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산에 꽃피다>(정우서적, 2013) 512~543쪽에 실렸습니다.
영산에 꽃 피운 일응 어장
-儀文과 思想을 중심으로-
이성운(동국대 외래교수)
엶
1. 소리, 열고 부르다
2. 춤, 짓고 펴다
3. 화청, 고루 청하다
닫음
엶
어장(魚丈) 일응 스님은 1920년 5월에 태어나 10대 초반에 불문에 든 이래 범패와 작법(作法)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며 후학을 지도하다 2003년 5월에 열반에 드셨다. 칠십여 성상을 영산의 부처님을 시봉하고 떠나셨다. 스님은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재의 작법 무 보유자로 지정받으셨으니 작법무의 탁월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평생은 멋들어지게 부처님을 시봉하며 무미의 영산에 한 떨기 꽃을 피어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산재는 작법절차, 영산대회 등으로 불려 왔는데, 명칭과 작법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 글은 영산재 작법 보유자로 지정되고 후학을 지도하며 한 평생을 영산에 꽃 피운 일응 어장 스님의 수행과 교화와 삶을, 영산재 각 작법의 절차와 의문에 배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일응 스님이 나고 출가하여 불문에 든 20세기 초중반은 일본불교의 침입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불교 차원에서는 ‘승려도성출입금지’의 해제를 건의하거나 대처를 의무화하며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흡수하려는 책동이 가해졌으며, 총독부 차원에서는 1911년 6월에 발포된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 그리고 사법은 일제가 그들의 식민지 통치 목적에 부응하도록 한국불교를 장악하였다.(<조계종사>, 61쪽) 일본불교의 침략에 맞서 한국불교에서는 불교중흥을 위한 노력으로 임제종과 종단을 건설하거나 선각자들에 의해 다양한 불교개혁론이 제창되었다. 특히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승려의 교육 진흥을 강조하며, 참선법을 고치며, 염불당을 폐지하여 불교의 본질 회복을 주장하였다. 포교를 중시하고 사원의 위치를 도회지로 옮기며 석가상을 제외한 모든 소상(塑像)과 탱화(幀畵)를 제거하며 각종 의식을 간소화함으로써 불교의 종교적 본질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걸식의 중지와 승려의 취처 허용 등을 주장하였다. 또 백용성 스님은 기존 ‘불교’에 박힌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대각교’를 창시하며, <대각교의식>을 간행하여 우리말로 불교의례를 봉행하였다.
하지만 한용운과 백용성이라는 두 걸출한 스님들에 의해 주도된 의례개혁은 민족운동의 한 면도 가지고 있었겠지만 순수한 그 의도대로 정착되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재공의식의 간략화와 폐지를 주창한 한용운 스님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쉽게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영산재에 이어 수륙재의식까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고 있는 현실이다. 만일 한용운 스님의 주장처럼, 비불교적이라고 하여 영산재나 수륙재 등 전통의례를 버렸다면 한국불교문화는 무엇이 남았을지 자못 궁금하다. 의식의 한글화와 우리말 번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각교의식>의 조석 통상 약례 의식은 보례(普禮)게송과 진언을 염송한 후 대각교의 석가여래와 시방에 변재하시는 불법승 삼보에 예경하는 조석통상 약례 의식은, 당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통과 현대를 조화한 뛰어난 예경의식이었지만 후대에 전승되지 못했다.
이렇듯이 선각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던 재래의 불교의례와 의식은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문화재로 각광받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로 거듭 나고 있다. 물론 이 이면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상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전하고 보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고에서 다룰 어장 일응 스님이나 스님이 평생 꽃 피운 영산의 무대는, 외부의 일제나 내부의 개혁자들에 의해 그 역할이나 의미가 부정당하고 폄하돼 왔다. (현재도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산재 등은 작법 스님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수행의 도량이며, 순수하고 때 없는 불자들에게는 좀 더 부처님께 친근하게 다가가 참회하고 복을 비는 막힘없는 신행의 불사라는 것은, 한 번이라도 법답게 의식에 동참해보면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서 이 글에서는, 어장 일응 스님의 범패와 작법을 알아보기 위해 동영상 자료와 스님께 의례를 익힌 제자 또는 교분이 있던 스님을 면담한 자료[‘(증언 스님)’로 처리]와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일차 논문을 완성한 윤소희 ․ 고경희 선생의 논문과 의례문을 바탕으로 하여, 어장 일응 스님의 범패와 춤 미학이 드러나는 영산작법 의문(儀文)의 의미(意味)를 중심으로, 일응 스님이 영산에 어떻게 꽃 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1. 소리, 열고 부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간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세상을 만난다. 그러므로 눈이 마주치며 몸짓으로 말하고 소리를 내어 상대와 소통한다. 현대의 큰스님이셨던 성철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취임사에서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다”고 하였다. 우리를 듣게 하는 오묘한 소리, 이 소리는 곧 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불교경전의 첫 구절, 여시아문(如是我聞), 나에게 이와 같은 소리들이 들렸다고 하고 있다. 이때의 소리는 무엇일까. 물론 부처님의 설법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는 소리를 하늘소리(梵音)이라고 한다. 이 범음을 범패라고 한다. 의식에서는 이 범패소리로 불법을 전한다. 무엇을 전하고자 할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불교의 대의(大義)이다. 불교의 대의를 평음으로도 하지만 특유의 가락으로, 하늘의 소리로 울려 전하는 것이 범패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부처라고 일러주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부르는 그런 소리이며, 마치 스스로 지은 업보로 인해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 먼 중생의 눈을 열어 주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업장을 녹여 주는 소리이므로 여느 소리와 다르다. 다만 그 소리에 계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 소리는 무의미한 어려운 소리에 불과하다. 이 범패 소리는 인연 중생에게는 불사(不死)의 감로수이다. 범패라는 감로수를 마시면 이제 바로 불문에 들어 불사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불문(佛門)은 생사윤회를 끊는 집안이므로 불사의 집이다. 윤회 화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처님의 하늘 소리인 범패 소리를 듣고 불문에 드는 인연 사례를 우리는 수고롭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스님의 상좌 인묵 스님은 어린 나이에 스님의 범패 소리를 듣고 자라났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불문에 발을 들여 놓았다.(인묵 스님 면담기) 인묵 스님의 사례는, 동요나 세상 노래 소리가 좋을 법한 나이에 어떻게 범패 소리가 좋으냐는 세속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상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불교에서는 꿈 얘기를 많이 한다. 꿈꾸며 꿈꾸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잘 믿지 못한다.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이나 모래를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 봄을 모르듯이. 이렇게 범패의 소리는 일체 대중의 불성을 일깨운다. 그것을 평범한 소리로 들리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업장이 우리의 불성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 뿐일 것이다. 이럴진대 인묵 스님의 출가 동기나 사연은 그의 선친이자 스승인 일응 스님의 출가 동기로 읽어 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제자 인묵 스님은 당시의 시대상황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추측하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 내몰린 출가였다면 이후 일응 스님의 수행과 행화를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시대 상황에 등 떠밀려 출가의 길을 걸었다면 그토록 열정적으로 범패와 작법을 익히고 작법을 전수하며 사비를 털어 후진을 교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보시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증언은 애교 섞인 추측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는 일응 스님의 소리와 작법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문전 초대 정도는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착각도 자유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적어도 범음성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심오한 세계가 있다는 것쯤은 짐작했다면 일응 스님이 일궜던 범음과 작법의 미를 탐색하는 기초적인 요건을 발부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범패가 그냥 단순한 인간의 심성을 일깨우는 예술성에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말이다. 자 이제 스님이 부르는 소리를 따라 영산의 멋진 무대를 밟아보도록 하자.
영산은 법화경전을 설하였다고 알려진 영취산을 의미한다. 또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불보살이 머물러 계시고 있다는 상징하기도 한다. 영산의 부처님을 만나려면 먼저 우리는 영산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혹자들은 영산은 이미 깨끗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현학적인 심미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리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늘 희로애락애오욕의 마음이나 탐진치 삼독이나 재색식명수의 다섯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영산을 깨끗이 단장(丹粧)하기 위해 행하는 의식의 하나로 복청게송(伏請偈頌)이 있다. 엎드려 청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청하는가. “복청대중 동음창화 신묘장구대다라니: 대중들이여, 신비하고 오묘한 대다라니를 동음으로 함께 불러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소리는 홑소리로 독창이다. 복청게송은 첫 소절을 질러서 내면서 굴곡이 있으니까 초심자가 배우기가 좋으므로 이 곡을 익히고 점차 다른 곡들도 배우고 범성이 익으면 짓소리를 하게 된다. 소리의 첫 관문이라고 하는 이 소리를 시작으로 한 십 년 범패를 익혀야 소리를 익히게 된다.(인묵 스님) 상주권공에서의 복청게송 이전에 향의 공덕을 찬탄하는 할향(喝香)과 향을 피워 올리는 연향게송을 하며 불법승 삼보에 세 번 머리 숙여 귀명의 절을 한다. 합장하여 연꽃을 피우고 그 연꽃의 향기로 부처님이 이 법회하시기를 아뢴다. 그리고 깨끗한 물에 천수다라니를 가지(加持)하여 그 감로의 물을 법당과 도량의 안과 밖에 뿌리게 된다. 깨끗한 물에 천수다라니로 가지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을 청해 다라니를 설해주실 것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염송해 줄 것을 청하는 의식이 복청게송이다. 영산 법회를 장엄하는 데 일체 대중이 함께해 달라는 복청게송은, 불교의례가 재장에 함께하는 일체 대중의 신행의례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일응 스님은 10대 초반에 불문에 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배우러 서울의 봉원사와 개운사에 입문한다. 전라북도 전주 완산동에서 태어나, 완주군 구이면 대원사 만암 스님 문하로 출가한 스님이 당시 고향 전주의 완제 범패로 국한하지 않는 모습은, 소리에 대한 이후의 열정을 설명해 주는 데 크게 장애되지 않는다. 일응 스님은 대원사 강 보담 스님께 범패와 작법을 사사 받는 한편 20대 초반에 사교를 수료하고 참선에 정진하며, 전북 완주 위봉사에서 대선법계를 품수하고, 정주 내장사 정 매곡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는다. 그리고 위봉사에서 대교를 마친다. 25세 경우에는 전주 승암사에서 이 법준 스님으로부터 1년간 범패의식을 사사받고 30세에 전주 동완산동 칠성사의 주지로 취임한다. 십대 초반 불문에 든 이래 일응 스님의 배움의 역사는 교학과 범패와 작법의 학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리에 끌리지 않고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소리를 배우는 일응 스님의 이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윤소희의 논문에는 근세 전북 어장 계보와 완제 범패 계보, 봉서사 범패 계보 등이 소개돼 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특정 스승을 고집하지 않은 일응 스님은, 오로지 일응 소리만 전승받았다고 하는, 그의 친자 상좌 인묵 스님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응 스님의 교육관과 소리와 작법에 대한 열린 자세는 독특하다. 작법의 수제자라고 많은 후학들이 입을 모으는, 인오 스님의 발굴은 스님의 안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스님은 젊은 시절의 인오 스님을 한 눈에 알아보고 “수좌는 범패를 좀 배워보면 좋겠다. 태가 참 고우니 작법을 해도 좋겠다”며 소리와 작법을 배울 것을 권하였다. 처음에는 생각이 없던 인오 스님이 멀지 않은 훗날 일응 스님을 찾게 된 것은 일응 스님의 탁월한 안목을 가졌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복청게송이 대중에게 천수주를 함께 염송하라고 청하는 소리라면 스님이 제자를 청하고 청해 부르는 곳을 찾아 떠나는 모습은 범패의 불림을 따르는 수연(隨緣)의 방편이었다. 스님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예는 비구니스님 절인 전주의 정혜사라고 할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범패를 후학들에게 전수한 시기는 스님의 50대였던 70년대 이후이다. 김제의 원각사, 전주의 동고사와 보문사, 익산의 태봉사, 광주의 율곡사 등지에서 청함을 받고 범패와 작법의 전수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인연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1987년 문화재 작법 보유자의 의무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호남 지역을 두루 다니며 원하는 곳이 있으면 전수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수연중생인 것이다. 청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모습은 법성게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하는 수행자의 모습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산의식을 운수의식, <운수상단>이라고 하는데,(고하 스님) <상주권공>과 달리 법당 안에 모셔진 부처님이 아니라 삼신 불 등 법회에 모실 영산의 여러 스님과 신중을 청한다. 운수단이 차려지는 곳은 영산이 되는데, 이 의식은 갖가지 소리와 춤으로 장엄한다. <상주권공>이 할향과 연향의 등게로 삼정례로 이어지는 데 반해서 운수단의 가사는 정교하게 전개된다. 향의 공덕을 찬탄하고 향을 피우는 게송을 한다. 그리고 등의 공덕을 찬탄하고 등을 밝히는 게송을 한다. 이어 총게송을 하고 삼귀의를 하는데, 상주권공의 세 줄 삼정례보다 자세한 삼귀의의 공덕을 찬탄하며 삼귀의를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의 업보가 소멸됨을 설하며 삼귀의례를 한다. 그리고 도량을 깨끗이 하는 엄정(嚴淨)의 천수주를 청해 감로수로 가지한 후 물을 뿌리고 엄정(도량찬) 게송을 한 후 정삼업진언과 정법계진언 개단진언 건단진언을 한 후 상위(上位)의 삼보를 청하는 요령을 흔드는 진령게송과 진언을 한 후 유치를 진행한다. 이 의식은 <상주권공>의 설법과 독경 중심의 의식과 달리 세밀하게 진행된다.(<운수단가사>) 그러므로 전문적인 의식을 습득한 스님들에 의해 봉행된다.
전문적인 어산 스님들에 의해 봉행되는 운수의식에 어장 스님들은 각지의 재(齋)의식에 부름을 받게 된다. 운수의식을 봉행할 수 있는 어장은 여러 인연처의 부름을 따라 범음으로 작법으로 제도중생의 거룩한 인연을 다하는 것이다. 중생의 아픔을 찾아가는 것이 불보살님의 길이고 수행자의 길이다. 하지만 때로는 예를 모르면서 완고하게 자신의 것을 주장하며 과감히 재장을 떠나버렸다. 한편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제자들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으면 “그려 이렇게 하는 거여”하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당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셨으며,(석정 스님) 제자를 (어른) 모시듯이 대우하면 가르쳤다.(인오 스님) 그렇지만 배움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잘못할 때는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해서 저승사자보다 무서웠다.(혜령 스님) 일체 중생의 고통에 기꺼이 몸을 바쳐 구원하는 자비의 관세음보살이 있는 한편 극악무도하여 금강저를 지닌 분노의 아촉여래가 함께 있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파주(把住)와 방생(放生)을 말한다. 신심으로 정성 다해 수습하는 제자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웠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들을 내치는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재는 정성이 제일이다’고 하신 말씀처럼 정성 없이 범패와 작법을 배울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지는 것을 싫어하신 성품은 범패와 작법을 여법하게 익혀 부처님을 좀 더 잘 공양하고 영가를 좀 더 잘 극락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염원에서였다.
범패는 하늘의 소리이다. 하늘의 소리를 인간의 마음으로 낼 때 부처님께 공양도 하지 못하고 천동 천녀의 춤을 분별하는 인간의 작은 마음에서 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른 새벽을 알리는 산사의 범종 소리, 그 울림의 파장은 모나지도 가볍지도 않지만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한 마디 말이 없이 어떤 말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어떤 시인의 시구가, 어떤 명 연사의 연설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새벽 범종소리, 재장의 범패소리, 이 두 하늘 소리는 각고의 수행 끝에 얻는 불과(佛果)이다. 불과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리는 범패가 아니다. 일응 어장 스님은 몸소 그 소리를 익혔고, 그 소리를 가르쳤고, 그 소리로 부처님께 공양 올렸으며, 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했다. 범패의 인성이 소리는 인도하는 소리이다. 일체 중생을 인도하는 소리이다. 이 길을 인도하는 이가 인로왕보살이다. 누가 길을 인도하는가. 바로 범패스님의 인성이 소리가 불보살과 일체중생을 인도한다.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을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했다. 어떤 설법보다 강렬한 입과 몸의 언어인 범패와 어산춤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을 만나게 하고, 다 함께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는 거룩한 설법이다.
2. 춤, 짓고 펴다
향의 공덕을 찬탄하는 할향이, 의식의 초입에 나온다고 해서 초할향이라고 한다. 초할향으로 시작된 영산의식은 이제 복청게송의 천수바라를 시작으로 하여 소리의 음성공양에서 이제 몸짓의 육신공양으로 확대된다. 범패가 소리로 영산을 수놓았다면 작법은 한 떨기 연꽃으로 피어난다. 소리가 일체 성현과 육도의 범부를 부르는 소리였다면 작법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몸으로 드러내는 최상의 장엄이다. 작법이라는 말은 법식을 짓는다는 의미인데 조선 초기에는 수륙재와 대비되는 영산대회를 지칭하였지만.(이조실록) 그 후대에는 <작법귀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체의 의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는 ‘작법무(作法舞)’라고 춤을 짓는 법식에 한정되어 쓰이고 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라는 성철 스님의 취임 게송처럼 소리로 듣는 것 이상으로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은 전하는 의미가 강력해진다.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은 재장에서 추는 춤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그는 그로부터 수차례 재가 열리는 곳을 찾아가며 그가 받은 인상을 시로 남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문장> 11호) 인연 없는 중생이 범패 소리를 듣지 못하듯이 작법이 지어내는 깊고 미묘한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눈 뜬 장님이 된다.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지 않고는 작법의 고수가 드러내는 참다운 공양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이라고 문수보살 진성게송은 노래한다. 작법은 다라니와 게송이 함께하며 지어내는 진정한 공양이고 공양을 위한 마음의 표출이다. 일응 스님 제자 스님들은 일응 스님이 작법무를, 서울 등지에서 ‘나비춤’이라고 명칭하는 것을 부정하고, 제자들은 한결같이 영산작법무는 어산춤이라고 하며,(석정 스님) 나비춤이라 불리는 자체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일응 스님과 그 제자들은 나비춤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표출하였을까. 어산춤은 천무(天舞)로서 부처님께서 영산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천동 천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춤의 모양이 고기 노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어산춤이라고 한다.(혜안 스님) 영산작법무를 나비춤이 아닌 어산춤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정통의 춤을 춘다는 일응 스님의 무한한 자긍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영산작법에는 다게, 도량게, 삼귀의, 오공양, 모란찬, 운심게, 지옥게, 왕생게작법의 7가지 작법무가 있고, 천수바라, 관욕바라, 기성가지(사다라니), 화의재(化衣財), 명(鳴)바라, 민바라 혹은 막바라의 6바라춤이 있다.(혜정 스님) 작법무와 바라무들은 영산에 부처님을 모시고 공양을 올리고 하위의 여러 영가를 청해 목욕하여 업장을 씻고 부처님의 법을 들려주고 음식을 베풀어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영산작법에서 행해지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영산작법의 순서를 간략히 살펴보고 영산작법의 춤이 드러내는 의미를 맛보도록 하자. “그런데 3일 영산이라고 해서 완전히 3일이 아니라 시간으로 치면 꼬박 48시간 정도 됩니다. 그 절차를 보면 먼저 첫날 오후 세 네 시쯤에 시련을 하고 괘불이운, 운수상단하고, 대령, 관욕을 하면 저녁이 됩니다. 저녁을 먹고 좀 쉰 다음에 밤 11시 무렵에 도량석, 쇳송을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 예불을 미리 드립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조전점안, 신중작법, 영산인 상단권공 중간 정도까지 하고, 식당작법과 다음날 예불까지 합니다. 마지막 날은 영산 중간부터 시작해서 운수상단, 중단, 신중퇴공, 관음시식, 전시식, 소대봉송, 회향설법 이렇게 마치지요. 이렇게 하면 재 지내기에 따라서 이른 오전에 마치고 점심 먹고 헤어지기도 하고, 좀 길면 점심때까지 하기도 합니다.”(고하 스님) 1970년대를 전후로 일응 스님과 외부 재를 많이 봉행한 고하 스님의 증언은 한국불교의 재공의 변천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3일 영산으로 재를 봉행하지 못할 때는 당일 재는 10시에 시작해서 오후에 끝나는데 재자의 형편에 따라 가감이 되지만 보통 3,4시에 끝난다. 일응 스님이 제자들과 함께한 보통 재는 대체로, 대령 관욕 신중작법 상주권공 화청 중단퇴공 관음시식 봉송 등의 차례로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영산작법에 동원되는 춤은 바라무 착복무 타주무 법고무로 나누며, 이 가운데 착복무는 부처님께 공양을 권하는 권공의식에서 거행되며, 향화게 운심게 삼귀의 모란찬 오공양 귀명례 도량게 다게 기경작법 삼남태 사방요신 정례 지옥게 자귀의불의 14가지가 있다. 육수가사를 수하고 고깔을 쓴 스님들에 거행된다.(<영산재>, 32~48쪽) 일응 스님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인 운심게작법은 착복무인데, 운심게작법이 행해지는 권공의식의 차례를 간략히 살펴보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일응 스님 작법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운심게작법의 일차적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산작법(재)은 영산의 부처님께 공양을 권하는 의식이며, 작법무 어산춤은 이때 추는 춤이다. 1) 괘불을 이운한다. 2) 영산작법을 거행한다. 도량을 깨끗하게 하고자 대중으로 하여금 천수다라니를 함께 염송하도록 청하는 복청게송까지 앞에서 다뤘다. 천수다라니를 삼 편 염송하며 법당과 주변을 삼 회 요잡하며 물을 뿌려 도량을 결계함과 동시에 엄정(嚴淨)을 한 다음 사방찬 도량찬(엄정게송)를 한 후 대회소를 읽고, 영산 6거불을 하고 삼보소를 읽는다. 대불청을 하여 3예청을 하거나 단청불(單請佛, 간단히 삼보를 청하는 의식)을 하고 자리를 드리는 헌좌게송을 다게를 하고 향화게송과 보공양진언 보회향진언 퇴공진언으로 진행된다.(<불교의식>, 352~369쪽) 이후는 설법과 독경이 진행되며 창혼(唱魂)을 하여 하단의 영가들을 위한 시식이 베풀어진다. 위에서 제시한 영산작법 의식은 대략적인 진행으로 보여 줄 뿐 세밀하게 진행할 때는 가감이 될 수 있다. 위에 제시한 의식에는 운심게작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영산작법에서 향화게송은 운심게송의 역할을 수행한다. 위 의식에서 제시된 다게 향화게송 보공양진언의 차례는 현재 삼보통청의 공양게 가지변공 (사다라니) 운심게송과 진언 (7정례공양) 보공양진언의 그것과 다름없는 구조이다.
운심공양게송과 진언이 등장하는 국내의문으로는 <진언권공>(1496)이고, 향화게송이 등장하는 의문은 <작법절차>(1496)인데 향화게송에는 진언이 따로 없다. 다른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두 의문을 읽어보자. 먼저 운심게송이다. “원차향공변법계(願此香供遍法界) 보공무진삼보해(普供無盡三寶海) 자비수공증선근(慈悲受供增善根) 영법주세보불은(令法住世報佛恩): 향 공양이 법계에 두루 하여 다함없는 삼보께 올리오니,/ 자비로써 공양 받으시고 선근이 늘어나/ 불법 펼쳐 부처님 은혜 갚게 하여지이다.” 향공양이 법계에 널리 퍼져 이 향공양으로써 다함없는 삼보님께 널리 공양하오니 자비로써 공양을 받아주셔서 (저의) 선근이 늘어나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머물게 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향공양이 무엇인지 표면의 의미로만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궁색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향화게송을 보자. 향화게송은 운심게송이 네 배에 이르는 장문의 발원문이다. “향과 꽃의 향기가 법계에 두루 하여 광명의 구름대와 여러 하늘의 음악과 보배 향 등 불가사의한 미묘한 법의 티끌이 되어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부처님이 나오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진리가 나와 장애 없이 휘감아 돌아 서로 장엄하며 일체 부처님 나라 시방법계 삼보 전에 두루 이르러 그곳에 다 나의 몸이 있어 공양을 닦으며 그 하나하나 모두가 법계에 두루 하여 저 모든 것들에 잡됨이 없고 걸림이 없이 미래가 다할 때까지 불사를 짓고, 일체 중생에게 널리 끼쳐져 모두 보리심을 내어 함께 무생법인에 들어 불지를 증득하기를 원합니다. 요잡을 하고 공양을 마치고 삼보님께 귀명의 예를 올린다: 願此香花遍法界 以爲微妙光明臺 諸天音樂天寶香 諸天餚膳天寶衣 不可思議妙法塵 一一塵出一切佛 一一塵出一切法 旋轉無礙互莊嚴 遍至一切佛土中 十方法界三寶前 皆有我身修供養 一一皆悉遍法界 彼彼無雜無障碍 盡未來際作佛事 普熏一切諸衆生 蒙熏皆發菩提心 同入無生證佛智 (繞匝) 供養已歸命禮三寶”(<불교의식>, 369쪽) 향화게송 이전의 절하며 청하는 의식에는 각각 호궤하고 향화를 지물처럼 장엄하고(嚴持香花)라고 하여 꽃을 쥐고 법답게 시방법계의 삼보에게 공양하라고 하고 있다. 이 향화게송은 <법화삼매참의>의 「약법화삼매보조의병서」(<대정장> 46)에 등장하는 관상하는 게송이다. 위 ‘참의’와 ‘보조의’에 따르면 이 행법은 삼업(三業)공양으로 손에 향로를 잡고 꽃을 뿌리며 내용과 같이 관상한다. 향화게송에 의거하면 위 운심게송의 향공은 향으로 올리는 공양과 꽃을 뿌리는 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작법절차>(1496)나 <영산대회작법절차>(1634)의 향화송은 이 향화게송과 조금 다른 모습인데 각집게송의 형태이다. 한 몸에서 나온 수많은 몸 각각의 몸에서 다시 백 천의 손이 나와 그 손들이 각각 향화등다과(香花燈茶果)를 잡고 시방의 제불타와 제달마와 제승가에게 공양하기를 원한다. 결국 이 향화게송은 운상(運想)하며 말하는 의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항상 향화게송이나 운심게송을 하는 것일까. <소실지갈라공양법>하권에는 운심공양이라는 것은, 오묘한 도향의 구름, 요향, 등명, 당번 산개와 종종의 고악, 가무, 기창, 진주, 라망, 걸려 있는 여러 보배 요령, 꽃으로 장식한 머리, 흰 먼지 털이, 작은 경탁, 긍갈니망, 여의보수, 구름 같은 의복, 최상의 미묘한 향과 맛의 하늘 주방의 음식, 보주로 장엄된 종종의 누각, 머리 관과 영락으로 장엄된 하늘 몸 등이 구름같이 허공계와 인천에까지 두루 채워져 있듯이, 육지나 물에 서식하는 모든 꽃은 누구의 것이 아니다. 수행자는 마음을 운전하여 허공에 가득 채워진 것을 지극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공양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고 묘한 것이 된다는 마음으로 생각한다. 법대로 이 진언을 외우고 수인 법을 지으면 위에서 상상한 공양 같은 것이 다 성취되는 것과 같다고 하고 있다.(<瑜伽集要焰口施食儀>, p.475c.)
위 향화게송으로 미뤄 보면 운심게송의 ‘향공(香供)’은 향과 꽃으로 행하는 관상공양임이 분명하다. 마지(摩旨)나 육법공양을 올리는 것은 재공양(齋供養)의 사(事)공양이라면 운심공양은 이(理)공양이며 법(理法)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산재 작법절차에는 향화게송이 나타나고 <진언권공>에는 운심공양이 나타날까. 앞에서 본 영산작법과 상주권공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야외에 운수(雲水) 설단을 하였을 때는 향화게송으로, 법당에서 상주권공으로 재를 올릴 때는 운심게송을 봉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두 재의 설행 비용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서울에서는 향화게송을 많이 하고 전라도에서는 운심게송을 많이 한다는 증언이 무관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법안 스님)
결국 향화게송이든 운심게송이든 마음을 움직여 공양하는 법이다.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법화삼매참의>의 소제목처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움직여 관상 공양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구의 삼업으로 공양하는 이 게송에 작법무가 등장하고 있다. 착복 바라 등의 영산작법에서 행해지는 무용이 많지만 운심공양하는 곳에 몸과 말과 뜻으로 펴내는 독특한 운심게작법이 행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일응 스님은 어떻게 운심게작법으로 영산에 꽃을 피웠는지를 보기로 한다. 이 책의 ‘제2부 일응 스님의 악가무’ 운심게작법의 채보가 실려 있다. 이 무보에는 일응 스님의 운심게작법 춤사위를 136장면을 캡쳐하여 설명돼 있는데, 북쪽을 보고 양손을 합장하면서 동시에 무릎을 굽히며 왼손을 뒤로 치는 첫 장면을 시작으로 양팔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하면서 춤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이 잘 정리되어 있다. 채보자 고경희는 일응 스님의 춤의 미에 대해 ‘정중함과 여법함의 미학, 만물의 생명미학, 수행의 미학 등 세 가지 미의식’을 언급하였다. 운심게작법의 동영상과 제자들의 기억 등을 분석한 논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일응 스님 춤이, 이 글의 주된 관심사인, ‘어떻게 영산을 장엄하고 있으며, 영산작법 어산춤에 대한 일응 스님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자. 몸으로 짓는 공양, 운심게작법은 마음으로 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대표적인 춤이다. 향로와 향기 나는 꽃의 향기가 법계에 두루 퍼져 다함없는 삼보님께 공양되어야 한다. 향화게작법이나 일응 스님의 운심게작법에서는 꽃만 들고 춤을 추고 있다. 일응 스님의 운심게작법은 북쪽을 향해 연꽃을 들고 시작된다. 스님의 후학들은 일응 스님께서 여러 영산작법의 여러 작법무 운심게작법을 특히 잘하셨다고 하는 증언하고 있지만(석정 ․ 법안 스님) ‘운심게작법도 서울과 전라도가 거의 같지만 작법과 태징이 좀 다르다.’고(법안 스님) 하고 있다. 특히 법안 스님은 일응 스님의 운심게작법을 사선과 느린 동선의 미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정중함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다음의 증언은 일응 스님 운심게작법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가장 독특한 동작으로는 천천히 내려가서 세 번 절을 하고 나서 사방을 궁뎅이 소리가 나도록 철푸덕 앉는 동작이 있어요. 말하자면 물고기가 춤추고 노는 모습같이 철푸덕 소리가 나도록 하죠. 근데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어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탁- 주저앉으면서도 손은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하는 거죠. 대부분 여기서 자세가 다 흐트러져요. 도는데도 제대로 도는 사람이 없더군요./ 이게 그냥 돌다가 앉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다 하지만, 동작이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면서도 전작법이 끝나고 후작법에 바로 이어서 들어가니까 어려워요. 고기가 노는 모습을 거기서 하는 거예요. 다게나 도량게작법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다 하고 앉을 적에도 요즈음은 이렇게 반듯이 앉는데, 일응 스님이 강조한 것은 여기서 살짝 사선으로 앉아서 구부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긍게 그게 안 된다고 호통을 치셨어요. 머리가 좀 죽어야 되고 느리게 움직이면서 뒷꿈치에다 힘을 주고 천천히 내려가라고 하셨지요.”(혜안 스님) 또 일응 스님 작법을 잘 전수하고 있다는 인오 스님은 경제 작법과 일응 스님 작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은 팔을 접거나 뒤로 져쳐요. 이레 접어 가지고 그냥 발자국 없이 둘이 앞에서 오고 이렇게 가고, 적당히 가서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여서 앉고, 접고 요신하지요. 그런데 일응 스님의 완제 작법은 팔을 펴서 돌아가되, 여법하게 쫙 하고 돈단 말이에요. 마치 바람이 불면 낙엽이 흔들려서 끝까지 갔다가 오듯이 춤추는 사람의 마음과 팔선이 도솔천까지 갔다 오는 듯이 동작을 크고 느리게 추는 것이 다르죠.” 또 일응 스님께서 작법을 가르칠 때 강조한 점을 증언한다. “박자 관념을 철저하게 지키라. 움직임을 철두철미하게 하라. 곱게 하라. 정성을 드려야 한다. 여법하고 정중하게 하라.”고 한 것은 일응 스님의 의례에 임하는 자세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 몸을 올리는 공양이므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는 운심게작법의 의미를 체득하지 않고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천동 천녀가 내려와 물고기 춤을 춤으로 사방 팔방의 세계를 돈다. “물고기가 춤추고 노는 모습같이 철푸덕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는 모습”은 “사방 요신이 끝나는 마지막 앉을 때는 가만히 앉아 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불교의식>, 368쪽) 향화게작법과 달리 역동적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생명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춤 태가 안 난다”고 하며(혜안 스님), 끝없이 반복 연습을 시키고 있는데, 이는 몸으로 실현되는 춤은 공양물이므로 아름다워야 하고 정성이 담겨야 한다고 일관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 결국 춤으로 행하는 신업공양에 한 치의 틈도 허하지 않는 것이다.
여법한 수행이라고 하면 참선수행만을 최고로 여기는 풍토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이미 한국불교는 18세기에 접어들며 참선 간경 염불의 삼문 수행이 정착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선만이 최고라며 염불과 의례의 종교적 역할을 간과한다. 구체적인 통계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찰 수입이 재공의 수입임에도 재공의식을 소홀히 하는 감마저 지울 길이 없다. 범패는 부처님의 소리이고, 작법무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신구의 삼업으로 올리는 공양이다. 청수를 올리고, 향 한 개비 피워 올리며 행하는 예불에도 부처님을 만난다. 단순히 행하는 일과가 아니라 조석으로 문안을 올리는 불자의 도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지 않고 어찌 부처님을 만나고 성현님을 만나 우리의 소원을 아뢸까. 하물며 영산작법은 일체 부처님을 청해 모시고 온몸으로 공양을 올리며, 일체 중생에게 법시와 재시와 무외시를 베푸는 의식이다. 이때 고도의 훈련으로 익힌 신업으로 올리는 공양인 작법무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일응 스님은 여법하게 정성을 다해 그렇지만 태가 아름답게 춤을 출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스님의 춤이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춘원 이광수는 <애인>에서 “임에게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임에게 보이고자/ 깨끗이 단장한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라고 노래했다. 당신의 임, 부처님께 올리는 신업 공양에 임하는 일응 스님의 작법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좀 더 잘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자 작법 수행에 정진한 일응 스님은 10대 초반에 불문에 들어 범패와 작법을 익힌 지 40여 년이 지난 1987년 문화재 작법무 보유자로 지정된다.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아니면 남에게 지기 싫은 성격으로 인해서라고 가볍게 언급하곤 하지만 이는 수행자의 정신이 없이는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스님은 만년에 머물다 떠난 전통사 벽화에 수행의 길을 나서는 모습을 벽화로 그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출가자의 길은 귀하고 감사하다고 하였다.(법경 스님) 평생을 온몸으로 공양한 행자가 아니고는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춤사위에 실린 일응 스님의 몸짓은 “춤추는 사람의 몸과 팔선이 도솔천까지 갔다 오는” 그것의 다름이 아니었다. 말이 없는 소리 범패, 몸과 말과 뜻으로 온 세계의 부처님께 공양하는 운심게작법, 그것은 그냥 하는 소리와 춤이 아닌 나를 비운 경지에 이른 이만이 쏟아내는 비할 데 없는 사자후인 것이다.
3. 화청, 대동의 향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도량을 꾸미고 상위(上位)의 불보살님을 청하여 몸과 말과 뜻을 다해 노래와 춤으로 공양을 올렸다. 이제 불보살님께 중생들의 소원을 아뢰고 이뤄 주십사 청하는 축원을 할 차례이다. 이곳에서 축원을 하기도 하고 화청(和請)을 한다. 화청에 대해 일응 스님과 재장에 함께 다녔던 고하 스님의 설명은 일목요연하다. “화청은 상·중·하를 고루 청한다고 해서 ‘고루 화(和)’, ‘청할 청(請)’이지요. ‘상’은 부처님께 묘엄성으로 공양하는 것이고, ‘중’은 법계 모든 중생들에게 법문을 듣고 극락에 갈 마음을 내라는 취지에서 합니다. 여기에는 법계 유주 무주 모든 중생이 포함되므로 지옥 중생과 영가들도 모두 여기에 해당되지요. 그리고 ‘하’는 재를 지내는 시주와 회중 모두 법문을 듣고 선업을 지으라는 뜻으로 화청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고하 스님의 설명에는 독특한 삼단관이 보인다. 상위의 성현은 부처님이고, 중위는 법계 모든 중생이고, 하위는 재자와 회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교의 재회 의례는 자비문중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무차법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대소 법회에서 상단이나 중단에 권공을 하고 하단에 시식을 할 때 청해지는 대상은 일체 법계의 유주무주의 고혼들이다. 당해 영가와 인연 영가 중심의 제사나 재일지라도 법계 영가청과 고혼청과 지옥의 중생에 대한 청이 빠지지 않는다. 삼위 삼단의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청 외에 불공과 시식은 이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화청의 3청은 부처님, 법계중생, 재자와 시중 회중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첫째는 능소(能所)의 문제이고 둘째는 화청과 축원의 차이이고, 셋째는 의례의 변천 역사를 고스란히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능소에서 공양을 받는 이들은 상위의 4성과 하위의 6범부이고, 재 공양을 올리는 재자와 시주이다. 둘째 축원과 화청의 차이인데, 축원은 상단 공양을 올리고 상단의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것이다. 그러나 화청은 앞에서 봉행한 상위의 부처님을 청해 공양을 다시 청해 음성 공양을 올리고 축원을 한다. 그러므로 공양의 중복된다. 공양이야 올리면 올릴수록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묵 스님은 화청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한다. 화청은 서비스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한문으로 진행되니 일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모르므로 다시 한 번 우리말로 공양을 올리며 축원을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무엇 때문에 의례 변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의례는 축소지향 또는 확대지향의 과정을 걷게 마련인데, 한국불교의례는 축소지향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기 시작한 인간이 가장 먼저 이룬 문화가 제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이나 자연에 제사를 지내며 풍년과 안녕을 기원했다. 자연 원시적 형태의 제사의식을 이후 성립한 종교도 이를 수용하며 발전하게 된다. 신라의 고려의 각종 국가 제사의식은 이를 증명한다. 이 과정에 국가사회에서 당해 종교의 역할에 따라 의례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제사의식의 집전 여하에 따라 생존 여부가 달려 있을 정도로 종교의 제사 기능 수행은 중요했다. 특히 숭불의 시대에서 억불의 시대로 이월되면서 한국불교의례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의례가 재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억불(抑佛)자들의 억불 명분의 하나는 반승(飯僧) 또는 재승(齋僧)이었다. 스님들께 공덕을 짓기 위해 재를 올리는 것으로 국가 재정과 민간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수륙재 때 승려 외에 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사대부 집안에서 일재(日齋)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역사(役事)에 동원된 승려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조차 금지하고자 하였다. 재는 스님들께 올리는 음식공양이었는데 이것조차 없애려고 부녀자들의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고 스님들의 탁발을 금지하는 등 갖가지 압박이 가해졌다. 이후 스님에게 올리는 공양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재가신도와 출가수행자가 만나는 소통 창구였고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왔지만 이후 ‘재(齋)’는 왕생극락을 비는 추천(追薦)의식에 기생하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되었다. 일재를 올리는 불자들에게 해 주는 축원이 화청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재는 이제 제사의식의 대체재(代替財)로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 재를 올린 사람에게 스님들은 화청을 해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모습이 고하 스님의 증언이나 일응 스님의 화청에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의 질곡으로 의례는 축소되며 차례와 의문의 혼효를 면하기 어려웠다. 화청과 화청에 대한 인식은 이 같은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수륙재에서는 연기를 설명해 주는 위치에서 다시 한 번 삼위의 성현과 범부를 청해 공양하고 우리말로 법문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생략되기도 하고 회심곡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일응 스님의 화청 음반은 화청의 원형과 역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일응 스님 화청에 대해 제자 인묵 스님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알아듣기 쉬운 것은 화청이지요. 일단은 가사가 한글이기도 하지만 선율도 민요조니까 훨씬 친근하지요. 화청은 각 지역 민요 토리에다 실어요. 호남은 육자배기, 영남은 메나리, 서울·경기는 경기조로, 이북은 서도제 같은 것이 있겠지요. 그 소리를 하나 해보면,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 밖에 또 있는가~ 여보시오 시주님네~’ 이렇게 나가지요. 화청은 목을 굴려가면서 구성지게 하는데 일응 스님 화청은 호남조이지요.” 소리의 고장에서 나서 범창(梵唱)에다 국악의 시조창까지 익혔으며 북 등 의례 사물을 자유로이 다룬 일응 어장, 60대에 녹음된 일응 스님의 화청은 주위의 요청으로 2011년 인묵 스님에 의해 발행되었다.
이제 두루 청한다는 화청에서 일응 스님의 수행과 교화와 행적을 논구해 보기로 한다. 어장 일응 스님은 10대 불문에 들어와 소리와 작법에 매료되어 서울과 전주 일대의 소리 스승을 찾아 배운다. 1949년 전주 칠성암에 주지로 있으면서 범패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악의 시조창을 하는 이들과 교유한다. 그리고 한국불교 현대사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는 비구 대처 분규의 소용돌이를 맞는다. 정화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이 사건은 한쪽에는 법란(法亂)이라 칭하며 그 상처를 잊지 않고 있다. 첫 사태가 발발한 지 70년에 이르는 현재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이 사태의 시발점과 가장 고통 받던 시대에 일응 스님은 홀연 승복을 벗어버린다. 30대 중반의 눈 밝은 수행자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응 스님의 대쪽 같은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스님을 스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다시 승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전부터 익혀왔던 시조창으로 전국대회 수상을 한다. 무엇이든지 한 번 하고자 하면 정상을 맛보려는 강단을 느낄 수 있다. 지고는 못산다고 제자들은 후학은 증명하지만 이는 수행자의 분심 용심의 한 모습이다. 일체 지자 일체 승자가 되지 않고 어찌 참다운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스님은 불교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범성은 여전했고 스님의 소리를 찾는 이들은 도하에 널려 있었다. 주변의 권에 따라 스님은 다시 삭발하고 속인으로 있던 모습을 과감하게 벗어버린다. 금연이나 염색의 일화는, 스님의 참다운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다. 일찍이 이규보는 소성거사 상을 보고 머리를 깎으면 사문이고 머리를 기르면 거사라고 노래했다. 세상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는 것뿐이다. 물론 명분론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이상처럼 쉽게 용납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공양을 올린 뒤 다시 한 번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민요조의 화청을 통해 일응 스님은 일체를 불러 모신다. 잘 난 사람 못 난 사람, 세상에는 신분의 고하가 있고 차별이 있다. 그렇지만 불법의 법회 도량에는 차별 없이 불러 모신다. 그렇다고 막무가니의 그런 법회가 아니다. 불교의례 도량에는 ‘평등공양 차등보시’가 있듯이 일체를 평등하게 받들어 청해 모시고 법을 펴고 공양을 베풀어 하나가 된다. 모두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떠나는 반야용선에 오르게 하는 것이다. 일응 스님이 범패와 작법을 배우겠다는 이들을 위해 서울, 전주, 익산, 광주 등지를 찾아다녔다. 일신의 영광과 편안함을 추구했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루 청한다는 것은 두루 청함에 응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청해 모시고 공양을 올리고 일체 중생을 청해 법문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러므로 화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교육장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청규와 같은 것을 지키지 않는 교육자에는 과감히 퇴출을 하고 있다. 저승사자라고 애교어린 별명을 얻은 것이나 범패와 작법에 맞지 않다고 배우기를 원하지 않은 이에게는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은 것은(법경 스님) 스님의 자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고, 이 길만이 최고요 전부라고 국집하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독각을 인정하셨다. 삼승귀일승(三乘歸一乘), 성문 연각 보살의 길은 다 부처님의 길로 돌아가듯이 각자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일응 스님의 범패와 작법의 습득과 전수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청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닫음
2003년 5월 세수 85세, 법납 73해를 일응 어장 스님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지만 스님께서 남긴 화청 테이프나 운심게작법의 동영상으로 스님을 만나 뵐 수 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전북영산작법, 광주의 전통불교영산회, 서울의 일응어산작법보존회 등을 설립하여 스님의 어산작법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범패와 작법의 특징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 논문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소리와 작법과 화청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일응 스님의 사상과 의례문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위 논의와 언급과 바람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한문 중심으로 구성된 불교의례의 문제를 수없이 언급하며 개혁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불교의례는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도 해야 하지만 범패와 작법은 우리말인가 한문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 하늘의 소리와 하늘의 몸짓으로 부처님께 삼업공양을 올리는 것이므로 언어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처럼 문자를 쓰되 문자를 떠나 있는 것이 범패와 작법무이다. 그러므로 한글화와 현대화에 잘못 매몰되면 범패와 작법무로 행해지는 전통불교의례의 숭고한 의미와 더 높이 고양된 신심을 놓치게 된다. 범패와 작법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습득과 전승의 대상으로 그 역할 또한 다른 어떤 불교의 교학이나 수행법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둘째, 범패와 작법으로 행해지는 공양과 시식은 단순히 불공이나 시식하여 복덕을 닦는 데 머물지 않고 고도의 단련을 통해 수행을 완성하게 한다. 작법무는 단순한 춤이 아니라 일체 세계에 두루 계신 부처님께 몸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므로 정중하게 여법하게 아름답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일응 스님을 고구정녕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일응 스님은 제자들에게는 엄한 스승이자 자상한 스승이었다. 범패와 작법의 여법한 습득을 위해서는 긴 시간의 투자와 젊은 시절 입문이 필요한데, 출가연령이 갈수록 지연되고 교학중심의 풍토로 말미암아 범패와 작법을 익히려는 수행자가 적은 게 현실이다.
셋째, 어장 일응 스님은 범패와 작법을 당신의 수행으로 삼고 한 평생 살다 가셨다. 시속의 풍습에 따라 가정을 일구었지만 가정보다 소리와 작법의 습득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렇지만 스님은 지기도 싫어하고 한 번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익히려는 집념으로 당대 최고의 어장이 되었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당대 최고의 어장을 찾아 소리를 익히고 외도 시조창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만이 불교라고 고집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분야에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수련과 제자의 교육에 신명을 바쳤다. 스님께서 세연이 다해 열반에 드신 지 열 돌이 되었다. 하지만 후학들을 정진하라고 화청하는 범음이 들리는 듯하다.
참고문헌
이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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