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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아버지의 집을 찾으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말씀의 감동이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반석인가? 모래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지으려고 자제를 구입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평지에 집터를 구입하였고요.
다른 한 사람은 산 위에 집터를 구입하였습니다.
두 사람다 집터를 장만하였습니다.
누가 집터를 잘 장만 한 사람 같습니까?
산에다 집터를 마련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서 땅 속에 돌이 나오기 까지 파서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평지에 집터를 마련한 사람은 평지 작업만을 하였습니다.
평지에 집을 짓는 사람은 쉬엄쉬엄하여도 일이 잘 진척됩니다.
그런데 산에다가 집터를 마련한 사람은 너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걸립니다.
자제를 운반하는 것도 힘이 들고요, 반석이 나오기 까지 땅을 판 것도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평지에 집을 짓는 사람이 볼 때 그 사람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집하나 짓는데 뭐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짓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평지에 집을 짓는 사람이 집을 완공하여 살림 도구를 들어 놓을 때까지 산에 집을 짓는 사람은 아직 한 참이나 더 걸려야 될 것 같았습니다.
한참 오랜 시간이 흘러 집을 완공합니다.
요즘은 전원주택 붐이 있어서 산에 있는 집들이 넘 좋아 보이지만 저희들 어렸을 때는 산에 집이 있는 것이 참 부자연 스러웠습니다.
평지가 좋다는 말이죠.
근데 그해 여름은 유난히 다른 여름 같았습니다.
거의 매일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 졌습니다.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그런 말씀을 한번 드렸죠? 제가 왜관 있을 때입니다.
안식일 아침마다 모셔 오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 집 가는 길옆에 한 분이 집터를 닦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에 그 길을 갈 때는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벽이 올려지는 것처럼 보였고요.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 아룸다운 집이 서 있는 것을 보왔습니다.
논 한 가운데 땅을 판 것이 아니라 땅을 돋구어서 집을 지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그해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 주에는 심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안식일이 되어서 그 할머니를 모시러 그 길을 가는데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집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 집이 올라가고 있을 때 아마도 제가 말 한마디 한 것 같습니다.
저 집 위험하다고요 땅을 돋우어서 집을 짓는다면 가에 돌로 축을 쌓고요 그리고 돋운 흙들이 자리를 잡고 다져지기 까지 여러 달이 걸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집이 올려지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성경에 두 사람이 지은 집에 대한 예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두 집들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눅 6:48-49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디에 접목을 하셨습니까?
우리의 믿음과 결부시키셨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신앙도 모래 위에 서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시련의 폭우가 쏟아질 때 우리의 믿음도 함께 무너진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믿음의 집을 반석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모래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반석위에.
지금 우리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 보시지 마시고요.
모래 위에 세워 진 집처럼 내 코가 석자나 빠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모래 위가 아닌 반석 위에 세워서 시련의 폭우가 쏟아져도, 박해의 태풍이 몰아쳐도 결코 무너짐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로 서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반석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것일까요?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은 무엇이고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는 것이 다 모래 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반석을 어떻게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고전 10: 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은 누구시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시라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믿음이 어디에 서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반석 되시는 예수님 위에 서 있어야 된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믿음이 예수님 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 위에 서 있지 않은 믿음은 다 뭐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모래
이제 여러분들의 자신을 한번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반석되시는 예수님 위에 나의 믿음은 세워져 있는가? 아니면 모래 위인가?
어디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럼 예수님 위에 우리의 믿음이 세워진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첫 번째는 생각이 예수님께 고정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예수님께 고정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요.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 시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씀일까요?
우리의 생각들이 아! 나의 믿음이 예수님 위에 세워 져 있구나 라는 그런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겠죠? 누구도 그런 생각을 줄 수가 있습니까?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마음의 생각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 3: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를 줄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을 하는 하와가 죄를 범하였습니까?
아니죠? 어디까지나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죄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고요, 예수님의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에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예수님 위에 서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좀 많이 생각하면 내가 예수님 위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죠.
생각은 그다음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일에 결정적인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 되기에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참으로 중요 합니다.
생각 자체가 예수님 위에 서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할찌라도 생각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그 생각에 따른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누구를 많이 생각하라고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는 도리의 사도는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주님의 행적을 가리키는 표현이고요.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주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의 모습과 지금 하늘에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의 생각은 우리의 믿음의 삶과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일요일 휴업령과 같은 환난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하여도 많이 생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많이 생각하라고요?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늘에 계시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많이 생각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많이 생각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자주 인용하는 증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시소 83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라고 하죠? 명상과 생각은 좀 비슷한 용어입니까?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죠?
생각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사전에는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명상은 좀 다르죠?
명상을 사전은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적이 있는 생각을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뜻 없이 일어나는 혹은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들이 생각이라면
명상은 목적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까지도 조절할 수 있어야 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생각을 많이 하는 것으로 조절하자고요? 예수님의 생각
우리가 함께 읽은 시대의 소망은 그런 의도적인 명상의 유익에 대하여 기록된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특히 그분의 마지막 장면과 주님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 어떻게 될 것이라 합니까?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을 많이 하자고요? 예수님의 생애를 많이 생각하라 건성으로 말고요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감으로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사람들로 들어나게 되길 축복합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생각하면서 두 번째 생각하고 싶은 말씀은 행동의 변화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바뀐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인위찐이라는 처녀가 갓 스무잘이 되던 1985년 고향을 떠나 마우오쑤 사막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이 사막은 중국의 4대 사막중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날라 오는 황사들이 그사막들에서 날라 온다고 합니다.
사방이 모래 뿐이고 길도 없는 사막에서 며칠을 통곡으로 보낸 인위찐은 이곳에 사는 남편에게 연민을 느끼고 여기 꽃을 심으면 안될까요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풀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실패를 반복하면서 나무를 심기 시작한 15년이 지난 1999년에 신문 기자들에 의하여 인위찐이 만든 오아시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사막에 풀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가꾼다는 거 쉬운일일까요?
나무를 심어 놓으면 돌개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다 덮어 버린답니다.
40년 가까이 이렇게 사막을 숲으로 만든 땅이 여이도의 1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인위찐이 사막을 오아시스로 바꾼 역사가 무엇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생각에서 행동으로 옮긴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이 생각만 하고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모래 위에 지은 사람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처럼 생각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반석 위에 지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좀 더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각 그 자체로만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행동이 따르는 순종이어야 한다, 아멘입니까?
성경에는 순종이 뭐 보다 낫다라고 합디까?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순종이 뭐 보다 낫다고 합니까? 제사 드리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까? 무슨 제사를 언급한 말씀입니까? 사울의 제사를 말씀하고 있죠?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좀 심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상관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날 때 하나도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아말렉을 칠 때 그들에게 속해 있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을 가진 것은 다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시를 사울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군사를 이끌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전쟁을 쉽게 끝내고 돌아 오는 길에 사무엘을 만납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울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사무엘이 이런 말을 하죠.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무슨 소리가 들려 왔을까요?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포로들의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이거 무엇인가 라는 사무엘의 말에 사울이 무슨 대답을 합니까? 그 다음 말씀이죠?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다 진멸하라고 하였던데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 입니까 라는 사무엘의 물음에 사울이 무슨 대답을 합니까?
가장 좋은 것으로 무엇하기 위하여 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라고 하죠. 예배를 빙자한 불순종입니까?
가장 가증스러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의 구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동산 안의 모든 실과를 먹으라고 하면 그거 먹으면 되고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면 먹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십일금을 내라 하면 내면 되는 것이고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부족할 것 같아서 십일금은 좀 보류를 하겠습니다. 이거는 누구의 대답입니까? 사울의 대답입니다.
십일금 때문에 굶어 죽었다 이거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의 책임이다.
저는 십일금 내다가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저는 순교자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도록 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십일금을 잘 내는 사람들은 압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형제가 헌금에 대하여 배우고 난 다음 드리기를 시작하는 헌금에 대하여 지난번 한번 말씀 드렸죠?
지난번에는 5000을 가지고 와서 헌금을 내어 달라고 합니다.
병을 팔아 5000원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금 500원을 내라고 하니까 다 내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장형제를 잘 몰라 저 평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장형제 5000이라면 저에게 5만원 보다 더 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헌금에 대한 정리가 잘 안되시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 장형제에게 좀 배우시길 바랍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키라면 지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 지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예비군 훈련 문제 한번 말씀을 드렸죠?
제가 초신자 때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그리고 얼마 후에 예비군 훈련이 안식일에 나왔는데 안식일을 지켜야지 라는 마음으로 그 안식일에 교회를 갔습니다.
근데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하는 말 아니 훈련 가지 않고 어떻게 교회 왔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라 했을까요? 아니 안식일에 교회 와야지 왜 훈련을 갑니까 했습니다. 훈련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지 말라고만 하시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내 삶에서 훔쳐 가는 도둑이 있다는 말씀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안식일 도둑 맞지 않도록 잘 지켜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마 하신 귀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되길 축복합니다.
화요일 금요일도 말씀 드리면 부담이 될까요?
화요일 금요일 교회 나오라 하시면 천국 포기 하시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 100%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순종도 좋지만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우리 성도님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안식일 학생 50명 될 때 까지만 힘이 들어도 화요일 예배 금요일 예배 참석해 주시길 부탁드려 봅니다.
저는 예배와 교회 부흥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도 부흥된다. 그러나 예배가 살아나지 않으면 교회도 살아나지 못하고요 여러분들의 신앙도 살아 나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순종과 관련된 증언의 말씀 하나 올립니다.
부조 60 “불사 불멸은 순종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약속되었으며 범죄 한다면, 그들은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바로 그날 그들은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불사 불멸은 무슨 조건으로 약속되었다 합니까? 순종의 조건으로
그 순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범죄라고 합니다.
성경은 불순종의 모본을 보여준 사람에 대하여서도 말씀하고 있고요.
순종의 모본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무엇을 볼 것을 즐거워 하였다 했습니까?
나의 때라고 하신 나의 때가 무슨 말씀입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요 2: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서도 예수께서 내 때가 라고 하셨죠?
여기서 때에 대하여 증언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소 147 “자기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을 마리아에게 하실 때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말하지 않은 생각, 즉 마리아가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품고 있던 기대에 대하여 답변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서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의 때가 무슨 때라고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현실을 중요시 여기죠,
현실을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모래위에 집을 지으려 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그런 내용으로요.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평안의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지금 좀 힘들어도 반석위에 집을 지으려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내 생각대로 신앙하지 맙시다.
좀 불편하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극렬한 시험중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바라볼 수 있는 눈들을 가지시길 호소합니다.
말씀에 온전한 순종이 나에게 결국은 기쁨이 될 것이고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반석위에 집을 지어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견고한 집들로 들어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생각을 쫓아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을 오늘 이시간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좀 힘들어도 반석위에 집을 지어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6:46-49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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