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영화 문법의 기초를 다진 <국가의 탄생>과 1920년대에 만들어진 <미소 짓는 마담 보데>, <안달루시아의 개>를 연달아 보고 있으면, 그 사이엔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미국에서 그리피스의 영화 제작 방식과 연출 기법이 인정받고 자리 잡는 동안, 유럽에서는 세계 1차대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이 끝나고 1920년대에는 예술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 혹은 정신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가 다다이즘인데, 여기서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 바로 ‘반항’이었던 것 같다. 이 반항은 예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기존의 생활양식과 관습, 관례 등 모든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이러한 예술 사조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오히려 더 대중적이게 되었다. 기존의 것에 대한 해체나 파괴가 순수에 관한 탐구로 여겨지기도 하고, 현실에 반하는 것들을 영화의 이미지로 구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험영화를 논할 때 아방가르드, 전위영화,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영화 등 다양한 이름과 형태의 것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이 아주 복잡하고 긴밀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것들이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며, 당시의 정신을 계승한 현대의 영화들도 있는 것 같다.
<미소 짓는 마담 보데>(1922)와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모두 192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7년이라는 시간 차이를 두고 각각의 영화는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반항하고 실험하는 것 같다. <미소 짓는 마담 보데>의 보데 부인은 남편의 장난에 완전히 질려버린 모습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공간도 보데 부인을 억누르는, 답답한 공간처럼 보인다. 보데의 환상 속에서는 남편보다 훨씬 멋진 모습의 남성이 등장하기도 하고,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 시각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한 현실을 참지 못한 보데부인은 남편이 자주 갖고 자살소동을 벌이던 권총에 실제로 총알을 채워넣는 방식으로 반항하기도 하는데, 여기까지가 내러티브에서의 초현실이다. 보데는 곧바로 후회하고 다시 총알을 찾아오려고 한다. 결국, 총구는 보데에게로 향했으며, 보데를 끌어안은 남편의 모습이 이들의 마지막이다. 영화는 명확하게 다시 현실로 복귀하지만, 사실 보데가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초현실이 현실이 되는 상상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미소 짓는 마담 보데>은 최초의 페미니즘 실험영화로도 언급되는데, 여기서의 ‘실험’은 현실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안달루시아의 개>는 파격적인 이미지, 불규칙한 나열, 공간이동 등 영화의 모든 부분에서 실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눈알을 면도칼로 자르는 장면은 지금 보아도 시각적 충격이 엄청나다. 이후에 이어지는 구름과 달 매치컷도 매우 인상적이다. 손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는 장면과 피아노 위에 놓인 당나귀 시체들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영화 작업을 함께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아방가르드가 어느 정도 성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전의 실험영화와는 구별되는 지점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미소 짓는 마담 보데>와는 달리, 영화 전체와 영화 속 이미지 모두에서 실험이 이뤄진 것 같다. 이는 기존 영화에 대한 반항이 될 수 있으며, 영화 속 내용이 초현실적인 것을 넘어 영화 자체가 초현실적인 예술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 같다. 유럽을 중심으로 생겨난 초현실적 실험영화 정신이 이후 영화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도 궁금해진다.
첫댓글 두 편의 영화를 통해 현실적 이미지로 출발한 영화가 초현실적 예술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집어낸 점이 좋습니다.
이런 초현실적 실험영화 정신이 이후 미친 영향을 필자와 더불어 같이 탐구해 나가는 것이 세영사 수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