구축했으며 서로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문을 크고 넓은 것으로 달았다. 요샛말처럼 ‘밀당’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의 일이었다. 미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 나의 가벼운 애증은 이내 깊은 애정으로 진화했고, 긴 생머리의 뒷모습에 마음이 사로잡혔다며 고백한 p는 어둑한 칵테일 바에서 장미꽃 한 송이와 함께 연인이 되기를 청해왔다. 모든 게 정해놓은 것처럼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서로가 자신의 짝임을 알아본 어린 연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지방에서 갓 상경한 두 사람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추억을 쌓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청계천을 걷다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려 사지도 않을 책을 골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은 필요하지도 않은 전공 분야 서가에는 인적이 드물어서 누가 볼 새라 짧은 입맞춤을 나눌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고소한 빵 냄새에 이끌려 한 손은 빵을 들고 한 손은 땀이 나도록 꼭 잡고 걸었다. 명동에 가면 코즈니 쇼핑몰에서 인형, 액자 따위의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서로에게 선물하곤 했다. 처음으로 남산타워에 올라가 야경을 보며 다정한 말을 속삭였고 언젠가 돈을 벌게 되면 타워 아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자며 약속했다. 그러다가도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고 남산을 내려오느라 부루퉁해진 얼굴이 돼서 작고 무의미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겁이 많아 제대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p에게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p는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선생님이 되어 어린 딸을 가르치듯 자전거 중심을 잡는 법부터 페달을 굴리는 데까지 세심하게 봐주었다. 우리는 종종 자전거를 타기 위해 한강으로 갔다. 대여한 자전거를 타고 한강 둔치를 달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하루는 서울숲에서 자전거를 타는데 날씨는 몹시 추웠고 그에 비해 나는 한없이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강 옆 찬바람을 간과한 것이다. 목도리와 장갑같이 중무장을 하고 나왔어도 모자랐을 추위였다. 코가 빨개지고 감기 기운이 맹맹하게 돌 때쯤 p는 보다 못해 자신의 오리털 점퍼를 내게 걸쳐주었다. 그도 그 안엔 니트 스웨터 한 장을 입었을 뿐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벗어주었다. 걱정스레 춥지 않겠냐고 물어봤을 때 p는 코가 빨갛게 되고도 춥지 않다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사랑을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어주는 사랑이 또 있을까. 내 안의 애정이 뭉클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깊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반곱슬에 헝클어진 머리도 사랑했고 키가 작은 나완 다르게 187cm 큰 키에 길게 뻗은 종아리도 사랑했다. 평소에는 굵은 뿔테 안경을 썼지만 단 둘이 있을 때 보이는 맨 얼굴의 p도 사랑했다. 취미가 <수학의 정석>을 푸는 것이라는 엉뚱한 면도 좋았고 내 생일에는 사태살을 따로 삶아 맑게 끓여낸, 처음 먹어보는 형태의 미역국을 직접 만들어준 것도 감동이었다. p와의 연애는 마치 노래 가사처럼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새로운 감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저릿해오는 나의 연애는 사실 어딘가 모르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어느 날 우리가 즐겨가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내가 가방을 뒤적였을 때 가방 바닥에 유리조각이 나뒹군다는 것을 알았다. 자잘한 조각들은 그가 사준 곰 캐릭터가 그려진 작은 손거울 파편이었다. p는 자신이 치우겠다며 가방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이게 소설이었다면 이것이 파경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락한 연애의 기쁨에 취해있던 내가 떠올린 건 다시 구하기 어려운 거울에 대한 미련뿐이었다.

  p는 우리가 만난 지 3년이 되기 전에 헤어짐을 고했다. 적어도 내게는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분명 아침만 해도 잘 잤느냐며 통화를 했고 저녁에 만나 밥을 먹고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집에 막 데려다준 참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하루를 보냈는지 적어도 미리 눈치라도 주지 않았는지 따져 물었다. p는 그러면 내가 밥을 먹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가 떠나버린 방에 혼자 남아 목이 쉬도록 밤새 울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을 더 겪었더라면 알았을 것이다. 모든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해야 하지만 이별은 단 한 사람만 하고자 해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애초에 내가 납득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모든 연애의 결말이 결혼은 아니고 또 결혼이 사랑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때였다. p가 좋아하는 웰시코기 종의 개를 기르고 나중엔 이것도 해주겠다 저것도 해주겠다던 말을 하나씩 실현시키며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오래 연애해서 다년간의 정을 쌓아 결혼하는 이들을 내 미래라고 점찍어뒀던 것도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별 직후에는 우리의 연애가 p로부터 미련의 시간도 없이 버려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연애가 아무리 내게 특별했어도 사실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현실에 p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나를 귀애했던 그 시절의 연인은 이제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며 견뎠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첫사랑 첫 이별의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되어 가슴 깊이 남았다. 모두들 그런 사람 하나쯤은 가슴에 갖고 가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그날 밤, 내게 먼저 연락한 그의 문자쯤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한 번쯤 우연히 길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만 묻고 번호도 묻지 않은 채 헤어지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가끔은 꿈에 p가 나와 다정하게 애칭을 부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기도 했다. 그러나 흔해 빠진 식상한 답안처럼 시간이 약이었다. 점점 꿈에도 나오지 않았고 그런 우연은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각각 살아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무뎌진 마음으로 살다가도 문득 옛 생각에 가슴이 유독 시린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혼자 술을 마셨고 가끔은 울었다.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이 반복되고 p와 함께 했던 서울도 떠났고 나이 앞자리 숫자도 한번 바뀌었다. 옛사랑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것에 매진하기도 했다. 때로는 책이, 때로는 공연 관람이 그랬고 가장 마음을 파고드는 노래를 부른 가수가 되기도 했다. 슬픈 이별 노래보다는 밝고 신나는 노래를 들었고 어느덧 캔버스 위의 그림을 다른 색으로 덮어버리는 것처럼 이전의 기억들은 새로운 것들에 의해 묻히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만큼은 p가 아니면 붙일 수 없었다. 그가 찍어준 사진에 남은 피사체를 향한 애정, 한겨울 강바람에도 외투를 벗어주는 사랑을 나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대신 이따금 궁금해졌다. p는 잘 살고 있는지, 키우고 싶어하던 웰시 코기는 키우고 있는지, 아직도 친구들에게서는 예전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지, 지금도 술을 마시면 약간 코가 맹맹한 목소리로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지. p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못 마시던 아메리카노 커피를 물처럼 마시게 되었고 혼자서도 바에 가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p가 좋아했지만 나는 별로 선호하지 않아 잘 먹지 않았던 칼국수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p가 맛있다고 칭찬하던 그 집엘 같이 가줄걸 이라며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p는 현재의 연인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쏟아 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p가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질 때보다 조금 더 어른이 되어서야 p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게 되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가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연인들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듯한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 게, 작고 초라한 어른이 된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꺼내 보는 추억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런 기억을 채워준 p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심사평

 2018년 황순원문학제의 제1회 ‘나의 첫사랑 이야기’에 응모된 글들은 저마다 소중히 간직했던 진정한 사랑의 불씨들이었다. 다시 그때를 되돌아보며 한 자 한 자 글을 써 나가는 과정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생애 처음으로 사랑한 이를 위해 아름답게 펼쳤던 그 시절의 서툰 몸짓과 뜨거운 마음만큼은 모두 같지 않았을까. 아마도 글을 써 나가는 동안에 첫사랑과의 풋풋한 시절로 다시 성큼성큼 가닿았으리라. 이제는 멀어져버린 소중한 추억들, 실패와 아쉬움으로 남은 기억들로 가슴이 저렸을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각기의 숨은 이야기들이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지고 다듬어져서 무엇보다 아름답고 단단한 마음의 결정체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하고 오래가는 사랑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다. 유행에 휩쓸리는 상품처럼 겉치레만 요란하고 또 인간다운 내면이 휘발되어 허약하기 그지없는 가짜 사랑은 진정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툴지만 순수했던 첫사랑을 다시 떠올리며 함께 나누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사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대상 후보가 된 작품은 ｢뒤늦은 편지｣와 ｢첫사랑이 최고야, 바꿔봤자 뉘여｣였다. 두 작품 모두 첫사랑에 관한 기억을 깔끔하고 단단하게 전개하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았다. 대상을 수상한 ｢뒤늦은...｣은 제목 그대로 편지 형식을 취하면서 첫사랑의 아픔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서정적인 감정이 녹아든 문장과 형식의 완결성이 돋보였다. 그리고 최우수상을 수상한 ｢첫사랑이...｣는 구수한 입담으로 운명과도 같은 첫사랑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전개한 작품이다. 내면의 정서를 솔직한 어조로 잘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순수하고 철없이 사랑하는 이를 향했던 머뭇거림과 두려움, 거기에 수반한 슬픔과 고통의 눈물이 지나고 나면 더 큰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이번 공모전에서 목도한 ‘나의 첫사랑 이야기’가 저마다의 첫사랑을 넘어 우리 시대의 사랑이라고 하는 더 큰 화두로 수긍되고 더 폭넓게 읽힐 것이다.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은 그와 같은 기획 의도를 잘 반영한 글들이었다. 대상을 비롯한 수상자들께 진심 어린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앞으로 더 아름다운 글을 써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강은모(문학평론가)
장예원(문학평론가)
정재훈(문학평론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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