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우왕 3년 1377년 10월 왜구들이 왜선 40척을 이끌고 동래현을 침입하여 주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그 무렵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왜구를 무찔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옛부터 이곳은 군사요충지로서 감만포라는 지명도 왜구를 무찌른 곳이라 하여 조선시대 초기부터 불리어졌다.
감만동은 부산항의 입구에 위치하여 감만마을 뒤로 홍곡산, 동담산, 태성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너머 해안에는 돌산, 솔개해수욕장, 모래산이 있었으며 마을 앞에는 감만포구가 있어 옛날부터 어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인조임금때 1636년부터 1652년까지 감만포에 경상좌수영이 설치되었다가 지금의 수영으로 이전해 감으로 인해 감만동에 민간인이 이주해 와 살기 시작하였다.
대표적 감만동토박이로는 밀성 박씨, 금령 김씨, 김해 김씨 등이며 이후 창녕 성씨, 남원 양씨, 인동 장씨 등이 함께 살았다.
밀성 박씨 이판공파 감만문중 입향조의 호는 동은공으로 본향이 청도 흑석이며 1650년대에 이주해 왔다. 동은공에 관련된 문건은 호구단자에 이름이 기록된 것이 유일한 자료이다. 동은공의 조부는 임진왜란시 곽재우의병장과 동맹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2등 공훈을 수훈하였다.
동은공의 옛집은 최영장군사당에서 100m아래쪽에 있었으며 동은공을 비롯한 선대묘소는 국군항만운영단안에 있는 동담산에 있었으나 1930년대 일제의 부산항축항공사시 바다를 메우기 위해 산을 깎을 때 파묘 화장하였다.
동은공 감만문중에 조선시대 후기 1800년대 세분의 열녀가 나왔는데 파평 윤씨, 인동 장씨, 영산 신씨 등이다.
당시 파평 윤씨의 열행에 대한 정문 건립 및 표창을 청원하는 상서문과 인동 장씨에 대한 정문 건립 상소에 대한 예조의 답서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파평 윤씨의 열행에 대해 표창을 청원하는 상서문을 간략히 소개하면 '남촌면 감만리 박두완의 처 파평 윤씨는 1848년 무신년에 남편이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하니 남편을 구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손가락 살을 베어 수혈하여 먹게하여 남편을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또 병이 재발하니 허벅다리 살을 베어 수혈하여 먹게하여 재차 소생시켰으며 무오년에 남편의 병이 또 재발함에 따라 다리 살을 베어 수혈하여 먹게하여 완치시킴은 열행의 정성입니다. 남편의 병을 세 번이나 소생시켰으니 윤씨의 정성과 열행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또께서는 잘 참작하시어 정려를 표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다.
금령 김씨 충의공파 감만문중 입향조는 금령 김씨 17세손인 김 용 할아버지로 1650년에 부산 사상에서 출생하여 1670년대에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추정된다.
묘소는 홍곡산 부경대용당캠퍼스 내에 있으며 후손들은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이 집안 출신으로 금령 김씨 20세손인 김중태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영조임금때 절충장군(사단장급)을 지냈다. 일제강점기때 1919년 김원술, 김상갑 선생은 신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사립 학교 설립을 제안하여 주민들이 배영의숙을 세웠으며 1938년까지 20년간 6년제 초등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때 감만동 뿐만 아니라 문현동, 우암동, 용호동, 용당동에서도 배영의숙에 배우러 다닌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김성희 선생은 제3공화국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병화 선생은 최영장군 사당인 무민사 발전과 관리를 위해 무민사보존회를 결성하여 매년 향제를 지내고 주민들의 호국정신을 앙양시켰다.
김해 김씨 삼현파 감만문중 입향조는 김해 김씨 15세손인 김말남 할아버지로 1690년에 출생하였으며 1720년대 이후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벼슬은 처음 정8품 통사랑을 받고 정3품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강서구 송정동에 있다. 김말남 할아버지의 부친의 호는 강운공으로 의금부도사로 벼슬을 시작하여 정3품 통정대부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처음으로 청도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조선 시대의 호적제도는 각 호구의 가장이 3년마다 인적 변동 사항을 개편한 호구단자 2부를 직접 작성하여 동래부에 제출하였다. 동래부에서는 그 내용을 검토한 후 이상이 없으면 날인하여 민, 관, 각각 1부씩 보관하였다.
동래부에서는 호구단자를 기초로 호적대장을 작성하였고, 호구단자는 지금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며, 그것으로 군역과 부역 그리고 징세의 기초로 삼았다.
1774년부터 시작해서 이 제도가 폐지된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약 120년간에 걸쳐 작성되어 졌다. 당시의 통 조직은 5호 1통으로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였는데 1800년대 초기의 호적 문서에 7통까지의 기록이 보이므로 감만마을에 최소 35가구 이상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만동의 행정구역은 조선시대때 동래부 관할로 남촌면, 남하면, 석남면에 속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용주면, 부산부 서면, 부산진출장소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연출장소, 부산진구 대연출장소로 1975년 남구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1979년에 감만1,2동으로 분동되었다.
감만동은 1919년 일제강점기때 부산항축항사업계획에 의해 감만포 매립공사가 지금의 감만버스종점 부근부터 시작하여 해방 전까지 3차에 걸쳐 이루어져 지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해방 후에는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감만동을 둘러싼 해안을 매립하여 정유공장단지, 연합철강, 8부두, 감만부두, 신감만부두, 감만시민부두 등의 산업시설을 유치하였으며 최근에는 영도와 연결하는 부산항대교가 건립되어 항만, 군사. 산업,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1951년 감만마을
(글쓴이 이 규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