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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왼편에 자리한 ‘연꽃잎의 정자’란 의미의 하엽정 전경. 박광석의 손자인 규현이 연을 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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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전경. 사육신 충정공 박팽년의 11세손인 박성수가 초가를 짓고 자기 아호로 당호를 삼은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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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헌 사랑채에 붙은 미수 허목 선생이 쓴 ‘예의염치효제충신’. |
대구에서 ‘묘골’이라고 하면 순천박씨 집성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근자에 새로 많은 한옥을 지어 후손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순천박씨들의 후손된 자긍심과 유서 깊은 고향에 대한 애향심을 느끼게 한다.
이번주에는 달성군 하빈면 파회(坡回)마을에 자리한 삼가헌 고택과 그 별채인 하엽정, 충정공 박팽년 선생을 모신 낙빈서원을
둘러봤다.
◆지방 양반가 특징 잘 보여주는 삼가헌(三可軒)
삼가헌은 사육신인 충정공 박팽년(1417∼56)의 11세손인 박성수(朴聖洙)가 1769년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아호를 당호로
삼은 집이다.
그 뒤 그의 아들 박광석(朴光錫)이 1783년 순천박씨 집성촌인 묘골에서 산언덕 하나를 경계로 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09년 초가를 헐고 안채를 짓고, 1826년에 사랑채를 지었다. 안채는 전면 6칸인데, 아쉽게도 2009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가 모두 동남간방(東南間方)을 향하여 전후 3중으로 배열되어 있다.
사랑채의 동쪽 끝에는 중문채가 한 일자 형태로 뻗어나가 있다. 또 안채의 서쪽마당 끝에는 칸막이 없는 3간통의 곳간채가
동향으로 안마당을 향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삼가헌은 동양의 철학서 가운데 하나인 중용에서 취했다고 한다.
중용 제9장에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란 내용이 나온다. 이 글에서 3가지 항목의
‘가(可)’자를 취하여 아호와 집이름을 삼았으니, 이는 선비로서 스스로 지키고 지향할 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가헌의 편액 글씨는 조선 후기 전주의 유명한 서예가인 창암(蒼菴) 이삼만(李三晩)의 글씨이다.
흔히 ‘창암체’라고 일컫는 독자적인 서체를 이룬 이분은 대구에 친구가 있어 종종 놀러왔고, 이런 연유로 인해 이 집을 비롯한
대구지역 몇 곳에 편액과 글씨를 남긴 분이다.
사랑채 마루에는 삼가헌을 지은 내력을 기록한 기문과, 정면에 미수 허목선생의 글씨체로 보이는
‘예의염치 효제충신(禮義廉恥 孝悌忠信)’이라는 글씨가 판각되어 있다.
사랑채 기둥에도 유려한 필체로 쓰여진 2폭의 주련이 걸려 있다.
秋水爲神玉爲骨 추수위신옥위골·가을물 같은 정신과 옥 같은 몸은/
是眞名士必風流 시진명사필풍류·진정한 명사로서 반드시 풍류가 있으리라/
이러한 편액과 주련을 통하여 당대 집주인이 지향했던 정신세계와 가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 세대 앞선 삼가헌의 주인은 효람 박병규 선생이다.
효람은 유명한 서예가다. 몇 년전 제자들에 의해 선생의 유작집이 간행되어 선생의 정신과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도 효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구 최고의 정자’ 하엽정(荷葉亭)
하엽정은 삼가헌 왼편에 자리한 한 채의 별당.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인 규현이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란 당호를 붙였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 한 칸을 늘려 붙였다고 한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巴山書堂)’
으로 쓰던 곳이다. 정자에는 작지만 유려한 필체로 쓴 하엽정이란 편액이 있고, 방마다 ‘향기를 맞이한다’는 뜻의 ‘영향(迎香)’
등 작은 편액을 걸어 집의 격조를 더하였다.
정자 앞의 연못은 직사각형인데 가운데 작은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 건널 수 있도록 외나무다리가 있는 형태다.
연못은 길이가 21m, 너비가 15m의 면적을 가졌으며 연꽃을 심었다. 7~8월이면 작고 소담스러운 연꽃이 피어 하엽정의
본면목을 드러낸다.
못둑에는 매화나무, 배나무, 석류, 해당화 등이 심어져 있다. 남쪽 담장 너머에는 현주인인 박도덕씨의 고조부가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20m 정도의 참나무와 탱자나무가 우뚝 서 있다.
삼가헌의 운치는 하엽정으로 인해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하엽정 누마루에 앉아 연꽂을 감상하거나 주위의 풍광을 감상
하며 홀로 사색하거나, 독서하기에도 최적의 공간이며, 친구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누어도 멋스러운 느낌이 든다.
필자가 탐방한 날도 주인께서 누마루에 올라오라고 하시기에 올라가 연꽂을 감상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하였다.
주위 산언덕에선 소나무, 참나무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연못 주위에 각종 화초가 자란 모습을 보고서, 우리 대구에도 이렇게
운치 있는 정자가 잘 보호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필자에게 대구의 멋진 정자 하나를 꼽으라면 하엽정을 내세우고 싶다. 정말 많은 이가 하엽정의 이름을 듣고 이곳을
찾겠지만 그저 바삐 둘러 볼뿐, 과연 삼가헌 사랑채 마루나 하엽정 누마루에 앉아 조용히 차라도 마시며 선인들의 멋을 생각
하고 여유를 즐기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육신 모신 낙빈서원(洛濱書院)
낙빈서원은 삼가헌에서 오른편으로 마을 안을 거쳐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서원은 단종조의 사육신을
모시고 있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돌아가실 때 단종의 보필을 명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보위에 오르자
박팽년·성삼문·하위지·유성원·유응부·이개 등 육신은 절개를 지켜 복귀운동을 도모하던 중 김질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참형과 3족이 멸해지는 바람에 혈손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이들 육신 중 박팽년의 혈손은 명맥을 이어 모계의 향리인 하빈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후에 사우를 세우고, 박팽년과 아울러 육신까지 모시게 되었다.
1675년(숙종 원년)에 사림들이 박팽년의 사당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다 낙빈사(洛濱祠)라는 별묘를 세워 향사를 지내오다
1694년 도내 유생들의 소청으로 사액(賜額)을 받아 낙빈서원이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때 여섯 분의 위패는 서원 뒷산에다 매혼(埋魂)하였다. 그 후 1924년 유림들에 의해 이 자리에 낙빈서원이
복원된다. 다시 이곳에서 여섯 분의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4년 충효 유적 정화사업에 따라 묘골 구 종가터 뒷산에다 육신사
(六臣祠)를 짓고 거기에서 매년 추향을 봉행하고 있다.
동방금석문연구회장·능인고 교사 jiju222@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