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물은 다할 수 없다’는 위대한 사상(?)에 불교의 ‘공(空)’ 개념을 도입해 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새로운 물질이 생겨나지 않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완전히 소멸되지도 않는다. 다만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존재할 뿐이고, 총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전자(-), 핵(+), 중성자(○), 더 작게는 쿼크와 반쿼크 들의 무한 조합과 배열 관계 속에서 그 에너지가 변화되었을 뿐이다.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시적인 모습으로 잠시 나타났고, 완전히 없어지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새롭게 창조되지도 못한다. 다만 형태를 변화하면서 생과 사를 반복한다. 아주 잠깐 그 모습으로 스칠 뿐이다. 그렇다면 생과 사는 일시적인 모습으로 잠시 나타났던 그 존재의 입장에서 본 생과 사 일뿐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작은 입자와 에너지 측면에서는 그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공(空)이다.
2. 불교의 ‘연기(緣起)·공(空)’ 사상에 양자역학을 다시 도입한다.
연기법은 ‘세상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실체가 있는 고정불변의 존재는 없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만물의 실체 없음’을 공(空)이라 한다.
양자역학은 입자 단위의 미시세계 속에서 빛은 실체가 있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양극단의 공존을 설명한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공존한다는 의미다.
양자역학은 ‘불확정성 원리’, ‘이중성’의 세계를 설명하고, 이 현상을 ‘허깨비(ghost)’라고도 부른다. ‘모든 사물에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공(空)과 일치한다.
이러한 미시세계가 모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거시세계를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잊고 물건에 집착하고 나와 남을 구분한다. 그러나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같은 양극단의 분리는 무지에서 온 분별 작용에 불과하다.
3. 우주탄생을 ‘양자 요동’과 ‘다중 우주’로 설명한다.
무에서 유가 발생할 수 없다고 해놓고, 빅뱅은? 빅뱅 이전은?? 또 다중 우주는???
공(空)은 실제로 비어있음이 아니라, 물질(+1)과 반물질(-1)이 쌍(0)을 이루었다가 사라지는 생사의 무한 반복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다. 이것이 비어있다는 시공간의 실제 상태이다. 이 양자 요동은 유의미한 최소한의 시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양자 거품(Quantum foam)이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시공간의 인플레이션(급팽창)으로 인해 물질과 반물질의 생성 소멸 자체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이때 어떤 물질(+1)이 반물질(-1)과 쌍(0) 생성 소멸이라는 짝을 이루지 못하고 남겨지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탄생하였고, 이렇게 새로운 우주가 시작된다. 빅뱅이다. 빅뱅 1초에 쿼크가 양성자 중성자를 형성했고, 3분까지 양성자 중성자에 의한 핵융합으로 수소와 헬륨이 생성되고, 38만년이 되는 동안 새로운 중성원소들이 다량으로 만들어지면서 자유전자가 사라져 광자가 우주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졌다. 4억년 동안 만들어진 암흑물질들이 중력으로 뭉쳐서 초기은하가 탄생하였고, 138억년에 지구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우주의 시작 빅뱅은 138억년! 그렇다면 빅뱅 시점, 0차원의 한 점에 우주의 모든 물질을 담아야 한다. 이는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E=mc²(질량-에너지 등가 원리)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주 초기 최초의 공간에는 극도로 압축된 에너지가 있었던 것이다.
고요한 ‘무’의 공간은 실제로 음(╍)과 양(ㅡ)의 생성과 소멸로 들끓고 있는 잠재적 유의 공간이었다. 깨진 균형은 결국 유를 탄생시켰고, 비어 있다고 여겼던 공간에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또 다른 빅뱅이다. 이런 방식으로 다중 우주와 다차원의 세계는 무한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시간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중 우주는 시간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공간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거대하고 무한한 다차원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가장 낮은 차원인 0차원은 어떠한가? 0차원이란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크기도 갖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다. 시간과 공간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이 0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세계 그 차체일 것이다.
이 와중에 인간의 의식도 우주의 원리인 인플레이션의 법칙에 따라 확장되어 ‘우주는 어느 단계에서 그 안에 관찰자의 탄생을 허용해야 한다’는 데에 도달한다. 이 ‘관찰자’의 의미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해 온갖 방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계=나’, 범아일여, 도, 일체유심조다. 주역 또한 이 모두를 담고 있다.
다만 이들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하기까지 한 평생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일생의 과업이다.
4. 결국 도덕경 25장에 모든것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거다!!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무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들을 수도 없고 모양이 없어 볼 수도 없으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서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의 영향력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고 움직임도 멈추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만물의 어미라 할만하다.
사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저 ‘道’라고도 하고, 마지못해 ‘큰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크기 때문에 무한정 뻗어나간다. 무한정 뻗어나가기 때문에 멀리 간다. 멀리 가면 마지막엔 근원으로 되돌아온다. (결국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고, 자기 안에서 만물을 낳고 기르는 것이다.)
道 자체는 무한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모두 道가 스스로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 역시 무한하다. 이렇게 네 가지 무한한 것 가운데 사람도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의 법칙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법칙을 본받으며, 하늘은 道의 법칙을 본받는다.
그리고 道는 스스로 그러한 자신의 본성을 본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