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인간이 맛이 가면 어느 정도일 수 있는가를 말해 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월남에서 1천 7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월남전 참전 미군인을 위해 2천억 달러를 더 지불했다. 1982년 11월 헌정된 월남전 참전 기념관은 280만의 생존 귀환자들에게 통곡의 벽이었다. 그 중 80만의 귀환 군인이 전후 정신질환과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렸고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약 6만 명의 퇴역군인들이 자살을 해서 실제로 전쟁기간에 죽었던 군인들의 숫자보다 많았다.
사람을 죽일 때는 상대가 멀수록 안보일수록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군 해군은 육군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었다. 일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판정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하지만 아예 후방으로 빼버리면 다시는 복귀를 못하기 때문에 통상 3일 후에는 원대복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어서 적과 대면할 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었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8 년 동안 한국군이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 4, 7000 명이다. 그렇다면 4, 7000 명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을까?
TRAUMA(정신적 외상)는 본래 정신의학분야에서 특정한 병리적 증상을 논의하는데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을 거치면서 참전 군인들의 후유증이 알려지면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월남전참전군인이 TRAUMA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참전전우들 가운데 TRAUMA에 시달린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한국인이 미국인 보다 더 독종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한국인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군인과 비슷하게, 2차 대전을 치른 일본 군인들도 TRAUMA에 시달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인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주장을 접한 기억이 있다. 한마디로 전체주의적인 윤리적인 감수성이라고 할까?
분명치 않은 이유 때문에 애매하게 겪는 일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겪는 일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법이다. 미군은 징집 되어 갔지만 한국군은 대부분 지원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월남에 지원했던 대부분의 한국군은 돈 때문이었다. 즉 월남전 자체가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방관적인 자세를 갖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이 아닐까?
TRAUMA라는 측면에서 월남전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은 개인적으로 겪고 있고 월남은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즉 때린 놈은 개인적인 TRAUMA를 느끼지만 맞은 놈은 집단적인 TRAUMA를 느낀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내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도 집단으로 내상을 입는다.
고엽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
'(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재판비용과 판결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하기 때문에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택했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억 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 그러나 8년 5개월 동안 미군 다음으로 많은 346,393 명이 참전해서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돈 1달러도 받지 못한다. 이유는 전두환 때문이었다.
한국은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서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5공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리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84년 J 일보에서 고엽제 문제를 보도했으나 제보 기자를 해고시키고 다른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이었고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된 후에나 겨우 고엽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고엽제 피해 단체가 법률 제 8793에 의하여 비로소 공법단체가 된 것은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왔던 훈장을 탄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12월 2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