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제작 ; 서울 둘레길 길동무
‘함께 행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행(同幸)으로 시작한 서울 둘레길 길동무 팀의 2019년, 팀장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매 주 토요일을 기다려 함께 걸으며 행복을 나누웠는데 오늘이 금년의 마지막 토요일, 행복을 찾아가는 아침입니다.
어느 앱을 열어보니 과거에는 소중한 추억을, 현재는 즐거운 도전을, 미래는 새로운 희망이라 했더군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를 통해 인연되어 시작한 동행(同幸), 길동무 모두가 소중한 추억을 남기셨는지요, 현재는 즐겁게 걷고 있는지요, 이제 2020 새로운 희망을 약속하며 강화터미널에서 월선포선착장으로 버스는 달려간다.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도 다을새길의 시작점인 월선포선착장이다. 다을새는 교동의 예지명 가운데 하나인 달을신(達乙新)에서 왔다. 교동도는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고려ㆍ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 그리고 조선 중기엔 경기ㆍ황해ㆍ충청 삼도 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됐던 중요 섬이다. 한강ㆍ임진강 물과 예성강 물이 합쳐지는 물길 어귀에 교동도가 있다. 드넓은 간척지, 들판과 하늘을 휩쓸고 다니는 철새떼가 몰려다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 마을과 산자락에서 옛사람들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풍년들면 교동 주민이 10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의 섬, 천혜의 자연과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고즈넉한 숲길, 강화 속 강화다. 며칠간 미세먼지가 발목을 잡았는데 찬바람이 불며 모처럼 깨끗한 날이 구름이 해를 가렸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월선포선착장이다. 예전 강화 본섬을 이어주던 유일한 뱃길이 교동대교에게 내어주고 지금은 낚시꾼들과 나들꾼들이 찾는 곳이다. 월선포는 선멀(배를 짓던 마을) 앞에 있는 포구인데 달밤에 선멀서 바라보면 고요한 바다 위에 둥근 달이 비치니 바닷물 속에도 달, 하늘에도 달, 겸하여 노송이 물위에 비치니 그 광경이 달의 신선이라 하여 월선이라 하였으며 이태백이 놀던 자리 같다 하여 월선포라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교동교회를 지나 이정표와 장승이 서있는 삼룡리마을로 들어선다. 한가로운 시골마을의 풍경이 향수를 느끼며 걷는 마을길은 곧이어 옛 교동교회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 1899년 세워져 120년 역사를 지닌 옛 교동교회다. 교회 앞에는 고풍스런 나무 종탑이 시간을 붙잡아 두고 있다. 고즈넉한 산길로 들어선다. 겨울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로 걷기가 안성마춤이다. 지난 가을 '링링'이 힘쓸고 간 흔적이 마음 아픈 언덕길을 올라 첫 번째 쉼터인 안양사지를 만난다. 안양사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정도로 연혁이 있었으나 화개산 남쪽에 그 터만 남아있다. 읍내리의 장수약수터가 안양사가 있던 자리로 낮은 석축이 남아있다. 안양사지를 뒤로 아름다운 숲길은 길동무들을 마음을 사로잡는다. 교동향교가 마중나온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에 창립되었으며 고려 충렬왕 12년(1289) 안향이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유로 추앙받는 공자와 주자 상을 가지고 왔는데 고려에 당도하여 첫 번째로 배를 댄 곳인 교동도에 문묘를 세우고 화상을 봉안하였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며 동국 18현인(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김장생, 조헌,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제기고 ·주방 등이 있다.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80년 복원되었다. 교동도의 교통편이 조금은 불편해 서둘러 교동향교에 물이 끈긴 성전약수를 뒤로 한차례 가파른 포장길을 오르면 화개사가 길동무들에게 얼굴을 들어낸다. 조금은 건물모습이 절같지 않는 화개사는 고려시대 이래 줄곧 유지되어 온 교동을 대표하는 전통 사찰이다. 화개산 남쪽, 교동의 행정관서가 있던 읍성 근처에 자리한 화개사는 수백 년 동안 교동 주민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으로, 교동향교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교동향교가 교동 주민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라면, 화개사는 신앙과 수행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이다. 화개사는 고려시대 목은 이색이 공부했던 절로 유명하다. 14살에 친구 2명과 함께 책을 싸들고 바다 건너 교동 화개산에 들어가서 공부했다고 그의 문집‘목은집’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 가파른 임도길로 오름길이 가팔라진다. 그리고 만나는 문무정이다. 화개산 남쪽에 있는 문무정은 본래 문정과 무정 두 개의 샘이었으나, 지금은 하나의 샘으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문정의 물이 많으면 문관이, 무정의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어는 날 이 샘에서 솟은 빛줄기가 바다 건너 송가도(지금의 삼산도)까지 비추어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하게 되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운 후 진정되었다고 한다. 문무정이 메워진 후에 교동에서는 문관과 무관의 배출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전해온다. 화개산 오름길이 가팔라진다. 푸른 하늘에 닿은 바다 속 화개산을 오르는 길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바위길을 매달리며 한차례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는 길동무들은 힘은 들지만 화개산 정상을 만날 기대감이 역역하다. 화개산 봉수대에 오른다. 화개산 정상에서 서쪽능선에 이어져 있는 연봉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보면 남쪽 아래 교동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라 전해지며 남쪽으로는 강화의 덕산(망산)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하음산에 응했다. 봉수는 긴급한 소식을 횃불과 연기로 전하던 통신 수단이다. 주로 국경지방에서 적의 침이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군사 목적으로 쓰였다. 봉은 횃불이고 수는 연기이다. 화개산 봉수대를 뒤로 능선길을 걷다보면 화개산 청동기 암각화가 길동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리고 올라선 곳이 화개산 정상(259m)이다. 휘둘러보는 조망이 아름다운 답다. 강화 본섬의 별립산부터 고려산, 혈구산, 덕산 ,국수산, 석모도의 상주산 그리고 주문도, 볼음도까지 파노라마를 선사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동도의 논밭의 규모다. 교동도에는 논 800만평, 밭 200만평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이처럼 곡식을 풍성하게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농사에 댈 물이 부족해 참외나 감 등의 농사만 했고, 여기서 나온 수확물로 이웃지역인 황해도 연백과 쌀을 교환했다고 한다. 황해도 연안군(옛 연백군)의 모습은 조금은 아쉽지만 안개 때문에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을새길은 시작부터 화개산(259m) 정상을 향해 달려온 길동무들은 이제 추억을 남기기 위해 대룡시장으로 향한다. 이 내리막길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정말 발목을 붙잡는 길인데 올 겨울은 너무나 포근해서 봄이 오는 길처럼 흙길이 조금은 미끄럽다. 성혈바위다. 성혈(바위구멍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에 별자리, 풍요화 다산,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안 주술적 행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바위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지점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좀 더 내려서면 시야에 고구저수지의 아름다운 수면이 길동무들을 붙잡는다. 어느해 겨울이었지 고구저수지는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으며 마치 울고 있는 듯했었지, 화개산성 망루에 선다. 화개산은 259m의 낮은 산이지만, 교동을 지키는 전투지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다. 화개산성은 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산성(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이란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고 있는 구조를 말하며 화개산성의 남쪽은 산 정상부의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였으며,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축조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1555년 최세윤이 증축하고, 1591년 이어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1737년에 개축하여 군창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화개약수에서 잠시 올라서면 효자묘터다. 효자 묘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 병환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청주골에서 살았던 효성이 지극한 신 씨라는 젊은이가 아버지의 공양식 제공을 대가로 교동현의 군사로 징발된 부유한 집의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모병되어 종사하게 되자 그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에 노심초사하여 고목근현(현재의 고읍마을)으로 이사하여 아들과의 약속을 삶의 목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 약속은 아들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있다면 산성의 북루(北樓)에 해가 지기 전 하얀 적삼을 누대에 달아 아들의 생존을 어버이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었다 한다. 그 시절에는 봉화나 수기 신호로 아군이나 내륙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던 때라 어느 날 이를 수상히 여긴 수장이 적삼 수기를 못 달게 하였으므로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상심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아들을 취조 하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장이 그 어버이의 시신을 산성 내에 안장하고 삼년시묘를 허락하여 종사하게 함은 물론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수장과 병졸의 아침묘소 참배를 생활화하여 참배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효(孝)의 근본(根本)으로 그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화개약수터에서 연산군유배지로 내려선다. 주말을 맞아 많은 산꾼들이 화개산를 오르는 모습을 보며 정말 화개산이 명산임을 보여주고 있다. 연산군유배지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1506년 9월 교동으로 안치되어 그해 11월 사망할 때까지 약 2개월 동안 유배되어 있었다. 교동에 안치한다는 기록만 있을 뿐 교동 어느 곳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현재 교동면에서는 읍내리 읍성안, 고구리 연산골, 봉소리 신골 등 세 곳을 유배지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통한증막를 만난다. 화개산에서 고구리로 내려서는 길목에서 만나는 전통시대의 한증막은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반까지 동네사람들이 사용했었다. 소나무에 불을 지펴 밀폐된 한증막을 가열시키고 일정한 온도가 괴면 물을 뿌려 불을 끈 후, 헝겹이나 가마니를 두르고 들어가 땀을 내는 방법으로 한증막을 즐겼다. 오랜 새월로 점점 허물어져 내려 2008년 복원공사를 하였다. 지름 4.5m로 어른 1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교동면사무소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내려서다 만나는 안내판이 오늘도 정겹다. "교동도, 너와 나의 추억, 지금 만나러 갑니다" 110여년 전통을 자랑하는 교동초등학교를 지나 오늘의 점심메뉴인 만두전골을 먹으로 "수진내 식당"으로 들어선다. 맛깔스러운 반찬과 함께 만두전골로 길동무들의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낸다. 오늘의 추억여행지 대룡시장으로 들어선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가득찬 대룡리의 시장은 1960~70년대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해방 후 면사무소를 비롯한 주요 시설이 읍내리에서 옮겨오면서 대룡리는 교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0년 6. 25 전쟁 이후 황해도 지방의 피난민들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 연락장소로 이용하면서 먹을거리를 비롯한 장터가 생겨났다. 피난민들이 그곳에 정착하면서 점포수가 늘어나고 업종도 다양해지면서 대룡리 시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룡시장은 교동이발관, 거북당, 동산약방, 교동정미소, 제일다방, 강화상회 등 가게 이름이 딱 옛날 그대로다. 곳곳에 벽화도 그려지고 건물도 조금씩 손을 봐 예전 같은의 옛 풍광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골목에 들어서면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해진다. 1960~1980년대의 빛바랜 사진 같은 모습이 곳곳에 간직되어 있다. 교동은 신라 경덕왕16년(757년)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호칭이 정해졌다고 한다. 교(喬)는 높을 고(高), 높이솟을교(上)의 뜻으로 어원은 「夭」(구부러짐) 와 「高」의 생략형의 한자로, 높고 상부가 구부러짐의 뜻이며 교목(喬木)은 키가 큰 나무를 가리키는데 아마도 고구려시대부터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 불리워진것에 기인한 것, 동(桐)은 오동나무의 동자로 동재(桐梓)는 오동나무와 가래나무의 뜻으로 곧 좋은 재목(인재)를 나타낸다. 교동에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지금도 읍내리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보인다), 좋은 인재가 많이 났기 때문에 교동이란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옛날 대룡리는 마을에서 역마를 사육하여 대역촌(大驛村)이라 부르다가 뒤에 대아촌으로 개칭하였다. 교동의 중심이 되는 큰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룡리라 하였다. 대룡시장을 뒤로 들판길이 시작된다. 기대했던 철새들의 향연은 오늘은 보지못했다. 철새는 없어도 참새 떼가 반기는 남산포로 가는 길, 길동무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남산포(삼도수군통어영지)로 들어선다. 삼도수군통어영지는 1633년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여 경기도는 물론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관장하던 부대의 터이다.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적하여 해안을 방어하였다. 근세에 선착장을 개축하여 이 일대의 경관이 상당히 변했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없다. 잠시 진망산(남산) 사신당으로 밧줄에 매달려 오른다. 이곳에 예전에는 큰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 신당이 있었는데 이를 사신당이라 불렀는데 6.25때 없어진 것을 1969년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사신당 내부에는 임경업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송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배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언제였던가 길동무와 함께 남산포선착장에서 보는 얼음바다는 정말 장관이었는데 올 겨울 큰 추위가 없다보니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쉽다. 남산포 앞바다에 바위 섬 하나다 눈길을 끈다. 응암이다. 응암은 교동도와 송가도 사이에 있는 바위섬이다.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인 ‘여’라 하기 에는 만조 시에 잠기는 일이 없고, 바윗돌로 된 작은 섬인 ‘염’이라고 하기 에는 식생대가 없는 바위섬이다. 교동도 사람들은 ‘매여’라기도 하고 상여를 닮았다고 해서 ‘상여바위’라고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응암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봐서 이곳 섬 주민들은 매여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응암은 응암상월이라 하여 교동팔경 중 하나로 강화도, 송가도, 미법도 등과 어우러진 경관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듯 풍경이다. 남산포를 뒤로 교동읍성으로 향한다. 조선 후기 1629년 경기 수영을 이곳에 설치할 때 쌓은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ㆍ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인조 7년(1629년) 교동에 처음으로 영이 설치될 때 축조된 것으로 주위는 305m, 높이는 2.4m인 옹성(甕城)세곳과 치첩 네곳이 있고 둘레는 동남북에 세 개의 문이 있으며 소남문(小南門)이 있었다. 남문은 고구려시대 때부터 고목근현의 초소로도 알려져 있다. 교동읍성 남문이다. 교동읍성에는 삼문에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은 통삼루, 북문은 공북루, 남문을 유량루라 불렀으며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연대조차 알 수 없고 남문도 1921년의 폭풍우로 아취형의 남문만이 남아있던 것을 1982년에 강화군수를 지낸 교동 읍내리 출신 김충호 군수가 경기도청 재직 시 붕괴된 남문(아치형)과 치첩을 보수하여 원형은 되찾았는데 남문위에는 유량루로 추측되는 네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었는데 남문은 1974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56호로 지정되어 1975년에 해체 복원에 이어 현재 문루가 복원되었다. 마을 길을 따라 황룡우물을 만난다. 교동 수영 앞에 있는 우물로 그 안에서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종 때 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418년 3월 13일 수군첨절제사 윤하가 수영 앞에 있는 우물에 황룡이 나타났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황색의 큰 용이 우물 가득 차게 보였는데 허리가 기둥과 같이 굵었다고 했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남양의 화량진을 옮겨 경기수영이 읍내리에 설치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된 것이다. 삼도(경기·황해·충청) 수군통어영을 관장하였으며 안해루(현종9년1667년)의 석주가 2개 남아있고, 객사 터와 북문과 서문, 동문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가 제법 남아있다. 연산군적거지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 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 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인 폐비 윤 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 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조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죽은 터다. 또한 인근에는 부근당이 있는데 이 곳에 연산군과 그 부인 신 씨의 화상을 모신 것이라고도 한다. 연산군과 그 부인 신 씨의 묘는 서울둘레길 8코스에 자리하고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가 길동무를 손짓한다. 잠시 느티나무 보호수에 올라 추억거리를 남긴다. 다을새길은 이제 동진포가 마중나온다. 1629년 교동에 수영이 설치되고 읍성이 축조된 후 사용되었던 읍성 앞쪽의 포구다. 한때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교동으로 와서 날씨를 살핀 후 서해로 나갔으며, 동진원이라는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교동팔경 중 동진송객이 있으니, 이곳에서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교동도 다을새길의 하이라이트 제방길이 시작된다. 갈때 숲 그리고 겨울바다를 보며 달리는 길동무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시점이자 종점인 월선포선착장 오전과는 달리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려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여행을 안겨준 교동도 월선포에서 작은 음악회를 끝으로 2019년 마지막 트레킹을 끝낸다. 길동무 여러분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황해도 만두가 맛있다고 하던데 수진네 식당을 가봐야겠습니다
교동도는 추억여행하기 좋은 곳이지요. 수진네 식당의 만두전골 값도 싸고 맛도 최고더군요. 교동도에 식당들은 여러군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