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라! / 2021년 12월 12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빌립보서 1:12-30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내가 아는 지인의 형부가 심정지로 사망하였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도 자기와 통화를 했는데 54세밖에 안 된 분이 갑자기 다음 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차를 타고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딸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친구 엄마가 말기 암이라고 말입니다. 그 친구가 자기 엄마와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데 어떻게 하냐고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는 문자를 보냈더군요.
산 사람들은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러나 사람들에게 죽음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그 엄중한 현실을 외면하고 사는 겁니다. 살 걱정과 살 준비만 하지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훌쩍 세상을 떠나면 그때는 잠깐 나도 죽어야 하는데 하며 일시적으로 죽음이라는 현실을 인식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다 잊고 맙니다.
심정지로 죽든, 암으로 죽든, 사고로 죽든, 나이를 먹어 죽든 우리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지만 사실은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죽어서 슬프지만 언제는 안 죽겠습니까?
문제는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죽어서 없어진다면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저에게 누가 죽었다는 말은 심판대로 갔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그 죽음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그 죽음은 단지 관념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종교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 준엄한 현실이 단지 지식과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고 아멘은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믿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는 사람도 없고, 그 무서운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으로는 믿지 못하니 믿음으로 살며 준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만나 거듭난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육신을 위해 육신대로 사는 그 자아숭배를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거듭난 바울에게 죽고 사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만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고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안 올 것처럼 자신을 위한 삶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획득하며 자신을 힘 있는 자, 행복자로 만들기 위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쌍한지 말입니다. 누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집을 사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해외여행을 다니고,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얻고 성공하였다는 소리를 들으면 먼저 마음에서 아이고 소리부터 나옵니다.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섬기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그 마음 안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과 출세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없다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어떻게 되겠습니까?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들어가 영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권세를 인기와 성공을 부러워하는 정신없는 성도들이 교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를 만나 내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며 내 육체의 만족과 세상의 영광을 위해 살던 그 타락한 삶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자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다면 나는 정말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위해 살던 그 죄악을 회개하였는지, 그 죄에서 돌이키고 죄와 싸우고 있는지, 십자가에 나를 날마다 못을 박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좁은 길을 가는지 돌아봐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내 육체에서 올라오는 죄와 싸워가며 반드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그 믿음이 내 몸을 십자가의 피로 사시고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신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하지만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착한 일을 죽어라 한다고 구원을 받겠습니까? 내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받고 거듭난 자들만이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의를 위한 사랑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지 못하면 그 어떤 사랑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를 외면하고 우리가 아무리 내 이름으로 사랑으로 포장하여 내놓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죄인을 십자가에 대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에 나를 주님과 함께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사랑과 믿음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외면하고 내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나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믿음 있는 자로 존귀하게 하려고 하면 그것은 악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주인으로 사는 자로 거듭나면 다 변화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로 말입니다. 십자가에 나의 교만한 주인 됨을 못을 박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으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며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과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면 그래서 어떤 죄인이든지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지식과 이론에 대해서는 알아도 나의 주인 됨을 포기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알겠는데 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뭔지 몰라서 지옥에 가는 성도들은 없을 겁니다. 왜 평생 교회에서 목사노릇을 하며 십자가를 전한 자들이 심판을 받겠습니까? 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으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겠습니까?
다 십자가가 뭔지는 수도 없이 들어서 알았지만 그러나 순종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타락한 자신의 교만한 자아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십자가에 내 죄를 대속하신 주님을 진짜 주인으로 영접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해야하는 그 고난의 길을 가지는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 고난의 길이 얼마나 영광스런 길인지 믿지는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는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시간에 심판대 앞에서는 몇 년을 믿었는지, 직분이 무엇인지는 아무 쓸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를 믿어도 십자가가 뭔지 알고 온전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교회에 들락거리며 믿는 척 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고 죽을병에 걸려 잠깐 믿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래 전에 국민일보에 났던 기사입니다. 한 목사님이 아주 가난하게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병까지 들었습니다.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고 머리에 병까지 있어 몸도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을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돈을 주며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지만 수술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버린 배추를 주어다가 죽을 끓여 먹고 사는 분이 무슨 수술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수술은 할 수 없다고 나가려는데 그 의사가 잠시 앉아보라고 하더니 자기가 수술비를 다 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의사가 천에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이 의사가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겁니다. 이 의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간 겁니다.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공부하고 틈틈이 일을 하며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거의 마쳐 갈 때 몸이 너무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쉬지 못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검사를 해보니 신장이 두 개가 다 망가져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성공을 향해 쉴 틈 없이 달렸습니다. 그 고생이 거의 끝나가는 데 그 꿈을 펼치고 영광을 보기도 전에 새 파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 현실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당신은 신장을 이식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미국 땅에서 신장을 이식해주겠습니까? 신청을 해도 그 순서가 언제 오겠습니까? 자신과 조직이 맞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이 의사는 진찰실에 나와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아있던 흑인이 그 의사를 보고는 달래며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최고의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신장이 다 망가져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식을 받지 않으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흑인이 대뜸 그럼 내 신장을 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내가 신장을 하나를 당신에게 주겠다. 그 의사가 신장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설명하자 이 흑인은 그런 검사를 해보자고 하는 겁니다. 이 의사는 그렇게 쉽게 맞는 게 아니라고 안 맞을 거라고 사양했지만 이 흑인이 자기가 찾아가서 검사를 했을 때 이식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의사는 처음 보는 흑인의 신장을 이식 받아 건강을 회복하고 서울대에서 교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의사가 건강을 회복한 후 그 흑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면 되겠느냐?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 흑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나를 만나고 찾을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라. 나는 건강한 신장이 두 개가 있기에 한 개를 준 것밖에 없다. 당신이 의자에 앉아 울고 있을 때 그때 나는 내 신장을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하느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주님이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십자가에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의사가 목사님에게 자신이 받은 그 은혜를 간증하며 나도 목사님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조금 갚으려고 한다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저 이 세상의 재물과 돈과 영광이나 달라고 하고 원수를 만나면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면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으로 내 몸에서 나를 십자가로 구원하신 나의 주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을 위하여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구원만 받았다고 자신을 속이지 마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고마우신 주님을 위해 나는 어떤 고난을 받고 있는지 돌아보고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내 몸에서 나의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