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안동시내엔 다방이 몇군데 없었으며 그나마 대부분의 다방은 어른들의 전용 공간 이었거나 자식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선을 뵈이는 것이 사교 다방 역할의 전부였다.
1960년대엔 중 장년의 신사숙녀들이 안동의 신양반 행세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동시내 여기저기 다방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음악 전용 다방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경북 북부지방에도 드디어 젊음을 불태우는 청바지 장발 통키타 문화가 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점들 난로가에 앉아 성냥개비를 쌓으며 연애나 사업 이야기도 했었다.
부모님과 사이에 소통이 참 힘들던 시대 였기에 다방을 찾아 멋도 내고 바람도 피우던 곳, 결국 반숙과 술한잔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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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외버스정거장 그 중에서도 안동 버스터미널 옆의 학다방은 안동의 젊은 숫처녀 숫총각들이 바람나면 은밀히 부모 몰래 모이는 곳이었다. 정확히 안동시외버스정류장 - 우측입구 3층에 있었다.
당시의 학다방은 DJ에게 조그만 종이 쪽지에 희망곡을 신청하여 감상하였다.
학다방은 안동의 처녀 총각들로 자리가 빌 때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그 시절,,, 안동에는 10여개 정도의 음악다방이 있었다. 특히 안동터미널 옆의 학다방은 아침부터 12시통금시간직전까지 젊은이들로 꽉 찼다.
오랫만에 친구와 담소를 나누면 시간 가는줄 몰랐다..
뽀오얀 담배연기 속에서도 내가 신청한 곡을 기다리면서,,, 요즘 인기있는 가수가 누구라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그 기쁨에 DJ에게 향긋한 편지를 건네 주는 친구도 있었다.
종이위에 쓴 신청곡에는 팝송 한 두개쯤 올려야 웬지 여자친구 앞에 위신이 섰다. 탁자위의 빵이 정겹다.. 음악다방의 얼굴 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박스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지고 경외스러웠던지.
유심초..산울림등은..저 시대 대중가요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그시절 안동구시장 주변의 고불고불한 골목길 끝에 있던 허름한 다방..위스키-티를 아시나요?
레코드판도 사 보고 밤이면 '별이빛 나는밤' 라디오를 들으며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였던 시절이 었다.
안동지역의 안동교육대학생, 상지전문대학생, 간호전문대학생, 그리고 재수생,
야영훈련은 제쳐 두고 젊음을 불태우는 고향의 여고생들도 포크송 노래책은 필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동네 친구들 끼리 멀리 오입 갈 때도 통키타는 빠질수 없지롱,,, 임하 천전 백운정 솔밭에서 우리는 요렇게 신나게 흔들어 대기도 하였고,,,
농촌 시골에서 온 처녀 총각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루었다. 뽀얀 담배 연기로 가득찬 다방은 20∼30대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당시 인기 높던 경북대에 입학한 안동고 출신 학생들은 고향에 와서 통키타 문화를 꽃 피웠다. 희망곡 신청은 주로 아래와 같은 7080가수들 노래다
어니언스, 둘다섯, 김정호, 양희은, 송창식, 김세환, 서유석, 유심초, 조영남, 서수남 하청일 불루진, 라나에스포, 뚜아에모아, 은희, 이장희, 윤형주, 사월과오월, 이연실, 나훈아, 정훈희, 등 ![]() ![]() ![]() ![]() ![]()
그들은 유리창 속의 ‘DJ’목소리와 함께
못말리는 고등학교 그룹사운드 조직 유행
흘러 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에 취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고막이 터질듯한 보컬그룹의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리드 싱어가 된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몸 장단을 맞춘다.
그시절 장발의 안동 총각들( 앞줄 - 진우, 병천, 동욱, 성수, 병순, 뒷줄 - 동규, 태호, 찬호, 성익)
지난 60∼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각 도심과 변두리 지역에 넓게 자리했던 ‘음악다방’속의 한 풍경이다.
그시절 안동 중앙통 거리의 처녀들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차 한잔 값이 200원 정도 하던 시절,음악다방은 마땅히 갈곳 없고 호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던
안동 고향의 사회 초년생들이나 대학생,젊은 직장인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요즘같이 매서운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라면 사랑하는 연인과 따뜻한 커피를마시며 평소 좋아하던 팝송을
맘껏 들을 수 있는 음악다방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가끔은 아줌마 부대들도 남편 몰래 음악다방에 들이 닥쳤다. 우리와는 세대가 달라서 그런지 신청곡이 영 엉마이다.
인근 다방엔 파리를 날리는 형편이라, 이쁜 다방레이지가 온갖 애교를 부리곤 했지만 우린 넘어가지 않았다. 1970년대의 젊음은 산에서도 들에서도 피가 솟구친다.( 좌로부터 병식, 기철, 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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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안동 처녀들은 틈만 나면 집안을 뛰쳐 나와 싸돌아 다녔다. 또한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화려해 보이는 DJ를 꿈꾸기도 했다. 대학생이면 통키타 둘러 메고 청바지 입고 장발이 유행하던 시절,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넣고 다니며 거울 앞에서 뽐내며 머리를 빗는
DJ의 모습 또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고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들에겐 DJ가요즘 청소년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god’에 버금가는 ‘동네 우상’이었다.
향토장학금 타러 고향가는 기차 안에서도
한달에 한번씩 향토장학금 받으러 고향집에 갈 때도 열차 단속 피해가며 통키타 튕기고 신명나게 궁디를 흔들어 대며 청춘을 불태웠다.
그들은 뮤직박스 주위에 앉아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종일 친구와 노닥거리며 음악을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몇일 동안 자랑을 늘어 놓기가 일쑤였다.
그 시절,‘약속다방’은 왜 그리도 많던지.
그 약속다방에선 또 얼마나 많은 약속들과 기다림,헤어짐이 있었을까?
그때가 그립지만 요즘 추억의 음악다방을 찾아볼 수가 없다.
![]() ![]() 음악다방은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절 안동 고향에서도 음악다방의 열기는 대단했다.
대구나 서울로 유학간 친구들은 안동에 오면 최고의 대중 음악 다방 문화를 선도했다.
음악다방과 당구장 탁구장도 인기를 누렸었다. 그 때가 그립습니다.
![]() ![]() ![]() 통기타 하나만 가지고 1인 밴드가 가능하고 얻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도 이때 열렸다. 메시지를 음미하기에 적당한 포크는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한 인기를
그러나,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한 포크는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그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수많은 금지곡을 양산해냈고, 당시 민중가요의 정점에 있던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 대중적 통기타 포크송은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의 이른 바 '포크송'으로 방향을 틀었고, 낭만과 자연을 노래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풍가면 여고생들도 한쪽에 모여 쌤들이야 보든 말든 궁디를 신나게 흔들어 댔다. 양희은, 정태춘 등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이 시기의 저항적 포크의 맥은 주로 '메아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전신)등 대학노래패처럼 언더에서
그시절 안동 총각들(앞줄 - 동규, 동욱, 병식, 병순, 뒷줄 - 진우, 찬호, 태호, 병천, 성수)
구전민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민중가요...
일반적으로 저항의 노래라 하면 '락'을 말하고, 비판적인 가사라면 '랩'을 떠올리지만,
1970년대 늘 우릴 즐겁게 했던 인기 코미디언들 80년대 굴곡 많은 현대사에서 젊은이들의 심장을 들끓게 했던 것은 바로 이 포크음악이었던 것이다. 장발족들의 반란은 어디서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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