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충만한 삶(빌 3장 1-9절) 230924 주일설교
유머 - 무슨 재미로 사는지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남자: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호들갑)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그럼, 술은? 여자: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몰라요~!
남자: 참 순진하시군요! 전 솔직히 반갑지만 ...무슨 낙(재미)로 사시죠?여자는 환한 미소로 여자: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ㅎㅎㅎ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 유명한 학자며 군인, 저술가 토마스 로렌스의 재미있는 일화.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된 평화회담 진행될 때, 맡은 특별한 임무는 아랍 대표들과의 중재역할. 아랍 대표들을 위해 프랑스 최고급 호텔에 방을 예약, 그들을 프랑스의 이곳저곳으로 안내 아랍 대표들에게 제일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에펠탑도, 루브르 박물관도 아닌 호텔의 목욕탕다. 사막에서 얼마나 물이 귀한데 호텔의 목욕탕에 적은 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와서 그들은 목욕탕을 볼 때마다, 감탄. "야, 이런 신기한 것이 있었구나!" 그런데 회담이 끝날 무렵에 토마스 로렌스에게 호텔 사람이 달려왔다. "큰일 났다. 로렌스경. 지금 아랍 대표들이 호텔 목욕탕을 다 뜯어 가고 있다." 로렌스 경은 급하게 달려갔다. 달려가 보니까 그들이 정신없이 목욕탕을 뜯고 있어서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냐? 아랍대표들은 이것 다 뜯어서 아라비아로 가져가려고 한다. 그들의 의견인즉 사막에 그 목욕탕만 가져다 놓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질 거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로렌스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랍 대표들에게 그 목욕탕에 물은 수도꼭지만 튼다고 나오지 않고, 수도꼭지를 연결해 주는 수도관이 따로 연결되어 그 관을 통해 물이 공급된다.(조상호 목사)
오늘날 재미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 가치 중 ‘썰렁’한 것 설 자리 없다. 영화, 드라마가 썰렁하면 외면당한다. 설교나 강의도 마찬가지. 튀는’ 연예인과 ‘날리는’ 스포츠 스타는 열광 청소년들 성실한 ‘범생’보다 잘 노는 ‘날라리’가 “청년이여, 야망보더다 재미를 느껴라”
재미의 추구에는 단지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려는 게으름이나 쾌락의 추구 이상의 요소가 있다. 인간이 재미 추구하는 이면에 영적 원인. 우선 재미의 추구 권태를 벗어나려는데서 비롯. 철학자 하이데거 ‘불안’을 인간의 고질적 본성 보다 무서운 것이 심심하며 권태다. 권태는 무료 흥미 잃어 지루함. 할 일 없어 지겨운 것 불안에 떨며 살기보다 더 어렵다. 권태는 일종의 현대적 질병. 산업화가 본격화된 1750년대까지 영어에 ‘권태’라는 말이 아예 없었다. 기계화와 전문화 통해 노동이 단순해지고 비인간화된 생산 과정에 사람들 의미를 상실 권태는 일과 놀이가 분리됨에서 비롯된다고 여기에 근거를 둔다. 많은이들 하루의 대부분 일에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현대 문명이 권태의 뿌리다. 산업화 이전의 생산 활동 작업은 대개 놀이의 요소 포함. 고도로 분업화된 작업에 종일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터에선 성취감, 만족할수다. 마르크스 현대인은 종일 노동 하며 일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흔히 권태롭게 생각하는 단조로움이나 자극의 부족이나 반복은 진짜 원인이 아니다. 반복도 의미 있고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은 권태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인이 재미에 목말라 하는 것은 단지 놀기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재미가 있어야 살지’라는 불평을 게으른 소치나 배부른 흥정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미의 추구는 분명히 채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에 대한 추구와 관련이 있다.삶의 목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면 인생 자체가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 주말만 되면 꽉 막힌 도로에 앉아 짜증을 내면서도 필사적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노는 사람은 오락이 지겨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재미는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의미가 확보되고 성취해야 가능하다. 오락은 단순한 재미의 추구나 휴식 이상이다. 권태의 반대는 정신없이 바쁜 것이 아니다. 의미가 충만한 삶이다. 그런 삶을 누리는 사람만이 사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활력이 넘친다.사실 현대의 중대한 문제는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리지만 진정한 원인을 찾는 일에 주저한다.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통한 일시적 처방에 몰두할 뿐. 권태에 대한 가장 일반적 처방은 TV 켜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권태의 진정한 원인인 공허함에 대해 아는 바 없다.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경종을 남긴 사건. 1923년 어느 날, 미 시카고에 에드워드 비치호텔에 당시 미 최고 부자 일곱 사람. 이들의 재산 미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것. 어느 신문기자가 시카고에 모였던 1923년의 그 날 이후 25년 후 부를 자랑하던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 발표. 그중 첫째 강철회사 사장 찰스 슈언 25년 후 한푼 없는 거지로 죽었다. 둘째 밀 농사로 거부였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 모든 것 잃고 쓸쓸하고 고독하게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죽어갔다. 셋째 사람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냈다. 넷째 미 재무장관 지냈던 엘버트 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 나 집에서 자기 죽음을 기다렸다. 다섯째 월스트리트의 회장 J.C.리버모아는 자살. 여섯째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쳤다. 일곱 번째 부동산업계의 거부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 거부 7명의 비극적 종말 1948년 미 커다란 충격.
<호모 루덴스>(Homo Ludens)고전. ‘노는 인간'뜻 라 ‘놀다’ 뜻 Ludens 1938년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9145) 네덜란드 학자 1938년 출간 책. 즐기는 문화와 철학까지 인간의 놀이에 의해 생기고 발달했다고, 고대의 노래와 춤에서 종교 의식과 제례가 발달, 낙서로 미술이 발달, 무리지어 놀면서 스포츠가 생겨났다.
인간은 외형적 놀이는 차치하더라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 놀이를 즐긴다. 어릴 적엔 길 걷다가도 불현듯 보도블록의 검정 혹 빨간 블록만 밟으며 총총걸음 하며 나름의 놀이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자랐다. 부모님께 꾸중에 눈 둘 곳이 없어 바라보던 벽지모양이 갑자기 동물 모양 같은 모양을 연상하며 벽지에서 숨은 동물 그림 찾기를 하기도 했다. 산을 오르다 우연히 바라본 돌무덤을 바라보며 맘속으로 ‘저기서 어느 부분의 돌을 빼면 탑이 무너질까?’ 생각에 돌 던져 맞혀 무너뜨리던 장난이, 모바일 게임의 콘셉트로 수백억의 매출 올리는 게임회사의 토대를 이기도 한다.
엘튼 트루블러드 “G은 유머가 매우 풍부하시다. 만일 우리가 G께서 얼마나 유머 많으신지 안다면, G의 백성들이 G께 다가가는 방법은 훨씬 더 부드럽고 더 친밀해질 것.”
루터 전집 26:95 “세상을 향하여 웃으시고 윙크하시는 G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희락 : 기쁨과 즐거움. 성경에 다윗 왕의 즉위식 때 즐거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IS 가운데 희락이 있음이었더라”(대상 12:40) 대하 30:26 히스기야 왕 때의 유월절을 가리켜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다”고 이사야는 고대 도시로 모든 것이 풍부하고 번영했던 두로를 ‘희락의 성’(사 23:7) 전도서는 세상적 기쁨이나 향락을 웃음과 희락으로 의인화 이런 세상적 희락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바울은 G의 나라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희락이다(갈 5:22)
박성일, 헤아려 본 기쁨 중
C. S. 루이스 《개인 기도》 17번째 편지에 즐거움에 대한 생각 “즐거움이란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영광의 광선들이다”라고 설명. 그는 G의 영광이 세상에 비치는 모습을 3가지로. 첫째, 그 영광이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면 그 결과를 ‘선함’(goodness)이라 부른다. 이것은 G의 영광의 윤리적 측면. 둘째, 그 영광이 우리의 지각할 때 결과를 ‘진리’(truth)다. G의 영광의 인식적 측면, 끝으로, 영광이 감각과 감성에 비칠 때 결과를 ‘즐거움’(pleasure)이라 부른다. 이것은 G의 영광의 미적 측면이다.
셋 중 가장 중요한가? 진, 선, 미 모두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 신실하게 추적한다면, 3가지 모두 G의 영광을 만나는 적절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것들을 옳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상하게 윤리나 인식적 기능도 G의 영광이 아닌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에서 루이스는 특히 즐거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밝히는데, 그의 생각은 너무나 긍정적이다. 그는 ‘아주 일상적인 즐거움 속에서도 G의 영광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예배의 자세를 취함이 너무도 당연하다?’하고 생각하게 된 것.
그런데 “세상에는 당연히 잘못된 쾌락이나 즐거움도 있죠?”라고 반문할 수 있다. 루이스의 답은 아주 분명하다. 그는 ‘나쁜 쾌락’이 당연히 있지만, 쾌락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쁜 쾌락이란 불법적 방법이나 행동을으로 쾌락을 얻으려는 데 문제가 있다.
예, 사과를 훔치는 것은 나쁘지만, 사과의 달콤하고 향긋한 맛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사과가 지닌 달콤함과 향긋함은 여전히 G의 영광으로부터 나오는 광선. 이것이 훔치는 행위를 정당화 하지 않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도둑질을 더 나쁜 것이 되게 한다. 왜 이 경우 도둑질은 일종의 경건을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과는 단순히 과일에 불과 않고, G의 영광 비추는 거룩한 물체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 도둑질은 불경을 저지르는 문제 된다.
루이스는 감각적 즐거움과 예술적 즐거움을 구분 예술적 즐거움이 영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감각적 즐거움이 예술적 즐거움에 비해서 수준이 낮아도 가장 낮은 경험 속에서 G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더 고상한 경험 속에서 그분을 찾을 거라 기대할 수 없다. 뛰기에 앞서 걷기를 배워 작은 일에서 G 경외하는 삶에 익숙해지지 못하면 큰일에서 G을 경외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G을 ‘맛보아 알지’(시 34:8)못하는 사람이 G을 믿음과 이성을 통해서 발견할 거라 기대할 수 없다. 루이스는 “즐거움이라는 천국의 열매에서는 그것이 자라난 과수원의 향기가 난다”고 즐거움 자체에 천국의 냄새가 묻어 있다. 즐거움에 창조주의 메시지가 속삭이고 있다. G은 영원한 즐거움의 근원이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1327년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살인 사건을 풀어 가는 추리 소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윌리엄에 의해 범인은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이단으로 금지된 서책에 수도사들이 접근하자 이들을 독살. 도대체 어떤 책이었기에 수도원의 동료들 독살했을까?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2권 필사본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 모름지기 수도사는 웃음과 거리를 두고 엄숙하게 살아가야 한다. 웃음은 영성에 방해된다는 생각이 호르헤가 지키고자 했던 것.
필립 얀시, 《놀라운 G의 은혜》 중
“얼마 전 주일에 교회에서 한 꼬마가 고개 돌려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며 웃기에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아이는 … 그냥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 엄마가 아이를 확 잡아채더니 브로드웨이 소극장에서 관객더러 들으라고 하는 독백마냥 다 들리는 소리로 ‘그만 좀 웃어! 여긴 교회야!’ 그러면서 아이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이의 볼에 눈물이 흐르자 ‘차라리 그게 나아’하고 덧붙인 뒤 다시 기도하는 자세로 돌아갔다.
나는 벌컥 화가 났다. ‘온 세상이 울고 있으니 너도 이제부터라도 울어’하는 말로 들렸다. 나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난 아이를 내 옆에 앉혀 놓고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기뻐하시는 G, 웃으시는 G, 우리를 지으실 만큼 유머감각이 있는 G이시다. 그러나 통념상 우리는 조문객처럼 엄숙하고 비극을 연기할 때처럼 비장하며, 소중한 것을 전부 갖다 바치면 믿음이 좋은 줄 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금 이 엄마는 우리 문명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빛, 유일한 소망, 유일한 기적, 유일한 무한의 약속 옆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아이가 교회에서 웃을 수 없다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기쁨의 영성, 장경철 교수
기뻐하지 않는 사람과 기뻐하는 사람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은 특징. 무감각.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듯 기쁨의 반대는 무감각. 마음이 슬퍼지고 옛날에 잘못한 일이 가슴 아프게 한다면 무감각에서 건짐받은 것. 기뻐하기 위해서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무감각에서 건짐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쁨을 위한 첫 걸음이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감각한 반면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즐거운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다.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얼굴이 밝다고 말한다. 밝은 곳을 바라보면 빛이 반사되듯 밝은 면을 바라보면 얼굴이 밝고 어둔면을 바라보면 어두워지게 마련.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사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나 G앞에서 염려를 자기 기도 제목으로 바꿀 수 있다. G 앞에 나아가 자신의 걱정 거리들을 아뢸 때 염려는 사라질 것. 감정은 영성의 지표다 기쁨이란 하나의 감정. 조나단 에드워즈는 감정에 대해 인상적 정의를 “감정이란 내 영혼이나 의지가 생생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행사되는 것.” 사실 신앙생활 할 때 지나치게 감정 중심적이 되면 곤란함에도 감정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하다. 왜냐 감정은 신앙생활의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 자신의 영혼과 의지가 G을 향해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 길이 없으나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통해 믿음과 신앙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다. 행 16장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귀신 들린 여종을 귀신 쫓아냄. 여종통해 돈벌이하던 주인은 돈벌이 수단이 사라지자 바울과 실라를 고소 두 사람은 빌립보 감옥에 갇힌다. 죄수지만 감옥에서 G을 찬송. 성경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냥 막연히 찬송 듣지 않고 귀 기울였다. 감옥에서 걱정 초초 두려워하는데 죄수들은 걱정 기색이 없고 G을 찬송하고 예배. 감옥의 죄수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들인지 궁금해 그 찬송을 들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들의 영혼은 G을 향해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G을 기뻐하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영혼과 의지가 G을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신앙생활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나 신앙생활에 감정은 자기 영성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세 가지 종류의 기쁨 기쁨에 세 종류. 첫째 성취의 기쁨.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행복하나 성취의 기쁨에는 두 가지 문제다. 얻기가 어렵고, 행복의 수명이 짧아서 성취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취하고 나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또 뭔가를 추구한다. 공부를 잘하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러한가? 높이 올라갈수록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에 어느 사다리의 끝에서 뛰어내리게 된다. 자신과 자녀에게 성취의 행복만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위태로운 일이다.
둘째 성취의 기쁨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의 기쁨이 있다.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그것은 자신이 받은 것을 받았다고 깨닫는 순간. 행복은 깨달음에서, 불행은 착각에서 비롯된다. 행복한 사람은 날마다 깨닫는다. 고전 2장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G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G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G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셋째 친밀감의 기쁨이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자가 있어야 행복하다. 이와 같이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해진다. 시간과 공간이 바뀔지라도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지 끝까지 행복할 수 있다. 높은 곳에 있든지, 무저갱에 있든지, 새벽 날개를 쳐서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그곳에서 항상 자신을 받아주시는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될 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간구가 G께 뭔가를 요청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G께 요청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 ‘아버지’라고 부를 때 간구 한 것은 아니지만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것. G으로부터 기쁨을 공급받고 그 기쁨을 유통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기쁨으로 물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외부적인 어떠한 조건에도 기뻐했다. 외적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기뻐했으나 J X와의 만남으로 변했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X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X J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X를 얻고" 여기 중요한 단어는 '그러나' 과거의 바울은 외부적 조건을 자랑 외적 성취를 내세웠으나 J X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J을 만난 순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가 그동안 삶의 기준으로 삼아던 모든 가치관들이 바뀌어졌다. 목숨걸고 이루었던 여러 가지 업적들을 다 해로 여겼고 그가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 '쓰레기'다. 좀더 속된 표현 '똥' 그가 J을 만난 후, 과거의 모든 것들을 버렸다. 모든 것을 다 똥으로 여김. 주위에 바울이 쓰레기 취급했던 것들을 자랑한다. 무슨 무슨 집안의 몇대 자손, 어디 어디 학교 나왔다, 모태 교인, 과거 한국에서 유명한 교회, 어느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 했다, 과거 한국에서 한가닥 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라며 자랑. 바울은 그렇게 자부하던 모든 것을 J믿는 일에 방해 되면 다 똥처럼 여김. 왜 X J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 바울에게 무엇도 J보다 귀한 것은 없다.
제임스 와일더, 인생모델의 개발자
중독은 인체가 도파민의 적정량을 잃었을 때 생기는 현상. 뇌에 과다한 도파민을 만들어내는 특정한 행동, 경험, 약물 등을 지속 반복할 때 중독으로 발전. 중독은 뇌를 장악 점점 더 중독 유발 강한 유대 관계 맺으나 중독 유발 요소들은 기쁨의 대용품. 즉, 우리의 뇌가 BEEPS를 통해 얻길 원하는 것 기쁨이 대신 줄 수 있다. 기쁨과 긴밀한 관계 가질 때 뇌는 필요한 것 얻음. 전통적 회복 과정과 확연히 다른 접근법. 기쁨은 G과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방법으로 관계 맺게 도와준다. 기쁨은 새로운 정체성 서로에게 줄 소중한 선물은 기쁨.
많은 기독교인들 기쁨이 감정과 상관없고, G 향한 자세로 오해 기쁨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여기는데 이상한 것은 J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J이 말씀하신 기쁨은 굉장히 크고, 측정 가능하다. 성경에 성령님이 등장할 때마다 기쁨과 평안이 함께 하사 기쁨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고, 뇌의 한 부분을 ‘기쁨 센터’라 이름 붙였다.결론은 G께서 성경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말씀하셨듯이, 기쁨은 몸과 뇌가 간절히 원하는 바 열망, 필요며 변화다. 뇌는 최고의 삶을 살 기쁨과 평안을 추구하며 살도록 만들어졌다. 뇌는 기쁠 때 가장 잘 기능한다. 이를 통해 G의 임재하심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이야기하는 기쁨은 그저 감정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기쁨이다.
‘노는 법’에 관한 한, 한국은 호모 루덴스의 진면목. 예전부터 그랬었나 싶은 게, 고대 중국문헌에 우리민족을 동이족이라 칭하며 유독 눈에 띄게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활쏘기를 좋아하고 음주가무에 능하다’. 한마디로 흥의 민족이란 얘기다.
세계양궁은 한국양궁이 독주 이제는 상위권 국가들의 코치진은 죄다 한국인. K-Pop은 세계적인 문화현상. 클래식 분야 최정상급 한국인 연주자들이 전 세계, 유럽의 오페라 하우스에 반드시 한국인들, 프로게임리그에서 최상위 한국인 랭커들끼리의 결승전은 흔한 풍경. 이게 다 세계인구 대비 0.67%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의 독보적인 발자취로 특출하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자기 점검표(김성수 목사, 시애틀 지구촌교회)
신앙생활 재미있는 신앙생활은 계속 자라야 한다. 내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재미와 기쁨도 없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지루해 교회 빠져 신앙이 자라 기쁨도, 재미도, 보람도 생긴다.
많은이들 오해. 교회만 나오면 자동으로 신앙이 자란다고. 대가 치러야 신앙이 성숙한다. 교회에 처음 나올 때 기본적 신앙적 삶 살지 않으면 성숙 어렵고 올바른 신앙생활 위해 자기 점검 필요. “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나?” 늘 묻고 점검하라. 신앙이 계속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 자기 점검표의 내용은
1. 매주 준비된 예배를 기대감을 갖고 드리고 있나?
주일 G 만나는 기대감과 없는 사람. 예배에 기대감은 일찍 나오고 10분 전에 앞에 앉는다.
2. 주일 말씀 중 한 가지를 삶에 적용하고 있나?
설교에 은혜 이웃들과 나누고 주일 말씀 내 삶과 연관, 말씀에 순종할 때 능력. 아는 것과 행함은 신앙 성숙 기대하기 어렵고, 매주 말씀을 받은 후 “결단과 헌신”이 좋다.
3. G과의 만남의 시간이 있나?
하루 에 G과 만남으로 주님의 음성 듣는 시간 새벽기도 혹 수요, 금요 기도회 갖는 것 필요.
4. 구역에서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나?
신앙생활의 기본은 관계성. 사랑하고 사랑 받는 관계성. 서로의 삶을 세워주고,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겨주는 관계성 있어야 새 힘 얻고, 깊은 상처와 고통들이 회복.
신앙의 성장과 기쁨, 재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 가지의 삶이 매주 반복 되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