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감미롭게 흐르는 샹송에 실려 두물머리 꽃자라로 길을 달린다.
그곳의 꽃밭엔 낮과 밤이 시간을 잃고 뜨거운 정염의 불길이 황홀히 타오른다.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반백의 희끗한 사내 하나가 달려간다. 지금 흐르는 배경음악은 수정처럼 매혹적인 눈망울에 금발의 광채를 휘날리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실비 바르땅(Sylvie Vartan)”의 “마리짜 강변의 추억”이다. 그리움과 애틋함이 꽃잎처럼 차안을 가득히 떠돈다. 감미롭고 로맨틱한 서정성, 세련되고 애틋한 음색의 뛰어난 호소력, 뭇남성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뇌쇄(惱殺)적인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처럼 어설픈 이를 단박에 흡입한다.
이윽고 이두수(二頭水) 푸른 강변의 꽃자리에 선다. 집을 나선지 한 시간 반 뒤였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애틋한 여인처럼 달려왔을 이두수(두물머리). 이곳의 강변 운치는 내게 늘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파리에 세느(seine)강이 있고, 배경음악이 흐르는 불가리아에 마리짜(maritza)강이 있다면, 내 눈앞엔 지금 양귀비꽃들이 붉게 일어나 뜨거운 정염에 몸을 녹이는 아름다운 이두수의 푸른 한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 강변엔 황홀한 현기증이 인다.
하늘의 태양과 붉디붉은 꽃의 뜨거운 정열에 싸여 천지가 황홀한 연모의 불길로 타오른다. 그 뜨거운 불길 속을 두 시간여 동안 온 몸으로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렸다. 나무 그늘아래 서니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그때 불어오는 강바람에 땀을 걷으며 강을 바라보니 하얀 나비 한 쌍이 강둑을 건너온다. 나비는 이 꽃 저 꽃 너울너울 우아한 춤을 이리저리 한참을 너울거리더니 불어오는 강바람 따라 강둑 넘어 사라진다. 이윽고 한 쌍의 나비가 머문 자리에 한 쌍의 푸른 청춘의 영혼이 그 꽃잎에 사뿐히 앉는다. 꽃잎에 강바람이 찿아들어 붉은 꽃잎이 흔들린다. 나뭇잎도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꽃잎과 나뭇잎이 여자의 마음마저 흔드는가. 여자가 먼저 원하는 듯했다. 카메라 렌즈에 맺히는 여자의 웃음끝이 맑고 행복했다. 나비가 달콤한 꽃술을 애무하듯 푸른 영혼이 숨을 멎고 하나로 타오른다. 햇살 뜨거운 정념의 꽃밭에서 시간을 벗고 공간을 벗은 갈애의 시간 속으로 뜨겁게 타오른다.
스물스물 녹아내리는 그 희고 고운 몸짓은 꽃 보다 아름다웠다.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저 붉은 꽃이 나비와 벌을 무시로 불러들이듯, 저 푸른 영혼의 뜨거운 시간은 그 얼마나 관능적이고 싱싱한 아름다움인가.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내 푸른 시절은 사막 같았다.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이별이 없었던 삭막했던 내 청춘시절은 한 사람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은 어찌 그리도 길고 길었던지…….
그때 내게 있어 청수처럼 젖어드는 아름다운 한 여인과의 로맨스는 환상 같은 것이었고, 꿈이 주렁주렁 열리는 달콤한 상상속의 그 무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때가 되어 나는 한 여인를 맞아들였다.
내게 끝없는 달빛의 향기를 머금고 다소곳한 자태로 다가오던 매혹적이던 여인이었다. 내 마음에 맺힌 매듭을 풀어준 그녀는 한평생 달빛같은 여인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매혹적이던 여인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전혀 다른 여자가 돼 있다. 가끔 얼음과 불구덩을 들락거릴 때면, 흙담처럼 무너지는 현실 앞에 산다는 일이 얼마나 막막했던가. 아니, 산다는 일이 얼마나 아득했던가. 견디어 내는 일이란 것이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녹아 내리는 일일지니. 때론 외롭고, 적막하고, 더러는 아픈 세월의 흔적을 쓸쓸히 남기던, 그런 세월이 가뭇없이 흐르고 흘러, 벌써 내 나이 예순에 접어들었다. 세월은 참 빠르다. 빠르게 흐른 세월 뒤에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며, 내게 남겨질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엔 늘 낙관적이질 못하다. 죽음을 전제한 이 물음은 내게 늘 페시미즘의 가슴 서늘한 그늘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이여,
가끔 가슴 서늘한 그늘이 덮치는 이 허무虛無는 무엇인가.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살다가 벌써 몇 몇은 죽고, 남은 벗들은 오늘도 나처럼 고단한 삶을 뚜벅뚜벅 지고 저문 골목길을 돌아가는 그대여. 오늘도 피 할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억겁의 고단한 끈을 붙들고 비틀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가는 그대여. 때론 산다는 것에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허무함을 느끼며, 더러는 허허로운 바람이 가슴을 스치는 고적함을 느끼며 살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묻고 싶나니…….
두물머리 강변엔 지금 들꽃이 한창이다.
강둑에 혼자 앉아 희고 노란 꽃잎들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이토록 작은 것들이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싶다. 이 예쁜 꽃을 만나서, 그 꽃을 마주하고, 그 꽃과 눈빛을 마주하며, 그 꽃과 이야기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저 꽃잎 속으로 녹아든다. 참으로 고맙고 신비하고 매혹적인 꽃의 시간이나니…….
눈 들어, 아름다운 청춘의 두 영혼이 머물던 꽃자리를 보니, 그들은 환각처럼 자리를 떠나갔다. 그 자리에 붉은 꽃잎 하나 강물의 파문에 실려 간다.
남양주 이두수 강변 꽃자리에서, 석등.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