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시, 우리나라 중소기업, 자영업자(병원, 한의원 등 포함), 일반
서민 등을 괴롭힌 금융상품 삼총사가 있었습니다. 원/달러
KIKO통화옵션, ELS(Equity Linked Securities,
즉, 주가연계증권; 주가연계예금 포함), 엔화 대출이 바로 그것입니다. 키코와 ELS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적이 있으니 오늘은 엔화 대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엔화 대출은 2002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계기는 2001년 10월에 정부와 한은이 취한 ‘외화대출의 용도 제한 폐지’였습니다.
과거 해외직접투자자금, 외화결제자금, 외채상환, 국산기계자금구입 등으로 한정하였던 외화대출용도를 운전자금 등 원화자금이 필요한 경우에도 외화자금을 차입할 수
있도록 규제를 철폐한 것입니다. 중소기업과 외국인투자기업이 자금조달 수단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여
대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했던 외화차입 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정부는 판단하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환율을 통제하여 환리스크는 크지 않았던 반면에 내외금리차는 컸었던 과거(IMF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자유변동환율제도 하에 내외금리차가 크지
않아 외화차입 수요가 급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기업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점에서 봐도 합당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은행의 외화대출이 달러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미달러화와 우리 원화의 금리 차이는 1%
조금 넘어 작았지만 엔화 같은 저금리 통화와 비교할 때 그 금리차는 무시할 만한 정도를 넘었습니다.
또 하나, 은행들이 환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굳이 외화대출이 필요 없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게까지 실적 증대를 위해 마구잡이로 외화대출, 특히 엔화대출을 권유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습니다. 은행들이 건전한 상식을 기초로 영업활동을 하리라고 너무 과신했습니다.
2001년 12월말 국내은행의 외화대출 잔액은 73억 달러, 그 중 엔화대출은 5.7억 달러(엔화
금액으로는 740억 엔 정도)였는데 2002년 11월말에는 외화대출 잔액 141억 달러, 그 중 엔화대출 잔액은 77억 달러(9,400억엔 정도)로
늘었습니다. 11개월 동안 늘어난 외화대출은 대부분 엔화 대출이었던 셈입니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1,000원 내외에서 안정되었고, 엔화차입이 원화 차입보다 3~4% 정도 금리가 낮다는 점을 들어 은행들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엔화대출 마켓팅을 적극 추진한
결과였습니다. 이후 엔화대출은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까지 계속 늘어났습니다. 2008년
말 국내은행의 외화대출 잔액은 431억 달러, 그 중 엔화대출은 165억 달러(엔화로는 1조5천억 엔 정도)였습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은행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주주가치 극대화’ 등을
주요 경영목표로 삼고 전 영업점에 수익성 증대를 독려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엔화대출은 은행 영업점의
입장에서는 정말 수지 맞는 장사였습니다. 기업부문이든 개인부문이든 원화대출 시장은 은행간 경쟁이 치열하여
차주가 좀 우량하거나 담보가 확실한 경우 기껏해야 1~1.5% 정도 마진 남기기가 힘 드는데, 엔화대출은 쉽게 2% 이상의 금리 마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엔화대출은 우량 차주(의사, 한의사
등)나 담보가 있으면 3% 정도의 대출금리가 적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은행의 조달금리는 제로금리 수준이었던 엔화 시장금리에 한국계 은행의 차입 가산금리를 더 하더라도 1%를 넘지 않았습니다.
은행 영업점이 엔화대출을 하면 금리마진 못잖게 짭짤한 이익이 발생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환전수수료였습니다. 엔화대출 섭외 대상의 대부분이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없어서 엔화를 그대로 쓸 일이 없었습니다. 즉, 원화로
환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은행이 고객들에게 적용하는 환율은 크게 2가지입니다. 외화 현찰을 사고 팔 때 적용하는 환율(현찰매매율)과 외화 송금을 보내거나 받을 때 적용하는 환율(전신환매매율)입니다. 통상 선진국 통화에 대한 현찰매매율은 매매기준율에서 ± 1.75%, 전신환매매율은 ± 0.98% 하여 고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은행이 외화를 팔 때는 비싸게 팔고, 살 때는 싸게 삽니다. 여러분도
경험해서 아시다시피 은행에서 환전을 할 때 위에서 말한 매매율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고객에 따라
깍아줍니다. 은행간 경쟁이 치열하여 아주 우량고객인 경우에는 90% 이상, 보통의 고객에 대해서도 50~60%는 쉽게 깍아줍니다. 특히, 전신환매매율은 기업들의 수출입이나 각종 송금, 외화예금 및 대출과 연관되어 있어서 더욱 경쟁이 치열합니다. 1달러에
기준환율이 1,100원이라면 전신환매입율(매도율)은 10.8원
정도 싼(비싼) 1,089.2원(1,110.8원)에 고시하지만, 은행에
완전히 잡혀있는 기업이 아니고서는 이런 환율로 거래하는 기업은 하나도 없습니다. 환전 금액이 크고 거래가
빈번한 기업의 경우는 10전 남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엔화대출 시에는 이런 에누리가 일절 없었습니다. 1% 가까운 환전수수료를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시장환율이 100엔당 1,000원일 때, 어느 의사가 개업자금으로 3억 엔을 대출받는다고 가정합시다. 그 의사는 이 엔화 자금을 은행에
팔아야 합니다. 이 때 은행은 전신환매입율을 적용하여 약 3천만
원을 환전수수료로 받고 29억7천만 원 정도를 지급합니다. 은행의 지점장 입장에서 이런 환전수수료 수입은 엄청납니다. 대출마진은
세월이 흘러 부실이 없어야 영업점 이익으로 올라가지만, 환전수수료는 바로 그 시점에서 지점의 이익으로
잡히니까요. 실적이 저조하여 인사나 성과급에서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있는 지점장들에게 이런 엔화대출은
좋은 탈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행이 엔화대출을 상환받을
때는 다시 차주에게 엔화를 팔면서 1% 가까운 환전수수료를 다시 챙깁니다.
엔화 표시 거래가 없는 기업이나 개인사업자들은 엔화대출을 받는 순간 엄청난 환투기를실행한
꼴이 됩니다. 금융감독원은 2002년 12월에 이런 환투기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은행들의 무분별한 엔화대출을 억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외환리스크 관리대상 기업 확대, 외환건전성 지도기준 강화, 대손충당금 적립비율 상향, 환리스크 홍보 및 교육 강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엔화대출을 실질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조치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초에서
2007년 중반까지 4년 반 동안 원/엔 환율은 2003년 하반기 일시적으로 1,100원/100엔으로 상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떨어져 750원대까지 하락하였습니다. 원화보다 3% 포인트 이상 싼 금리에다 환차익까지 발생하는 엔화대출에
대해 환리스크를 주의하라는 금감원의 말발이 먹혀들 리 없었습니다.
엔화대출의 파국은 결국 2008년 국제금융위기
발생과 더불어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은행이 2007년 8월에서야 외화대출 용도를 해외사용 실수요 목적과 제조업체의 국내시설자금으로 제한하였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이 뒤의 경과는 키코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100엔당 1,500원을 넘어선 환율 폭등으로 수 많은 의사, 한의사들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부도를 냈습니다. 그리고, 엔화 대출을 받은
많은 중소기업들도 부실화되어 문을 닸았습니다. 제가 다닌 은행의 경우,
엔화 대출이 특히 많았던 지역을 담당하였던 본부장은 이들 대출금의 부실이 매우 크다고 해서 부임한 지 1년 만에 해임되기도 하였습니다.
원/엔 환율은 2012년 5월 100엔당 1490원 선에서 금년 5월의 890원이
깨지기까지 3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락(원화 강세, 엔화 약세)하였습니다. 2007년 8월 이후 자영업자들이 신규로 엔화대출을 받을 수 없기에 과거와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우리 기업들도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이런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말 131억 달러(1조1200억 엔)에 달하던 국내은행의 엔화 대출금이 올해 6월말에는 38억 달러(4,800억
엔)로 줄어들었습니다. 달러화 대출은 오히려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올 3월 이후 엔/달러 환율은 달러 당 120엔 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누구도 환율이나 주가에 대해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런 수준의 환율은 좀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관료들이나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펀드멘탈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를 달러가 휘어잡았고, 최근에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초읽기에 들어감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경제가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20년’ 동안 약화되긴 하였으나, 그렇게
만만하게 볼 상대는 절대 아닙니다. 요즘 원/엔 환율은 100엔 당 970~1,000원으로 몇 달 전에 비해 엔화가 많이
강세가 되었다고 하여 엔화대출을 받겠다고 섣불리 나설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엔화 대출이 투기적이라고
하여 무조건 배척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국제화된 세상에서 기업들이 적절하게 차입통화를 선택하는 것은
훌륭한 재무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시기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느 누가 지금이 최선인 지 아닌 지를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긴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곤혹스런 사태에 직면하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엔화대출이 아주 투기적이었던 반면에 엔화스왑예금은 헤지의 표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엔화스왑예금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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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출입 거래는 대부분 달러화 표시로 이루어집니다. 이에 따라, 교역규모가
증대되면 될수록 관련 수출입 금융의 증가로 달러 표시 외화대출도 늘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엔화대출에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