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기적의 극초정밀 유물 ‘선각단화쌍조문금박’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07.04ㅣ주간경향 1484호
턱없이 작은 크기이고, 무게 또한 0.3g밖에 안 되는 금박인데요. 그것도 반 정도로, 구겨져서 흙 속에 묻힌 채 발견됐습니다. 심지어 20m 거리에서 나머지 반쪽까지 찾아낸 겁니다.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0.05㎜ 이하의 선으로 3.6㎝ 금판에 그린 ‘선각단화쌍조문금박’(금박화조도)를 돋보이게 처리한 그림을 제공했다. 상상의 꽃 무늬인 단화(團華), 즉 둥근 꽃무늬를 바탕으로 하고 좌우에 멧비둘기 암수를 그려넣었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뭐가 반짝거리고 있네요.” 2016년 11월이었습니다. 경북 경주 ‘동궁과 월지’와 접한 동쪽 지역을 발굴 중이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그쯤에서 조사를 마무리할 작정이었습니다. 유적과 인접해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동해남부선 철로(폐선)가 지나고 있는데요. 그 철로 옆에 조성된 배수로에서 물이 계속 차올라 더 이상의 발굴은 불가능했던 겁니다. 상층부만 조사하고, 철로 철거 후의 추가 조사를 기약한 채 발굴장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발굴 인부의 개가
그때 인부 중 한사람이 연구소 조사원을 찾아와 “저기 흙 속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고 알립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정원혁씨)이 인부가 지목한 통일신라 건물지의 계단 출입시설 부근을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팥알만큼 작지만 반짝거리는 작은 물체가 구겨진 채 흙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박이었습니다.
10여일이 지난 뒤 또 다른 인부가 첫 번째 발견지점에서 20m 떨어진 회랑건물터에서 역시 반짝거리는 물체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수습한 두 물체는 출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수장고에 들여놓았습니다.
그후 수습 유물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두 물체를 꺼내 봤더니 문양의 패턴이 흡사했고, 그것을 이어보니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었습니다.
턱없이 작은 크기(가로 3.6㎝×세로 1.17㎝×두께 0.04㎜)이고, 무게 또한 0.3g밖에 안 되는 금박인데요. 그것도 반 정도로, 구겨져 흙 속에 묻힌 채 발견됐습니다. 심지어 20m 거리에서 나머지 반쪽까지 찾아낸 겁니다.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그걸 한사람도 아니고, 눈썰미 좋은 두사람의 인부가 찾아냈습니다.
‘포 나인(99.99%)’의 기적
연구소 측은 이 작은 금박을 완전체로 복원해냈는데요. 분석 결과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0.3g(0.08돈)의 금박 순도는 이른바 ‘포 나인(Four Nine·99.99%)’이었습니다.
불순물이 0에 가까운 ‘포 나인’을 향한 고순도의 정련기술은 요즘에도 ‘워너비’라는데, 그런 ‘포 나인’의 정련기술을 통일신라시대에 확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라시대 금관(6점)의 금 함유량이 80~89%(19~21K)라는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끌이나 정으로 새긴 문양의 굵기가 신비롭기까지 한데요.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0.08㎜)보다 얇은 약 0.05㎜ 이하인 것으로 분석됐거든요. 국가무형문화재 김용운 조각장은 “컴퓨터로 도안한 그림을 레이저로 쏘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면서 “0.05㎜ 문양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김용운 조각장은 고려시대 금도금 은잔의 문양을 보여주었는데요. 이 은잔은 5㎜에 약 20선을 조각했는데, 신라 금판은 5㎜에 약 60선을 새겼다는군요. 신라 금판이 고려 은제 잔보다 3분의 1 정도 더 정밀했다는 얘기죠. 무엇보다 컴퓨터와 레이저를 사용해도 새기기 어려운 극초정밀 기술이라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2016년 11월 금박화조도가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발굴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인부가 합체해봐야 가로 3.6㎝, 세로 1.17㎝, 두께 0.04㎜에 불과한 금판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열흘 간격으로, 두 동강나고 흙 속에 구겨진 채 20m 거리를 두고 발견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예부터 한국의 극초정밀 예술은 유명하죠. 청동기시대 국보경(숭실대 소장)은 선의 골 깊이가 약 0.70㎜, 선의 간격이 약 0.30㎜, 선의 굵기가 약 0.22㎜에 불과합니다. 자그마치 2300~2200년 전의 작품인데 말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동제 사리 외호의 문양(0.3㎜)과 신라 천마총 금관의 가는 선(약 0.25㎜), 황룡사지 금동제 봉황 장식의 꽃잎 내부의 선(약 0.10㎜), 동궁과 월지 출토 금동제 풍탁의 선(약 0.14㎜), 감은사터 사리기 누금 알갱이(약 0.30㎜) 등이 모두 극초정밀 예술품이죠.
실수를 용납하지 않은 예술혼
이렇게 확인된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이하 ‘금박화조도’)의 세부 문양을 살펴볼까요.
넓은 금판에 문양을 새긴 후에 필요한 부분만 오려 사용했는데요. 꽃잎문양(단화·團華)을 배치한 뒤 좌우에 새(멧비둘기)를 마주 보게 표현했습니다. 가로 3.6㎝×세로 1.17㎝×두께 0.04㎜에 불과한 금판에 왼쪽 새(가로 0.9㎝×세로 0.75㎝)와 오른쪽 새(가로 0.8㎝×세로 0.65㎝), 그리고 꽃문양(가로 1.37㎝×세로 0.92㎝)까지 새겼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가능할까요.
그런 작은 금판에 문양을 새기다 보니 아차 실수한 흔적도 보인다는데요.
“자를 대고 오리다가 실수해서 다시 자를 옮겨대고 오린 흔적이 있습니다. 스케치한 다음 잘못 오리거나, 무늬를 잘못 새겼다는 의미입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한상 교수는 “워낙 작은 문양을 새겼기 때문에 기계가 아닌 이상 오히려 틀리는 게 당연했을 것”이라면서 “만약 실수를 그냥 두었어도 육안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럼에도 1200년 전의 장인은 오차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예술혼을 발휘하며 고쳤던 겁니다.
왜 쌍조문을 새겼을까요. 쌍조문의 모티브는 서역과 동북아시아에서 확인됩니다.
일제강점기 ‘동궁과 월지’. 1980년대 초까지도 ‘안압지’로 일컬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가운데 물이 고여 있는 전형적인 연못인 것 같았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에서 처음 확인되는 문양이고요. 주로 길상(吉祥)의 의미로 새기거나 그렸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막새와 같은 기와에서 주로 확인됩니다. 바탕에 새긴 꽃은 상상의 꽃잎 문양인 단화(團華)인데요. 이런 꽃문양도 국내 출토 사례가 제법 됩니다. 이번에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금박화조도’와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은제 음각 화조문 소형 사리호(꽃과 새를 새긴 은제 사리 항아리)’랍니다.
이렇게 작디작은 이 ‘금박화조도’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었을까요.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금판에 구멍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떤 기물에 붙인 마구리(장식물)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막걸릿값 안 주냐’고 깨버린 신라 접시
‘동궁과 월지’가 어떤 유적인데 이런 극초정밀 유물이 나왔을까요.
웬만큼 나이를 먹은 이들에게 친숙한 유적 이름이 있으니 그것이 ‘안압지’입니다. 기러기 ‘안(雁)’ 자에 오리 ‘압(鴨)’ 자를 쓴 것으로 보아 기러기나 오리 떼가 노는 연못(지·池)이라는 뜻이겠죠.
본래 <삼국사기>는 “674년(문무왕 14)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만 했는데요. 조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증보 편찬)이 ‘(연못) 이름=안압지’로 특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안압지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운데 물이 고여 있는 전형적인 연못 같았습니다.
급기야 1974년 11월부터 경주고도관광개발 10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연못의 준설작업을 시작합니다.
연못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출토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 일반 공사업체가 굴착기로 바닥의 진흙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문화재청 산하 경주사적관리사무소는 혹시 몰라 임시직이었던 고경희 조사원(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장을 지냄)을 현장감독으로 보냈답니다. 그때가 1975년 1월이었는데요. 이때의 에피소드가 기막힙니다.
인부들에게 “유물을 출토하면 신고해달라”고 했더니 “그걸 공짜로 신고하냐. 막걸릿값을 쳐주지 않으면 줄 수 없다”면서 고경희 조사원이 보는 앞에서 신라토기(접시)를 깨버렸다는 겁니다. 그냥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즉시 공사가 중단됐고, 3월부터 정식 발굴로 전환됐습니다.
20m 떨어진 곳에서 다른 인부 2명이 발견한 금박 조각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합체됐다. 두 조각의 문양 패턴이 흡사했고 이어보니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품이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안압지가 아닌 동궁과 월지
못과 주변 발굴(1975~1976)은 그렇게 시작됐는데요. 깜짝 놀랄 만한 발굴성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총면적 4738평(1만5658㎡)에 이르는 연못은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 입출수구 등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정교한 호안석축(못가에 돌로 쌓은 축대시설)이 확인됐고요. 연못 주변을 조사한 결과 건물지를 모두 31동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중 서쪽의 건물 5동은 연못의 축대시설과 연접해 조성됐는데요. 아마 이 건물의 밑까지 찰랑찰랑 물이 차 있었을 겁니다.
연못 안팎에서 출토된 유물이 3만3000여점에 달했답니다. 그중 안압지 주변의 건물지에서 출토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매우 중요한 표지유물이었습니다. ‘의봉’과 ‘조로’는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의 연호 중 각각 9, 10번째의 연호거든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679년(문무왕 19) 동궁(태자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했다”고 했거든요.
674년 연못을 조성한 다음 5년 만인 679년 동궁을 세웠다는 이야기죠.
또한 안압지 연못에서 출토된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와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및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의 명문이 주목을 끌었는데요. <삼국사기> ‘직관지’에 등장하는 동궁(세자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이 보이거든요.
<삼국사기>에 “822년(헌덕왕 14) 왕의 동모제(어머니가 같은 동생) 수종(흥덕왕·재위 826~836)을 부군(副君·왕세자 혹은 태자)으로 삼고 월지궁에 입궁시켰다”는 기록이 보이네요. ‘월지궁=동궁’이라는 얘기죠. 674년 조성된 연못은 679년 세워진 동궁의 부속시설로 기능했으며, 그 이름은 ‘월지(月池)’일 가능성이 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부터 ‘안압지’로 흔히 알려졌던 사적 명칭은 2011년부터 ‘경주 동궁과 월지’로 바뀌었습니다.
신라시대 ‘복불복’ 게임기와 남근의 출현
동궁과 월지 출토유물 가운데 압권은 길이 6m, 너비 1.2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배였습니다. 8명 정도가 주안상과 함께 타고 놀았을 놀잇배로 추정됐습니다. 다양한 금동판불(동판 등에 새긴 채색불상) 16구도 눈길을 끌었는데요.
뭐니 뭐니 해도 출토유물 중 이목을 끈 유물 2점은 주령구와 목제 남근이었습니다.
연못의 바닥 펄에서 확인된 주령구(酒令具)는 6개의 사각형과 8개의 육각형으로 된 ‘14면체 주사위’였는데요.
각 면에는 4~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주사위를 던져 새겨진 글 내용대로 벌칙을 받았던 놀이도구가 분명했습니다. 통일신라시대판 ‘복불복’ 게임이었습니다.
벌칙 가운데는 ‘원샷으로 술 석잔 마시기(삼잔일거)’,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자창자음)’,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음진대소)’ 등도 있었는데요.
‘집단 코 때리기(중인정비)’, ‘팔 구부려 마시기(곡비즉진)’, ‘얼굴 간지럼 태워도 참기(농면공과)’,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추물막방)’ 같은 짓궂은 벌칙도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지탄받았을 것 같아요.
‘금박화조도’의 왼쪽과 오른쪽 새는 모두 멧비둘기로 추정된다. 쌍조문은 3세기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에서 처음 확인되는 문양이다. 주로 길상(吉祥)의 의미로 새기거나 그렸다. 이 문양은 서역과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래됐다. 국내에서는 기와에서 주로 확인된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역시 연못에서 확인된 ‘목제 남근’ 2점은 어떨까요. 망측한 유물이 왜 거기서 나왔을까요.
그러나 선사시대부터 생식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고 숭배해왔습니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중 커다란 남근을 노출한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성 성기가 도드라지게 표현한 신라 토기들도 보이죠.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볼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못 발굴 후 30여년이 지난 2007년부터 월지의 동쪽 지역에 대한 본격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동궁·월지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 짓기 위한 조사였는데요. 그 결과 다른 신라왕경(王卿) 유적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형 건물군 및 담장 등과 함께 안압지와 동일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017년에는 황룡사 광장으로 통하는 동문터를 확인했고요.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갖춘 수세식 화장실 유구도 찾았습니다. 그 무렵 그 옆 발굴장에서 ‘금박화조도’를 찾아낸 거고요.
이 순간 한가지 제안하고 싶어요. 팥알만큼이나 작은 ‘금박화조도’를 발견한 두분의 인부를 찾아냈으면 합니다. 그분들의 눈썰미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