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稔(진념·62)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별명이 「직업이 장관인 사람」이다.
세 개 정권에서 부총리를 포함, 모두 여섯 번째의 장관을 지내고 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인 1991년 그는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처음 장관직에 올랐고, 金泳三 대통령 시절인 1995년
노동부 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金大中 대통령이 집권한 현 정부에서 1998년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장(장관급),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 2000년 재경부 장관을 거쳐 2001년 1월 지금의 경제총수(부총리) 자리에 올랐다.
전북 부안 출신인 그는 대표적인 호남 엘리트群에 속한다. 영남 대통령 시절에는 호남이라는 지역 안배 케이스로,
또 호남 대통령 시절에는 같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장관직에 올랐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누구에게나 친화력이 있고 지방색이 덜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청와대가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실제로 그는 재경부에서 비교적 지역을 따지지 않는 공평한 인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DJ 정부에서 「벼락출세」한 많은 호남 출신들의 성향과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재경부의 한 영남 출신 공무원은 『언젠가 陳부총리에게 업무보고를 하기 위해 부총리 비서실에서
다른 간부 세 명과 함께 대기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간부 네 명이 모두 영남 출신이었다』면서
『속으로 「지금이 DJ정부 맞아?」라는 생각을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陳부총리 스스로가 영남 정권이 키워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陳부총리는 한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날 키워 준 분은 金鶴烈 前 부총리(1969~1972년ㆍ경남 고성)다. 그분은 나를 사무관 시절부터 채찍질하면서 키웠다.
그 다음 徐錫俊 前 부총리(경북 성주)가 중용해 줬다. 역대 영남 정권에서도 기획원에는 호남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차관보가 될 때까지는 능력에 따라 인사를 했다』
陳부총리의 말처럼 과거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했던 경제기획원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똑똑한 인재들이 중용된 적이 많았다.
일례로 기획원 내에는 「前 3총사」와 「後 3총사」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前 3총사」는 李鎭卨(前 건설부 장관), 崔洙秉(한국전력 사장), 陳부총리였고, 「後 3총사」는 金仁浩(前 경제수석),
金英泰(前 산업은행 총재), 朴有光(前 경제기획원 차관보)이다.
「前 3총사」 중 李鎭卨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전남-북 출신이고, 「後 3총사」는 모두 경기高와 시라큐스 대학 출신이었다.
그만큼 과거에는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탁했다는 증거다.
陳부총리는 仁德도 많은 편이다. 과천 경제부처에서 평이 좋다. 재경부 공무원들뿐 아니라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난 1월 개각 때의 일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陳부총리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과천의 재경부 간부들은 달랐다. 당시 개각에서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으로 영전한 金振杓 재경부 차관은 이례적으로
陳부총리 퇴진 불가론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陳부총리만큼 골고루 갖춘 사람이 없다는 논리였다.
金차관(당시)은 『경제부총리는 거시경제에 대한 업무파악 능력뿐 아니라 경제부처를 이끄는 리더십, 재벌 및 노조와의 관계,
야당 및 언론과의 관계, 대외관계 등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봐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陳부총리만 한 인물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퇴진 불》極〈� 柳志昌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 「실세」 차관급들이 가세했다. 마치 서로 짠 것처럼
『陳부총리를 더 모시고 싶다』고 했다. 官街에서의 陳부총리의 인기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출입기자 역시 陳부총리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다. 陳부총리는 기자들을 맞상대하는 공보관을 반드시 우대해 왔으며,
이는 기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陳부총리는 『과거 물가총괄과장을 맡을 때 언론인 출신이었던 徐基源씨로부터
기자의 속성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한다.
기자들을 상대하는 공보관을 제대로 발탁하고, 인사 때엔 반드시 주요 국장 자리로 전보시켜 줬다.
개성이 강한 기자들을 상대로 무사히 공보관을 마친 인물이면 그만큼 능력이 있고 人和에도 문제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폭탄주 돌리며 人和 다져
陳부총리는 또 기자들이 퇴근시간(오후5시) 이후 집무실로 찾아가면
가끔 위스키와 맥주를 가져오라고 하여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기도 한다.
특히 이슈가 되는 질문공세가 이어져 곤란한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술로 넘기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는 직원들이나 기자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좌 삼삼」, 「우 삼삼」,
「앞으로 한잔」을 돌린 뒤 다시 「대각선으로 한잔」으로 돌린다. 그리고 나면 「이제는 마음의 잔」이라며
무작위로 돌리며 자신에게 집중되는 술잔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린다.
陳부총리의 술 실력과 관련된 최근 일이다. 지난 2월15~16일 이틀간, 陳稔 부총리는 재경부 출입기자들과 함께
대전 통계청과 관세청 등을 순시하고 인근의 현대자동차와 대덕단지 연구소 등을 견학했다.
이 과정에서 陳부총리는 15일 저녁 회식에서 테이블 세 곳을 돌아다니며 폭탄주를 세 잔씩, 모두 아홉 잔을 마셨다.
폭탄주를 돌리기 전에 마신 잔까지 포함하면 그날 들이킨 술은 상당한 양이라고 한다.
회식이 끝난 뒤에는 다시 기자들과 심야까지 얘기를 나눴으며, 아침에는 거뜬히 일어나 예정대로 순시를 마쳤다.
해운항만청장 시절, 노조와의 술 담판은 유명한 일화다. 1988년 해운항만청장 취임 직후 그는 기세가 등등한
부산항운노조와 밤새워 술마시며 그들을 술로 제압했다고 회고한다.
기자들이 陳부총리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얼굴을 마주대하려는 자세에 있다.
기자가 취재하러 집무실을 들르면, 반드시 최근 이슈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
2000년 말 예금 부분보장제 한도를 놓고 논란이 빚어질 당시, 陳부총리는 여론을 반영하는 언론의 입장이 중요하다며
견해를 묻기도 했다. 결국 언론들은 신문을 통해 한도를 2000만원으로 하는 게 바람직한지,
3000만원이 좋은지 5000만원이 나은지에 대해 여론수렴에 나섰다. 결국 언론을 끌어들이며
예금 부분보장 한도를 5000만원으로 결정했고, 뒷말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이처럼 陳부총리는 격론이 뒤따르는 이슈를 다룰 때는 「共犯」을 끌어들이곤 한다.
그는 간부 직원들에게 이렇게 「공범론」을 펼친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재경부 국장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 당신들(국장)도 기분 나쁠 것 아니오.
부하 직원과 말할 때 처음부터 일정한 선을 그어놓지 마시오.
무조건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지 말고 여러 사람 얘기를 들어본 뒤,
「당신 얘기가 옳소. 다같이 함께 해봅시다」고 하면 모두가 신나는 것 아닌가』
누구한테 명령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아드레날린만 분비되고, 엔도르핀은 샘솟지 않는다는 게 그의 행정철학이다.
다른 경제부처와 정책조율을 할 때도 한 발짝 물러서는 그의 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陳부총리는 『경제행정을 오래 하다 보니, 리더 몇 사람이 개혁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고 뛰어다녀 봐야 개혁이 되는 게
아니란 걸 터득했다』고 말한다. 保育(보육)문제만 해도 보건복지부와 여성부, 교육부, 노동부가 다 걸린 사안이지만,
발표해서 가장 빛나는 부처가 발표하고 책임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부총리라고 해서 「혼자서 차 치고 포 치는 일은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수차례 실감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공공부문을 개혁하기 시작한
기획예산위원장 시절, 「국가경영」이란 표현을 썼더니 행정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용어』라며 반발한 때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경영이란 표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과거 「조세의 날」을
「납세자의 날」로 바꾸자고 했을 때 재무부가 반대해서 결국 한 해 늦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항간에는 陳부총리에 대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사람이다, 결정하는 일이 없다, 개혁적 성향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일축한다. 『경제문제에 관한 한 나는 시장론자이며,
시스템 개혁론자』라고. 그렇다고 시장에 무조건 맡기자는 것은 결코 아니며,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견해다.
재경부의 한 고위 관료는 『陳부총리는 개혁 얘기만 나오면 「마구잡이로 도끼로 깨부수는 식의 개혁은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부실기업으로 꼽히는 하이닉스반도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陳부총리는 「회사채 신속 인수제」라는
희대의 秘方(비방)을 마련했는데, 그는 이것도 시스템 개혁과 연결을 짓는다.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한 상황에서 하나만 무너지면 도미노식으로 연쇄 도산하게 되는데,
정부가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陳부총리는 『IMF 직후 기아 회장을 맡던 시절, 은행 문이 닫혀 신용장(L/C)조차 개설할 수 없었다』면서
『시장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정부는 직접 개입해 시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하이닉스 사태 초기 정부 조치도 옳은 것들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이닉스 처리와 관련해, 한때는 골치아픈 하이닉스를 퇴출시켜 버리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개혁에 대한 해외의 신뢰를 높일 수도 있다는 계산도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아랫사람 편하게 해 주는 스타일
陳부총리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정말 官運이 좋은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작년 8월 개각 때 교체설이 나돌았다. 경제가 2분기(4~6월)부터 좋아질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경제 침체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陳부총리 본인조차
『작년에 장관직을 물러났으면, 불명예 퇴진이었을 것』이라면서 『그때는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말할 정도다.
특히 9·11 테러 사태로 미국경제가 침체일로에 빠지고, 그 여파로 되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던 한국경제도 사그라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오히려 해외 투자가들은 돈을 싸들고 한국을 찾았다. 싱가포르, 대만 등 소위 잘 나가던 아시아
경쟁국들이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며 죽을 쑤고 있던 반면, 우리 경제는 상승세를 타면서 외국인 투자가들이
「그래도 한국밖에 없다」며 찾아든 것이다. 그 영향으로 한국의 증시는 세계의 경기침체와는 아랑곳없이 활황세를 탔다.
그는 지난번 개각 때도 운좋게 살아남았다. 지난 1월 말 개각을 앞두고 관가에서는 李起浩 前 경제수석이 입각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이 경우 田允喆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現 청와대 비서실장)과 쌍두마차를 형성해 한 사람이 경제부총리,
다른 한 사람이 기획예산처 장관을 맡게 된다는 설이 파다했다. 李 前 수석은 당시 재경부 주요 포스트에 있는 관료들과
저녁자리를 가질 정도로 입각을 앞두고, 다지기 작업에 들어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잡은 「李容湖 게이트」가 陳부총리에겐 호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李起浩 前 수석이 「李容湖 게이트」와 관련해 전화를 한 통화 받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李 前 수석은 사의를 표명했고,
이어 개각이 단행됐다. 田장관은 비서실장으로 향했고, 경제팀장으로서 지휘봉은 여전히 陳부총리 손아귀에 놓여졌다.
이를 놓고 관가에서는 『陳부총리의 관운은 타고났다』는 말이 번졌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부의 裵永植 기획관리실장은 陳부총리가 이처럼 長壽(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지역차별을 하지 않는 불편부당,
능력 위주의 발탁, 아랫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관리 기법』이라고 꼽고 있다.
陳부총리는 사람 챙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역대 재경부 장관인 李揆成, 康奉均, 李憲宰씨 등과 함께
골프회동을 가졌다. 물론 陳부총리 제의로 이날 모임이 성사됐다. 역대 재경부 장관들이 골프장에서 함께한 것은 처음이다.
李揆成 前 장관은 『陳부총리가 그렇게 사람을 잘 챙겨요』 하며 칭찬한다.
陳부총리는 또 같은 달 姜慶植 前 부총리와 오찬을 함께 하며 국정 전반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田允喆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을 비롯한 기획예산처 간부들(자신이 장관 시절에 함께 일했던 간부들)과 저녁도 함께 하는 등
옛날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잘 챙긴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과는 특별한 「인연」 없어
세간에는 호남 정권이기 때문에 金大中 대통령과 잘 알고 지내 장관직에 오래 머무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국민의 정부 들어 많은 장관들이 金大中 대통령과 과거 교감을 가졌던 인물들인 데 비해,
陳부총리는 같은 호남사람이면서도 이상하게도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陳부총리는 기아차 회장 시절이었던 1997년 말, 당시 大選 후보로 소하리 공장을 방문한
金大中 대통령 후보를 점퍼 차림으로 맞은 것으로 유명하다.
陳부총리는 『金대통령 취임 전까지만 해도 점심 한번 함께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DJ정권 초기 기획예산위원장 직을 맡아 달라고 청와대에서 요청할 즈음, 기아차 회장이던
陳부총리는 자금난 때문에 金英泰 당시 산업은행 총재를 접촉하고 있었다.
그때 陳부총리는 장관급이던 기획예산위원장 자리를 정중히 사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아차 살리는 게 1차적인 임무였고, 둘째는 金大中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으니
주변에 애쓴 다른 勇將을 기용하는 게 타당하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전해진다.
「직업이 장관」이지만 그에게 특별한 「장관학」은 없다.
그에게 장관직을 안겨준 盧泰愚, 金泳三 前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金大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장관에 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관에 오르기까지 「홀로서기」 외에는 다른 해답이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 뿐이다.
해운항만청장에 오를 무렵, 그는 친한 여권 인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했다.
『(해운항만청장) 하지 마라. 쓸데없는 정보 보고가 마구 올라오고 있다』고. 차관보 될 때까지는 뒷말이 없었는데
차관급에 오르자, 끌어내리려는 음해가 시작된 것이다. 陳부총리가 기자들에게 『陳稔이 자르려면 확실히 자르라고 해』면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정치권을 향해 내뱉는 것은, 엄청난 시련을 거쳐 살아남았다는
「장관 9단」의 자신감에서 배어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차출령」 고비마다 빠져나가
영호남 정권을 드나들며 경제부처 장관을 맡은 陳부총리에게도 수차례 정치권의 손길이 찾아왔다.
그가 처음으로 여의도 정치 1번지行을 고민한 때는 동력자원부 장관을 맡던 1990년대 초였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이었다.
陳부총리는 『1991~92년 즈음해 당(민정당)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날 임명한 대통령이 나가라고 하면 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임기까지 대통령을 모시고 싶다』며, 완곡한 거절의 뜻을
비쳤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출마 얘기가 나온 만큼, 자신도 준비는 해야겠다고 판단해 사전 염탐 작업에 나선다.
당시 陳부총리는 朴健培 해태 회장이 운영하던 정치광고회사를 통해 자신이 나서게 될 지역구에 대한 지지율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낙선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전북 전주의 완산구와 덕진구가 물망에 오르는 후보 지구인데 각각 지지도가 4.8%, 5.2%밖에 나오지 않았다.
陳부총리는 또 친구를 통해 선거비용을 따져봤다. 선거하는 데 그때 돈으로 무려 30억원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陳부총리는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표현한다.
어쨌든 어차피 나가면 지는 게 뻔하다면 기왕이면 멋지게 떨어지자고 판단한 陳부총리는 이때 꾀를 낸다.
당시 전주 덕진구 지역구 위원장이며 서열도 높던 임방희씨에게 전국구를 추천하고, 그 자리에서 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盧泰愚 대통령이 이후 아무 말이 없어 출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호남지역에서 민정당 출마자는 줄줄이 떨어졌다.
그는 동자부 장관을 마치고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 머물던 1993년에도, 金龍煥 前 재무부 장관에게서
정치인으로 전향하라는 제의를 받는다. 스탠포드 대학에 다니던 둘째 아들을 찾은 金 前 장관이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나누던 중 『정치를 해 보자』고 권유해 왔으나, 陳부총리 부부는 한 마디로 「노(No)」를 선언했다.
하지만, 陳부총리가 노동부 장관을 하던 1996년에 두 번째 정치바람이 찾아온다.
당시 자민련 정책위 의장이던 金龍煥씨가 『출마해 달라』며 요청, 3년 만에 정치바람을 다시 일으킨 것이다.
金의장은 그 때 서울에 자민련 케이스로 나오는 지역구 중 한 군데를 陳부총리가 골라서 나가 달라는 주문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때도 陳부총리는 정중히 사양했다.
선거관련 법을 지키면서 당선되기 힘든 정치현실을 생각할 때 정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설명을 했다고 한다.
陳부총리는 『공직생활만 30년 이상 했는데,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국회의원 될 생각도,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정치자금 문제를 고민한 것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고 그는 털어놓고 있다.
선거공영제만 정착된다면 법인세 일부를 내놓을 수 있다는 최근의 그의 발언은, 그럴 만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陳부총리, 命이 길긴 길어』
陳부총리는 정치자금에 대해 이런 농담을 주위 사람들에게 던지곤 한다.
『돈도 쓸 줄 아는 사람이 써야지, 우리 같은 사람이 쓰면 덜컥 걸리기 십상이다. 한 칼에 날아가지』라고.
30년 이상 공직에 몸담으면서 쌓아 온 명예가 하루아침에 물거품되는 위험을 안고 가기 싫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세 번째 陳부총리 출마설이 나돈 것은 2000년 4ㆍ13 총선을 앞두고서였다.
그때도 陳부총리는 자신을 임명한 사람이 나가라면 당연히 나가야겠지만, 자발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시에도 출마 사인은 당(민주당)에서 나왔다.
陳부총리는 『그때 사표를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맡기고 당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로부터 「없었던 일로 하자」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장관직에 머물게 되었다.
야당의원들은 지금도 그를 보면 『陳부총리, 命(명)이 길긴 길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이같은 맥락을 아는 탓이다.
세 번째 출마 얘기가 나올 때에는 陳부총리가 많은 구설수에 오른 게 사실이다.
『떨어질 것 같으니까, 나오지 않으려 한다』 등등. 陳부총리는 『당시 한 일간지에서 나와
南宮晳 의원을 「도망병」으로 표현하는 만평을 실어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회고했다.
실제 그는 그뒤 南宮晳 의원과 만나 골프를 친 뒤, 술 한잔을 하면서 『우리 나갑시다. 도망간다는 소리에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낍니다』고 했다고 한다.
陳부총리는 『장관직을 그만두면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개각 때마다 교체 얘기만 나오면,
기자실에 들러 『나,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으로 가고 싶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물론 유임이 확정되면
이런 얘기는 쑥 들어간다.
그가 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기획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기획원 선배인 黃秉泰 前 駐中(주중)대사의 어드바이스가 그를 대학으로 이끌었다.
『(공직) 그만둔 뒤 기업체로 나가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고, 교수 자리가 제일 좋다』는
黃秉泰 前 대사의 말에 솔깃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李鎭卨씨와 손 붙잡고 한양대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1988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李鎭卨씨는 그 덕분에 안동대 총장을 거쳐 지금 서울산업대 총장직을 맡고 있다.
陳부총리가 특히 스탠포드 대학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은
1994년 연수를 마친 뒤 단순히 강의를 해 봤다는 경험 때문은 아니다.
동자부 장관을 마치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의 연수생활이 그에게 기억에 남을 만큼 혹독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처음 6개월은 「visting fellow」로, 나머지 6개월은 「visiting professor」 자격으로 한국경제에 관한 강의를 했다.
강의를 하고 나서 받은 돈과 자기 돈을 합해 최고경영자 과정에 1년 간 연수(기숙사 생활)를 했다고 한다.
陳부총리는 이 기간을 『밤 12시까지 공부하는 지옥훈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외국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즐겨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도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농담을 함으로써 좌중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한다는 게 측근들 얘기다.
실제 그는 강연자료를 100% 그대로 읽어내리고 마친 적이 한 번도 없다.
재경부 실무자들은 담당 사무관까지 나서서 자료를 챙겨 주지만, 강연이 시작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그는 원고 밖으로 나온다. 강연원고는 첫 페이지만 읽고 넘어가는데, 이는 자료를 만드는 데 애쓴 부하직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재경부 관료들의 전언이다.
역대 재경부 장관들이 말을 아끼며 원고에 충실하게 강연을 끝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주위에서는 이런 모습은 보수적인 재무부 출신이 아니고, 자유분방한 기획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陳부총리의 자신감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평판들이다.
『결혼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
그의 독특한 성격은 여성들을 특별히 배려하는 면에서도 일단이 비쳐진다.
기자실을 찾을 때에도 女기자가 자리에 없으면 『어디 갔느냐』며 불러서 옆에 앉히곤 한다.
그는 작년 하반기 경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당시, K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박찬숙입니다」
대담 프로그램에 매주 연속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초 한 번만 나가기로 했는데,
이후 열 번으로 출연계획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열 번을 넘겨 출연해 경제현안에 관해 폭넓은 얘기를 나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陳부총리가 정기적으로 장기간 출연하자, 재경부 기자실에서는
「아들만 둘이어서 陳부총리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陳부총리는 역시 외자 이름인 網(27·한국은행 근무), 律(24·대학생)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대단한 애처가로 소문나 있다. 『내가 아무리 폭탄주를 많이 먹고 쓰러져 자도,
다음날 새벽이면 우리 마누라가 어김없이 내 손을 끌어 인근 우면산에서 한 시간 동안 등산을 하게 만들어요』라며
부인 자랑을 겸한 체력유지의 비결을 소개한다.
성신여대 음대(피아노과) 교수인 부인 徐仁貞(55)씨와는 연예 반 중매 반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그가 徐교수와 만나게 된 것은 1966년 워싱턴 대학에 유학하던 시절이다.
연세대 黃일천 교수 집에서 밥을 먹으며 친분을 쌓던 터에, 黃교수 부인이 다리를 놓아 준 것이다.
徐교수 이모와 이화여대 영문과 동기동창인 黃교수 부인 소개로, 방학 때 한국에 잠시 들른 陳부총리와 徐교수가 만났다.
당시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박사코스를 밟던 徐교수는 박사를 마치지 못했다.
陳부총리가 연애편지를 쓰면서 『1년 이상 못 기다리겠으니, 결혼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박사코스와 陳부총리 둘 중에서 陳부총리 쪽을 택하고 만 것이다.
결국 徐교수는 인디애나 음대를 졸업한 뒤, 국내에 들어와 홍익대학에서 미학박사 학위를 따는 데 만족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