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혜 그리고 유혹 다혜가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마음의 한구석을 떼어 바다 멀리 내던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날인가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질 것 같던 여인이었다. 내 사랑의 주식을 몽땅 소유한 여인이 떠나 버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미국이란 거대한 나라를 선택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를 선택했다. 그녀를 떠나 보내고 내가 견디어 낼 수 있을지를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기다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내 일생을 걸었던 여인과의 이별이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사랑했었다면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훔쳤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훔칠 수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옷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내 사랑의 징표였다. 며칠 동안 밤마다 우리는 붙어 앉아서 사랑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입맞춤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세상의 숱한 맹세들이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를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다. 지리라는 건 사랑을 접근시키기도 하지만 사랑을 내팽겨쳐 주기도 하는 묘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문서로 확인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런 우리들의 사랑을 육체로 확인해 두려고 했지만 다혜는 마음으로 확인하기를 고집했다. 그것이 우리들의 작별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우린 결코 헤어지기 위해서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만나기 위해서 손을 흔드는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잠시 헤어지는 아픔이 우리들의 미래를 아름답게 장식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믿고 있었다.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믿는 것밖에 우리들에겐 할 일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혜가 떠나고 나면 허공에 뜬 내 갈증을 어떻게 가누게 될지 모르겠다. 공항 대합실, 다혜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천천히 돌진해 들어갔다. 그것은 돌진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다혜네 식구들 속으로 주책없이 끼여드는 것은 돌진일 수밖에 없었다. 다혜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허리를 꺾었다. 오랜만이네."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다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다혜가 피식 웃었다. "그동안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했다. 다혜를 사랑한 것이 다혜 아버지를 괴롭힌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철이 없어서 자넬 괴롭혔었지. 이젠 공부하러 떠나는 애니까 자네가 많이 도와 줘야 되네." "네." "서로 자제하고....." "네." 그것은 다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말라는 압력이었다. 나는 다혜 아버지를 한대 갈겨 주고 싶었다. 다혜가 다가왔다. 하얀 원피스와 재킷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청바지 차림의 보통 때 다혜 모습이 아니었다. "가서 매일 편지 쓸 거야." 다혜가 먼저 말했다. "공부 잘해." "우리 아버지 같은 소리만 해." "다혜 아버지가 나한테 한 말이거든." "우리 아버질 이해해 봐. 아버지가 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지 몰라." "난 아버지가 안 될 거니까." 다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다혜의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별을 축하합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다혜 친구들이 짖궂게 다혜와 나의 이별을 축하하고 있었다. 짐을 부치고 난 다혜네 식구들의 눈언저리가 붉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객쩍은 기분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다혜인데도 내가 나타나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 쏠렸다. 다혜가 파리 유학이란 복잡한 과정을 겪게 된 것도 나 때문이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집갈 나이의 다혜가 뒤늦게 공부를 하겠다는 것부터가 다혜네 식구들을 긴장시켰다. 공항에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오지 않으면 완고한 식구들이 승리감을 느낄 것이고 그녀 자신이 더 참담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했다면 더 당당하게 공항 대합실에서 이별이란 걸 느껴보자고도 했다. 우리들의 사랑을 거부하는 가족들에게 뜨끔한 기분을 남겨 주자는 것이었다. "오기로라도 나와야 돼.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돼. 우리 식구들에게 소름 끼치도록 사랑을 가르칠 필요가 있어." 다혜가 며칠 전부터 강조한 말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보다 한시간쯤 일찍 나가게 될 다혜와 나의 마지막 장면은 이제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나 먼저 들어갈까?" 다혜가 불편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말했다. "오기도 없어?" "왜 없겠니. 너희 식구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싫어서 그래. 내가 구걸하러 온 놈도 아니고......, 큰 죄인도 아니데 너무들 하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나를 두려운 듯, 또는 사랑을 구걸하는 못난 놈 쳐다보듯 했다. "얘야, 일찍 들어가거라." 다혜 이모가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공항 대합실에 있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시간 넉넉해요, 이모. 얘기 조금 하고 나갈게요. 내가 미우니까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다혜가 모진 소리를 했다. "얘는...... ." 다혜 이모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다혜의 친구들도 우리 두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속셈인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불안해서 저런다니까. 찬이가 힘으로 저지시키거나 나를 납치해 갈까 봐 저렇게 안달을 한다니까." 다혜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사실대로 잘 봤어." "날 납치하고 싶어?" "어제부터 계속 그 생각이었다. 감쪽같이 납치해서 어디론가 숨어 버릴까 궁리만 했지." "정말 납치할 거야?" "그럼 안 되니?" "지금 난 찬이한테 납치당하고 싶어. 공부하기도 싫고 이렇게 반강제로 헤어지는 것도 싫고." "그럼 납치하래?"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어. 내가 파리 유학 결정했다면 당연히 나를 납치해서 잠적해 버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지금 비행기 타러 온 사람에게 자꾸 먼저 간다니...... ." "제길...... 넌 내 맘을 너무 몰라. 난 패배자처럼 매일 밤 복수를 꿈 꿨어. 납치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었어." 나는 다혜가 떠난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을 답답하게 할 줄을 몰랐다. 더구나 결혼상대자로는 실격이 되어 버린 신세였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어. 찬이 정도면 날 납치하는 건 쉽잖아." "그러고 싶어. 그러나 난 결코 납치하진 않겠어." "왜?" 다혜는 도전하듯 물었다. "알아." 다혜는 그 한마디에 눈물이 글썽였다. 마음이 여린 소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힘 내. 내가 찾아갈 테니까. 지구 끝이라도 찾아갈 테니까." 나는 어울리지 않게 이런 말을 해 버렸다. 다혜가 피식 웃었다. "기억나니? 훼드라. '죽어도 좋아'라는 거 말야. 나갈 때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 돼.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어른들 생각처럼 철딱서니 없는 사랑이나 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돼."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납치당하길 바래." 다혜가 시큰하도록 짜릿한 말을 했다. 그건 그녀의 진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그런 싶었을지 모른다. 그녀가 떠나고 없는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견디어 낼지 걱정이었다. "우리한테 오기가 있잖니. 우리 참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할 힘도 길러질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 다혜가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뭔데?" "찬이가 하자는 대로 해 버릴 걸 그랬어. 내가 무슨 맘 먹고 그랬는지 몰라. 그까짓 육체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말야." "이미 글렀어." "지금이라도 둘이 도망갈 수 없을까?" "그것보다 더 귀중한 걸 우린 알고 헤어지잖아." "그건 그래." 하나님 잔인하십니다. 우릴 결국 이렇게 만들 바에야 어째서 만나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되길 바라셨겠죠. 그리고 즐기고 있겠죠. 하나님.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린 끝까지 헤쳐 나갈 겁니다. 하나님의 장난에 놀아나진 않을 거라 이겁니다. 사람들이 출구로 모여들었다. 나와 다혜는 먼 빛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혜네 식구들이 모여서 다혜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있었다. 다혜는 손을 흔들고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리고 뛰었다. 다혜는 울고 있었다. 눈물 가득 괸 눈빛이 다혜는 많은 사람을 뚫고 내게로 뛰어왔다. 나를 얼싸안았다. 뜨거운 입술로 나를 끌어 당겼다. 짭짭한 그녀의 눈물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그저 길고 뜨거운 입맞춤에만 우리의 생애를 건 것처럼 들떠 있었다. "사랑해. 우린 이길거야." 다혜가 먼저 손을 풀었다. "그래, 우린 이기고 말 거야." "사랑한다고 큰소리로 큰소리로 말해 줘." "그래." "갈게. 큰소리로 나갈 때 말해 줘." "알았어." 그녀는 바닥에 팽개쳤던 가방을 들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다시 출구로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다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혜가 출구를 빠져나가 자동문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들었다. 나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공항 대합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놈이 뭐라든 사랑할 거다!" 또 악을 바락바락 썼다. 다혜가 손을 흔들고 자동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랑한다아! 사랑하고 말 거다아! 어떤 놈이 뭐라든 넌 내 꺼다아! 사랑한다아!" 아까보다 더 악을 써댔다. 다혜네 식구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사람들이 내 곁에서 물러났다. "사랑한다아. 사랑하는데 무슨 잔소리가 필요하냐아! 젊은 놈은 사랑이라도 하자아! 사랑한다아!" 나는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리지 않고 악을 쓰며 내뱉었다. 워낙 큰소리로 악을 쓰니까 구경꾼들도 슬금슬금 도망가 버렸다. 제복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뭐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사랑한 여자가 떠났습니다. 그래서 악 좀 썼습니다. 그녀의 부모들 들으라고 더 악쓴 겁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떠들면 어쩝니까?" "사랑도 내 맘대로 못해서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건 잘했소. 그러나 여긴 국제공항입니다. 나가서 실컷 소리 지르시오." 나는 괜히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왔다. 다혜네 식구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혜 친구 두명이 서성거리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서 뛰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차가운 밤 하늘에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나는 주차장에 앉아서 아홉 시 이십 분이 넘도록 담배만 연신 피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쫓아 들어가 다혜를 훔쳐올까? 소란해지겠지. 그럼...... .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홉 시 이십 분을 지나 아홉 시 반도 넘었다. 나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무섭게 흡뜬 눈으로 공항을 빠져 나갔다. 어둡고 차가운 공항을 흘낏 뒤돌아보며 내 기분이었다. 다혜는 내 축소된 분신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만큼 내 가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여인이었다. 다혜. 처절하고 애절하게 불러보고 싶은 여자였다. 그녀는 내 앞에서 한번도 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소녀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으로 사랑을 남긴 여인이었다. 다혜. 그녀는 떠났다. 기약은 했지만. 그녀의 동경과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로 이별의 고통을 흘려놓고 떠났다. 프랑스 파리가 어떤 곳인지 나도 그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녀의 영어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녀의 불어 실력은 미지수라는 생각이 자꾸 뇌리를 건드리곤 그녀의 의지라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헤어지며 그녀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육체를 왜 벗어던지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했다. 떠나기 전날 밤까지도 그녀는 옷 벗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끝까지 육체를 지킬 수 있는 여자라는 게 내 솔직한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쾌속으로 달렸다. 희미한 가로등과 차량의 불빛 속을 비집고 달렸다. 어둠 저쪽에 다혜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달렸다. 뒤를 흘낏 쳐다보았다. 백미러 속으로 검은 승용차 한대가 쫓아왔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짐작할 수 없는 차형이었다. 속력을 늦쳐 신호대기 앞에 서서 유심히 뒤차를 살폈다. 세 명의 사내들이 낯선 일본인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구석 자리에 하얀 모자를 쓴 여인도 직감에 일본인 같았다. 브레이크 등의 붉은 빛 때문에 확실하게 생김새나 표정을 집어 낼 순 없지만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춘삼이 형과 넙치 형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일본 애들의 보복 작전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애들의 작전은 어떤 것일까? 점잖게 협상을 제의해 올까? 일본 애들의 속성은 강한 자에겐 비굴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실리있는 협상을 하지만 약한 자에겐 무자비한 보복만 갚아 나간다고 들었다. 엑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뒤차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뿐 따라붙는 기색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뒤에 애들이 따라붙게 만들 걸. 나는 은근히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눈치채게 내달릴 순 없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총질까지 할 애들은 아닐 것 같았다. 우리 나라 실정을 알기 때문에 그런식의 무모한 앙갚음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기분은 나빴다. 차의 방향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은주 누나네 집으로 방향을 잡아 괜히 집 안이 시끄럽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하든 뒤쫓아오도록 유도하여 내가 유리한 위치에서 결판을 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성산대교를 건너 시내 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뒤차는 조금 바싹 따라붙는 것 같았다. 얼핏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람들 눈이 비교적 많은 H호텔이었다. 멀찍이 검은 승용차가 들어서는 걸 확인하고 커피수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에서 비교적 입구 쪽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애들을 불러들여 일본 애들의 동태를 관찰하고 싶었다. 상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차 한잔을 다 마시도록 아무도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호텔에서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안에 무선전화기라도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대책없이 호텔을 나가긴 싫었다. 일본 애들이 어떤 애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정정당당하게 판을 벌여만 준다면 두려울 게 없지만 보통 일본애들답게 치사한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깔끔하고 예쁜 여자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흰 모자를 보는 순간 일본 애들의 행동이 개시되었다는 어떤 두려움과 부딪쳐 본다는 흥분이 나를 감싸고 돌았다. 하얀 털모자의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창가를 쳐다보며 관심이 없는 척했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누구시죠?" 나는 주위를 매섭게 훑어보고 물었다. "어머 절 모르세요?" 낯이 그렇게 설지 않아 보였지만 기억엔 없었다. 잘생긴 여자여서 누구에게나 한번쯤 어디선가 스쳐 지났던 여자라고 착각할 만했다. 크지 않은 몸매와 밝은 웃음이 친근감을 주었다. "장총찬씨 아니세요?" "그럴 거요." "어머, 저 다혜 친구예요." 내가 한껏 긴장한 탓인지 그녀를 어디서 만났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나요?" "공항에서요." "그 전에는요?" "말만 많이 들었죠, 다혜한테서. 오늘도 멀찍이서 두 사람의 뜨거운 모습을 잔뜩 질투품고 쳐다봤죠." "이름이..... ." "슬아예요." "김슬아요?" "예." "이름은 들었습니다. 한반였다죠?" "다혜가 그 정도밖에 얘기 안 해요?" "아뇨. 어떤 병원엔가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것도 알죠." "다혜를 사랑하세요?" "그럴 겁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우린 보다시피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슬프신 거예요." "슬픈 척이라도 해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제가 술 사드릴까요?" "왜요?" "다혜 친구니까요." "술 사주라고 합디까?" "아뇨. 이건 순전히 제 생각예요. 슬픈 거죠." 김슬아란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다혜 입에서 어쩌다 학교 다닐 때 동료들 얘기가 나오면, 끼여 있을 정도였지 가깝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학생 때 빼어난 인물값을 하느라고 조금 시끄럽게 학생시절을 보냈다는것과 어떤 의사와 연애하다 헤어져 복수극을 꾸미고 있다는 정도의 얘기로 그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슬아가 내게 술을 사겠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일본 애들의 접근 대상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혜와 무언의 경쟁자로 내 파멸을 구경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이 있을지고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차에서 본 그 하얀 모자가 아니었다면 다혜의 친구의 호의로 받아줄 수도 있었다. "난 술이 조금 센데요." "나도 보통내기는 아니란 소릴 들어요." 나는 슬아라는 여자의 뱃심이 무엇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뒤에 보이지 않게 도사리고 있을 일본애들 생각을 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머리채를 잡아 앉히고 싶었다. 그러나 내 예민한 느낌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다. 거리낌 없고 밝은 표정 속엔 그런 흉계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슬아란 여자가 대학가에서 미모를 자랑하여 시끄럽게 했을 만한 여자라는 걸 나는 인정하고 싶었다. "좋은 데가 있어요." 그녀의 티 없는 표정을 읽으며 나는 웃었다. "나를 유혹하는 겁니까?" 그녀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유혹하면 안 돼요?" 슬아의 대답은 의외로 경쾌했다. "난 유혹에 약해요." "난 유혹하는 데 강해요." 슬아는 어느 말이나 거침이 없었다. 다혜 또래의 나이인데도 휠씬 세련된 차림새와 가꾼 흔적이 역력한 모습은 부유한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차라도 한잔 들고 일어납시다." 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누구 만나러 오신 것 아녜요?"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가 버린 모양입니다." "전 여기 자주 와요." 옵니까?" "어머머, 이상하셔라." 다혜 같으면 주먹이 날아올 말이었다. 슬아는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 채 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전화 잠깐 하고 올게요." "설마 도망가시는 건 아니겠죠?" 슬아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런 미인 두고 도망갈 사내는 아니올시다." "다혜한테 안 이를게요." "우린 헤어졌다고 했잖아요. 다혜 얘긴 이제 그만 합시다." "좋아요. 우리들 얘기만 해요." 나는 동전 두 닢을 꺼내들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주위를 재빨리 훑어 보았지만 내가 찾고 있는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다" 전화를 받은 녀석이 잠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웬일이유?" "벌써 자냐?" "어제 밤샘했어요." "임마 몸 좀 아껴라. 뭣 좀 부탁하자." "하죠,머." "지금 나 H호텔 커피수에 있다. 내 차 알지?" "알아요. 한판 신나는 것 있어요?" "아직 모른다. 내 뒤를 좀 따라 댕겨라. 눈치 채지 않게. 내 뒤에 날 미행하는 놈이 있으니까 세심하게 살펴보고 나하고 연락해야 한다." "어떤 놈이 형을 미행해요. 죽여달라고 빽 쓰는 놈도 다 있네." "급해. 바로 나와서 대기해라." "지금 나갈게요. 십 분내로 갈 수 있어요. 참 애들 데리고 나갈까요?" "시간 없다. 혼자 해. 눈치채면 안 돼." "어떤 애들예요?" "내가 알면 뭐러 널 불러내겠냐?" "일본 애들이 시작한 거 아녜요?"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미인계 테스트 중이다." "신나겠는데요." "빨리 서둘러." "지금 나가요." 녀석은 H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금세 나올 수 있는 녀석이었다. 눈썰미가 있어서 재주 부리는 게 많은 녀석이었다. 안심하고 무슨 일이든 맡겨도 실수하지 해서 재미를 톡톡히 본다고 했다. 학교라곤 국민학교도 다니다 말았는데 외국인들과 장사하며 거칠게 없을 만큼 능숙한 회화술도 가지고 있었다. 슬아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요즘 담배 못 피우는 젊은 여자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담배도 핍니까?" "남 하는 짓은 다 하고 싶어요." "욕심이 많군요." "맞아요. 총찬씨 같은 남자들이라면 다 갖고 싶어요." "날 어따 쓸데가 있겠습니까?" "아직 몰라서 그렇지 쓸데가 많을 걸요." "그럼 좀 써보슈." "연구중예요."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고 그녀는 즐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거침이 없었다. "가죠." "가봅시다." 나는 따라 일어서며 그녀의 세련된 옷매무새 사이로 재빠르게 몸을 읽었다. 속살도 예쁠 것 같았다. 그녀 주변에 사내가 떠나지 않았을 것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행동은 유혹이 분명했다. 그녀가 나를 유혹해야 할 이유는 달리 없었다. 계산된 유혹이라면 몸조심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미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김슬아란 여자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조직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위헙부담이 따르는 일이지만 부딪혀 보지않고 그들의 정체를 캐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밖은 찬 바람이 내리꽂히듯 불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가벼운 차림새가 불안해 보였다. "내 차가 있어요." "실업자신 걸로 아는데요?" "요샌 실업자가 자가용 몰고 다니는 시댑니다." "태워 주시겠어요?" "얼마든지." 자동차 열쇠를 찾아 문을 열며 재빠르게 훑어 보았다. 녀석이 멀찍이 보였다. 내가 움직이는 걸 철저하게 감시할 녀석이었다. "향내가 좋네요." "내 차가 아니라 누나 차 빌려 타는 겁니다." 다닌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다혜한테 얼핏 들었어요." "별 소릴 다 하고 다녔네." 이렇게 말하며 눈치를 살폈다. 다혜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닐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슬아와는 가깝게 지낸 친구가 아니었다. 슬아는 내게 관심이 많은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순수한 동기가 아닌 일본 애들에게서 나온 정보라면 바짝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시동을 걸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슬아는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포갰다. 쭉 뻗은 종아리와 얇은 치맛단 사이로 보이는 살결이 매끄러워 보였다. "세검정 쪽으로 가죠." 슬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은 데 있나요?" "분위기가 좋아요." "그런 델 자주 가십니까?" "더러요. 왜요? 젊은 여자가 그런 델 다니는게 이상해 보여요?" "그런 셈이죠." "늙은이 같은 소릴 하시네." "내가 늙었나 봅니다." "팔팔하신 걸 알아요. 가장 남성적이란 것도." "이거 왜 이래요."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여자일줄은 몰랐다. 세검정으로 꺾어들자 그녀는 높은 곳을 가리켰다. 십상이지요." 나는 그녀가 가리킨 쪽의 호화주택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어디 유혹당해 봅시다. 여자한테 유혹당하긴 첨이니까." "그래요. 나도 유혹하긴 첨예요." 우리는 언덕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조그마한 간판과 안내등 뿐이었지만 첫 느낌에도 고급 요정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떨립니다." "생각보다 싼 집예요. 술은 내가 살테니까 걱정 마세요." 슬아는 자꾸 내 비위를 건드리고 있었다. 얼굴 예쁘고 놀아나 본 여자들 특유의 자신만만한 말투 그대로였다. 대개 그런 여자들은 못난 사내 녀석들이 기를 승하게 사내에게 함부로 말해도 된다는 배짱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이보슈, 김슬아씨." "네?" "나 유혹하고 싶으면 말투부터 고치쇼. 내가 술배 곯아 얻어먹으러 다니는 놈인 줄 알아요? 뭐하는 여자인지 모르지만 남자들이 떠받드는 꼴만 본 모양인데 나한테 그러지 마슈. 차라리 내 돈 내고 소주 먹겠소." 나는 그냥 따라 들어가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 순간 슬아는 놀란 듯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능숙한 감정의 연기자였다. 그런 여자들의 특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여자를 무릎 꿇게 할 방법을 생각했지만 떤 방법이든 "미안해요. 괜히 그래 본 거예요. 총찬씨가 멋져서 괜히 다혜가 밉고 그래서요. 여잔 다 그렇잖아요." 얼버무려 넘어가는 순간의 기교도 보통은 아니었다. 나는 뒤를 흘낏 바라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대청을 지나 뒤채와 연결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내하는 종업원이 슬아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앉으세요." 겉보기엔 한옥인데 안의 치장이나 구조는 양식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그녀는 조명을 받아 퍽 선정적이었다. 갑자기 나는 그녀를 덮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술상이 들어왔다. 슬아는 내 잔을 가득 채우고 술병을 내밀었다. 나도 그녀의 빈 "우리들의 미래을 위해." 슬아가 먼저 잔을 내밀었다. "그럽시다." 나도 잔을 내밀어 부딪쳤다. 그녀의 눈빛은 매혹적이었다. 왠만한 사내라면 스스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 같았다. 하얀 모자를 벗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윤기가 곱게 흐르고 있었다. 다혜와 전혀 다른 자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슬아에겐 관심만 가지고 보면 색정이 흐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 전체에서 교태가 묻어날 것 같은 여자였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여자이거나 그렇게 될 수 밖에없는 환경에 적응해 나간 흔적일지도 모른다. 여자에겐 흔적이 남는 법이었다. 철저하게 숨기려는 여자에게선 흔적을 발견하기 여자에겐 과거를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날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녀의 속셈을 짚어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초반전은 탐색전 아녜요?" "유혹에도 탐색이 필요합니까?" "기본이죠." "난 성질이 급해요. 할 얘기도 있을법도 한데요?" "다혜도 그런 식으로 다뤘나요?" 슬아는 다혜를 물고 들어갔다. 그편이 그녀를 유리하게 할 거라고 믿는 거 같았다. "난 예쁜 여자에겐 더 급해요. 우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 여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사내들의 수만은 없었다. "워밍업 좀 하구요." 그녀는 내게 술만 자꾸 권했다. "술 많이 마시면 재미가 없으실 텐데." "술 마시는 걸로 난 남자를 평가하는 버릇이 있어요." 슬아가 교태스럽게 말했다. 올려진 치맛단을 쓸어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뒷일 걱정없이 만난 사이라면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에 빨려 들어갔을 것 같았다. 슬아는 확실히 남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여자였다. "난 술보다 우리 김슬아씨를 마시고 싶은데." 이왕 나서는 김에 아예 내 쪽에서 적극적인 방법으로 유도를 해 나갈 결심을 했다. "그래요, 아주 홀딱." 슬아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속이 터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배포가 있다면 한번 부딪쳐 볼만한 여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내가 만난 여자들 가운데 가장 다루기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어여쁜 여장를 만난 것 같았다. "서둘지 마세요. 서둘지 않아도 즐거운 밤일텐데요." 슬아는 내게 바짝 다가 앉았다. 한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촉촉한 입술로 내 볼을 가볍게 빨았다. "날 어쩌자는 거요." "훔치고 싶어요. 다혜한테서 훔쳐낼 기회가 쇼를 할 때 저 남자라면 채뜨려 볼 도박을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더 자신을 얻은 것은 그 사람 많은 공항 대합실에서 사랑한다고 악을 쓸 때였어요. 저런 남자라면 내 노예로 삼고 싶다는 생각였죠." "뭐라고요? 노예요?" "그래요. 노예요." "말 잘 듣게 생겼습니까?" "아뇨. 그러나 우린 진실을, 솔직한 걸 위장하진 말아요. 젊다는 핑계로 우린 사랑이니 뭐니 떠들지만 사실은 성이 다른 노예를 한 명씩 갖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난 그래요. 쓸 만한 남자를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사랑은 주는 거라고들 싱거운 소릴 하죠. 그러나 난 안 많이 받고 싶어요.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게 물론 세상사겠죠. 내가 사랑을 주지 않아도 상대방 남자는 나 없이 죽고 못 사는 그런 걸 원해요." 슬아의 거침없는 말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만 끄덕거렸다. 그녀의 말은 원색적이었지만 크게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요?" 나는 슬아란 여자가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간 거예요." "어쩔 셈입니까?" "아까 말했잖아요. 훔치겠다고." "훔쳐질 것 같애요?" "열 번쯤 찍을 수 있어요." "대단한 여자한테 걸렸네." 훔치려는 사내들이 많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슬아는 짖궂게 내 입술을 살짝 훔쳤다. 술내음과 그녀의 교태가 같이 묻어왔다. "알 만하죠. 그만한 생김새라면 나라도 빠지겠어요.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요. 우린 장난하려고 만난 게 아니고 서로 목적이 있을 것 같애요. 슬아씨는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거요. 까놓고 말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녀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는지 캐내고 싶었다. 슬아는 가볍게 내 등을 때렸다. "잔인하지 말아요. 여자의 진실을 그런 식으로 받는 게 아녜요." "믿어봅시다." 나갔다. 그녀는 남자의 심리를 웬만큼 꿰뚫어 보는 여자였다. "슬아씨, 내가 첨은 아니죠?" 단수 높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래요. 난 좋아하는 남자에게 옷 벗기는 수고를 끼치는 여자가 아녜요. 그까짓 게 뭔데요?" 나보다 한 술 더 뜨는 슬아였다. 웬만한 일로 당황해 본 적이 없던 나도 그녀의 당돌함에 기가 꺾였다. 들어온 술을 거의 비울 때쯤 나는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건넌방 문이 비죽 열리면서 종이쪽지가 한장 밖으로 나왔다. 나는 얼른 챙겨넣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없고 눈치 채지 않게 하려고 따라 들어왔으며 자동차 바퀴의 바람을 뺀 사내들이 건너 빌딩에서 야간 망원경으로 살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슬아를 태우고 달리는 동안에도 낯선 애들은 야간 망원경으로 계속 내 뒤를 추적했고 중간에 슬아가 그 패들과 메모를 주고 받은 것 같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나는 쪽지 뒤에 밖으로 나가 애들을 두어명 더 불러내어 멀찍이에서 감시해 달라고 썼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녀석이 엉거추춤하고 다가왔다. "수고했다. 뒤는 네가 책임져라." "형, 아예 잡아챌까요?" "아직 일러. 계속 뒤를 잘 봐라." "알았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들어왔다. 슬아는 흐트러진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꽤 호기있게 마시는 체했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젖가슴 끝이 여리게 보이는 슬아에게 다가갔다. "날 벗겨 줄래?" 음험한 눈길이었지만 밉지 않았다. 속살이 보이는 허벅지와 흐트러지는 그녀를 나는 끌어당겼다. 난 그저 사내이고 싶었다. 슬아의 몸은 따뜻했다. 나는 이 엉큼한 계집애를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나를 유혹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체 유혹에 말려 들어가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고 싶었다. 그편이 훨씬 내 신변이나 그들 조직과 부딪치는데 유리할 것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여자를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보다도 짙은 여자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녹여낼 수 있는 특수한 물질을 하나쯤 더 소유한 여자 같았다. 가슴은 팽팽했다. 겉옷 이외엔 아무것도 걸친게 없어서 내 손이 비집고 들어가기 쉬웠다. 적당하게 긴장한 가슴을 쥐고 그녀의 흐트러진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꿈틀거리는 요정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벗겨 줘." 슬아는 이글거리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짧은 호흡이 단절되었다가 이어지고 길고 흐느적거리는 비음이 다시 잘게 부서지곤 "일어서."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냥 벗겨." 코 먹은 소리였다. 단 두 꺼풀만 벗기면 되었다. 그녀가 걸친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가난뱅이라면 그렇게 간편한 옷차림으로 나돌아 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성능 좋은 승용차 한 대는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차림새였다. 취한 체 하는 것인지 내 혼을 빼앗기 위한 수작인지 구분할 수 없게 슬아는 무너져 버렸다. 나는 슬아를 천천히 벗겨 내려갔다. 눈부시게 흰 속살이었다. 군살이 없어서 빼어난 조각 한 점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앙증스런 헝겊쪼가리 한 개 뿐이었다. 슬아는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흐느끼듯 말했다. 마지막 헝겊쪼가리 한 개, 더 흐트러지거나 무너질 게 없는 여자, 더 열락을 아는 듯이 꿈틀거리는 여인의 육체, 한 꺼풀만 벗겨내면 내 잠자던 욕망을 한껏 불사를 수 있는 여인. 건드리기만 해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그녀를 건드렸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흐트러져도 육체에 자신이 있는 여자들의 마지막 자존심은 그런 것이었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슬아의 육체였지만 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본 애들의 꾐에 빠지지 않은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육체를 내던진 여자가 아니라면...... . "날 갖고 싶어." "그래." "우리들의 첫날 밤이 너무 시시하지 않아." "괜찮아." 나는 그녀를 자꾸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느라고 엉덩이를 올려 주지 않았다. "난 우리들의 첫날밤을 황홀하게 보내고 싶어." 슬아가 반쯤 허리를 들고 말했다. "황홀하게 해 줄게." "여기선 싫어. 신경 쓰여서." "괜찮아. 내게 맡겨." "아이 싫어. 우리 호텔로 가. 응!"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럴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녀를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호젓한 음식점에 있는 것이 주는 애들도 있고 일본 애들이 문제를 일으킬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급해?" "난 모든게 급한 놈야." "밤은 한없이 길잖아. 난 자기 거야. 이게 우리들 숙명일 거야. 나 착한 여자 될 거야." "넌 내 거지." "응" "벗어." "여기선 싫어. 불안하잖아?" "정말 싫어?"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호텔로 가자니까. 어서." 그러나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거부의 몸짓이었다. 여자가 몸짓으로 거부하면 결코 알고 있었다. 나는 슬아를 놓아 주었다. 그런 행동이 그녀의 계획이라면 내가 고집부려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팽팽하게 경직된 내 아랫도리가 아팠다. 그녀는 그걸 아는지 갑자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가벼운 마찰로 내 흥분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녀는 옷을 입었다. 당당하게 서서 부끄러움 없이 옷을 입었다. 머리를 매만지며 슬아는 생긋 웃었다. "가요." 한 꺼풀을 걸치면 여염집 처녀처럼 변하는 것도 여자들만의 헤택인지 모른다. 그녀는 단정하고 차가운 여자로 환원된 듯 했다. 호텔로 들어가 조금 아까처럼 초조하게 젖어드는 여자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유혹하기 위해선 대담할 수 있어도 육체를 나누어 갖기 위해선 수줍을 것 같기도 했다. 밖으로 나와 모른 체하고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앞자리에 올라 앉았다. 전진 기어를 넣고 차가 움직이자 바람 빠진 바퀴가 더 내려앉았다. "왜 이래?" 나는 혼잣소리처럼 말하고 시동을 껐다. 한쪽바퀴의 바람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펑크난 모양인데." 나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슬아가 차에서 내렸다. "어떻게 하지?" "택시 타요. 가까운데, 뭘." "차는 어쩌고." "내가 전화해 놓을게요. 내 차 운전사한테 고쳐놓으라고 하면 돼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슬아는 내게서 자동차 열쇠를 빼앗듯이 받았다. "걱정말아요. 내가 알아서 차질 없게 호텔 앞에 갖다 놓으라고 할 테니까." 슬아는 열쇠를 쥐고 다시 들어갔다 나왔다. "다 일러놨어요. 좀 좋은 차 타고 다니면 이런 일 없잖아요." "그래서 성질나면 좋은 차 한 대 사주쇼." "정말요?" "괜히 농담 따먹기 하는 사람인 줄 알아요?" "그까짓것 쉽죠. 대신...... ." 슬아는 덥석 팔짱을 끼고 말 끝을 흐렸다. "대신 자지러지게 사랑해주면 될 거 아뇨." "하는 것 봐서 결정하죠." 슬아는 생긴 것 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 대쯤 기증할 수 있거나 차를 사 주기 전에 감쪽같이 없애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손쉽게 대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님, 알려 드립니다. 육체로 공격하면 육체로 막을 것이며 정정당당하게 주먹을 휘두르면 주먹으로 대결할 겁니다. 그러나 비열하게 대들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 이번 일만은 잔소리해선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방관자여야 합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강자의 편이었고 잘 사는 나라 편이었으니까요. 쪽발이 애들이 휘젓고 다니며 온갖 추태를 다 부려도 하나님은 그들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편 드는 잘 사는 나라의 녀석들이 어찌 되는지 하나님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셔야 합니다. 정말 말똥말똥하게 뜨고 계십쇼.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