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최병선, 이영근, 2018.5.8.화. 샘골공원
학교 가는 즐거움을 아는가? 30여 년 전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서울에서 양평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에 가다보면 한강 최하위에 있는 팔당댐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보는 것이다. 그 팔당댐을 지나면 어서 오라는 듯 양팔을 크게 벌리고 반겨주는 곳이 양수리다. 양 줄기에 시원한 물을 가득 담고 푸른 하늘을 머금은 채 한강은 아세아 복음화를 꿈꾸고, 학문과 경건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마지막 명령을 따라 기도에 열정을 가진 우리 학우들을 반겨준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 학교 가는 길은 양수리 조금 지나 있어서 남한강을 따라 길을 가다보면 말 그대로 어디로 도시락 싸들고 소풍가는 기분이 든다.
양평 아신리, 일명 다르래기에 있는 우리 학교는 팔부능선 산에 있어 마치 수도원 같은 분위기가 난다.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로렐라이 언덕에 가면 이 땅의 평화를 품속에 깊이 간직한 남한강 물이 쉼 없이 흘러 남북이 갈린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하나로 이어지길 염원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듯 유유히 흐르며 소리 없는 외침을 들려준다.
새벽이면 다락방 chapel실에서 새벽기도회가 매일 열린다. 처음 입학했을 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는 소명을 안고 엎디어 부르짖어 간구하는 소리가 동녘에 붉은 물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외부강사들이 오셔서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은 수업분위기도 참 좋고 경치가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했다. 물론 학생들도 그 얘기에 다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학교가 산속에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학한 학생들은 그 분위기를 힘겨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작은 매점 외에는 변변한 카페 하나도 없다. 수도원 분위기를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려면 버스를 타고 양평 읍내에 나가야만 했다.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일학년 학교생활을 기숙사에 들어와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해야했다. 심지어 술 담배 하다가 발견되면 퇴학에 처해진다는 규정도 있었다. 경건생활에 따른 새벽기도, 매일 전교생 모여 오전11시에 chapel을 갖고 또 밤마다 매일 Room Chapel 시간도 있었다. 또 밤 10시 반에 한 방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30분 정도 경건의 시간을 보냈다. 사실 즐겁고 은혜로운 시간인데 새벽이나 밤이나 매일 그렇게 하니 거기에 잘 적응이 안 되는 학우들도 있어 가끔 옆으로 걸어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Room Chapel 끝나면 열심이 특심한? 학우들은 에스겔 골짜기라는 기도골짜기에 가서 각자 자기 믿음 크기만큼이나 큰 바위 덩어리를 하나씩 부여잡고 밤늦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고, 나아가 새벽이 밝아와 자신의 눈을 밝혀 줄 때까지 기도의 불을 피우는 학우들도 종종 있었다. 정말 대단했다.
나는 에스겔골짜기 기도에도 갔지만, 밤 기도보다는 새벽기도에 집중했다. 새벽기도회는 매일 여섯시에 열린다. 그리고 경건생활에 도움을? 주기위해 출석 체크도 했다. 나는 그때 기도생활에 정진했다. 신학의 길로 들어선 이 몸, 성경을 알고, 그 성경을 기록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처럼의 사랑’을 깨닫고 더 깊이 알고, 그 은혜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무릎으로 몸부림하며 기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덮거나 춥거나 변함없이 마치 구약시대에 아침저녁 드리는 제사처럼 내 자신을 드리는 시간을 기도에 보냈다.
새벽설교 후 기도시간에 들어가면 나는 강당 바닥에 방석을 깔고 무릎 끓고 엎드려 기도했다. 기도하고 찬양하다 다시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와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면 보통 여덟 시나 여덟시 반이 되었다. 나는 소위 굶식 기도를 꽤 많이 했다. 왜냐하면 아침밥 먹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학년 오월 말까지 굶식 기도가 이어지다가 이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식당 권사님의 배려로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어 큰 힘이 되었다. 지금도 그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고 하면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무릎이 펴지질 않아 한쪽 손을 바닥에 집고 서서히 겨우 일어나 다락방 예배실 밖 테라스에 나가면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태고의 꿈을 안고 고요히 흐르는 남한강물이 내 품속으로 스미듯 맞아준다. 얼마나 평화롭고 즐거운지 모른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 말이 조금은 실감날 정도다. 그 순간 아침 물안개 사이로 조그만 나룻배가 세월을 낚으려나, 노 저어 아직 미몽에 있는 민족을 깨우려나,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지나가면 신비를 가진 한 폭의 동양화가 완성되곤 했다.
이처럼 세계선교의 비전을 갖고 함께 땀 흘리며 눈물로 기도했던 믿음의 용사들이 지금은 세계 곳곳으로 나가 선한 역사를 위해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고 있다. 이런 와중에 다르래기(Acts) 기숙사에서 함께 방을 썼던 이영근형제가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나는 안산에 올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 들르라고 했더니 5월 8일 화요일 바로 오늘 낮에 안산에 온다고 한다. 반가움에 함께 공부하고 기숙사에 놀러와 사진까지 같이 찍었던 최병선 목사에게 안산에 오라고 연락했다.
점심을 함께 먹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신길동에서 일을 마치면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이쪽으로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최목사와 만나 우리끼리 점심으로 짬뽕과 짜장면을 먹었다. 네 시쯤에 전화 왔다. 상록수역에 내린다고 하여 차로 나가 대기했다. 조금 후에 영근 형제가 삼십이 년이 흘렀으나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가. 그는 한의사로 LA에서 동산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녀는 간호학을 공부하는 쌍둥이 딸과 아들이 하나 있는데 셋 다 대학생이라고 한다. 그는 신학공부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어려운 미국생활에 잘 적응하고, 또 중국 가서 한의학까지 공부하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한의원을 잘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원장은 지난 일주일동안 캄보디아 의료선교 갔다가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피곤하지 않느냐 했더니 듬직한 그는 선배님들 만나니 반갑고 기뻐서 피곤한줄 모르겠다며 빙그레 웃었다. 1986년 Acts기숙사에서 함께 사진 찍었던 후배 한남희는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고 있단다.
우리는 며칠 있다가 만난 대학생 때처럼 반갑게 악수하고 일단 샘골교회가 있는 공원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에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에 몸과 마음 바쳐 헌신과 사랑을 쏟아 붙다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최용신(崔容信)의 묘와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 다섯 그루도 보고, 그 당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도 둘러보았다. 그 당시에는 천곡(泉谷)교회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을 순 우리말로 바꾸어 샘골교회라 한다.
이원장은 대학생 때 동아리 활동하며 이곳 샘골교회를 다녀갔다고 했다. 우리는 샘골교회 유적지를 돌아보며 선진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되새겼다. 공원벤치에 앉아 우리들의 Acts 학창시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Acts기숙사에서 한방 썼던 주기철 목사는 러시아 선교사로, 주님 향한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이며 그의 동기인 허민수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하고, 그 외에도 여러 Acts 동문들이 세계 곳곳에 나가 복음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는 청송탁구클럽에 들러 기다리고 있던 큰 아들 명진이를 만나 30분정도 탁구 했다. 저녁으로 동태탕을 먹으며 다르래기 시절 향수를 그리워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난 그가 Acts 기숙사에 한방 썼을 때 얘기하는 것을 듣고 몇 번이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후배들은 자기들끼리 ‘그 방 방장이 누구냐?’ 물으면 ‘김영배 선배다’고 하면 ‘너희들 다 죽었다’고 했단다. 왜냐하면 매일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나가지. 매일 Room Chapel 안 빠뜨리고 밤 열시반이면 꼭 함께 하지. 장난을 치나, 까불기를 하나, 농담은 해서는 안 될 것처럼 항상 경건한? 얼굴을 하고 살지. 후배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경건파? 선배로 보였던 모양이다. ‘꼭 그런 사람 아니었다.’고 아무리 변명해도 이제는 지나간 얘기가 되었다.
후배들은 내가 방에 앉아 성경 읽고 있으면 발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다녔고, 내가 새벽기도 가기위해 먼저 일어나 다락방 Room Chapel 실로 가면서 곤히 자고 있는 후배들을 살짝 건드리며 ‘새벽기도가자’하면 더 이상 잠을 자려야 잘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채플실로 갈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랬구나. 난 군대 갔다가 와서 신학대학 들어 간 소위 예비역이었고, 같은 방을 썼던 후배들은 이제 갓 고등하교를 졸업한 새내기들이었다. 그러니 나이 차이도 있고 신앙연륜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서인지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영근 형제는 그 당시 늘 뒤에서 나를 바라보며 기도했는데, 한 번은 자신이 김 선배보다 더 오래 기도하기 위해 끝까지 기다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아침식사시간이 다 지나도록 내가 계속 기도하니 어쩔 수 없이 자기는 기도를 멈추고 식사하러 갔다고 했다. 사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굶식 기도를 하며 연단을 받는 때였다.
“그때 김 선배의 기도생활, 경건생활을 바라보며 힘을 얻었고,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걷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그의 말에 정말 형용할 수 없는 큰 위로와 감동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LA에서 새벽기도 나가는데 매일 새벽 찬양대에서 찬양을 하고, 또 가끔 찬양대 지휘할 때도 있다고 해서 내가 박수를 보냈다.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가.
그는 “선배가 얘기를 했으면 식사를 대접해줄 수 있었을 텐데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하며 아침 금식 때문에 내가 그렇게 길게 기도한 줄 몰랐다며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는 식사 후에 댕이골 우리 집에 와서 최 목사 아픈 허리와 다리에 침을 놔주고 나서 또 약속 시간에 맞춰 떠나야했다. 저녁 8시쯤 이 원장과 최 목사 떠날 시간되어 상록수역까지 기쁨과 아쉬움을 다시 만날 약속으로 남기고 기꺼이 전송했다. 이제 저들의 앞길에 주께서 함께 하고 저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선한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는 돌아간 후 페북에 이런 메시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