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에 맞는 멋있는 성도(2219.2023.11.26)
대상19:1-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품격에 맞는 멋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멋있는 성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사람은 멋있으면 누구나가 다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품격에 맞는 멋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품격에 맞는 멋있는 성도’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멋이라는 말하고, 맛이라는 말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요. 우리 사람은 아주 멋이 있어야 됩니다. 그럼 그 멋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한국어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옷이나 얼굴 따위의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맴시, 사람이나 사물에서 엿보이는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 하는 짓이나 모양새가 격에 맞아 훌륭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뒤집어 얘기하면 격에 맞는 말, 격에 맞는 행동, 격에 맞는 모양새 이럴 때가 참 멋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품격에 맞는 신앙생활을 멋있게 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하는데도 품위가 있고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안에 들어오면 사랑이 충만해서 어찌할줄 모르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이런 품격있는 멋있는 말, 행동, 모양새, 세련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격이 모난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간에 이간질과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요일에 에베소서를 공부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하여 말과 행동으로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때에 품격있는 멋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치 못하고 아직도 교회 섬기는데 동참하지 않고, 입이 열렸다면 나오는대로 툭던지는 말을 한다면 그 툭 던지는 말에 누가맞아 죽을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수준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고급스런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하고, 할렐루야하고, 사랑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성도가 멋있는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수준있고 품격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라고 부르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예를들면, 길가다가 쌍욕을 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말투가 아주 거친 사람들도 볼수가 있습니다. 보통 욕이 아닌 쌍소리하는 욕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쌍소리 빼놓고는 대화가 안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제가 쌍욕으로 설교를 하고 대화를 해도 쌍욕을 더해가면서 한다고 생각을 해보시면 다들 혀를 찰 것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저렇게 쌍 소리를 할 수 있어 할 것입니다. 그건 격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격에 맞는 말을 하고, 격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 격에 맞는 모양새를 갖출 때 참 우리 목사님 멋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런 격을 갖고 신앙생활 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그 격에 맞는 생각도 해야되고, 그 격에 맞는 말도 해야되고, 그 다음에는 행동도 해야 되고, 모양새도 갖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멋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말과 행동에 그리고 은혜받은 것에 대해서 보답할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은혜를 갚을 줄 아는 성도가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보은의 멋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 보겠는데, 품격있는 멋있는 성도가 뭐냐하면 은혜를 갚는 성도가 참 멋있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일년열두달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은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열두달 매일 은혜받는 것은 아니라도 은혜받은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은혜받은 것에 대해서 보답하는 것이 멋있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 갚는 다는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보은입니다. 무슨 멋이 있느냐 하면 보은의 멋, 그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다윗왕이 나이 많아 죽어갈 때에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이어주면서 유언을 몇 마디 남깁니다. 유언이라고 하는 거는 아주 심각한 얘기 아닙니까?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을 유언으로 남기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 몇 마디 중에 한 마디가 저 길르앗, 즉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길르앗 땅에 있는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은혜를 굉장히 많이 입었으니까 그 아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라는 겁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니까 설명을 해야 되지 않아요? 다윗이 유언에 남길 정도로 바르실래에게 입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삼하19장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당하지 않아요? 즉,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쿠데타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 해 와서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렸습니다. 사실은 거의 끝난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너무 급한지라 신도 못신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도망갔습니다. 그때 당시 왕이 신도 못 신고 도망간다는 것이 보통 창피를 당하는게 아닙니다. 그 때 당시 종들은 신을 못 신어요. 주인들은 꼭 신을 신습니다. 그런데 신을 못 신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리고도 살아 남지를 못하겠으니까 요단강 건너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땅에는 바르실래라고 하는 큰 부자가 살았어요. 그런데 쿠데타 군이 예루살렘 수도를 점령했고, 왕은 지금 쫓겨왔는데 누가 감히 그 왕을 돕겠다고 나서겠습니까? 도와줬다가 나중에 쿠데타가 성공하는 날에는 자기의 운명이라는건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바르실래는 쫓겨온 왕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털어 가지고 뒤를 봐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이 패전병들을 전부 모아 가지고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그 바르실래라고 하는 노인에게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요청했습니다. 내가 은혜를 갚겠다는 겁니다. 한사코 바르실래는 안간답니다. 즉 바르실래는 고향 땅을 지키고 고향에서 죽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도 다윗이 간청을 하니까 그렇다면 내 아들 김함을 좀 데리고가 주십시오. 다윗이 그 아들 김함을 데리고 와서 다윗 평생에 극진히 은혜를 베풉니다. 신세진것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것을 아들에게 그렇게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그 아들 솔로몬에게도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라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자기 평생에 은혜를 갚았으면 이제는 됐다 싶은데, 아들에게까지 대를 이어서 은혜를 갚으라고 했으니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보은의 멋. 이 멋을 갖춘 성도가 되자는 것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이 바른 선택인지 분별이 되지 않을 때,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암몬의 왕인 나하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다윗은 나하스의 장례에 조문사절단을 보내 예를 표하게 했습니다. 2절에 보면, 암몬의 왕 나하스가 다윗에게 전에 호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 호의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추측하기에는 사울왕에게 쫓기던 다윗을 도와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윗은 감사함으로 좋은 의도와 좋은 마음으로 문상을 위한 조문사절단을 보냈던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의와 감사의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본문으로 1-2절에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하눈의 아비 나하스가 전에 내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 아들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에게 하니라 다윗의 신복 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조상하매’
이제 읽어드린 본문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이 잡듯이 뒤져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유대 땅에 있어 가지고는 발붙이고 숨어 있을 곳이 없어요. 그래서 암몬자손의 땅. 암몬 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암몬왕 나아스가 박대를 하려면 박대를 할 수 있는데도 다윗 일행을 맞이해 가지고는 얼마나 극진히 도와주는지. 다윗이 그 때 받은 은혜와 신세진 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게 아쉬운 것이 없을 때 크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는 정말 아쉬워 견딜 수 없을 때 조그만 도움이 두고두고 기억이 되는 겁니다.
평생잊지 못할 도움을 받아보시면 훗날 그것을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도움을 받았어요. 죽은들 잊습니까? 그러다가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됐어요. 그러고 있는데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은인인데,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해 왕이 되었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자기의 신복들로 조문 사절단을 만들어 조상을 하게 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무얼들고 갔다는 말은 기록되지 않아 모르지만 빈손 들고 갔겠어요?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오래두고 기억하고 있다가 신세 진 것과 은혜 입은 것을 꼭 갚는 다윗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멋집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열번 잘해주다가 한 번 섭섭하게 해 주면, 열번 잘 해준 거 다 잊어 먹고 섭섭한거 그거만 들고 돌아다니며 얘기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한번 섭섭하게 한건 잊어버리시고, 열번 잘한것만 기억하면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될 터인데 우리네 사람들은 백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한 것만 붙잡고 늘어지니 참 답답 할 뿐입니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좋은 것만 알아주는 다윗처럼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성도가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한번은 숙종 왕 때. 숙종이 개성에 행차를 했어요. 그런데 개성 성문 밖에는 효자 하나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평생에 왕을 한 번 뵙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겁니다. 언제나 아무나 왕을 볼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늙었어요. 이제 병도 들었어요. 마침 숙종 대왕께서 개성에 행차를 한다는 겁니다. 아들은 아주 효자인지라 이때 다 싶어서 불편한 어머니,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업고서 왕이 지나 가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길가에서는 제대로 못 봅니다. 지나갈 때까지 머리 숙이고 있어야지. 고개 들었다가는 죽습니다. 그러니까 맞은편 언덕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 언덕에서는 어떤가요? 실컷 볼 수 있잖아요? 나중에 그 사정을 알게 된 숙종 대왕은 그 효자에게 큰상을 내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은혜를 힘입어 태어났고 자랐고 자기가 자신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기억하고 효도하는 이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에게 대한 계명을 주실때 첫째 부모에게 잘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부모의 은혜를 생각지 못하고 보답하지 못하는 그 주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뭔지 아십니까? 교회 와서 거룩 거룩하고 혼자 봉사한다고 주름 잡아도 집에 가서 자기 부모 알기를 뭐처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을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믿음은 예배당에서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믿음으로 보면 됩니다.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은혜를 보답하는 보은의 멋, 다윗이 얼마나 멋진 성도입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이런 멋진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화평케 하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화평의 멋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장가 안간 총각 형제가 있습니다. 물론 부모도 있고, 그런데 그 집안에 그렇게 형제우애가 좋아요. 동생이라면 형이 그냥 끔 뻑 죽고 동생은 형이라면 목숨 내놓고 그렇게 의좋게 사는데, 형이 장가들었어요. 그 집안에 여자 하나가 들어오더니 한달, 석달, 6개월, 1년 지나고 났더니 형제가 개 싸우듯 싸워요. 누구 때문 이예요? 사람하나 잘 들어 와야됩니다. 그렇게 화평하게 살던 형제인데 여자 하나들어 온 후에 왜 그렇게 싸움 판이 벌어집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정도 불행하고 여자 자신도 불행합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형제가 그렇게 싸우는 집안에 형이 장가를 들었는데 너무 좋은 여자를 맞이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남편한테 시동생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시동생한테는 형의 말을 잘하여 화해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둘도 없는 형제가 됐어요. 밤낮 개 싸움하던 집안에 화목하고 천국과 같은 집안이 됐습니다. 화평을 도모 하는 것과 불행을 도모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가는 곳마다 화평케 하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3-4절‘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를 보낸 것이 왕이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이 본문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그 왕의 아들 하눈과 화평을 도모하며 살고싶어 했으면 화평케 한 다윗 아닙니까?
화평케 하는 사람은 아주 멋있는 사람입니다. 암몬 자손의 왕 나아스가 죽고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을듣고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냈더니, 그 아들 하 눈이 왕이 되고 조문사절을 영접하며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너무너무 감격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밑에 있는 방백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람을 잘 둬야되요. 사람 잘둬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방백들이 왕이여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왜? 다윗이 저렇게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진짜인줄 아십니까?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조문사절을 보내는 척해 놓고는 이 땅을 샅샅이 조사하고 탐지하고 알아두었다가 빈틈이 어디 있다 하는걸 알아낸 다음에 반드시 쳐들어와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그래서 하눈이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럴듯 했습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하눈’에게는 좋은 의도와 좋은 마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눈에게는 다윗의 의도를 곡해하게 만드는 ‘거짓 속삭임’을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속삭임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 한 마디로 ‘저들은 우리 나라를 염탐하러 온 겁니다’ 마치 하와의 옆에서 거짓 속삭임을 주는 뱀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뱀의 말은 오늘도 우리들의 귀를 더럽히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는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사람이 거짓 속삭임에 사로잡히면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이런 악한 마귀 사단이가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자그마한 ‘씨앗’을 심어놓으면 그걸 아주 빠르게 자라게 만드는게 인간의 죄된 습관이요, 속성입니다.
암몬의 왕 하눈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에 오른 다윗왕국과 화친의 관계를 맺고 평화롭게 번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눈에게는 안타깝게도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때의 결정적인 선택이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듭니다. 또한 이때, 하눈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눈의 선택, 그리고 나라의 멸망,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국제 정세와 외교적인 국가 간의 관계에서 하눈의 신하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고, 왕은 그 조언을 듣고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하눈이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는데, 그때가, 하눈에게도, 암몬이라는 나라에도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이 보낸 조문사절단을 받지 않더라도 외교적인 결례를 하지 않고 다윗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지혜롭게 돌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눈이 어떻게 했습니까?
조문사절단의 수염을 잘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수염은 자유인의 표시오.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수염을 잘랐습니다. 옷을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잘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옷을 입지 않고 긴 옷을 입어 하체를 가렸기 때문에 그 의복의 볼기 중간까지 잘랐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주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눈이 신하들의 조언을 들을수도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선택이겠죠? 하지만 최소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인격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위에서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인격적으로 존중함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없으면 예의라도 있고 예의가 없으면 의리라도 있어야 하고, 의리가 없으면 상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도 평화를 만들어내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평화를 깨트리는 자도 있습니다. 교회에도 12월이 되면 당회를 하게 되고 직분자를 세우고 합니다. 직분자를 잘 세워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받침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치 못하고 평화를 깨트리인다면 본인도 손해고 교회도 손해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우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은 직분에 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직분 받고 잘못하다가는 평화를 깨트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하눈 사이에 친구가 됩니까? 원수가 됩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겁니다. 다윗은 그렇게 화평케 하고자 했고 암몬 자손의 왕도 그렇게 알았는데 그 밑에 있는 방백들이 왜 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를 이렇게 불화 즉, 원수를 맺게 합니까? 두왕 사이를 그렇게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요? 나중에는 암몬 사람들이 젊은 피를 많이 흘리고 큰 손해를 보는 것 아니었습니까?
왜 이렇게 됐습니까? 화평케 하자는데 왜 그렇게 시비를 걸고 조문사들에게 하지 못할 짓을 하여 원수를 맺어놓고 맙니까? 그러기에 화평케 하는 것은 그렇게 멋진 일입니다. 그 반대로 불화케 하고 원수를 맺는 것은 그와 반대로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지라도 결단코 원수맺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친구를 원수로 만들어 놓는 이런 불행스러운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화평케 하는 화평의 멋이 있는 성도였습니다.
3.나 보다 너를 더 생각 하는 배려의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배려의 멋이 있어야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배려란 ‘이래저래 마음 써주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도 마음 써주고 저렇게도 마음 써주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신경을 써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배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흔히 쓰는 말로 말하면 늘 너를 생각하는 그 멋. 나만 나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그 멋. 그게 있어야 되지 않아요? 나만 나라고 생각하는 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하는데 이게 어떻게 멋있는 성도겠어요. 그렇다면 성도로써는 멋이 없어요. 나보다 오히려 너를 생각하는 이 배려의 멋이 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배려는 조금도 없으면서 나만 주장한다면 멋있는 성도가 아닙니다. 남에게 베풀줄 알아야 합니다. 배려할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 5절을‘혹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의 당한일을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이 말은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단발령이 내려서 상투 자른 적이 있죠? 뭐를 알수 있나요? 상투 자르는걸 본적이 없고, 잘린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얘기 들어서 알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상투 잘리니까 고맙다고 그랬어요? 집에 돌아가서 자살한 사람도 있고요, 집에가 통곡을 한사람도 있습니다. 상투 자른걸 그렇게 부끄러 운일로 여겼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까닭은 다윗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염을 깎이면 그 만큼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깎았느냐 하면 절반을 깎았다고 했습니다. 수염이 긴데 그 절반을 깎은거 아니에요. 양쪽을 갈라놓고 한쪽은 깍고 한쪽은 그대로 둔 겁니다. 염소처럼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창피한 꼴을 당한 겁니까?
또 옛날 다윗왕 때 바지를 중둥볼 기까지 잘랐다는 말은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잘랐다는 말입니다. 뒤로 돌아서면 엉덩이가 보이지만 앞으로 돌아서면 뭐가 보일까요? 상상을 해봐요. 그런 창피를 당한 겁니다. 암몬 자손의 땅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이르는 데가 여리고성 아닙니까?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벌벌 기다시피 합니다.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이 지경을 당했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수치와 모욕을 당한 조문사절단의 수치가 회복되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 돌아오게 합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과 암몬의 경계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여리고에 머물게 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띄어 수치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당한 모욕과 마음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입니다.
조문사절단은 왕의 이름으로, 왕의 권위로 왕을 대신해서 가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사절단에게 수치를 주고 모욕을 준 것은 다윗왕에게 수치를 주고 모욕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암몬왕 하눈에 대한 응징을 생각하기 보다 상처받은 신하들의 마음과 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왕입니까? 그 사람이 망신 당할 때, 난감한 일을 당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배려를 베푼 다윗이에요. 나 보다 너를 더 생각 하는 성도. 그 배려의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라면 여리고에 머무는 조문사절단의 회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회복프로그램을 진행하게 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된 사람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주고 다시 일어나 나라를 위해 충성할 일꾼들을 잘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윗의 작은 배려와 조치로 수치를 당하고 상처를 입은 조문사절단은 크게 회복되어 다윗을 위해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위로하고 다만 회복하고, 한명 한명 수고하는 주의 종들을 잘 섬기면 그렇게 회복된 주의 종들이 평생을 달릴 힘을 얻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한명 한명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잘 섬기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그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갈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십시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여러분 우리 상주감리교회를 좀더 성숙한 교회로 만들어봅시다. 우리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점더 높은 신앙의 수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성도가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화평케 하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나 보다 너를 더 생각 하는 배려의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상주감리교회와 성도들이 멋있는 교회와 멋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