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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왕릉여행◈ 스크랩 제26대, 홍릉(洪陵)-(上) 명성황후, 친청정책의 조선외교, 조선은 망국에 몰리다.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275 13.03.11 05:59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제26대, 홍릉(洪陵)-上篇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고종(高宗)과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民氏)의 합장릉(合葬陵)

홍릉(洪陵)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272(구, 금곡동 141-1) (홍유릉洪裕陵) / 홍유릉관리소 031-591-5628

 

망국의 상황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조선의 멸망과정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것도 불과 100년이어서, 당시의 상황들이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결국, 생각보다 많은 분량의 글이 만들어 지게 되었고, 불가피하게 <26대왕릉 洪陵>편은 上, 下로 나누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량으로 이해 부탁 드리며,

상편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짧은 이야기와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하편에서는 고종의 이야기와 대한제국의 당시 상황을 엮었습니다.

 

 

 

고종 이명복(高宗 李明福)

1852년(철종3년) 9월 8일~1919년 1월 22일

조선26대 임금,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재위: 43년 7개월 (1863년12월~1907년7월)

아버지는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의 둘째 아들로 아명(兒名)은 '개똥이'라 부르다가 소년시절 '명복(命福)'으로 지었으며, 초명(初名)은 '재황(載晃)'이었으나 '희(熙)'로 개명하였고, 자(字)는 '성림(聖臨)'에서 '명부(明夫)'로 바꿨으며, 호(號)는 '주연(珠淵)'입니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의 손자로 인조의 8대손으로 원래는 왕위계승권이 없으나,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넷째아들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명복은 영조의 양증손자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철종15년(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 趙氏=신정왕후神貞王后)와 아버지 흥선군(興宣君)의 밀약으로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명성황후 민자영(明成皇后 閔玆映)

1851년(철종2년) 9월 25일~1895년(고종32년) 8월 20일

조선26대 황제 고종의 비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여성부원군 민치록(驪城府院君 閔致祿)',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이씨(韓昌府夫人 李氏)'로 일명 '감고당 이씨(感古堂 李氏)'의 딸입니다.

5대 대고모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이며, 시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와는 12촌간입니다. 9살에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게 자라다가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생활하였으나며, 16살이 되던 고종3년(1866년), 시어머니의 천거로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이 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와 마찰을 빗었고, 대원군 섭정을 벗어나게 하여 고종이 친정을 하도록 합니다. 대원군과 달리 개방정책을 펴다가 서구열강과 일본의 대립구도속에서 조선왕실 내 반일세력이었던 그녀는 일본경찰과 낭인들에 의해 처참한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아들 '이척(李?, 조선27대 황제 순종)'만이 생존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습니다. 

고종은 명성황후 외에 후궁 13명을 두었고, 

'순헌황비 엄씨(純獻貴妃 嚴氏)'로 부터 '이은(李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을 두었으며, '영보당귀인이씨(永寶堂貴人 李氏)'로 부터 '이선(李?, 완친왕完親王)'을, '귀인장씨(貴人張氏)'로 부터 '이강(李堈, 의친왕義親王)'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상궁염씨(上宮廉氏)'는 서녀 이문용을 들였고, '광화당귀인이씨(光華堂貴人 李氏)'가 황자 '이육(皇子 李堉)'을, '보현당귀인정씨(寶賢堂貴人 鄭氏)'가 황자 '이우(皇子 李?)',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가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두었습니다. 

그 외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 '삼축당상궁 김씨(三祝堂?宮 金氏)',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宮 金氏)'와 궁인(宮人)으로 '서씨(徐氏)', '김씨(金氏)', '장씨(張氏)'가 있습니다.    

 

홍릉 침전(寢殿)

지금까지의 왕릉에 있던 정자각이 사라지고, 침전이 자리합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위에 올라 명나라 황제 태조의 효릉을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종(高宗)'은,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로, 흥선군과 헌종의 모후 신정왕후와의 밀약으로 추존왕 익종,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하여 조선의 26대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12세의 어린나이였기에 즉위초,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이 후 10년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았습니다. 이 후 부인 명성왕후 민씨의 후력을 얻어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리게 됩니다.

조선 역사상 대내외적으로 가장 위태하던 시대,

안으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왕후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으며, 밖으로는 서구열강들의 개항요구가 빗발치고, 청, 일, 러 3국의 간섭이 끓이지 않았지요.

그 와중에 섬나라 원숭이들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킵니다. 한 나라의 국모 명성왕후가 일개 원숭이 낭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체는 불에 태워지는등 '천인공노(天人共怒)'의 만행을 저지른 것이지요. 정말 '시발노무색기(始發奴無色旗)'들입니다. 더하여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명성왕후를 폐서인하라고 하지요. 그러나 하루만에 '빈(嬪)'의 호칭을 내렸고, 같은해 다시 왕후로 복위시켜 동구릉의 '숭릉(崇陵:18대왕 헌종과 명성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 안장을 하고 '숙릉(肅陵)'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능 조성은 김홍집내각의 실각으로 5개월만에 중단 되었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청량리 천장산 아래로 천장을 하여 '홍릉(洪陵)이라 하였습니다. 청량리의 '홍릉'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것이지요.

그러나 이후의 열강 압력은 더욱 거세졌으며, 특히 섬나라 놈들의 압박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섬나라 친일파들의 등장으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등을 일본과 친일파들의 강압과 협박에 못이겨 조약하였고 이로서 외교권을 일본에 내어 주게 됩니다.

그나마 한줄기 빛이라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밀사를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서구들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친일파와 원숭이들은 그것을 빌미로 고종을 압박하여 '양위조서(讓位詔書)'를 내리도록 하였고, 결국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은 1910년에 무력으로 조선을 합방하였고, 태황제를 '이태왕(李太王)'이라 불렀지요. 그러던 1919년, 덕수궁 경운궁에서 커피를 마신 후 승하하게 되니 보령 67세입니다. 그러나 시신이 2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심하게 부풀어 오르는 증상으로 고종의 죽음에 독살설이 유력하게 작용되고 있습니다.

 

 

'홍릉(洪陵)',

1919년 3월 4일, 고종황제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장사지냅니다.

그리고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홍릉도 이곳으로 옮겨와 합장하고, '홍릉(洪陵)'이라 하엿습니다.

그런데, 같은 능역에 자리한 홍릉과 유릉은 이전 역대 조선왕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1897년 10월,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라 하여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면서 황제위에 올랐기 대문입니다.

이에, 왕릉이 아닌 황제릉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명나라 태조의 황제릉인 효릉(孝陵)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왕릉과 황제릉은 근본적인 상설과 규모부터가 다르며, 침전과 재실의 구조와 배치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홍유릉 매표소를 지나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향합니다.

연꽃 화려한 '연지(蓮池)'를 지나고 나면 금천교에 닿습니다. 금천교를 지나면 다시 두갈래로 좌측은 '제궁(祭宮)', 우측은 '능원(陵園)'입니다. 능원공간으로 먼저 가봅니다.

홍살문의 앞에 서면 기존의 왕릉과는 전혀 다른 상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참도의 끝에 있어야 할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지요. 침전과 홍살문의 사이에 자리한 참도는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중앙이 한단 높게 되어 있으며 좌우로 한단 낮은 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높은 단은 황제와 황후의 혼령들이 다니는 길이고, 좌우는 왕과 대신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홍살문 바로 옆의 배위를 지나, 참도에 들어서면 좌우로 석물들이 도열하고 있습니다. 석마 2쌍이 서고, 그 옆으로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의 순이며, 그 옆으로 능침공간에 있었던 큰키를 가진 무인석과 문인석이 서고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위로 정자각 대신 일자형 '침전(寢殿)'이 자리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정자각에서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양식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계단이 만들어 졌으나, 홍릉의 침전에는 삼면에 모두 선계, 어계가 공존하며, 특히 침전 전면으로 오르는 계단은 세개로 중앙계단이 선계, 좌우가 어계입니다. 즉, 참도를 따라 그대로 오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요.

침전의 옆으로 비각이 자리하며, 비각의 비석에는 '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 부좌(大韓 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附左)'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침전의 뒤로 능침공간이 자리합니다. 

사초지의 아래 우측으로 '어정(御井)'이 자리하며, 좌측으로 '망료위(望燎位)'가 자리합니다. 

 

홍릉의 능침은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병풍석에는 화려한 문양의 꽃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밖으로 12칸의 난간석을 세웠으며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간의 문자가 없습니다. 글자를 새기기 위한 원의 무늬는 존재하는 데 글자가 없네요. 또한 난간석의 밖으로 설치되어 봉분을 수호하던 석양과 석호가 없습니다. 아마도 침전 아래의 도열되어 있는 석물이 있는 이유인것 같습니다. 

능침앞에는 혼유석을 1좌만 놓았고, 양옆으로 망주석을 놓고 중앙에는 장명등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설들을 삼면의 곡장이 두르면서 능원상설이 됩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능침공간의 삼계(初階, 中階, 下階)의 공간은 사라지고 능침공간의 능원만이 남았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모두 침전 아래에 설치한 것입니다.  

 

침전의 옆으로는 '제궁(祭宮)'이 자리하는데, 왕릉에서는 말하는 재실(齋室)입니다.

행랑채와 부속건물들이 배치되어, 살림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제관들과 능지기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홍릉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를 지나면서부터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능역의 수계에 맞닿는 곳, 즉 홍살문의 앞에 설치하는 것이지요. 홍릉의 금천교를 넘어서면 좌로 재궁, 우로 능원이 자리합니다.

 

 

 

철종14년(1862년)부터, 철종은 사실상의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주색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로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체질이 더욱 악화되었지요. 그로인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이듬해 승하하게 됩니다.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는 먼저 옥새를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신정왕후와 이하응의 치밀한 밀약으로 철종의 임종을 지켜 본 신정왕후가 옥새를 먼저 챙겨 후계자를 지명하니, "흥선군의 적실 차남 명복을 익종대왕에 입승대통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철종의 7촌 조카뻘인 고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선군에게는 명복의 형, '완흥군 재면(完興君 載冕)'이 있었습니다. 흥선군의 장남이지요. 그러나 당시 재면은 이미 성인이었고, 동생 명복은 12세의 니이로 재면보다는 명복의 수렴청정, 섭정이 쉬울것이라는 흥선군의 판단과 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로서 헌종의 모후이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집니다.

그리고 1863년 12월, 조선의 제26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 불과 12세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년뒤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함으로서 섭정의 대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고종의 즉위는 아버지 흥선군의 치밀한 계략에 의한 것입니다.

당시의 조정은 안동김씨의 수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즉, 안동김씨에게 왕족으로서 훗날을 염려하게 한다면 바로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하응의 형뻘인 이하전의 죽음이 그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훗날 왕위에 올라 안동김씨들의 세도를 위협한할수 있다면 미리 그러한 싹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는 바람에 흥선군은 왕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안동김씨들의 따가운 감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이하응은 안동김씨들의 경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파락호(破落戶)'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익종비 조대비의 친정조카 '조성하(趙成夏, 1845~1881)'를 통하여 조대비와 연줄을 대기 시작합니다. 조대비 역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지내던 입장이었기에 권력의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서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였고, 이하응의 차남 이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왕위에 올리게 된것입니다. 

 

섭정을 이어 받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그는 가장 먼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는데 역점을 둡니다. 그리하여 쇠락해진 왕권을 되찾는 동시에 조선을 압박해 오는 열강에 대적하기 위하여 개혁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당쟁의 뿌리를 뽑기 위해 '서원(書院)'을 47개를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여 민심을 수습하는가 하면,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름없는 세금들을 없애면서, 궁중에 특산물을 올리는 '진상제(進上製)'를 폐지시킵니다. 또한 은광산 개발을 허용하여 경기를 살리고자 했으며, 복식을 간소화하였고, 군포세를 호포세로 전환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법전'대전회통(大典會通)', 관아와 관사의 시행규정을 정한 '육전조례(六典條例)', 문신과 무신의 인사행정을 정한 '양전편고(兩銓便攷)'등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국정을 담당하던 관청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키면서 삼군부를 둠으로서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분리시켰습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수습하면서 국가재정을 확립시키는등 세도정치로 얼룩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기부금제도인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한양 사대문을 지나면서 통행세를 받는 '문세(門稅)'를 거두는가 하면 주인이 있음에도 거목과 거석을 징발하여 궁궐 건설에 사용함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인이 월경하여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는 통상을 요구하여 조정이 당황을 하자, 천주교 선교사들은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영국과 함께 3국동맹을 맺으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를 오랑캐로 막는다.'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가 되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박해령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1866년 1월, 천주교 탄압교령이 내려지고 이로 인하여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게 되는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같은해 10월 프랑스는 이에대한 보복으로 군함7척과 병력천명으로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제주목사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으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합니다. 

또한, 같은해 8월에는 대동강을 따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거절을 당하자 횡포를 부렸고, 화가 난 평양군민들의 화공으로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5년 뒤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원인이 됩니다.   

 

[번외] '흥선대원군'편에서 다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합니다.

 

 

홍릉

홍살문과 참도까지는 기존 왕릉과 같은 조영이지만, 참도가 만나는 침전과 참도 옆으로 도열한 석물들의 모습에서 많은 차이를 나타냅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한창인 고종3년(1866년),

궁에서는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원군의 며느리로 자신의 부인 민씨의 일가인 '민자영(閔玆映)'을 간택하게 됩니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은 숙종의 게비 인현왕후의 오빠였으나, 그의 집은 가난하여 민씨는 어려서 부터 궁핍하게 살았으며, 그녀가 9세 되던해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없던 집안에 11촌간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장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閔升鎬, 1830~1874)'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민승호는 흥선군 이하응의 처남입니다. 그리고는 생모와 오빠와 함께 숙종이 인현왕후를 위해 지어준 한양 '감고당(感古堂)'으로 이사를 오게 된것입니다.

즉, 대원군의 민씨 간택 이유

외척들에 의해 국정이 농간 되었던 순조, 헌종, 철종의 60년간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왕실과 정권이 온전치 못하였음을 들어,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는 집안의 왕비를 들임으로서 외척의 세도정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1866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민자영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생각은 완전한 잘못된 생각이었지요.

 

명성왕후가 태어날 때 집 주변이 자줏빛이 영롱하게 뻗쳐 이름을 '자영(玆映)'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어릴적부터 영민하였는데, 그러한 모습을 본 아버지는 걱정이 많았다고 하지요. 암튼,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을 즐겨 읽는등 언문과 사서삼경등을 두루 섭렵하였고, 한글과 한문도 잘 ?습니다. 특히, 여성으로는 드물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춘추좌전(春秋左傳)'을 탐독하였다고 하지요. 두 책은 모두 중국 궁정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략과 암투가 벌어지는 내용으로 왕자의 난, 임금의 시해사건등이 가득한 역사소설입니다. 

또한 9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임종시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고 있어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준비된 여군(女君)이나 다름없던 민씨는 왕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왕비에 책봉 될 당시, 고종은 후궁 귀인이씨를 총애하고 있었습니다.

가례를 올린 날도 고종은 귀인이씨의 처소에 들었다고 전해지지요. 그러던 1868년, 귀인이씨가 왕자 '완화군 선(完和君 ?)'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귀인이씨와 고종의 첫아들 완화군을 총애하기 시작하였지요. 남편에 시아버지까지 자신을 병풍대접하자 배울만큼 배운 민씨는 시아버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1871년 민씨가 왕자를 낳았는데 5일만에 죽고 맙니다. 그런데 민씨는 왕자의 사인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어린 아들에게 인삼을 달여 먹인 후에 열이 나면서 사망한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3살이던 후궁의 왕자 완화군을 세자의 자리에 염두를 두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귀인이씨는 슬픔에 실어증에 걸렸습니다. 이때,민씨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이씨를 궁궐에서 ?아내어 버립니다. 이로서 완화군의 죽음에는 민씨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씨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양오빠 민승호를 비롯하여, 흥산대원군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음에도 실각한 조대비의 친조카 '조성하(趙成夏, 1845~1881)', '조영하(趙寧夏, 1845~1884)'형제와 손을 잡았으며, 흥선대원군에 의해 실각한 안동김씨가문의 '사영 김병기(思穎 金炳冀, 1818~1875)', 고종의 형 '완흥군 재면(完興君 載冕, 1845~1912)'과도 손을 잡습니다. 더하여 서원철폐로 불만이 갖고 있던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등의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를 갖게 됩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섭정이 옳지 않다며 상소했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을 당한 인물로 민씨는 최익현의 뒤를 봐주면서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도모하기 시작합니다.

즉, 대원군이 없애려 했던 붕당의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현상입니다. 명성왕후 민씨가 끌어들인 대부분의 인사가 노론이었다는 점이지요.   

    

 

 

(좌)수복방과 (우)수라간

수복방은 능지기가 머물던 공간이며, 수라간은 제례를 지내기 위한 음식을 차리는 공간입니다.

 

 

결국, 대원군의 편애로 후궁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불거진 민씨와의 대립은,  

명성왕후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세력과 대원군에 의해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들간의 정치적인 갈등이 빗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1873년 11월, 명성왕후 민씨의 흥선대원군 퇴진에 물꼬를 틉니다.

최익현을 다시 불러 등용하면서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正三品 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으로, 다시 '호조참판(戶曺參判)'으로 승진을 시킵니다. 그리고 11월, 대원군의 정적 안동김씨, 대원군의 독재를 염려한 조대비, 대원군의 장남 재면, 그리고 유림세력의 결탁으로, 전국를 떨게하던 대원군의 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22살의 나이로 성인이 된 고종을 두고 더 이상의 섭정의 명분이 없던 대원군은 그렇게 정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된것이지요. 외척의 득세가 다시 시작되었고, 고종은 여전히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874년 2월 둘째아들 '이척(李?, 조선27대왕 순종)'을 낳았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얼마 후, 명성왕후의 친정집으로 한 수령(守令)이 선물을 위장한 폭약이 터지면서 양오빠 민승호와 그의 아들, 친정어머니가 죽게 됩니다. 민씨는 이를 두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것이라 비난하였고, 그 때부터 보복이라도 하듯이 대원군의 주변인물들을 숙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명성왕후는 자신의 민씨일가와 개화파들을 대거 등용합니다. 즉,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정반대로 개화정책으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천주교에 포교의 자유를 주는가 하면, 별기군을 창설하여 신식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개화는 전국에서 반발로 이어집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국가재정이었으나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지요. 조정의 대신들의 곳간에는 재물과 곡식이 가득하였으나, ?어죽는 백성들이 늘어나게 된것이지요.

 

1881년,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된 개화파로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관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고종에게 전하게 되는데,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조선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외교정책에 대한 내용으로, 일본과 청나라 조선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를 경계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조선은 중국의 변속국으로 변함없이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며, 중국외 유일의 조선수호국가인 일본과 결합하고, 독립국가인 미국과 합하면 화를 면할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용인 즉, 조선의 쇄도정치는 오래갈 수 없으며 대외방어에 힘이 없는 조선은 개국을 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생들은 이를 문제삼아 상소운동을 벌이며 민씨정권을 규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같은해 8월, '이재선역모사건(李載先逆謀事件)'이 일어납니다.

대원군 주변세력 안기영(安驥永), 권정호(權鼎鎬), 강달선(姜達善), 이철구(李哲九)등이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李載先, ? ~1881)을 왕으로 옹립하고 고종을 폐위하여 대원군에 집권하게 하는 역모를 꾸몄으나, 모의에 참여했던 광주산성장교 이풍례(李豊來)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을 사형시키고, 이재선은 제주도로 유배하여 사사시킵니다. 이를 계기로 민씨정권은 대원군의 기를 꺽을 수 있었으며,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 할 수 없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러던 1882년 6월,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걷은 쌀을 실은 세미선(稅米船)이 올라오지 않자 군사들의 군미지급조차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식군대인 별기군보다 구식군대들은 더 오랜시간을 지체하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거기에 14개월의 밀린 녹미중 1달치를 지급하면서도 아전들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이 지급이 된것입니다.

군사들은 불만이 가득하여 명성왕후 민씨의 외척이자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閔謙鎬)를 찾아 따졌으나 오히려 군사들의 주동자를 색출하여 처형하려 하였지요. 이에 분개한 군사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게 됩니다. 이른바 '도봉소사건(都捧所事件)'입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선동하여 민씨를 공격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입니다.

대원군이 병사의 복장을 하고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를 암살하려던 계획입니다.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를 찾지 못하였지요. 무예별감 '홍계훈(洪啓薰, ? ~1895)'의 권고로 변복을 하고 그의등에 업혀 누이로 위장하여 궁궐을 빠져 나와 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 피해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씨의 외척인 '민겸호(閔謙鎬, 1838~1882)', '이최응(李最應, 1815~1882)', '김보현(金輔鉉, 1826~1882)'등은 살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명성왕후를 찾을 수 없자, '황후가 죽었다.'며 국상절차를 밟기도 하였지요.

이 때, 민씨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청나라에서 이를 빌미로 개입하며 4천5백의 군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1천5백의 군사가 인천을 통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대원군의 단호한 대응에 후퇴를 하였고, 이 틈을 탄 청의 '오장경(吳長慶, 1833~1884)'이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아래 수많은 군민을 학살하였고, 개화파들과 대원군파를 정계에서 축출하는등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면서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였으며, 명성왕후가 그들의 보호아래 입궁을 합니다.  

    

 

홍릉 참도(參道)

중앙의 높은 곳은 신도(神道)라 하여 혼령이 다니는 길이며, 그 보다 한단 낮은 곳을 어도(御道), 즉 왕이나 신하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조선을 구하기 위한 방법은 개국뿐이다."

명성왕후는 임오군란이후, 개국에 열을 올립니다. 일본을 포함하여 미국, 독일등과 잇따른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없는 개국은 백성들에게 혼란만 가져오는 계기가 됩니다. 이미 '도봉소사건'으로 급진적인 개혁은 반발을 도모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을 터이지만, 명성왕후는 당시 조선의 난리를 타계할 방법으로 열강들에게 나라의 문을 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성왕후의 친조카 '민영익(閔泳翊, 1860~1914)'등의 친정수구세력들이 공공연히 개화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상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제기한 것은 개화파들이었지요.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하였고, 조정의 개화정책에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조정을 뒷받침하였지요. 그러나, 민씨일파들이 세도를 펴면서 개화파들을 탄압하며, 청나라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조선을 청국의 식민지화 하려하자, 개화파들은 명성왕후를 무너뜨리고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바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입니다.

민씨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축하연에 참석한 민태호(閔台鎬, 1834~1884), 민영목(閔泳穆, 1826~1884), 조영하(趙寧夏, 1845~1884),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을 살해하고, 고종과 명성왕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게 하여, 50여명의 개화파들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1~1917)'에게 지원을 요청, 1중대의 일본군대로 호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을 우의정에,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좌포도대장,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을 우포도대장, 그리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호조참판으로 두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후,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며, 각국의 공사관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사이, 명성왕후는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 1854~ ? )'을 통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튿날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Yuan shihkai=원세개袁世凱)'가 6백의 군사를 끌고 들어오자 김옥균등과 말다툼을 벌였고, 잠시 후 청나라의 군사가 1천6백에 이르자 일본군대 200백명은 후퇴하였고, 개화군사 8백여명도 숫적 열세로 패배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홍역식(洪泳植), 박영교(朴泳敎, 1849~1884)은 끝까지 고종과 명성왕후를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고,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서광범(徐光範), 유혁로(柳赫魯, 1863~1940), 변수(邊燧, 1861~1892)등은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속에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결국,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난 정변은 '3일천하(三日天下)'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후 명성왕후는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는 반면에,일본은 갑신정변으로 불에 탄 일본공사관과 당시 죽은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함으로서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하는 '한성조약(韓城條約)'을 체결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친정조카 민영익이 갑신정변으로 유일하게 살아 남았으나 큰 부상을 입자 미국의사 '호러스뉴턴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1932, 한국명 안련安蓮)'의 치료로 생명을 얻게되었고, 이로인해 서구열강과는 친계를 일본과 개화파들은 경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등의 무대가 되어 버립니다.

특히, 러시아는 조선의 얼지않는 항구를 차지하기 위하여 남하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청나라의 개입으로 고전하였고, 이를 통해 청나라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위안스카이를 통해 납치되었던 대원군을 귀국시키기도 합니다.

 

 

 

홍릉 배위(拜位)

홍살문 옆 한평정도의 공간으로 돌을 깔아 놓은 공간입니다. 왕이나 제관들이 능침을 향해 절을 하는 곳이지요.

 

 

 

그런던 1892년, 운현궁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또한 궁궐의 여러 전각에서 화약이 발견 되었지요.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대원군의 장자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李載冕, 1845~1912)', 그의 아들 '이준용(李竣鎔, 1870~1917)' 부자의 거처인 '운현궁(雲峴宮)'에도 폭약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명성왕후가 지목 되었습니다. 지난날 대원군의 사주로 양오빠와 친정어머니가 폭약으로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관계는 확인되 않았습니다. 사실, 민씨 친정집의 폭발사고 이후, 대원군은 자객과 폭탄테러의 위협에 자주 시달렸다고도 전합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폐출을 수시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조선사회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명성왕후는 권력 유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지요.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 민씨일가의 횡포는 날로 더해졌습니다. 실상,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강들과의 마찰에 그 부분이 감추어 졌다는 것이 맞는 것이 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그리도 걱정 하던 외척의 전횡이 다시 시작 된것이지요.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임오군란에서 보듯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핍박과 착취는 날로 심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민심은 신앙을 ?게 되었고, 반왕조의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지요.

그러한 와중에 '동학(東學)'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창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혹세무민(惑世無民)'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동학의 교세는 더욱 확장되고 있었고, 2대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조정에 대적할 만큼의 조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1893년 3월, 동학교도 2만여명이 충북 보은으로 집결하는 '동학보은집회(東學報恩集會)'모여 '신원금폭소(伸寃禁暴疏)'를 조정에 상소하였으며, 당황한 조정은 선유사(巡撫使)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을 파견하여 동학의 요구를 수긍하기로 합니다. 상소의 내용은 교주 최제우를 신원하고 포교의 자유를 달라고 하였고, 탐관오리들의 척결과 민생고의 해결, 서양과 일본의 배척등을 골자로 한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는 표교의 자유를 얻고 있는 반면 동학은 그렇지 못한데 다른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정은 동학의 요구에 수긍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이 과도한 수세를 징수하여 군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착취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에 동학접주 '녹두장군 전봉준(綠豆將軍 全捧準, 1855~1895)'을 중심으로 항의를 하게 되자, 이번에는 안핵사(按?使)로 '이용태(李容泰, 1854~ ? )'를 파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사를 위해 파견 된 안핵사는 병을 핑계로 한달이나 늦게 고부로 향했고, 그나마도 '동학폭도(東學暴徒)'라 하여 농민들을 잡아들여 폭행을 가하는 가 하면 집을 불태우는 등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을 자행합니다.

그로 인하여 농민봉기가 일어나니, '갑오개혁(甲午改革)', '동학혁명(東學革命)'으로 불리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 일어난 것입니다.

1894년 1월 11일, 접주 전봉준은 최경선(崔景善, 1859~1895), 정익서(鄭益西), 김도삼(金道三)등의 농민지도자들에게 봉기계획을 알리고 각각 집강에게 통문을 돌렸습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한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직향한다.'라는 행동방침을 세우고, 고부관아를 습격, 아전을 죽이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을 한 후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 하였습니다.

4월에는 전주성까지 함락을 시키자, 명성왕후는 또 다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나라가 이에 출병을 하자, 일본도 조선으로 출병을 합니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당도하자, '외세의 출병구실을 없애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였고, 관군이 이를 수락, 1894년 6월 10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으며, 전쟁을 중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은 철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군대를 늘렸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양반, 부호층들과 함께 연계하여 전쟁에서 진 농민들의 토지등의 재산을 빼앗고 일본군과 함게 농민들을 색출하여 학살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로서, 일본군과 기득권 양반부호들의 연합이 이우러진 것으로 '식민지 지주제(植民地 地主制)'라는 민족분열정책이 되었습니다. 

이에 농민군은 다시 2차, 3차 봉기를 하였으나, 일본의 화력앞에 실패하였고, 전봉준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1895년 3월 처형됩니다. 

 

그런데, 갑오농민전쟁의 뒤에는 흥선대원군이 있었습니다.

1890년 초, 전봉준은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여를 살던 전봉준은 고향인 고부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훈장을 지내며 살고 있었지요. 그러다 1893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만나게 됩니다. 농민전쟁이 있기 1년전이며, 당시 전봉준은 상소를 통해 백성들의 민생고를 조정에 알리고자 하였지요. 농민군의 요구에는 명성왕후의 폐위도 있었으나, 대원군의 섭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전 모의의 성격이라기 보다는 민씨 일파의 부패와 일본군, 친일개화파의 축출과 함께 대원군의 섭정을 요구하기도 아였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로 당시 민생, 민초들의 마음은 명성왕후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명성왕후의 세도 역시 과거 안동김씨 일파와 별다름이 없었다는 민초들의 판단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에 수시로 명성왕후의 제거를 의뢰하였으나, 번번히 거절을 당하였고, 그의 손자 이준용도 일본공사를 방문하여 명성왕후의 폐출의 정당성을 알리며 협조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일본영사관은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시각, 명성왕후 역시도 흥선대원군과 개화파들을 모두 없앨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발각이 되었고, 이로서 대원군은 명성왕후를 없앨 계획에 돌입하게 됩니다.

 

 

 

 

 

홍릉 석물

왼쪽부터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그리고 석마 2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석물등ㄴ 참도의 양쪽으로 1쌍씩 배설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1895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납니다.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끝남음을 들어 청, 일양군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옷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공사는 본국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자국 공사관을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명분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병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조정은 일본이 철수한 후에야 내정개혁이 가능하다며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게 됩니다. 그러자 1895년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이틀뒤에는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 계속 북상하여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로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깊숙히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무력은 앞세운 일본은 조정의 내각구성에도 참여를 하는등, 조선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됩니다.

또한, 1895년 4월, 청의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조인하여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함으로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약하고, 요동반도를 할양하게 됩니다. 

 

그 때, 명성왕후는 일본을 막고자, '인아거일(引俄拒日)'정책을 추진합니다.

바로 러시아를 끌어 들임으로서 일본을 막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종은 일본의 경계로 움직이지 않았고, 명성왕후가 러시아 '카를 이바보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i Weber, 1841~1910)'공관을 만나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러시아 공사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견제하게 됩니다. 당시는 청일전쟁 직후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성을 다시 청나라에 돌려 주게 됩니다. 이러한 정세를 명성왕후는 이참에 러시아를 앞에 두고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려 합니다.

명성왕후의 정책으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접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조선에서 막대한 이권을 챙기던 일본인들이 분노하였으며, 청일전쟁으로 흘린 젊은이들의 피를 보상하라면서 격렬한 시위를 하였지요.

그리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민씨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판단, 1895년 8월,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 1846~1926)'를 일본공사로 보내면서,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1848~1906)',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 幸彦, 1858~1927)', 사무라이이자, 미우라고로의 심복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1852~1912)'까지 조선으로 들어 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본군과 낭인들이 실질적인 암살작전에 들어가고, 조선인을 표면적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가장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작전명 '여우사냥',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입니다.

 

     

 

 

 

 

1895년 10월 4일,

일본 궁내부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1852~1912)'는 명성왕후 제거와 관련된 4개 각서 항목을 들고 흥선대원군을 찾아갑니다.

바로 1년전 자신이 민씨 폐위를 요구를 반대하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자신을 찾아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거사 이후 대원군은 국왕을 보필하여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고 내각에 맡기도록한다.'라는 각서로 대원군의 정치참여를 미리서 차단하자는 목적이었지요. 처음에는 반대하던 흥선대원군, 결국은 친필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0월 8일,

흥선대원군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으면서, 또한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 이들을 척결하겠다.'는 '고유문(告由文)'을 발표하고 게시하라 지시합니다.

인천으로 들어온 일본 낭인들은 개화파 '유길준(兪吉濬, 1956~1914)',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1843~1895)', 친일인사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具然壽, 1867~1925)', 훈련대 1대대장, '이두황(李斗璜, 1858~1916)', 2대대장 '우범선(禹範善, 1857~1903)', 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1867~1946)', 일본 통역관 '박선(朴銑)'등의 호위를 받으며 불과 반나절만에 경복궁에 잠입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정궁, 경복궁,

경복궁의 정문을 지키던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 ? ~1895)'이 방어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낭인들은 궁궐로 들어가 명성왕후를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성왕후는 궁녀복으로 갈아 입고 건청궁 옥호루로 피신하여 있었으나, 낭인들은 궁녀와 내관등 40여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었으며, 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이 이를 막자 양 팔목을 잘라 죽입니다.

그리고 조선인 안내자들은 궁녀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기어이 명성왕후를 찾아내게 됩니다.

낭인들은 명성왕후의 발을 걸어 바닥에 넘어뜨리고 발로 가슴을 수차례 걷어 찬 다음, 칼을 휘둘러 난자하여 살해합니다. 그도 모자라 시체를 향원정으로 옮기어 홑이불을 씌워 석유를 끼얹어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릅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왕후 민씨가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잔인하게 시해 된것입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명성왕후시해사건(明成王后屍害事件)'이 벌어진 것입니다.

민씨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일본은 을미사변 이후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왕후의 직위를 폐서인하여 강등하지만, 다음날 바로 '빈(嬪)'으로 승격시킵니다.

을미사변은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이에 그해 10월, 미우라고로등의 일본인들은 전원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명성왕후의 신원도 복원되었지요. 그런데, 히로시마에서 재판을 받던 전범들은 형식적인 재판을 하면서 '왕후를 살해한점은 인정이 되나, 증거가 없다.'는 희안한 이유로 무죄로 방면됩니다.

왕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으로 가담하였던 박선, 이주회는 처형을 하였으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고종은 참담하였습니다.

왕후의 암살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가담하였다는 사실과 정치인, 문신 가릴것 없이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었지요. 그 중 자신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이름이 거론이 되자, 훗 날 대원군의 죽음에 빈소를 찾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명성왕후 민씨 일파의 척족은 결코 무시해서 넘어가거나 간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선혜청에 들여 놓은 조카는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겨를 섞어 군미를 지급하는등 임오군란의 원잉 되기도 하였으며, 그 외에도 조정의 주요 요직은 모두 민씨 일가이거나, 민씨의 외가집안이었습니다. 대원군에 이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인 점입니다.

또한, 그러한 그녀의 권력은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구조속에 있었지요. 하여 고종의 역할은 조선의 임금이었으나 극히 미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홍릉 문, 무인석

기존 왕릉에는 능침공간의 중계, 하계에 자리하지만, 홍릉에서는 침전의 아래에 배설됩니다. 기존의 석물보다 문, 무인석의 키고 크고, 특히 문인석은 금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기존 왕릉에 배설했던 투박하고 거친 표면의 석물들과 달리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모양새가 그리 정감이 가지는 않습니다. 

 

 홍릉 침전선계

참도를 그대로 따라 오면서 만나는 계단입니다. 정자각의 경우,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편으로 오르는 계단이 두곳, 서편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한곳이 자리하지만, 황제릉으로 조선된 홍릉의 침전에는 전면에 세곳, 동, 서에 각각 두곳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홍릉 침전 내부

화려하게 단청을 한 고종황제의 침상이 놓여 있습니다.

 

홍릉 비각

 

'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 부좌(大韓 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附左)'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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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11 10:18

    첫댓글 잘 보고공부도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3.11 15:47

    늘 평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13.03.15 01:44

    덕분에 공부했읍니다

  • 17.10.26 18:58

    어제 홍릉 유릉 사릉에 다녀왔습니다.
    홍릉앞 석상들의 동물 이름을 잘 모르겠기에 친구랑
    헤맸는데 공부를 하고 갔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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