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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영익 _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 교수
1. 이승만 비판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건국의 원훈(元勳)으로서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國父)로 추앙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 대통령과 그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수를 웃도는 형국이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독재자라고 지탄한다. 그들은 이승만을 ‘권력욕에 눈먼 미국의 앞잡이’(공산권 정부와 언론), ‘무책임하고 잔인한 인물’(영·미의 진보적 언론), ‘희대의 협잡꾼이요 정치적 악한’(장준하), ‘교활하기 짝이 없는 철저한 에고이스트’(신상초), ‘독립운동도 제가 대통령을 해먹으려고 또 건국도 제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던 인물’(송건호), 그리고 ‘장개석(蔣介石)의 아류(亞流)’(래티모어)라고 꼬집는다.
국제학계에서 이승만을 향하여 최초로 비난의 포문을 연 연구자는 알렌(Richard C. Allen)이라는 가명(假名)으로 《한국의 이승만 : 허가받지 않고 그린 초상화》(Korea’s Syngman Rhee : An Unauthorized Portrait)라는 제목의 이승만 전기(傳記)를 쓴 테일러(John M. Talylor, 1930~)였다.
그는 ‘4·19학생혁명’ 직후에 발간한 이승만전에서 이 대통령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제1차 개헌(1952)을 감행하고 ‘4사5입’ 계산법으로 제2차 개헌(1954)을 한 다음 진보당을 탄압하고 3·15부정선거를 하면서 장기집권을 기도하다가 결국 4·19학생혁명(1960)으로 실권(失權)한 경위를―그의 대일(對日)외교 ‘실패’와 거창(居昌)양민학살 및 국민방위군 사건 등과 아울러―비판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이승만을 ‘평생 자기 조국에 봉사한 대가로 국민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낙인찍었다.
1960년 이후 국내에서 이승만 비판의 선봉에 섰던 언론인·사학자 송건호(宋建鎬)는 알렌의 전기를 원용하면서 그의 비판론을 일보 더 전진시켰다. 송건호에 의하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집권 기간에 아래와 같이 3대 ‘과오’를 범했다.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 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의 통치 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집권 기간 동안 그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혜택받아 영화를 누린 층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이승만은 남북분단의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를 비호함으로써 건국 초에 민족정기를 흐려놓았고 남한의 군사·경제체제를 미국에 예속시켰다는 논지이다.
송건호의 뒤를 이은 국내의 많은 ‘진보적’ 연구자들은 위의 3대 과오 이외에 다른 여러 가지 ‘죄과’를 밝혀내어 이승만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김삼웅(金三雄)은 근래에 국내외 학계에서 축적된 이러한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이승만의 ‘죄악상’을 ① 분단 책임, ② 친일파 중용, ③ 한국전쟁 유발 내지 예방 실패, ④ 독립운동가 탄압, ⑤ 헌정유린, ⑥ 정치군인 육성, ⑦ 부정부패, ⑧ 매판경제, ⑨ 양민 학살, ⑩ 극우 반동, ⑪ 언론 탄압, ⑫ 정치 보복 등 12개 조목으로 나누어 제시한 바 있다.
2. 이승만 긍정론
이러한 비판론자들의 주장과는 궤를 달리하여 이승만의 인물됨과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 대해 정반대의 견해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이승만 옹호론자는 이승만을 가리켜 ‘희세(稀世)의 위재(偉才)’(김인서), ‘외교의 신(神)’(조정환),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다 합친 인물’(김활란), ‘한국의 조지 워싱턴 ;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애국자 중의 한 사람 ;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밴 프리트)이라고 극구 칭송했다.
이승만 옹호론자의 대변자는 미국 시라큐스대학―1949년 이후에는 펜실베이니어주립대학―의 변론학 교수로서 1942년 이래 이승만의 자문·홍보 역을 맡았고 1954년에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을 저술한 올리버(Robert T. Oliver, 1909~2000) 박사이다. 그는 이승만을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형안,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 자질면에서 어느 한국인 정치가보다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그의 대통령 재직기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이 대통령은 여수(麗水)·순천(順天)반란사건과 같은 중대한 국가위기로부터 신생 대한민국을 구출하고 국가보안법을 통해 국가 존립의 기본요건인 안보를 확보했다.
둘째, 이 대통령은 6·25전쟁 중 남한 국민들의 충성을 확보했고 한국군의 훈련 및 장비 현대화 지원을 끈질기게 거부하던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미국의 원조로써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다.
셋째, 이 대통령은 공산주의 활동경력을 지닌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고 지주 출신 의원들로 가득 찬 국회에 압력을 가하여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전 국민의 75%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위해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집권 제2기에 그는 농업은행을 창설함으로써 한국 농민들을 전통적인 고리대금업자들의 착취에서 해방시켰다.
넷째, 이 대통령은 건국 초 어려운 재정여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우선순위를 배정하여 각급 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교사들을 재훈련하며, 한글로 쓰여진 새 교재들을 개발함으로써 국민교육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발달에 필요한 인력 풀(pool)을 확대했다. 그는 후세 한국인들로부터 ‘교육 대통령’(The Education President)으로 기억될 만한 큰 업적을 남겼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이 군사·경제면에서 미국과 유엔의 구조(salvation)에 매달리는 속국(client sate)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외교를 통해 미국과 국제사회로 하여금 한국을 진정한 주권(genuine sovereignty)국가로 대접하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기본적(basic)인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대통령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신생 대한민국이 직면한 공전(空前)의 혼란과 6·25전쟁이라는 재앙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등 방면의 발전을 도모한 결과 신생 대한민국을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고 이로써 1960년대 이후 남한의 눈부신 경제발전(번영)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본 것이다.
3.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
필자는 이승만 비판론자들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사실(史實)과 부합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다만 1960년대 이후 대다수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이 대통령의 ‘과오’ 내지 ‘죄과’를 파헤치는 데 집착한 나머지 그의 공적에 대해서는 관심과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 이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을 아쉬워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올리버류(類)의 관점을 살려 이 대통령의 공적을 집중적으로 부각·조명함으로써 현금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는 비판 일변도의 이승만 담론에 균형을 잡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승만 옹호론은 1954년에 이승만 전기를 저술·출판한 올리버 박사에 의해 선도되었다. 국내에서는 김인서(金麟瑞)가 1963년에 《망명노인(亡命老人) 이승만 박사(李承晩博士)를 변호(辯護)함》을 펴낸 이래 최근까지 본격적인 이승만 옹호론을 전개한 학자 내지 연구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이 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고위 관료와 군 장성들이 자신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통해 이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옹호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1995년 해방 50주년을 기하여 조선일보사에서 이승만 재평가 캠페인을 벌인 다음 1998년에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가 편찬한 18권의 《이화장 소장(梨花莊所藏) 우남 이승만 문서(雩南李承晩文書) : 동문편(東文篇)》이 출판되면서 학계와 언론계에서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즉 1990년대에 활발해진 이승만 연구를 통해 사회과학자 내지 언론인들 가운데 올리버류의 이승만 옹호론을 펴는 인사들이 등장했다.
필자는 아래에서 근자에 옹호론자들이 발표한 값진 연구성과를 참고하면서 이 대통령의 업적을 정치면, 외교면, 군사면, 경제면, 교육면, 사회면, 문화면 등 일곱 분야에 한정하여 종합적으로 정리·제시하고자 한다.
(1) 정치: 대한민국의 건국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에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1945년 10월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군사적으로 분할·점령당한 조국에 돌아와 미·소 양대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4대국의 5년간 신탁통치 계획에 따라 ‘타율적으로’ 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배격하고 그 대신 유엔(UN)이라는 국제기구의 권위를 빌어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자율적으로’ 남한만의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업적은 그가 ‘타(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정치·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대내적으로 우익세력을 규합하고 대외적으로 미국 조야의 지도자들을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박사는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그 임무를 완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제헌국회의 대다수 의원들이 선호했던 내각책임제안에 반대하고 그 대신 대통령중심제 채택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를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로 낙착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1919년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의회’ 참석자들이 소망했던 미국식 대통령제 정부 수립의 이상이 일단 실현되었다.
미국식 대통령제를 이상으로 삼았던 이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제헌국회가 채택한 대통령중심제에는 미흡한 점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니라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국회에서 선출토록 만든 규정이었다. 이 대통령은 1952년 7월 6·25전쟁의 와중에서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사실상의 ‘무혈 쿠데타’를 통해 야당 우세의 국회를 압박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남한에 완전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 대통령이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쏟아지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같이 대통령 직선제를 무리하게 관철시킨 이유는 한국과 같은 신생 공화국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 필요하며 그러한 대통령은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사로잡힌 직업 정치인(국회의원)이 아니라 순박하고 슬기로우며 애국심이 강한 민중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 대통령의 완강한 집념 때문에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거의 완벽하게 모방한 나라가 된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는 1960년 이 대통령의 하야 후 단명으로 끝난 장면(張勉) 총리 집권 기간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유신(維新) 기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남한의 대다수 국민과 정치가들이 선호하는 기본 정치제도로 남아 있다. 이 사실은 1948년 헌법 제정 당시와 1952년 발췌개헌안 채택 당시 이 대통령의 판단 및 결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2) 외교: 한미상호방위조약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으로 소문난 이 대통령은 집권 기간 외교면에서 일련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8년 12월에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받은 것을 필두로 1950년까지 미국을 위시한 26개 우방의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6·25전쟁 발발 후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을 실현시킨 것도 그의 중요한 외교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1952년 1월 일방적으로 동해에 ‘평화선’(일명 :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면서 일본에 대해 고자세(高姿勢)를 유지한 것도 대일(對日) 외교사상 보기 드문 쾌거였다.
이 대통령 집권 기간에 대한민국 외무부는 9개 국가에 대사관을, 8개 국가에 총영사관을, 3개 국가에 대표부를, 그리고 2개 국가에 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1950년대까지의 한국 외교사상 최대폭의 외교망을 구축했다. 이 기간에 한국의 외교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총회와 제네바 정치회담(1954) 등 국제회의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대통령 자신은 중화민국과 필리핀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공산주의의 확산 및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태평양동맹(太平洋同盟)의 결성에 앞장섬으로써 아시아권 내에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을 높였다. 1954년 국빈(國賓)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연설한 것도 한국 외교사상 하나의 이정표로 남았다.
이 대통령이 이룩한 여러 외교업적 가운데 백미(白眉)는 1953년에 성사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R.O.K.-U.S. Mutual Defense Treaty)이다. 6·25전쟁 중 시종 북진통일을 부르짖던 이 대통령은 1950년 10월 중공의 참전을 계기로 미국이 휴전을 모색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는데, 1953년 6월 미국이 한국 정부의 입장을 무시하고 북한·중공을 상대로 드디어 휴전을 성립시키려 하자 그는 반공포로 2만 7천여명을 독단적으로 석방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측 요구를 청종(聽從)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대통령은 7월과 8월에 서울을 각각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특사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및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과의 연이는 협상 끝에―미국이 추구하는 휴전을 묵인하는 대가로―미국으로부터 일종의 공수동맹(攻守同盟), 즉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 1일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된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상 미국의 ‘허수아비 국가’가 아닌 미국과 동등한 조약 상대국이 되었으며 나아가 미국의 군사적 보호막 아래 경제·군사·정치·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통령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에서 이 조약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1953년 이후 남한의 역사는 이 대통령의 예단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립은 19세기 말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간절히 희구했지만 미국측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현시키지 못했던 연미론(聯美論)의 꿈을 실현시킨 쾌거이며, 한국 외교사상 7세기 중엽에 김춘추(金春秋)가 당(唐)나라와의 교섭에서 거둔 성과나 994년 서희(徐熙)가 대(對)거란 협상에서 거둔 성과에 견줄 만한 외교적 위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군사: 양적·질적 군사력 증대 실현
대한민국 수립 직후 1948년 10월 5일에 이 대통령은 조병옥(趙炳玉)을 대통령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사·경제원조를 요청했다. 그 후 미국은 한국측의 미군 주둔 요구를 외면하고 1949년 6월까지 주한 미군의 철수를 완료했다. 미군이 철수하자 이 대통령은 1949년 8월 20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북한으로부터의 ‘임박한 남침 위협’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이 같은 요청에 대한 반응으로 미국 의회는 1949년 10월 6일 미 대통령으로 하여금 한국에 군사원조를 허용토록 하는 상호군사협조법안(the Mutual Defense Assistance Act)을 통과시켰다. 1950년 1월 26일에는 한·미 간에 상호방위협조협정(Mutual Defense Assistan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발발 시점까지 미국이 한국에게 베푼 실질적인 군사원조는 10대의 AT-6 연습용 비행기 구입을 허락하는 정도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6·25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 규모는 북한 인민군 병력의 약 2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명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장비면에서도 북한측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 이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과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즉각적인 군사개입을 요청하여 미군의 참전을 실현시켰다. 그 후 7월 14일에 그는 유엔군 총사령관이 된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함으로써 한·미합동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중과 휴전 후 이 대통령은 끈질기게 미국으로 하여금 국군의 병력 증강, 장비의 현대화 및 훈련 등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그 결과 그는 미 8군사령관 밴프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6·25전쟁 발발 당시 10만명(8개 사단)에 불과했던 국군의 총병력을 1952년에 25만명(16개 사단)으로, 그리고 휴전 성립 후 1954년에는 65만명(2군-20개 사단)으로 대폭 증원하는 데 성공했다.
장비면에서 한국군은 280mm 원자포와 F-5 초음속 비행기 등 정밀무기를 보유하고, 최첨단의 통신과 수송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군은 미군과의 부단한 협동을 통해 미국의 선진적인 인사와 군수관리기술 등을 습득했다. 그리고 육·해군사관학교와 보병학교, 전투정보학교, 공병학교, 통신학교, 병참학교, 군의학교 등 각종 특과학교 및 국방연구원, 육군군수학교, 교육총본부 등 각종 지휘참모학교를 통하여 군의 자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 밖에도 한국군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총 9,186명의 장교를 미국에 파견하여 첨단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이 대통령은 1958년 초 미국의 한반도 내 전술 핵무기 배치를 허용함으로써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했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미국의 지원으로써 ‘65만 대군(大軍)’이라는 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상비군을 육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이 오랫동안 희구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부분적으로 실현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아시아권 내에서 무시 못할 군사대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20세기 초 일제(日帝)의 군사력 앞에 굴복, 국권을 상실했던 대한제국의 총병력이 불과 1만명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대통령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4) 경제: '3개년 경제발전 계획'과 농지개혁
이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무관심 내지 무지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 기간 남한에서는 경제발전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대통령 집권 기간에 남한의 경제사정이 곤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기간에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청년 시절(1901)에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는 이 대통령은 상공업과 무역의 진흥을 통해 국민경제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구상에 따라 그는 집권 초에 우선적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면서 상공업과 무역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집권 기간에 남한에서는 소폭이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즉, 1953~196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9%에 달했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북한의 연평균 성장률 20%에 비해 훨씬 뒤지는 것이지만 다른 후진국들의 평균 성장률 4.4%에 비해서는 높은 것이었다. 1960년에 달성된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 역시 다른 후진국들의 경우에 비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6·25전쟁 후 미국으로부터 31억달러의 경제원조를 받아내어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함으로써 1955년까지 전화(戰禍)로 파괴된 경제시설 및 기타 설비를 거의 완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1958년 부훙부(復興部) 산하에 신설된 ‘산업개발위원회’는 경제발전계획 수립에 착수, 1960년 4월 15일에 ‘3개년 경제발전계획 시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 계획은 며칠 후에 발생한 ‘4·19 학생혁명’으로 인하여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그 후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경제개발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예로써 우리는 이 대통령이 경제발전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이 경제면에서 성취한 업적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지개혁이다. 이 대통령은 집권 직후 과거 조선공산당의 지도급 간부였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여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 표출된 농지개혁의 구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정부에서 마련한 농지개혁법안은 지주 출신 의원이 다수였던 국회에서 견제를 받다가 드디어 1950년 3월에 통과, 4월에 공포되었다.
그 내용은 3정보를 상한(上限)으로 하여 그 이상의 농지는 국가가 유상으로 몰수하고 이것을 다시 3정보의 한도 내에서 영세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지주의 토지를 연평균 생산액의 1.5배로 가격을 매겨 사들여 소작인들에게 분배하고, 5년간 현물로 땅값을 상환토록 하였다.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되었다. 그 결과 총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2천 정보의 땅이 유상 매입, 유상 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되었다.
이 대통령이 실현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삼림과 임야 등 비경지(非耕地)가 제외되고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문자 그대로의 ‘농지개혁’으로서 1946년 3월에 북한에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원칙 하에 실시된 토지개혁에 비해 농민에게 불리한 것이었다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이 개혁은 한국 역사상 여러 모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첫째,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둘째, 이 개혁은 한국의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양반지배층의 몰락을 초래하며 지주 배경의 한국민주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셋째, 6·25 발발직전에 개시되어 전쟁 중에 완료된 이 개혁은 전쟁 기간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내부 동요를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대통령 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5) 교육: 의무교육실시, 민주주의 문화적 토대 구축
이 대통령은 청년 시절부터 ‘교육 입국’(敎育立國)을 주장했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 육영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이를 몸소 실천했다. 3·1운동 후 그가 마련한 건국 청사진에는 국민교육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도 의무교육제 실시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미 군정기에 개시된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대통령이 추진한 교육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제도의 도입이었다. 해방 당시 한국인의 약 80%는 문맹(文盲)이었고,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그 중 전문학교 이상 대학 졸업의 학력 소지자는 전체의 0.2% 미만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적 여건 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건국 후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월에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한 다음 1950년 6월에 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국민이 6년간 의무교육을 받도록 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로 하여금 의무교육 실시에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도록 조처했다.
의무교육제도는 6·25전쟁 중 시행에 차질이 생겼으나 1954년에 마련된 ‘6개년 계획’을 통해 여행(勵行)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력아동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가두었다. 이로써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한국 역사상 대다수 백성이 문맹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각급 학교가 대폭 증설되고 해외 유학 붐이 일어났다. 우선 1950년대에 팽창된 각급 학교 및 학생수를 해방 당시(1945)와 비교하여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국민학교(초등학교)의 경우
학교수는 2,834 개교에서 4,620개교로 62.3% 증가
학생수는 136만6,024명에서 359만9,627명으로 2.6배 증가
- 중학교의 경우
학교수는 97개교에서 1,053개교로 약 11배 증가
학생수는 5만343명에서 52만8,61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
- 고등학교의 경우(인문고등학교와 실업고등학교를 합해서)
학교수는 224개교에서 640개교로 3배 증가
학생수는 8만4,363명에서 26만3,563명으로 3.1배 증가
- 대학의 경우
학교수는 19개교에서 63개교로 3.3배 증가
학생수는 7,819명에서 9만7,819명으로 12배 이상 증가
이 대통령 집권 기간의 해외유학 실태를 살펴보면, 1953~1966년 간에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에 통과한 유학생은 모두 7,398명에 달했다. 그 중 6,368명(86%)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1953년부터 1978년까지의 미국 유학생 중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기간에 미국 경제원조처(USOM)가 마련한 ‘교육교환계획’(敎育交換計劃)을 통해 유학·단기훈련 및 시찰 명목으로 해외로 나간 고급 인력은 2,464명이었다(그 중 72%에 해당하는 1,774명이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미 국무성이 지원하는 ‘지도자’ 단기시찰계획에 따라 미국을 다녀온 국회의원과 교육계 및 경찰행정계 등의 중견인물 및 학생 등은 940명이었다.
이들 외에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1950년대에는 무려 9,000명 이상의 한국군 장교가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이상과 같이 이 대통령 치하에서 이루어진 교육개혁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교육 기적’(敎育奇蹟)이었다. 이 기적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구축함과 아울러 다음 몇 가지의 중요한 정치·사회·경제적 파급효과를 수반했다.
즉, ① 한국의 전통교육에서 발견되는 신분주의·차별주의를 배격하고 전 국민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적 교육이 실현됨으로써 국민 전체의 사회적 계층 상승기회가 평등화되었다. ② 새로이 강조된 과학·기술교육은 한국인의 뿌리깊은 유교적 가치관을 합리적·실용주의적 가치관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③ 문맹 퇴치, 과학·기술교육의 강조 및 고등교육의 확산 등은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제 기적’(經濟奇蹟)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④ 이 기간에 강조된 민주주의 교육은 ‘이승만 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4·19학생혁명’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 196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6) 사회: 평등강조, 신분·남녀·지방 차별 타파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천부인권(天賦人權) 및 사민평등(四民平等)사상을 수용하고 독립운동 기간 스스로 평등주의를 실천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다음 한국 사회질서를 평등화하려고 시도했음은 1919년의 건국 청사진과 1946년의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 1949년에 발표한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 그리고 해방 후 공산당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밝힌 성명서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적어도 네 가지 면에서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기여했다.
첫째, 그는 전통적인 신분주의와 차별주의를 배격하고 남성과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사민평등·남녀평등의 사회를 구현하는 데 기여했다.
둘째, 그는 농지개혁을 통해 양반 지주들의 경제적 기초를 붕괴시킴으로써 한국의 뿌리깊은 양반제도에 결정타(coup de grace)를 가했다.
셋째, 그는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양성함으로써 남한의 전통사회에서 출세가 불가능했던 계층이 군문(軍門)을 통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동시에 장교 출신 군인들이 하나의 권력 엘리트로서 대소의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한국 전통사회에서 견지되었던 무인에 대한 문인우위(文人優位) 체제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넷째, 그는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정책을 폄으로써 조선시대 이래의 고질인 지방주의를 타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촉진된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양반의 몰락이었다. 이로써 신라시대 이래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토지에 기반을 둔 양반지배계급은 역사상 영원히 사라졌다. 양반제도의 붕괴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혁은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격상이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의 여성은 남성과 같이 의무교육을 받게 되었고 또 남녀공학(男女共學)도 시도되었다. 여성 중에 남자와 동등하게 대학교육을 받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1945년 광복 당시 거의 한 명도 없었던 여자대학생이 1960년에는 1만7,049명에 달했다. 1886년에 학생 1명을 가지고 이화학당(梨花學堂)이 개설되었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이러한 교육기회의 확대 내지 평등화로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은 물론이다.
미 군정기에 인신매매 금지령(1946. 5. 27)과 공창(公娼) 폐지령(1947. 10. 28)이 제정·공포된 데 이어 1948년의 헌법과 선거법을 통해 여성에게 참정권과 더불어 민의원 및 참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 공포된 신형법(新刑法)으로 인하여 종래 유부녀에게만 적용되던 간통죄(姦通罪)를 남·여 모두에게 적용(즉, 쌍벌)함으로써 여성의 입장이 크게 유리해졌다. 그 후 1958년에 제정된 신민법(新民法)은 여성해방을 진일보시켰다.
1950년대에는 미 군정기에 창설된 애국부인회, 여자기독청년회, 건국부녀동맹, 여자국민당 등 여성단체를 통해 여성의 정치활동과 권리신장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실현되었다. 제헌의회 선거에는 19명, 제2대 선거에서는 12명, 제3대 선거에서는 9명의 여성이 입후보했다(당선은 1~2명). 1958년 제4대 선거에서는 6명이 입후보하여 3명(박순천, 김철안, 박현숙)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1차 내각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장관(임영신)이 임명되었다. 조선시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차별대우를 받았던 한국 여성이 이승만 집권기를 거치면서 “가정의 깊은 장막 속에서 벗어나 눈부신 각광을 받으면서 사회의 밝은 무대 위에 등장”한 셈이다. 이것은 한국 여성사상 확실히 획기적인 현상이었다.
(7) 문화: 한글·영어 사용 강조하며 세계화에 앞장
청년기부터 한글 전용(專用)을 솔선수범했던 이 대통령은 1948년 10월 9일에 한글전용법을 공포함으로써 한글을 전용하는 것을 국책으로 추진했다. 이로써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한글시대’가 열렸다. 그는 개천절(開天節)을 국경일로 정하고 단군(檀君) 연호를 서력(西曆)과 더불어 병용케 했으며, 불교 정화(淨化)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 이러한 일련의 문화정책을 통해 이 대통령은 한국적 민족주의를 고양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경무대(景武臺)에서 영어를 상용하며, 영자 신문을 읽고, 주요 공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하는 등 영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일상생활 및 집무습관은 공무원과 일반 국민 간에 영어 보급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강조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선구를 달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통령 집권 기간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현상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독교(특히 개신교) 교세의 확장이었다. 청년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 대통령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 생활을 영위했다. 미국 유학시에 그는 장차 조국에 돌아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에 종사할 목적으로 신학(神學)을 부(副)전공했다. 1910년 귀국하여 서울YMCA에서 2년간 학감(principal)으로 봉직했고 1913년부터 1939년까지는 하와이에서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창설·운영하면서 기독교 교육과 선교에 주력했다. 미국 동부에서 1919년 서재필(徐載弼)이 창립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과 1942년 자신이 조직한 ‘기독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등을 통하여 많은 미국인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해방 후 이승만은 서울 정동감리교회 교인으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으며 평생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조석(朝夕)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했다.
이승만은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의 수반(국무총리)으로 추대된 직후 미국 신문기자와의 회견에서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1948년 1월에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개최된 제55차 ‘미국·캐나다 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지도자 회의’(The 55th conference of officers and members of the Foreign Missionary Board and Committee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에서 행한 연설에서 장차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서약’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그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식의 국회 의장으로서 감리교 목사 출신 이윤영(李允榮) 의원에게 개회 기도를 요청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일에 그는 기독교 의식에 따라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행했다. 이러한 그의 친(親)기독교적 언행으로 말미암아 그의 집권기에 대한민국의 국가 의전(儀典)은 으레 기독교식으로 행하는 관례가 성립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대통령령(大統領令) 혹은 다른 특단의 조치로써 국기(國旗)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하도록 정하며 국군에는 종군목사(從軍牧師)제, 형무소에는 교회목사(敎誨牧師)제를 도입함으로써 ‘동양 최대의 교세’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자신이 표방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위반하면서―4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후보와 공동명의로 ‘전국 교회 150만 신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호소문을 만들어 기독교인 유권자들에게 배포,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1919년의 건국 청사진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한 바 있는 그는 기독교를 헌법적으로 장려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개인적 모범 혹은 준(準)법적 방법을 통해 기독교를 장려한 결과 그의 집권 기간에 남한의 기독교(개신교) 교세는 <표 1>(편집주:생략)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국적 추세 하에서 남한의 총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미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중 약 25%, 그리고 정치적 요직을 점유한 인사들 가운데 약 40%가 기독교인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달리 말하자면, 이 대통령 집권기간 남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의 ‘불교정권’ 및 조선왕조의 ‘유교왕조’와 비교되는―‘기독교적’ 정권이 대두했고 ‘기독교 시대’(Christian era)가 열렸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자신이 해방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및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실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으며 이러한 업적은 대체로 역사적으로 획기적 의의를 지닌 것들이었다.
4. 잘못된 ‘헌법 운영’, 과오도 함께 따져야
이상으로써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12년에 걸친 집권 기간에 성취한 업적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 업적들을 대통령이 되기 전에 포회(包懷)했던 건국 구상과 연결시킴으로써, 그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된 다음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대통령의 업적을 힘주어 부각시키려다 보니 필자의 서술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을 유념하면서 필자는 이 대통령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평가함에 필요한 몇 가지 ‘감점(減點) 고려사항’에 대해 논급하고자 한다.
첫째, 이 대통령의 업적은 대체로 그의 특유한 사상과 비범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공을 전적으로 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대한민국 초창기에 다방면으로 분출된 국가의 ‘발전’ 현상은 근원적으로 해방 이전에 배양·축적된 한민족 전체의 성취욕구와 역량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여러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다른 수준에서 성취할 수 있었던 과업을 도맡아 완수했던 셈이다.
둘째, 이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일부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촉진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 6·25전쟁이 한국 사회의 변화에 끼친 긍정적 내지 부정적 영향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이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들은 대체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입장에 서 있거나 경쟁·적대관계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이나 북한 등의 경우와 비교하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대통령이 성취한 업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한 여러 신생국의 지도자들이 이룩한 성공적인 국가 발전의 한 케이스로서 상대평가(相對評價)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이 대통령의 업적은 대체로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모델로 삼고 미국의 적극적 지원 하에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가 이룩한 일련의 업적은 남한의 ‘미국화’(Americanization)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민족의 전통적 정서에는 미국을 우리의 배타적인 발전 모델로 삼는 데 대한 거부반응 요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온 국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었다.
다섯째, 이 대통령의 업적들은 대체로 장기적 안목의 국익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의 복리(특히 경제) 향상에 직결되지 못해 그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아낼 수 없었다.
여섯째, 이 대통령의 위업은 그의 말썽많은 ‘독재’를 통해 달성된 까닭에 민주주의를 최고가치로 받드는 현대인에게 평가절하(平價切下)되게 마련이었다.
이상 열거한 여러 가지 감점 고려사항 가운데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함은 물론이다. 종래 국내외의 이승만 비평자들은 이 점을 각별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을 역사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평가할 때 그의 독재정치와 그것에서 파생된 갖가지 폐단을 외면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이승만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과오’ 내지 ‘죄악’을 업적 평가에 포함시켜 감안해야 된다.
그런데 이승만 연구사(硏究史)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평가를 시도한 선례를 우리는 김인서의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하 함경도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고 6·25전쟁 전후 부산에서 기독교 목사 겸 잡지 편집인으로 활동했던 남은(南隱) 김인서는 ‘4·19 학생혁명’ 후 대다수 한국인이 이 대통령을 ‘역사의 죄인’으로 몰아붙일 때 홀로 이승만을 변호하는 책을 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대통령을 역사상 빼어난 치적을 올린 ‘희세의 위재’로 평가함과 동시에 그가 동포들로부터 자기의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사실을 개탄하면서 이승만을 《구약성경》<레위기>16장에 나오는 아사실(Azazel) 속죄양 또는 한국 풍속에서 정월 대보름날 멀리 날려 보내는 ‘액(厄)막이’ 연(鳶)과 같은 민족의 희생양으로 묘사했다.
김인서는 이 대통령을 이같이 높이 평가한 근거로서, ① 90평생을 한국독립운동에 국궁진력(鞠躬盡力)한 것, ②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 ③ 6·25동란에 적군을 격퇴한 공로, ④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공로 등 ‘4대 공로’와 ① 한국의 민주주의의 발전, ② 교육의 발달, ③ 전재(戰災) 복구, ④ 경제 안정 등등 ‘8대 치적’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이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치켜올리면서도 ‘이 정권’(李政權)이 저지른 ‘5대 죄과’와 이 대통령의 ‘한가지 죄’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인서가 지적한 이승만 정권의 ‘5대 죄과’는 ① 3·15부정선거를 자행하고 4·19데모 대열에 발포하여 불소(不少)한 사상자를 낸 것, ②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을 일으킨 것, ③ 거창(居昌) 양민학살 사건, ④ 관(官)에 탐관오리와 시(市)에 모리·간상(奸商)·사기·폭력 ; 국회(國會)에 정상배·당파 싸움 ; 민(民)에 밀주(密酒)·밀수·밀음(密淫), 산(山)에 도벌(盜伐)·공비(共匪) ; 지하(地下)에 적도(赤徒) 오열 등 상황을 단속하지 못한 것, ⑤ 반공포로의 불법석방으로 우방(友邦)에 배신한 것이고, 이 대통령의 ‘한가지 죄’는 ‘헌법 운영(憲法運營)을 잘못한 것’이었다.
엄밀히 따져보면 김인서의 이승만 공과론(功過論)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승만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평론함에 있어 이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아울러서 균형있게 다룬 접근방법은 역사의 연구와 서술을 공정하게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모든 역사가들에게 귀감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11월 12,13일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재평가」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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