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사무엘하 제6강
말씀 : 사무엘하 13:1-14:33
요절 : 사무엘하 14:14
내쫓긴 자가 버린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어떤 사람이 이강인 이야기를 오늘 메시지 서론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안하려고 했는데, 선배 스텝목자가 전화하더니 대뜸 이강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강인, 이제 끝났어. 싸가지가 없어, 짤라야 해!”, 이런저런 기준을 들이밀어 옳고 그름을 따지다보면 짤라버려야 한다는 무서운 결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한다면, 잘라 버리는 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질타와 징계는 버리는 것이 아닌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강인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손흥민을 살리는 것이며 전체를 살린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강인의 부모라면, 이강인을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마인드로 문제해결에 나설 것입니다. 오늘 압살롬 이야기의 핵심이 그러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위기의 시작은 첫째 아들 암논의 어그러진 사랑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13장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음의 병이 생길 정도였습니다.(2) 고대세계는 근친결혼을 허용하거나 근친결혼만 허용하는 왕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암논의 누이 사랑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암논의 사랑 방식입니다. 그는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다말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정욕이었습니다. 아무튼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자, 요나답이라는 교활한 친구가 한가지 꾀를 제시합니다.(3) 꾀병을 핑계로 누이를 병문안 오게 만든 후에 일을 저질러 버리라는 것입니다.(4,5) 사람의 본성은 선한 충고에는 귀를 막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소리에는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암논은 즉각 실행합니다.(6,7) 누이 다말은 오빠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문병 왔는데, 암논은 그런 누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8-14)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인드로 그리했을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어찌 이리도 쉽게 변심하는 것입니까! 다말을 볼수록 자기 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말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기 때문일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화산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것은 특별히 문제 많은 인간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하는 것을 황금율처럼 여기는데,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렘17:9)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너무도 쉽게 사랑과 미움의 극단을 오갑니다. 잠언 4장23절은 말씀했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암논은 어긋난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지 않아 악을 행했는데, 이제는 어긋난 미움의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지 않아 더 큰 악을 행합니다.
다말이 울며 압살롬에게 말합니다. 16절입니다.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16) 그러나 암논은 오로지 자기 감정대로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누이를 노예 다루듯이 모욕적으로 대하고 쫓아버렸습니다.(17,18) 다말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요! 다말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채색옷을 찢고 크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19)
20절을 보십시오 압살롬은 누이 다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잠잠히 있으라고 말합니다.(20) 22절을 보십시오. 압살롬 자신 또한 암논의 잘잘못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아닌, 지극히 하찮은 일처럼 처리합니다. 오직 다윗만 심히 분노합니다. 하지만 아무 징계를 내리지 않습니다.(21) 율법에 따르면 암논의 죄는 사형에 해당합니다. 암논이 아들이어서 차마 죽일 수 없었다면 멀리 유배라도 보내야 했는데, 화만 내고 끝났습니다.
다윗의 행동이 압살롬과 암논에게 어떻게 보였을까요! 아마 압살롬에게는 ‘아버지의 불공정’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역시 첫째라면 무조건 오케이하는 양반, 다른 자식들은 죽어나가도 장자 하나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양반이야!” 암논은 ‘아버지의 약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밧세바 사건에 비하면 내가 한 짓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아버지만큼은 내게 뭐라고 말할 수 없지!” 둘 다 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받은 자, 자식 걱정에 발목 잡힌 자로서의 아버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은 분노하고 암논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년이 지난 후,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합니다. 압살롬은 양털 깎는 축제에 다윗과 왕자들을 초대합니다. 양털 깎는 행사는 가장 즐거운 축제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바쁜 국정으로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기다렸다는 듯이 왕을 대신하여 장자 암논을 참가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의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2년 동안 압살롬이 조금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암논에게 참석하라 명합니다. 그렇게 참석했다가 암살당합니다. 다윗은 다말에게 암논의 병문안을 가도록 명을 내려 비극에 일조했는데, 이번에는 암논에게 축제에 참석하도록 명을 내려 비극에 일조합니다. 그렇게 압살롬은 복수에 성공합니다.(24-36)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떠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그술 왕 달매에게로 망명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미 죽어버린 암논이 아니라 외국에서 도망자로 살고 있는 압살롬입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르자,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38)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이미 죽었다는 것은 ‘3년이 지났으므로’입니다. 이 정도 지났으니 압살롬을 사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다윗에게 찾아온 위로였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다윗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다윗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간절해졌습니다. 압살롬은 첫째에게만 관대한 아버지로만 알았는데, 실은 압살롬에게도 관대한 아버지였습니다. 방식이 다르고 적용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압살롬을 불러오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한가지였을 것입니다. 암논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아 비극을 초래했는데, 압살롬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으면 또다른 비극을 초래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4장 1절을 보십시오. 요압이 다윗의 번민을 눈치챘습니다.(1) 이에 요압은 한가지 꾀를 냅니다. 한 지혜로운 여인을 택하여 상복을 입히고 할 말을 주어 다윗 앞에 서게 합니다.(2-4) 여인이 말합니다.(5) ‘과부인 나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둘이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6) 그러자 온 족속이 일어나서 동생을 죽인 형을 죽이자고 달려들고 있습니다.(7) 법으로 따지면 첫째를 죽여야 하지만, 그러면 집안의 후사는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다윗 왕이여! 제발 도와주옵소서!’ 그러자 다윗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겠다고 합니다.(8) 여인은 왕과 왕위에 부담을 줄 수 없다고 했는데도(9), 다윗은 거듭하여 첫째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겠다며 거듭거듭 약속합니다.(10)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까지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다윗을 두고 한 것이었음을 드러냅니다.(12) 다윗이 압살롬을 내쫓은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지금까지의 왕의 말씀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암논도 잃어버리고 압살롬까지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쫓겨난 압살롬을 다시 받아달라는 간청입니다.(13)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암논의 죽음은 땅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압살롬을 아무리 징계한들, 죽은 암논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압살롬이 중요합니다. 압살롬도 인간이기에 언젠가 죽을 터인데 그리되면 땅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살아있는 지금, 더 늦기 전에 관계성을 회복하여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내쫓긴 자는 징계 받는 자를 의미하며, 버린 자는 심판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징계와 심판은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징계는 사랑으로, 심판은 미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회복이 목적이며, 심판은 형벌이 목적입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압살롬을 사면하지 않은 것은 평생 고통하며 살다가 지옥에 가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뼈아픈 시간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다시금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나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으며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 생명을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세상은 즐겁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만 있지 않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울화통이 터지는 사람들과 매일 같이 함께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힘들고 치열하여 전쟁터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왜 광야같은 시간도 보내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영혼을 깨우려는 하나님의 망치입니다. 세상에 휩쓸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도록 깨우시는 손길입니다. 고통은 교만한 영혼을 낮추고 자기발견을 하는데 가장 좋은 처방이 됩니다. 회개에 이르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줍니다. 이 땅을 전부로 알던 살던 사람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힘든 시간을 만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를 파괴하고 죽이는 손길이 전부가 아니라 사랑과 섭리가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군대 신병 시절 내무반 신고식이 생각납니다. 제가 배치받은 부대에서는 혹독한 신병 신고식이 있었습니다. 신병이 내무반으로 올라오면 날이면, 병장부터 말단 이등병까지 모든 선임들이 내무반에 양측으로 도열해 있습니다. 신병은 내무반 선임들의 서열을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해야 하는데, 당연히 중간에 버벅거립니다. 그러면 사정없이 주먹과 발이 날라옵니다. 그렇게 20분 정도 정신없이 맞고 구르고 있는데, 신고식 주도하는 상병이 말합니다. “너 같은 얼빠진 놈은 우리 내무반에 필요 없어! 나가!”, 제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신고식 상병이 급히 날라 와서 문을 차서 못나가게 막고 계속 굴렸습니다. 그렇게 40분 정도 신고식이 끝난 후에 세면장으로 갔는데, 신고식 상병이 조용히 다가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라고 해서 진짜 나가냐? 나이 먹었다면서 그리 눈치 없어?” 아마 그런 시나리오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신병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신고식 상병은 ‘나가라고!’ 외치고, 그러면 저는 “제발 받아주십시오”하며 버티고..., 그러다가 병장이 ‘그만 해라! 열심히 하겠다는데 받아주자!’는 그림...,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20년쯤 지나서 비슷한 사건을 겪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한참 말을 듣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매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들을 향해 나가라고 했습니다. “나가, 너 같은 놈은 집에 있을 필요 없어!”, 그런데 진짜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상된 시나리오대로라면 ‘제발 나가라고만 하지 마, 이제부터 말 잘 들을께!’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미 뱉은 말이 있어서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압박했습니다. “너, 아빠가 사준 옷 다 벗어놓고 가!” 그러자 아들은 진짜 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 몸으로 나갔습니다. 아들이 문을 쿵! 닫고 나가는데..., 심장이 쿵! 하니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징계하는 자의 마음과 징계받는 자의 마음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징계를 받아들이기보다 버림받은 상처로 달려가기에 익숙합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미움이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의 매를 들었는데, 가정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쫓는 것과 받아주는 것, 어느 것이 맞는가!”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암논은 내쫓지 않았는데 버린 자가 되었고, 압살롬은 내쫓았는데 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있는 시간동안,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을 담았다면 내쫓는 것에도 용감해야 하고, 사랑을 담았다면 끌어안는 것에도 용감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 주권에 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끌어안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모든 일의 배후에 요압이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럴지라도 존심을 내세우거나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요압에게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요압이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22-24)
압살롬은 아버지의 사면에 감동했을까요? “형제를 죽인 끔찍한 죄인을 다시 영접해주시다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아버지의 은혜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을까요? 25,26절을 보면, 성경은 난데없이 압살롬의 외모를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습니다.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경민 목자의 10대 시절의 별명이 ‘조인성’이었는데, 그 호칭을 100% 인정할지라도 압살롬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미의 기준은 머리털 숫자였는데, 압살롬은 보통 사람들보다 4배나 많았습니다. 사면 받은 감격이 기록되어야 할 자리에 압살롬의 외모가 기록된 것은 압살롬의 내적 상태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용서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들의 찬사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압살롬만한 사람이 없지, 압살롬이니까 당연히 사면받는거지!”, 그런 소리들로 마음을 채우기 시작하면, 아버지의 용서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은혜가 아닌 사람들의 요구에 밀린 타협으로 해석이 되고 자기 능력의 탁월함이 이끌어낸 공로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생각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모습으로 잘 드러납니다. 28절을 보면,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 다윗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에 요압을 불러 따지고 싶은데, 요압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렇게 사건을 만들어 강제로 요압을 호출합니다. 압살롬의 회복을 위해 제일 앞장 서 주었는데도 고마움을 모릅니다. 자기발견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발견을 하지 못하면, 사람을 탓하고 모든 분노를 타인에게 돌립니다. 압살롬의 분노는 결국 아버지를 향했고 반역을 꿈꾸게 됩니다. 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돌아오지 못한 자,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죄가 많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에 징계하시고 연단하십니다. 다윗이 광야 훈련을 감당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회복의 길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