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봉투
은주 누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눈인사만 했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은주 누나는 그때까지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수다 떠는 거 보니까 과부는 과부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걸어?"
그래도 은주 누나는 눈만 흘겼지 계속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밥하는 계집애와 윤정이가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서 은주 누나의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윤정이가 검지를 길게 세워 입술을 가리켰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은주 누나는 퍽 심각한 투로 말하고 있었다.
윤정이가 고전무용에 소질이 있어 퍽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 주는 누나였다. 상장과 트로피가 많아서 윤정이가 보통 소질은 아닌
것 같았다. 장구와 북, 족두리와 부채, 색깔 고운 한복과 장신구들, 고전 무용에 필요한 소도구들이 많았다.
나는 윤정이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 생겼니?"
"삼촌은 몰라도 돼."
윤정이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네 일 같든데?"
"그렇지만 난 몰라."
"삼촌한테 말 못할 것도 있니? 엄마가 속상해 있던데. 무용경연대회 나가서 상 탔잖니? 그것도 금상 받았는데...... ."
은주 누나가 하는 얘기를 간추려 보면 것 같았다.
"엄만, 자꾸 속았대."
"속다니, 왜?"
"엄만, 내 말 안 들어서 그래. 선생님한테 잘 안 보이니까 그랬잖아 머. 다른 애들은 봉투도 갖다 주고 그러는데 우리 엄마는 너무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분명히 네가 금상 받았잖니? 실력이 있어서 받았으면 그만이잖아."
"다른 애들도 다 받은 걸 머."
"어떻게 다 받어?"
"우리 학교 애들 다 상 받았대 멀. 그러니까 속았대잖아."
은주 누나가 언성을 높이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금상은 너 혼자 아니니?"
금상이면 내 상식으로 한 사람만 받는 거였다. 1등을 두 명씩이나 주는 경우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없는 법이었다.
"아냐. 우리 학교엔 네 명이 금상이래."
"전국경연대회 아녔니?"
"엄마가 다른 학교에 알아봤는데 금상 받은 애가 다른 학교에도 많대."
나는 더 묻고 싶어도 윤정이가 가슴 아파할 것 같아서 더 묻지 않았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았다.
윤정이가 며칠 전에 받아온 금상 상장과 메달이 응접실에 진열되어 있었다. 윤정이가 그동안 받은 상장과 트로피들보다 오히려
맵시가 있게 생긴 상장과 메달이었다.
세계문화협의회라는 단체이름도 거창했지만 다른 상장과 달리 금박지와 영문판의 상장까지 따라붙은 것이 퍽 권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권위 있는 단체에서 세계적인 행사로 벌인 무용경연대회가 속임수였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 일본, 중국, 캐나다, 영국, 독일 등지의 어린이들까지 다채롭게 출전하여 무용과 음악, 미술 등 예능 솜씨를 겨루는 대회라고 했다. 윤정이가 그런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게 대견스러워 내가 인형을 선물로 주기까지 했었다.
세계문화협의회에서 만든 팸플릿을 보면 십수 년이 넘게 그런 대회를 치렀고 대회위원장이나 운영위원들, 고문이나 심사위원들, 협의회 회장단이나 후원하는 단체들은 모두 굵직굵직한 인사나 단체들이었다.
은주 누나는 아직도 전화기를 붙들고 상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꾸하는 것을 들어보니 윤정이 말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다.
전화를 끝낸 은주 누나는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을 평소에는 보기 어려웠었다.
"누나, 왜 그래?"
"한심해서 그런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니?"
은주 누나는 흥분해 있었다.
"말해야 알지? 뭐가 잘못 된 거야?"
"세상이 말세가 되려나 보다. 배우는 애들한테 사기치는 게 버젓하게 움직이니 말이다. 그것도 큰 문화단체고 운영자도 큰소리 치는 사람이 말이다."
"누난 순진해서 그래. 세상이 어떤 곳인 줄 알기나 해? 배우는 학생들 얽어서 뱃속 채우는 부류가 어디 한두 군덴 줄 알아? 우리나라 장난감이나 아이스크림이라고 속여 파는 얼음과자 만드는 작자들 투성인 것 몰라? 하나님도 두 손들 친구들이 수두룩하다니까."
내 말은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장난감을 보면 그 나라 어른들이 그 나라의 미래를 걸머진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즐겨 먹는 것들을 이용해 치사하게 돈벌이하는 부류를 보면 그 나라의 교육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런 부류들은 어린이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려는 음모자인데도 이 나라 법이 무른 건지 아니면 그런 부류들은 돈이 많아서 법망을 피해 가는 기술이 있는 것인지 몰라도 펄펄 살아서 갖은 재미는 다 보고 가는 것 같다. 서민이 조금만 잘못해서 옭아넣는 일에 이골이 난 양반들도 돈 앞엔 할 말도 없는 것 같다.
코끼리가 밟아도 끄떡없는 장난감을 외국사람처럼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다. 하루만 가지고 놀아도 못 쓰게 되거나 속상하게 되어 버리는 장난감을 만들어 파는 제 정신이 아닌 친구들이나 그런걸 두 눈 뜨고 보면서 국민의 일꾼입 네하는 자들이 침묵하거나 이상한 짓을 뒷구멍으로 해치우는 건 도대체 어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설탕물에다 색깔 섞고 요리조리 장난질쳐서 아이스크림 흉내를 내놓고 마치 선심이나 쓰듯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빙과류라는 작은 글씨를 넣어 놓는 상혼은 왜 눈 감아 주는 걸까? 거기다 무슨 외국 이름자를 늘어 붙여놓는 버릇은 쪽발이들한테 쪽발이라면 발톱 때라도 핥아먹을 부류들일 것이다. 그런 친구들은 제 자식 이름도 아마 서양식으로 메리, 도그, 워리, 쫑쫑, 끼끼...... 그렇게 지어 줬을 것이다.
은주 누나는 고개를 흔들며 분해서 못 견디겠다고 했다.
"말해 봐. 끙끙 앓지 말고."
"말해 봤자지만...... 이건 너무 하잖니."
"그러니까 말해 보란 말야."
"윤정이가 타온 금상이 속은 거였어. 세계문화협의회란 데가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자녀를 데려다고 전원에게 상을 주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아이들 잔뜩 데려다 참가비 몇 만 원씩 받아먹고 마구 상장을 뿌렸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니?"
"참가비 얼마였어?"
"4만 원씩 냈단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윤정이네 학교에서 단체무용까지 열 명이 출전했는데 모두 상장 받았대. 윤정이가 금상이고 나머지도 은상, 동상, 특별상......
그런 식였대.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른 학교도 모두 그런 모양야. 그래서 몇 군데 확인해 봤어. 내가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기
쉽잖겠니? 출전했다 하면 다 상을 준 모양야."
"그 친구들 장사 잘했겠네. 4만 원씩 천 명만 받아도 4천만 원 아냐? 문화 장사꾼한테 걸린 거구만."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무용선생이 이상하게 졸라대는 거야. 한 학교에서 열 명 이상 출전할 수 없다면서 자꾸 내보내래. 시상식도 없었어. 그냥 개인이 몇 일 몇 시까지 어느 호텔로 나오라고 해 놓고 상장하고 메달만 내 주는 식이었어. 먼저 같이 있던 동료 선생 중에 무용하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출전시켜 주는 머리수에 따라서 봉투까지 주는 모양야. 그 선생은 그런 걸 아니까 거절한 모양야. 열 명이 넘으면 소문이 날 테니까 제한하는 모양이지."
누나가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은주 누나는 자세하게 알진 못하지만 대충 세계문화협의회란 단체와 선생들이 가담한 사기극을 설명해 주었다.
"누나, 솔직하게 말해서 선생들도 일급지니 금싸라기 학교니 해서 빽 쓰고 돈 써서 교육을 빙자해 돈 벌러 다닌다는 말 있던데?"
윤정이가 다니는 학교가 이른바 일급지였고 돈 봉투 흥청거리는 학교라는 말이 있었다.
은주 누나도 가끔 봉투 들고 쫓아가는 눈치였다.
"그거야 머...... ."
은주 누나는 말끝을 흐렸다.
"나도 다 알아. 누나도 애를 가르친 사람였고 이젠 별 수 없이 봉투 들고 쫓아다니는 여자가 됐다는 걸."
"쟤는...... ."
"누나 입장에서 할 수 없겠지. 혼자 사는 여자라고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도 싶겠고 윤정이가 부반장이라도 계속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윤정이가 그런 소리 하는 걸 나는 들은 적이 있어. 엄마는 선생님을 자주 찾아가지 않기 때문에 부반장밖에 못한다고. 반장하는 애 집은 부자고 아버지가 높은 사람이라 엄마가 아예 기 죽어서 그런다는 거야.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난 알잖아. 윤정이 친구들도 그러던데 멀. 누구 엄마는 매달 얼마씩 내고, 누구 엄마는 선생 생일날 행운의 열쇠 해 줬고, 누구네는 기름값 대 준다고. 누난 선생 노릇까지 한 여자야. 누나도 그런다는 걸 모를 줄 알았어? 제발 내 누나만은 안 그런 여자였으면 좋겠어."
은주 누나는 고개를 돌렸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윤정이네 학교의 어떤 선생은 노골적으로 봉투를 요구한다는 걸 알아. 양심적인 선생도 많지만 비열한 선생 숫자가 너무 많단 말야. 누나 같은 여자들이 있으니까 그런 선생이 늘어나는 거야. 윤정이가 컸을 때를 생각해 봐. 세상은 돈 가지고 해결하는 거라고 믿을 거고 선생이란 모두 돈독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겠어?"
"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
"왜 안 돼?"
"부모 맘이란 게 어디 그러니?"
"이해는 돼. 그러나 이건 너무 하잖아.
윤정이네 학교 2학년 담임하는 강선생인가 하는 여선생 소문 들었지? 애들이 모두 얘기할 정도면 그게 어떻게 선생야. 누나만은 제발 그런 여자가 되지 마. 돈 좀 있는 여편네들이 선생 돈 갖다 주는 시합하는 판에 누나가 왜 껴드는 거야? 제발 그러지 마."
"그만 하자. 내가 왜 잘못을 모르겠니. 자식 키우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됐지만...... ."
누나는 힘없이 선생들이 노골적으로 봉투를 요구하거나 봉투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드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런 선생이 너무 많다는 얘기는 충격이었다.
하나님,
교육자라고 해서 덮어두는 일만이 미덕은 아니잖습니까? 그런 건 더욱 뒤집어 볼 일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이 땅덩어리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겁니까?
스승이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존경의 대상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승은 값진 유산을 남길 뿐 아니라 그 나라의 백년대계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엔 존경할 만한 스승이 많다. 그러나 존경받을 수 없는 스승이 더 많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가 없다. 사랑의 매질이란 미명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스승은 선생이 아니며 월급 액수만큼만 선생 노릇하려는 사기꾼들이 선생일 수 없는 것이다. 또 학생들을 현금 확보의 매개체로 생각하는 이른바 봉투에 눈이 어두운 수많은 선생들은 결코 선생이 아닐 것이다. 그런 선생들은 교육을 빙자한 교육상인일 수밖에 없다.
전 국민의 더부분은 학부모였거나 학부모 노릇을 하고 있으며, 어린애들도 세월이 가면 학부모가 될 것이다. 많은 학부모들은 음으로나 양으로나 봉투나 봉투와 유사한 물건을 선생에게 바쳐본 사람들일 것이다. 전에는 의사나 변호사, 세무서원들을 허가낸 도둑놈이라고 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선생을 허가낸 도둑놈이라고 한다. 의사나 변호사나 세무서원 따위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선생이 허가낸 도둑놈으로 하락한다는 건 가장 끔찍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누나, 내가 해결할 테니까 그동안 억울했던 일 있으면 죄다 털어놔 봐."
은주 누나는 손을 내저었다.
"얘가...... 그냥 있어.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떻게 선생을...... ."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니까 그래. 내 자식 가르티는 선생이니까 속상해도 참고 지내자는 그 생각 때문에 봉투 주는 게 습관이 됐고, 사회문제로 번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음성적으로 학부모와 선생 사이의 돈거래와 흥정봉투가 난무하는 거란 말야."
선생들은 펄쩍 뛸 것이다. 증거를 대라느니, 어찌 선생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면서 악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인 걸 어쩌랴. 나도 그것만은 거짓이기를 빌지만...... .
"내가 잊어 버리면 그만이지 머. 그만두자."
은주 누나는 괜히 말했다 싶었는지 발뺌을 하려고 했다.
"그게 자식 키우는 부모의 약점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내가 이담에 학부모가 돼도 그렇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없어. 어른들 말 처럼 자식하고 연관된 문제는 자신있게 말하는 법이 아니라고 한대잖아. 그러나 자식 키우는 게 약점이라고 해서 선생들과 음성적인 봉투거래가 지속된다고 생각해 봐. 배우는 애들도 다 알고 있는 이 끔찍한 불신의 뿌리가 나중에 무슨 문제가 되겠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냅둬."
은주 누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내 성깔을 알기 때문에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덮어두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러나 누나만은 제발 자식 키우는 게, 자식 가르치는 게 약점이 안 됐으면 좋겠어. 자식 가르쳐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봉투를 통해 득을 보려는 건 분명하게 다른 거야. 누난 제발 선생을 치마폭에 싸들고 노는 치사한 여편네가 되지 마."
나는 덮어두는 체하고 나왔다. 은주 누나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반장 다툼이나 등수나 성적 조작이나 시험지 부정 따위를 통해 멋진 사모님이 되고 싶은 여편네들의 봉투 바람만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런 돈을 받아먹는 뻔뻔스러운 선생들이 이 땅에 음흉하게 많다는 사실은 이 땅의 장래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봉투를 요구하는 곤두박질 친 사도가 바닥으로 기어다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선생만은 제발 놔두세요. 이 땅의 스승상이 무너지면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선생 가운데 가장 봉투를 밝힌다고 소문난 강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란이 삼촌되는 사람입니다. 영란이 아버지께서 뭣 좀 전해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학교 앞 유정 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강선생의 카랑카랑하고 신경질적인 음성이 경쾌하게 들렸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로 나갈 테니까."
나는 전화를 끊고 책갈피 속에 든 하얀 사각봉투를 의미있게 쳐다보았다. 그 봉투 속엔 천 원짜리 한 장이 두꺼운 편지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천 원 한 장 던져 주기도 아까운 여자지만 속을 떠보기 위해선 할 수 없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강선생은 퇴근차림으로 들어섰다. 옷매무새는 수수해 보였으나 눈꼬리와 날카롭게 생긴 하중이 빠르게 생긴 것이 감정적으로 싫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테가 큰 안경이었다. 얼핏 보기엔 퍽 이지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형님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우리 영란이가 어떤지도 알고 싶고...... ."
강선생은 생글생글 웃었다. 들어설 때의 표정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영란인 퍽 착해요. 공부를 좀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만요. 부모님이 너무 관심을 갖지 않는가 봐요. 영란이네 식구 뵌 게 오늘 첨예요. 몇 번 상의할 일 있다고 오시라고 했지만 깜깜 무소식였어요. 부모님이 너무 하시다 싶었어요. 솔직하게 서운하기도 했고요.
"죄송합니다. 형님이나 형수께서 워낙 주변이 없으시고...... 빈손으로 오시기도 민망하고 하니까 그러셨겠죠. 그래서 제가 찾아 뵙는 겁니다. 영란이도 다른 엄마 아빠는 다 찾아와 인사하는데 왜 안 가느냐고 떼를 쓰더군요. 어린 게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영란이가 똑똑하거든요. 다른 말은 안 했어요?"
"어린 게 영악스러워요. 제 저금통을 찢어 놓고 봉투에 죄 담더니 제발 엄마가 학교에 좀 가보라고, 선생님 좀 찾아가 보라고 울더군요."
"차암, 영란이 걔가 좀 엉뚱한 데가 있어요. 애는 착한데...... ."
강선생의 낯빛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찾아 뵐 테니 우리 영란이 좀 잘 가르쳐 주세요.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게 대죄진 건 아니지만 저희들이 도리를 다 못해서 할 말은 없습니다. 이건 형님 내외가 성의로 드리는 거니까 받아 주세요."
나는 하얀 사각봉투를 내밀었다. 강선생은 재빨리 봉투를 받아 차탁 밑에 감추었다.
"이거, 이러시면 안 되는데...... 어려우실 텐데...... ."
"저희들 성의라니까 그러세요. 넣어두세요. 적습니다."
"영란이는 지도만 잘하면 다른 애들한테 결코 안 떨어질 애예요. 아시겠지만 머리는 좋거든요."
강선생은 한참 동안 영란이란 계집아이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봉투를 받았다는 영수증이 바로 영란이의 장점을 억지로 분석해 주는 것 같았다.
강선생이 발행할 수 있는 영수증이란 그것뿐이었다. 영란이란 애가 괜찮은 집 딸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면 더 큰 영수증이 있었겠지만 영란이란 계집아이는 그 정도 영수증밖에 받을 수 없는 애였다.
"잠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뭐 가져다 드릴 게 있는데 제 차 속에다 놓고 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강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면 됩니다."
나는 다방문을 밀고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웃었다. 시원한 차 두 잔 값과 담배 한 갑 값을 물어내야 할 강선생의 꼬락서니를 지켜볼 심산이었다. 내가 넣어 준 봉투를 열어보면 차값과 담배값 계산하기도 적은 액수와 혹독하게 쓴 편지 한 통뿐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몸을 부르르 떨겠지.
하나님, 그 속엔 이렇게 써 놨습니다.
그만 봉투 좀 밝혀라. 이 천하에 더러운 돈벌레 계집아.
나는 다방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칸막이 뒤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강선생은 자꾸 출입문 쪽을 살펴보았다. 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강선생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올 때의 표정은 보통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잔인한 꼴을 목격한 여인의 표정이라고 해야 옳았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봉투를 뜯어보지 않았던들 그녀의 행복감은 조금 길었을 것이다. 그래 보았자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카운터 옆을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앙칼진 다방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고 강선생은 신경질적으로 핸드백을 열었다.
나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강선생은 그녀의 일생 전체에서 가장 참담한 꼴을 지금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이라는 명칭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녀의 지나친 행동은 여태 묻히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에 걸린 이상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다운 선생을 능멸하는 이 여자의 행위를 사회는 그동안 용인해 왔다. 용인하는 걸 미덕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강선생의 눈빛엔 살기마저 느껴졌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거 한 개 드시죠."
나는 50원짜리 빨아먹는 얼음과자를 내밀었다. 비닐 속에 단물을 넣어 얼린 얼음을 그녀가 받을 리 없었다.
"맛있습니다. 쪽쪽 빨아먹으면."
내가 내미는 것을 뿌리친 그녀는 앞서 걸었다.
"이봐요, 얼음과자 좋아하잖아요. 철없는 다니는 거 아닙니까."
"이거 왜 이래요?"
강선생의 목소리가 날 서는 것 같았다.
"철딱서니 없는 애들이야 이런 거나 좋아하잖소? 자, 듭시다."
나는 강제로 얼음과자를 내밀었다.
"당신 누구예요?"
"당신하고 필연적으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내올시다."
"소리칠 거요. 물러서요!"
"뭐라고 소리치시려고 그러십니까? 학부모한테 봉투 뜯어먹고 살았다고 진술서 쓰시려고 한번 소리질러 보시지."
"...... ."
강선생은 더 빨리 걸었다.
"이봐, 강선생씨. 한번 소리질러 보시라니깐 그래. 나는 선생을 빙자해 봉투 속의 현금만 눈에 불 켜고 다닌 선생 중의 선생이다, 이렇게 소리 치시라니깐."
"저리 비켜요."
강선생이 도망치듯 뛰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강가 선생. 그럼, 내가 소리쳐 드릴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난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예요. 선생한테 장난칠 수 있어요?"
그녀는 내가 영란이란 계집아이와 어떤 연관이라도 있기를 지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선생님들을 존경합니다.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은 돈 같은 걸 밝히고 성적을 조작하거나 세계문화협의회 같은 데서 돈 받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농락하진 않았지요. 우리 때 선생님들은 정말 선생님다운 분들이었어요. 요즘도 좋은
선생님들은 많지요. 당신 같이 개떡같은 선생이 늘어나서 병이지만."
"정말 왜 이러세요? 어쩌자는 거예요? 협박하는 거예요?"
강선생이 턱을 세우고 대들 기세였다. 나는 웃어 주었다.
"그럼, 나도 흥정 좀 해 봅시다. 잠깐 저리로 갑시다. 작은 소리로 조용하게 속삭이며 말합시다. 내 목소리가 태어날 때부터 커서 말입니다."
강선생은 두리번거리더니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여긴 당신네 학교 앞입니다. 떠들면 금세 볼 만하게 될 거요."
"빨리 가요."
"이리 오시죠."
차 문을 열었다. 그녀는 순간 굳어졌다.
"누구시죠? 어디서 오셨죠?"
그럴 때의 강선생 표정은 너무나 순박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어서 타요."
"누구?"
"타라니까 그래요."
그녀는 힘없이 올라탔다. 조심하느라고 다리를 여미고 눈을 내리 깔았다.
"자, 이것부터 먹어요."
그녀는 저항 없이 얼음과자를 받았다.
"다 먹어야 얘길 시작하겠소."
그녀는 마지못해 얼음과자를 깨물어 먹었다.
"그럼, 얘길 해 봅시다. 학부모한테 정기적으로 봉투를 받죠?"
"아녜요. 가끔 보내는 분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요. 정말예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독해서 쉽게 실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봐요, 강선생. 내가 당신 남편처럼 속 없는 사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말하쇼. 지금부터 거짓말하면 수챗구멍에 박아 버리든가, 학교 똥통에다 박아 버릴 테니까 수틀리게 나와 보쇼. 당신 한 달에 받는 봉투가 몇 개나 되며 얼마나 되는지 말해 보쇼."
"별로 없어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디서 오셨는데 이러세요?"
"너, 정말 이 따위로 해 볼래?"
나는 엑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말할게요, 말할 테니 내려 주세요. 제발
나는 이를 앙다물고 차를 몰았다.
하나님, 선생 아니라 선생 할아비라도 교육을 빙자한 사기꾼이면 수챗구멍에 박아 버려도 괜찮겠죠?
차라리 치마 벗어들고 돈을 긁어모을 일이지 자라나는 아이들이 알 정도로 돈을 밝히고 성적을 조작해 주고 반장 선거전을 조작하는 일만은 그냥 둘 수 없잖습니까.
하나님,
용서하는 게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잖습니까.
으슥한 계곡까지 강선생을 끌고 올라갔다. 계속 빌고 솔직하게 털어놓겠다고 주절거렸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애들 가르쳐야 할 사람을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안 그럴 테니 보내 주세요."
"너 같은 년은 주리를 틀어놓아도 시원찮은 년이다. 한번 얘기할 때 고분고분한 년도 아니겠지만, 옳은 소리하는 말 무시하다가 네 신세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마."
"선생님, 제발...... ."
"내가 네 선생이냐? 그럼, 너도 봉투 좀 내놔 봐라."
"하란 대로 다 할게요."
"그럼 옷 벗어라."
"그건...... ."
"하란 대로 한댔잖아, 이년아."
"저...... ."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웃옷을 벗고 치마를 끌어내렸다. 삼십대 여인의 풍요가 보였다.
"더러운 계집년 같으니라고. 그래 옷 벗어서 네 죄하고 무마하려고 그러냐? 이 속 없는 년아."
그녀는 재빨리 옷을 입었다.
"죄 얘기해라. 다 알고 왔으니까 한마디라도 거짓말 했다간 정말 학교 운동장에다 발가벗겨 던져 놓을 테니까."
"네, 말할게요."
그녀는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반장네 집에선 한달에 10만 원씩, 부반장네 집에서도 5만 원씩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한 학기에 두 번쯤 전 학부형에게 최저 1만 원에서 5만 원선까지 봉투를 받는다고 실토했다. 안 주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 찾아오게도 하고, 시험지나 통신란을 통해 찾아오지 않은 보복을 보여 주면 학부형이 알아서 봉투를 만들어 온다는 것이었다. 봉투 대신 물건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저만 그러는 게 아녜요. 다들 그러는데요 멀. 저만 왜 닥달하세요."
그녀는 궁지에 몰리자 동료 교사들을 물고 들어갔다.
"물귀신 같은 년."
나는 사정두지 않고 속으로 멍이 들게 갈겨 주었다. 강선생은 대굴대굴 구르며 울었다.
"세계문화협의회에 한 사람 보내면 얼마씩 받았냐?"
"만 원씩요."
"몇 명 보냈냐?"
"무용에 열 명, 음악 콩쿠르에 열 명......."
"누구한테 돈 받았냐?"
"박부장한테요."
나는 대충 세계문화협의회의 수법을 메모한 뒤에 강선생에게 각서 한 장을 받았다. 이후 단 한 번이라도 봉투를 받는 날이면 학교에 폭로해도 좋다는 각서였다.
거창한 간판을 읽어 내려갔다. 사단법인 세계문화협의회.
나는 속으로 거창한 이름과 거창한 인물들이 저지르고 있는 비열한 작태를 어디서부터 벗겨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회장단과 고문이란 직함을 가진 거물인사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자칫 잘못 손을 댔다가는 뒤집어 쓰는 불행한 사태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거물급 인사들이 노후대책 때문에 철모르는 어린이들 돈을 알겨먹고 사는 것일까?
늙으면 추악해지는 게 우리나라 늙은이들의 전통이란 말도 있었다. 깨끗하고 어른답게 늙은 사람도 많지만 무엇인가 좀 했다는 치들은 늙으면 거의 모두가 추악해진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었다. 무식한 사람은 변절자가 되려고 해도 될 게 없지만 유식한 사람들은 곱게 늙기가 어려운지 걸핏하면 변절하기 일쑤였다.
존경받던 지식인들 대부분이 훼절의 대명사가 되어 추악한 웃음을 흘리고 있고, 하나님을 앞세워 민중의 일꾼인 것처럼 떠들던 종교인들은 가짜라는 게 드러났고, 정직한 언론인으로 진리와 정의의 사자처럼 굴던 언론인들은 대개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했던 게 드러났다.
학생들 앞에 서서 제일 꼿꼿한 것처럼 굴던 "교수들은 눈이 빨갛게 제 꽁무니를 물고 미친 개처럼 뱅글뱅글 돌았고 민족의 지도자연하면서 국민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떠벌리던 친구들은 사리사욕의 대명사였다는 걸 국민들이 눈치채고 말았다.
세계문화협의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법 넓은 사무실에 집기와 꾸밈새가 이름만큼이나 찬란해 보였다. 직원들도 꽤 많았다.
"박부장님 계세요?"
여직원 앞에 가서 정중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죠?"
"서울서 왔습니다."
"누가 서울서 온 걸 몰라요?"
"아, 어느 곳에서 나왔냐 이겁니까?"
"어째 오셨어요?"
"여기 취직하러 왔습니다."
"우린 직원 안 뽑는데요."
"박부장님이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럼 저 안으로 가세요."
나는 여직원이 가리키는 대로 안쪽으로 갔다. 문을 노크하자 굵은 목청의 사내가 들어오라고 했다.
"실례합니다, 박부장님을 찾습니다."
거만한 몸집의 사내였다. 금테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소파를 가리켰다. 듬직한 모습이 누가 보아도 큰일을 하는 사람처럼 볼 것 같았다.
"어디서 오셨소?"
"네, 혹시 염라대왕이란 양반을 아시나 해서 들렀습니다."
"뭐라구요?"
잘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반문하는 건지 표정이 얼떨떨한 것 같았다.
"당신 뭐야?"
"사람입니다. 확실하게 사람입니다. 주민등록도 있고 이름도 있습니다."
"어허!"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사기쳐서 어린 학생 농락하는 애들 있으면 염라대왕이 조기 묶듯 죄다 묶어가지고 오라더군요."
"이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감히...... ."
덩치 큰 박부장은 금세라도 내 멱살을 옭아쥘 표정이었다.
"쌈 잘하슈?"
내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당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몹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냐? 이거, 순 공갈배 아냐? 여봐, 이 자식 끌어내!"
큰소리 나는 기색을 엿보던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나, 손대지 마슈. 다쳐 가지고 온 사람이라 건들기만 해도 치료비 단단히 물어야 될 거요."
소파에 버티고 앉아 이렇게 말하자 아무도
성큼 손 대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침입자처럼 들어왔어도 손 댔다가는 덤터기 쓴다는 걸 아는 사람들 같았다.
"너, 뭐하는 놈이냐?"
박부장이 목청을 낮춰 이렇게 말했다. 함부로 다루어서 덕볼 게 없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염라대왕하고 친한 사람요."
"여기가 어딘 줄 아냐?"
"아다마다요. 상장 남발하고 선생들 꼬드겨서 이상한 행사나 해서 배때기 불리는 데라는 것 정도는 알죠. 겁나게 생긴 자식들 먹고 사느라고 겁나는 짓하는 데라는 것도 압니다. 한가락 한다는 늙은 것들은 여기 다 있는 모양입니다. 그 늙은 것들 상판대기나 보고 가렵니다."
"어허, 이 자식 봐라. 어이, 경찰에 연락해 버려."
박부장이 어이가 없는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내가 부장석 전화기를 잡으려고 했다.
"이봐, 젊은 친구. 전화 잘못 걸면 손모가지 부러져. 내 얘기 끝나거든 전화를 걸든 목을 비틀든 하란 말야."
"빨리 연락해!"
박부장 목소리가 커졌다.
"이봐, 박부장이 내 여잘 건드렸단 말씀야. 제 애인 뺏기고 언놈이 눈깔 빼고 그냥 있겄냐? 부르고 싶으면 불러라. 박부장이 빵간가면 김밥 싸가지고 열나게 면회 다니고 싶으면 전화를 빨리 걸라구."
순간 모든 사람이 멈칫했다. 박부장의 낯빛이 금세 얼크러져 보였다.
"이 자식, 이거 정신 없는 놈 아냐? 돈 놈이구만."
박부장이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웬만큼 나이 든 사내에게 그런 식으로 치고 들어가면 오금이 저리지 않은 사내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박부장처럼 돈 긁어모으는 일에 능통한 사내들 짓이란 뻔한 것이었다.
"그럼 떠들어 보실까?"
나는 수첩을 꺼냈다. 수첩 속엔 전화번호 뿐이었지만 겁을 주기에 충분한 임기응변이었다.
"이거 돈 녀석하고 말이 안 되겠군. 돈 뜯으러 다니는 놈들이 많다더니 이놈이 그런 놈인 모양이구만. 자네들 나가 있게."
사람들이 몰려 나갔다. 박부장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현명하오. 생긴 것처럼."
"할 말 있으면 해 봐라. 얼마가 필요해서 그러는지 좀 알자."
"묻는 말에 서슴지 말고 대답 좀 해 보슈."
"해 봐라."
"혓바닥 반은 집에 두고 다니슈?"
"말하래두."
"그럼 우리 신사적으로 야자 타임 갖자. 너같은 자식에게 내 혀도 온전하게 놀려대긴 싫으니까. 음악 콩쿠르, 미술대회, 무용대회 하는데 얼마나 벌었냐? 같이 좀 쓰자. 여기 회장이란 작자가 알고 보니 사기꾼이라는데 너도 사기를 전공으로 해서 먹고 사냐?"
"이놈 봐라!"
"칵!"
나는 벌떡 일어나 박부장 목을 옭아쥐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바닥으로 내던졌다. 버둥거렸지만 제대로 말을 못했다. 혈을 짚어서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밖으로 걸어나와 서류철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박부장님이 행사서류를 가져오랍니다. 원본 가져오라던데요."
여자직원이 서류철을 뒤적거려 한아름을 안고 부장실로 들어갔다.
"어마!"
나는 서류철을 채뜨려 박부장 책상 위에 던졌다. 여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사기꾼들아. 무얼 못해 처먹어서 어린 학생들한테 사기쳐서 상장으로 돈을 만들어 처먹었냐? 이게 그 서류다. 증거물이 내 손에 있는 이상 너희들 맘대론 안 될 거다. 그래도 용감한 놈 있으면 경찰서에 전화를 해 봐라." 사람들이 주춤거리고 잇었다.
"5초 내로 이 방에서 안 나가는 놈은 박부장처럼 거품을 쏟게 하겠다."
"이봐, 할 말 있으면 맘 놓고 해 봐라. 이 장부는 내가 가져가겠다."
"여보세요, 그건...... ."
"안 된다는 거냐?"
"제발 이러지 말고 말로 해 봅시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 해 보시오. 같은 사내끼리 못할 말이 뭐요?"
"너, 말 한번 잘했다. 사내끼리 터 놓고 말 좀하자. 그래 선량한 학생들한테 몇 만 원씩 참가비 받아서 상장을 몇 만 장씩 만들어 나누어 줘서 배때기 채우는 게 잘난 놈들 할 짓이냐?"
"그게 아닙니다. 저희들은 자라나는 아동들을 격려하여 세계적인 문화를 형성시키자는 목적 아래...... ."
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박부장은 대자로 뻗어 누웠다.
"사내끼리 사내답게 말할 때 사기치면 그 꼴이 된다. 너희 회장이란 작자는 뭐하는 친구냐?"
"사회사업도 하시고 한때 정치도 하셨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고문들 명단에 정치가, 학자, 교수, 성직자, 의사, 예술가, 재벌들이 끼여 있을 만 하겠다. 그치들한테 얼마씩 주냐?"
"드리는 거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한 번 행사 치르면 얼마나 남냐?"
"...... ."
박부장은 또 한 번 나가 떨어졌다.
"그 장부에 다 있습니다."
다급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부를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상장과 메달 만드는 일에 돈을 쓴 게 별로 없었다.
교사들에게 협조비로 준 액수가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끔찍스러운 것은 참가학생 몇 천 명 전원에게 금상, 은상, 동상 그리고 특별상과 대상, 장려상과 장원 등의 상장을 다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 상장 장사지 세계문화가 어쩌구 하는 데가 아니잖냐?"
박부장이 고갤 숙였다.
바깥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알만한 얼굴을 가진 노신사가 들어왔다.
"당신이 박창수 영감요?"
"그렇소."
역시 거물다웠다. 의젓하게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젊은 애가 박창수 회장 뒤에 버티고 섰다. 박부장은 생기를 찾은 듯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는 거요? 나하고 애길해 봅시다. 나 박창수란 사람이오."
"압니다. 정치도 했고 사회사업도 했고 지금 사기집단 왕초 노릇 한다는 것도."
"젊은 사람이 너무 막말하누만. 이봐요, 난 평생교육에 일생을 바친 늙은이요. 이 땅의 미래를 위해 아동들에게 예술의 꿈을 심어 주고...... ."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창수 영감의 멱살을 잡았다. 젊은 사내가 주먹을 날렸다.
나는 재빨리 몸을 피해 그 주먹에 박창수를 내밀었다. 박창수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안경이 박살났다.
"왕초 때리는 졸개야, 이리 와서 두어 대만 맞아라."
나는 젊은 사내를 비틀어 내던졌다. 박부장 옆에 고꾸라져 누웠다.
"박창수 영감 들으슈. 당신 부하가 당신 친거지 나는 손 하나 대 본 적이 없소. 이제 실토를 하시지 그러슈. 정치나 했다고 거들먹거리며 사회 저명인사 이름 빌어 이런 고급 사기집단 왕초 노릇하는 재미가 어떤지 말요. 애들한테 몇 만원씩 울궈내서 두 달에 한 번씩 각종 대회 열어 돈 챙기는 게 평생교육이고 이 땅의 미래란 말요?"
"이봐, 이봐 내 얘기 좀 듣고."
박창수가 고통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으로 나를 잡았다.
"제발 곱게 늙으슈. 뭐 좀 안다는 늙은이들이 이 따위로 늙으니까 젊은 애들이 본받잖소. 차라리 예날 하던 식으로 큰 사기나 쳐서 떼부자 되는 게 낫잖소. 당신 정치 한답시고, 사회사업한답시고 배 채운 거야 천하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소."
"이봐, 젊은이. 그건 그런게 아니라 좀더 나은 평생교육장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준비하고 기획하고 있는 걸 들으면 알걸세만."
"사기꾼 왕초 노릇하려면 변명이나 말재간이 일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고문이라는 자식들이 거물들로만 구성됐습디다. 후원회 인사도 쩌렁쩌렁한 치들입디다. 다 폭로해서 어떤 꼬라지들인가 보여 주겠소."
"젊은이, 그분들은 아무 죄도 없도. 내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그냥 명단에 넣어 놓은 거요. 왜 거짓말을 하겠소."
박창수가 겨우 소파에 기대않아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최소한 승낙은 했을 거 아니오?"
"내 얼굴 봐서 그러라고 한 것뿐요."
"당신, 정치할 때도 국민한테 그런 술수로 사기치더니 죽을 때까지 사기치고 살 거요? 배우는 애들 데리고 장난 좀 하지 마슈. 애들먹는 과자나 얼음물 얼린 것 따위, 애들 장난감, 애들 옷, 애들 좋아하는 것 가지고 장난질 치는 새끼들은 지옥에 가도 똥통 속에 거꾸로 박힐 거요. 당신은 한때 이 나라 지도자였소. 오늘은 비겁한 상장 장사꾼 두목으로 전락했소. 왜놈들 붙어먹다 살아남은 놈들치고 국민한테 사기 안 치는 놈이 없소. 이 더럽고 치사한 늙은 것아."
나는 사정없이 박창수를 까발겼다.
"너 같은 민족배반자들이 여태까지 민족지도자니 대학자니 너울 쓰고 잘 처먹으며 살았지.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너희들은 가면 쓰고 폼나게 살았지. 어디 한번 이 땅의 어린이들까지 사기 처먹은 네 배짱의 끝 좀 보자."
나는 있는 대고 폭언을 퍼부었다. 박창수가 미운 생각대로라면 치도곤을 내고 싶었지만 늙은이를 차마 두드려 팰 수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창수가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내 부탁 하나 들어 주겠소?"
"타협을 합시다. 낼 모레면 죽을 늙은이오. 맘 편히 죽게나 해 주시오. 억지는 쓰지 않겠소."
박창수 표정은 퍽 지쳐 보였다. 진지함도 엿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친일파 배신자들처럼 타협을 하는 사내새끼가 아니다. 너희들은 체면과 염치를 위해선 민족도 팔아치운 놈들이다. 그동안 그만큼 속았으면 됐지 더 속아달란 말이냐?"
나는 이왕 시작한 길에 지금도 살아서 떵떵거리며 사는 문화단체 회장하는 늙은 여우년 욕도 했고, 지도급 이사라고 얼굴 내미는 늙은 늑대들 이름을 들먹이며 박창수의 친일행적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할 말 없소."
"그럼 경찰에 이 서류를 몽땅 넘기겠다." 한마디 합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창수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 협의회를 해체하겠소. 그리고 여기에 관련된 재산 전부를 장학기금으로 내놓겠소. 나는 그냥 조용히 묻혀서 살겠소. 젊은이 맘대로 하시오."
나는 잠깐 박창수와 시선을 떼어놓았다. 마음 속에 갈등이 들어 차고 있었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않아서 생긴 비정한 사회상을 기억하는 마음과 늙은이를 편히 죽게 해 줄 마음의 투쟁이었다.
나는 박창수의 손을 잡았다. 박창수가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좋습니다. 그냥 가겠습니다. 영감님을 믿겠습니다."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늙은이에게 구차한 소리를 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
저 정도만이라도 이 땅의 인물들이 소갈머리가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튿날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나는 가슴이 확 뚫리는 심정이었다.
박창수는 내가 상상했던 거소다 많은 액수의 재산을 여러 대학에 장학기금으로 헌납했다. 세계문화협의회를 해체했다는 기사는 없었지만 그럴 만한 배짱이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비열하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늙은이들이었다. 왜놈들이 들어온 뒤부터 이 땅의 인물들이 변절된 것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영감님, 고맙습니다."
"젊은이, 누군지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소만 잊지 않겠소. 고맙소."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돌아 앉았다. 가슴이 후련했다.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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