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컬럼=한국복지신문] 한국복지신문취재부=
콜로레도 백작, 잘츠부르크 대주교 취임
1772년(16살) 3월 14일 콜로레도 백작(Hieronymus Graf von Colloredo,1732~1812)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 취임했다. 전임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서거한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모차르트는 5월 초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단막 오페라 '시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을 헌정하고 오페라의 합창 일부와 아리아를 연주하여 취임을 축하하였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8월 21일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 유급 궁정악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2년 전에 밀라노 왕립극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사육제를 위한 오페라 '루시오 실라(Lucio Silla K.135)' 초연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모차르트 부자의 이탈리아 여행을 허락했다. 밀라노에서의 음악적 성공은 바로 잘츠부르크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밀라노 왕립극장에서 오페라 '루시오 실라' 초연
모차르트 부자는 10월 24일 잘츠부르크를 출발하여 11월 4일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에게는 이번 여행이 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밀라노는 모차르트에게 최초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마차에서 내린 모차르트의 손에는 여전히 미완성의 악보만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완성된 대본은 아직 받아 보지 못했다. 빈의 궁정시인 조바니 데 가메라(Giovanni de Gamerra 1742~1803)가 쓴 대본에 의한 레치타티보는 마쳤지만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가 수정하여 완성한 대본은 밀라노에 도착할 때까지도 받을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이런 식으로 늘 임박해서야 완성되었다. 12월 18일에 악보로 옮겨져 연습에 들어간 오페라 '루시오 실라' 는 1772년 12월 26일 몹시 춥던 겨울 저녁에 지휘대에 올라 선 모차르트를 또 다시 두 시간 동안을 기다리게 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막간과 휴식 다음에 발레를 넣었기 때문에 여섯 시간이 소요된 공연은 다음날 새벽 2시에 막을 내렸다.
쉬지 않는 열정적인 작곡
모차르트는 밀라노에 도착하여 '루시오 실라' 작곡에 쫓기면서도 틈틈이 '밀라노 4중주' 와 모테트(Motet 르네상스 시대 성악곡의 하나)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K.165)'를 작곡했다. 그리고 3차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던 1772년부터 1773년까지 '여섯 곡의 현악 4중주곡(K.155~160)' 을 써 내려갔다.
연주회를 마치고 모차르트 부자는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내려갔다. 테레지아 황후의 냉정한 표정에서 읽은 황후의 자신에 대한 의중과 많은 사람의 따돌림이 느껴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일자리를 위해 최후의 방문자로 토스카나의 레오폴트(Leopld ll 1747~1792) 대공을 찾아간 것이었다. 대공의 부인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 1745~1792)였는데 공주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페라 '루시오 실라' 연주회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희망사항이 무위로 끝난 허무한 결과를 안고 모차르트와 레오폴트는 1773년(17살) 3월 13일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음악적 성과
집으로 돌아 온 모차르트는 여행의 시간을 멈추고 약 4년 여 동안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다. 모든 실망감을 훌훌 털고 작곡에 몰두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와 레오폴트 부자가 그동안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돌며 명성을 얻었던 것은 잘츠부르크의 제후를 겸하는 대주교의 위상을 드높이고 돌아온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적인 수확을 거두어 들일 시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모차르트에게 대주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도록 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과 성당, 극장용 기악곡과 합창곡을 쉴 틈 없이 쏟아냈다. 1773년의 9개월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7곡과 현악 4중주곡 6곡, 현악 5중주곡 1곡, 디베르디멘토 4곡, 관현악 무곡 16곡, 미사곡 1곡 등의 훌륭한 작품들을 계속 작곡했다. 1774년(18살)에 이르러서는 교향곡만 해도 열네 곡이 작곡되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시작된 작곡의 양과 속도가 보여 준 엄청난 생산력으로 드러난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진행되었던 유럽과 이탈리아에서의 연주여행의 본격적 음악성과가 비로소 표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질풍노도 운동’과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레오폴트는 1773년 가을, 잘츠부르크에서 오늘날 마카르트프라츠(Makartplatz)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던 ‘무용교습소’를 인수했다. 8개의 방과 넓은 홀이 있는 크고 깨끗한 이 건물에는 정원도 딸려 있고 여름철 휴식은 물론 작곡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얼마의 기간 동안 모차르트의 가족들은 대단히 수준 높은 주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을 꼽는다면 그 곡은 바로 '교향곡 25번 g단조 K.183' 일 것이다.
모차르트 연구자들은 '교향곡 g단조 K.183' 을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영향으로 설명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일어난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등이 주창한 질풍노도 운동을 모차르트가 빈에서 배워 와 불타 올랐던 정열과 염세적 기분을 격하게 표현했다고 분석했다. 모차르트는 1773년 7월에 만난 레싱의 친구 토비아스 게블러(Tobias Gebler 1726~1786)의 대본으로 오페라 '이집트 왕 타모스(Thamos, Konig in Agypten K.345)' 를 작곡하며 ‘질풍노도’ 를 체험하고 인간의 자유를 질식케 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젊은이로 변모했다. (오페라의 흥행은 실패했지만)
콜로레도 대주교의 개혁조치
콜로레도 대주교는 13세기부터 여러 군주와 추기경, 대주교가 나온 귀족가문 출신으로 주변의 인맥과 추진력이 대단했다. 특히 긴축 정책으로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요제프 2세 황제와 노선을 같이하는 입장에서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대성당, 궁전, 대학극장 등에 집중되었던 음악연주를 대성당으로 축소하고 궁전극단은 폐쇄하였다. 극장은 주로 순회극단의 공연으로 대체했다.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성당 장식과 전례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미사 시간도 45분으로 제한하여 음악연주는 20분 이내의 짧은 미사곡이어야 했다. 장엄미사곡과 긴 미사곡에 의미를 두고 작곡해 왔던 모차르트에게는 견디기 힘든 조치였다. '교향곡 25번' 이후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자기보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적 소명을 자각하고 오페라 작곡가로 나아 가겠다고 하는 꿈을 굳혔다. 이 작은 도시에 자신을 가두는 것은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꿈은 오페가 극장이 없는 잘츠부르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은 점점 언젠가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트를 떠나야만 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다음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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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이야기⑨ 제3차 이탈리아 여행 – '질풍노도 (Strum und Drang) 운동 > 뉴스 | 한국복지신문 (xn--z92b13l.xn--3e0b70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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