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부록 ⑨鄭道傳의 아들 정진(鄭津)의 드라마틱한 인생■ 정진(鄭津) 이야기
[최종인 칼럼-삼봉 정도전의 아들] 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2016.12.06
2016년 8월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정도전과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라는 주제로 삼봉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칭송되는 삼봉 정도전의 국가경영에 관해 한·미·일·중 4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로 부문별로 나누어 발표된 내용이 관심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새로운 국가의 신질서를 구축할 설계는 했으되
군권(君權)과 신권(臣權)간의 충돌이 야기한 권력투쟁에서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제거되어
그 포부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던 삼봉의 경세(經世) 구상이 60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세인의 관심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정도전의 족적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는 당시 그의 직함에 그대로 드러난다.
태조 이성계의 절대적 신임 하에 국가경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개국공신이며 1품의 숭록대부의 위상을 갖고,
최고 정책기구의 수장인 판도평의사사,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 수문전의 태학사,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최고 군사책임자인 판의흥삼군부사,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이사 등 막강한 권력을 손 안에 쥐고
건국 초기의 각종 제도와 국정의 미래 향방을 견인하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정권 창출의 실력자가 정변으로 사라졌음에도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아들이 바로 정진(鄭津)이다.
곤욕의 시절을 넘어
고려 말 역성혁명이 있기 전 권신들에 의해 정도전이 아들과 함께 탄핵을 받고 삭직이 된 적이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삼봉과 아우들이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정진은 마침 태조대왕이 안변의 석왕사에서 선조를 제향하는
삼성재를 봉행할 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조에서 정종으로 왕위가 바뀌고,
비로소 이방원이 등극하여 완전히 정국을 장악했다지만 아직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미 주동자가 제거된 1차 왕자의 난 때를 떠올리는 무리들이 간관 권숙을 사주하여
난적(정도전·남은)의 뿌리를 뽑아야한다는 음해를 하므로 정진은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직첩이 회수되고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는 8년여의 모진 세월을 겪게 되었다.
1411년에는 목은 이색의 신도비문을 중국에서 받아온 것이 국체와 관련된다 하여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하륜의 간계에 의해 불똥이 부친(삼봉)에게 향하여
관작이 회수되고 자손이 폐서인되자 죄 없이 또 다시 관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염정(廉正)한 관료활동
고려 말 우왕 6년(1380)에 양촌 권근이 주관한 성균시에 합격하여 낭장으로 시작하여
사재령이 되었다가 영주지주사를 거쳐 전농시정으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막강한 실세 권력자의 아들임에도 스스로 지방관인 연안부사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이 ‘훈가(勳家)의 자제이니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서
서무(庶務)는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겸손하여
자신을 억제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니 고을사람들이 탄복하여 칭송하였다고 한다.
태조1년(1393)에 판사재감사가 되고 공조전서가 되었다가 형조전서로 옮겨졌다.
이때 아내가 그 남편을 죽이고 첩에게 덮어 쉬우는 살인유기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아내로부터 자복을 받아내어 공정한 옥사를 처결한 일이 왕조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어 원종공신으로 도승지를 지내고, 경흥부윤으로 승진하였다가
원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관직이 삭탈되고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어 장기간 관직을 떠나 고난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태종7년(1407) 좌정승 성석린의 천거로 판나주목사에 기용된 이후,
판공주목사가 되었는데 목은 이색의 신도비 문제로 또 다시 관계를 떠났다가
1416년 인녕부윤으로 돌아와 성심으로 정종을 모시고 다음 해 판안동대도호부사로 나갔다.
세종1년(1419)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겨울 판한성부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양 천도이후 처음으로 청계천 준설작업을 시행하였고
수문을 넓히고 돌다리를 건설하는 등 치수에 업적을 남겼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 다시 판한성부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유후사 유후, 군자감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를 맡으면서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이 태종 때 죽은 후
소헌왕후의 친정어머니인 안씨가 천안(賤案)에 올라있음을 풀어주도록 진언하였고,
이에 임금이 노루 한 마리를 하사하는 아름다운 일화가 남아 있다.
희절공 정진의 졸기
형조판서 정진의 부고를 듣고,
세종은 각별한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조회를 멈추며 부의와 함께 손수 치제문을 지었고,
의정부 우찬성을 추증하며 봉상시에서 올리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친히 희절(僖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는 시호의 의미로 보아
그의 평생에 일관된 정신이 돋보이며 임금이 내린 제문(祭文)의 그 절절함을 옮겨본다.
“몸을 바쳐 신하가 됨에 ~ ~,
생각하건대 경은 천성이 곧고 순수하며 품행이 온화하고 근신한지라
맑고 깨끗함으로 몸을 지키고, 청렴하고 조용하여 외화가 없었도다. ~ ~
내직과 외임을 두루 맡으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고,
형조에서 옥사를 판결할 때 반드시 원통함이 없게 하여
나라가 모범되게 안정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 ~ ~
어찌 갑자기 병사하여 나에게 서러운 회포를 무겁게 하는고. ~ ~ 슬프다.
인명은 비록 운수에 매이어서 길고 짧은 수한을 어찌할 수 없으나,
은전은 어찌 생사에 차별하랴. 조문하고 위로하는 예의를 마땅히 베푸노라.”
<자료협조 : 봉화정씨 문헌공파종회 정진수 총무이사, 정광순 홍보위원장>
■ 정진(鄭津, 1361년 ~ 1427년)(위키백과)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으로 시호는 희절공(僖節公)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거쳐 조선 건국 후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398년(태조 7년) 아버지 정도전이 요동 정벌 계획 중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수군 병력으로 충군되었으나 조준, 권근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후 의정부우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을 최초로 간행하였다.
경기도 출신으로 본관은 봉화.
정진은 1361년 정도전과 경숙택주 경주최씨의 네 아들 중 첫째 아들로 개경(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올라 1382년 낭장(郞將)이 되고 이후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지냈다.
공양왕 즉위 후 1391년 정몽주(鄭夢周) 등 온건파가
역성혁명파를 탄핵할 때 탄핵을 받고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공신의 적자로 외직을 자청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연안부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393년 판사재감사를 지내고, 1396년(태조 5년)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외직인 경흥부윤(慶興府尹)·영원주목사 등으로 나갔다가 공조전서와 형조의 전서를 역임하였다.
원주목사로 재직 중 아버지 정도전의 삼봉집 초본을 간행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충군
139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로 있을 때,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과 함께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동생 두 명도 살해당하였으나,
그는 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하여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정도전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으나
정진은 병력으로 충군(充軍)되어 전라도수군으로 충군 징용되었다.
이후 조준과 권근 등이 그의 복직을 주청하였고, 이후 1407년 다시 복직하였다.
그 해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의 천거로 판나주목판사(判羅州牧事)로 부임했다.
생애 후반
1416년(태종 16년) 인령부윤(仁寧府尹)이 되고, 1417년 판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세종 즉위후 1419년(세종 1년) 충청도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이후 자헌대부로 승진,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고,
1420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421년 판한성부사로 부임하였고, 1422년까지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2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부의 유후(留後)로 부임했다.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판서 재임 중 1427년(세종 9년)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사후
당시 세종대왕은 각별히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
바로 증(贈)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讚成)에 추증되고 희절(僖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경북 영주의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으며, 평택의 희절사(僖節祠)에 제향되었다.
가족 관계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조부 :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 ~ 1366)
조모 :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고모 : 봉화 정씨
고모부 : 공조판서 황유정(工曹判書 黃有定 , 1343 ~ ?)
숙부 : 정도존(鄭道尊)
숙부 : 정도복(鄭道復, 1351 ~ 1435, 호는 일봉(逸峯)) 한성판윤(漢城判尹)
사촌동생 : 정담(鄭澹)
사촌동생 : 정기(鄭淇)
아버지 : 정도전(鄭道傳, 1337년 ~ 1398년)
외조부 : 찬성(贊城) 최습(崔濕)
어머니 :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동생 : 정영(鄭泳)
동생 : 정유(鄭遊)
부인 : 정부인 연일 성씨(正夫人 延日 成氏)
아들 : 정래(鄭來)
아들 : 정속(鄭束, 稷山縣監 역임,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
손자 : 정문형(鄭文炯, (1427∼1501)] ) 의정부 우의정,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 시호는 양경(良敬), 세조대 청백리(淸白吏)
■ 실록에 보이는 아들 정진(鄭津), 손자 정래(鄭來), 정속(鄭束) 기록○ 김승·정진·김희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5일 기유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김승(金陞)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진(鄭津)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삼았다.
정진은 정도전의 아들이다. 김희선(金希善)을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삼았다.
○ 상산군 강계권과 정도전의 아들 정진 및 그 일당을 순군옥에 가두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4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상산군(象山君) 강계권(康繼權)·순녕군(順寧君) 지(枝)·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신의(鄭臣義)·대장군 강택(康澤)·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과 그 당여(黨與)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 조사의·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6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
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이조 의랑(吏曹議郞) 이조(李慥)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정진(鄭津)과 강택(康澤)을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대장군 한규(韓珪)·손원만(孫原萬)·송천우(宋千佑)를 경상 수군(慶尙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사복경(司僕卿) 이보검(李寶劍)과 장군 임득방(任得邦)은 강원 수군(江原水軍)에 충군(充軍)하고,
전 장군 하승해(河承海)를 풍해 수군(豊海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목인해(睦仁海)·박미(朴𢒺)·
이천우(李千祐)는 청해 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이조(李慥)를 흥덕진(興德鎭)으로,
강계권(康繼權)을 각산(角山)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영해진(寧海鎭)으로,
오몽을(吳蒙乙)을 이산진(伊山鎭)으로, 장군 조홍(趙洪)과 전 장군 이등(李登)을 순성진(蓴城鎭)으로,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김사행(金師幸)과 조사의(趙思義) 등 21인을 사유(赦宥)하였다.
○ 정도전·남은의 일파인 오몽을을 목베고 정진을 수군에 충군하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0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오몽을(吳蒙乙)을 목 베고
정진(鄭津)을 수군(水軍)으로 내쫓았다.
간관(諫官) 권숙(權肅) 등이 말씀을 올리기를,
"오몽을·정진 등은 남은·정도전과 함께 몰래 반역을 도모하고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우고자 하여 종친(宗親)을 해치려고 하다가,
실정이 나타나고 일이 명백하게 되어,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모두 이미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했는데도,
오몽을과 정진은 머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죄는 같은데도 처벌은 다르옵니다.
청하옵건대, 형법에 처하여 난적(亂賊)의 근원을 근절하게 하소서."하였다.
이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 좌정승 성석린의 의견을 물어 정진을 판나주목사로 삼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3일 계미 3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정진(鄭津)으로 판나주목사(判羅州牧事)를 삼았다.
이날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정청(政廳)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이조 좌랑(吏曹佐郞) 조서로(趙瑞老)를 보내어 그 집에 가서 묻게 하였다.
"목사(牧使) 하나를 제수(除授)하고자 하는데, 권숙(權肅)·정진(鄭津)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좋은가?
정진은 이미 추부(樞府)에 들어갔으니, 외관(外官)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성석린이 대답하기를,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鄭津)이 권숙보다 낫습니다."하니, 드디어 정진을 임명하였다.
○ 한상경·변계량·설칭 등에게 세자 시강원의 벼슬을 주다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0월 25일 기해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로 겸 웅무 시위사 상호군(雄武侍衛司上護軍)을 삼고,
한상경(韓尙敬)으로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변계량(卞季良)·설칭(薛偁)으로
좌·우보덕(左右輔德)을, 허지(許遲)로 좌필선(左弼善)을, 조말생(趙末生)으로 우문학(右文學)을,
정진(鄭津)으로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를 삼았다.
○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8월 19일 무오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정도복(鄭道復)으로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그 아우〉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내 천년(天年)을 마치겠습니다.
청컨대, 형(兄)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뒤에 성주(星州)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되었는데,
7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에게 직첩을 주라고 하다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26일 병술 5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정진(鄭津)에게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었다.
○ 정도전의 손자 정내와 정속·황거정의 아들 황효신 등에게 직첩을 주다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7월 25일 갑인 2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의 손자 정내(鄭來)와 정속(鄭束)·
황거정(黃居正)의 아들 황효신(黃孝信) 등에게 직첩(職牒)을 주었다.
○ 정진·조비형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9월 17일 기사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정진(鄭津)을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삼고,
조비형(曹備衡)을 경원 등처 병마사(慶源等處兵馬使) 겸(兼) 판경원도호부사(判慶源都護府事)로 삼았다.
○ 조견·맹사성·이맹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4월 17일 신묘 5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조견(趙狷)으로 판우군 총제부를, 맹사성(孟思誠)으로 이조 판서를,
이맹균(李孟畇)으로 판한성부사를, 문계종(文繼宗)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신상(申商)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이흥발(李興發)로 중군 총제를, 홍섭(洪涉)으로 중군 동지총제를,
박초(朴礎)로 병조 참의를, 이간(李暕)으로 형조 참의를,
정진(鄭津)으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이발(李潑)로 경상도 도관찰사를,
정간(鄭幹)으로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를, 최관(崔關)으로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를,
우박(禹博)으로 제주도 도안무사(濟州道都安撫使)·판제주목사(判濟州牧事)를,
정연(鄭淵)으로 사헌부 장령을, 민소(閔消)로 사헌부 지평을 삼았다.
○ 유관·맹사성·정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7일 정축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유관(柳寬)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연사종(延嗣宗)을 곡산군(谷山君),
맹사성(孟思誠)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안수산(安壽山)을 공조 참판,
문귀(文貴)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이안우(李安愚)를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이춘생(李春生)을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최운(崔云)·성달생(成達生)·
이수(李隨)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박규(朴規)를 중군 동지총제,
조계생(趙啓生)을 인수부 윤(仁壽府尹), 유장(柳暲)을 인녕부 윤(仁寧府尹), 장윤화를 이조 참의,
이양몽(李養蒙)을 호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을 예조 참의, 윤회(尹淮)를 병조 참의,
윤보로(尹普老)를 우군 첨총제(右軍僉摠制), 정초(鄭招)를 우대언(右代言),
유영(柳穎)을 좌부대언(左副代言), 조서로(趙瑞老)를 우부대언(右副代言),
권도(權蹈)를 동부대언(同副代言), 전직(全直)을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
한혜(韓惠)를 겸 지사간원사(兼知司諫院事), 박서생(朴瑞生)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송인산(宋仁山)을 사헌부 장령(掌令), 최문손(崔文孫)을 우대언(右代言),
강회중(姜淮仲)을 충청도 관찰사, 박실(朴實)을 판홍주목사(判洪州牧事),
박영(朴齡)을 판해주목사(判海州牧事), 정수홍을 판나주목사(判羅州牧事)를 삼았다.
○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27일 정유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게 되는데, 상왕이 흰 옷과 검정 띠[帶]의 차림으로
인덕궁에 나아가 견전(遣奠)을 올리고 봉사하기를 의식에 따라 하였다.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
예조 참판 김자지(金自知) 등에게 명하여 재궁을 모시어 가게 하고, 또 돈체사(頓遞使) 김겸(金謙)과
총호사(摠護使) 정진(鄭津)·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 최이(崔迤) 등에게 명하기를,
"재궁이 임진(臨津)을 건널 때에 각별히 노력하라."하였다.
백관들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노제(路祭)를 베풀고, 공신들도 또한 노제를 준비하였었으며,
각사에 한 명씩 재궁을 받들고 능소에까지 갔다.
○ 정진을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26일 을미 2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진(鄭津)을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임금이 표문에 대하여 절하고 낙천정에 나아가니, 상왕은 마전포(麻田浦)에 거둥하여 임금을 기다렸다가,
두 임금이 강을 건너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낙천정으로 돌아왔다.
○ 한성부사 정진의 치수에 관해 올린 소문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3일 계해 3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판한성부사 정진(鄭津) 등이 소를 올리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음진(陰診)의 재앙은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능히 면할 수 없는 것이나, 그 재앙을 구제하고 환난(患難)에 대비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바이니, 신묘년에 상왕 전하께서 내[川渠]를 뚫지 못하고,
봇도랑[溝洫]을 쳐내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냇길[川路]를 크게 개척(開拓)하고,
이를 파고 터 놓아, 각기 그 유통이 순하게 하고, 인하여 돌다리를 만들어,
나라가 반석(盤石)같이 견고(堅固)하게 되고, 백성이 편안히 잠잘 수 있는 즐거움을 얻었으니,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후환(後患)을 예비하는 생각이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류(支流)의 작은 시내[川]를 다 파서 넓히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유사가 의견을 올려 최후(最後)의 공(功)을 완성하도록 하였으나,
상왕 전하께서는 백성의 힘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만세(萬世)의 터전을 반드시 한 때에 갑자기 이룰 수는 없다고 하여,
역사(役事)를 농사 때까지 끌어 넘기지 못하게 하여, 그 역사를 중지하였으니,
그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은 지극히 깊고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부왕(父王)의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한 사람의 힘과 열 집의 재산을 아껴서, 무릇 공역(工役)을 일으키려 하면,
굳이 거절하고 즐거이 따르지 않으셨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 마음 쓰시는 생각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비가 한 달이 넘어도 그치지 않아서,
지난달 12일에 밤에 큰 비가 와서, 물이 넘쳐 하류가 막혔으니,
도성(都城) 안이 다시 침몰될 근심이 있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매, 전하께서 백성의 부모되신 마음과 자애심(慈愛心)이 많은 덕으로써,
근심하고 조심하심은 말로써 비유하기 어렵습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백성을 괴롭혀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 할 수 없는 일이오나,
재해(災害)를 구하고, 환난(患難)을 방비하는 일은 실로 왕정(王政)의 먼저 할 바이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특히 유사에게 명하여, 매양 농한기(農閑期)를 당하여
백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하게 하고, 그 힘을 다 쓰지 않게 하였으니,
신 등은 직분이 도읍(都邑)을 관장(管掌)하였으니,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한 두 가지의 좁은 소견을 다음에 조목 별로 열거합니다.
1. 두 곳의 수문(水門)은 좌우의 옹성(壅城)이 좁아서,
도성(都城) 안의 여러 곳의 물이 합쳐 흘러서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동부(東部)의 창성방(彰善坊)이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컨대 유사로 하여금 적당한 곳을 가려서 별도로 수문 하나를 더 만들어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면, 물이 넘치는 것이 감해질 것입니다.
1. 종루(鍾樓) 이하로는 지세(地勢)가 모두 낮아서, 도성의 물이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이,
높은 집마루에서 항아리 물을 내려 붓는 것 같아서,
많은 집들이 물에 뜨고 침몰되는 일이 반드시 이르게 될 이세(理勢)입니다.
원컨대 유사에 명하여 예전 도랑[渠] 자리에 그대로 냇길[川路]를 뚫어 파서, 깊고 또 넓게 하여
수재에 대비할 것입니다. 또 좌우 행랑(行郞)의 뒤에도 큰 도랑 하나를 만들면 크게 편리할 것입니다.
1. 진장방(鎭長坊)에는 산골짜기에서 여러 곳의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
격류로 쏟아져 내리는 까닭으로, 경복궁 동면(東面)의 내성(內城)이 몇 자[尺] 가량이나 무너졌으니,
만약 수년(數年) 동안 이대로 지나면, 거의 성내(城內)를 다 삼켜서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유사에 명하여 내를 넓히고 돌을 포개어 쌓아 올려 수도(水道)를 방비할 것입니다.
경복궁 서성(西城) 밖에도 또한 마땅히 내를 넓혀 흐름을 터놓아야 될 것이며,
그 외의 도랑들도 뚫고 파야 할 곳을 일일이 다 들 수 없사오니,
원컨대, 유사로 하여금 임시로 적당히 시행하게 할 것입니다.
1. 정선방(貞善坊) 다리 1개와 연화방(蓮花坊) 다리 2개, 창선방(彰善坊) 다리 3개,
덕성방(德成坊) 다리 1개 등, 위의 도합 7개의 다리는 거가(車駕)가 상시 지나시는 곳이니,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는 모두 나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큰 비를 한 번 지내고 나면,
모두 떠내려가게 되니, 재목의 허비와 백성을 괴롭히는 역사가 해마다 없을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름 장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썩어 무너지게되니, 그것이 견고하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청컨대, 유사에게 명하여 돌다리를 만들게 하여 이런 근심을 면하게 하소서."하였다.
임금이 공조(工曹)에 명하여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 한장수·허조·이지강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4일 갑자 2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한장수(韓長壽)로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를 삼고,
허조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지강(李之剛)을 예조 판서로, 조비형(曺備衡)을 판한성부사로,
김점(金漸)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신호(申浩)를 호조 판서로, 최윤덕(崔閏德)을 공조 판서로,
황자후(黃子厚)를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곽존중(郭存中)을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신장(申檣)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민의생(閔義生)을 판사재감사(判事宰監事)·지병조사(知兵曹事)로,
박안신(朴安信)을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조상(曺尙)을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이사맹(李師孟)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정진(鄭津)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 박자청 외 3인의 관직을 파면하다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17일 정축 1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박자청(朴子靑)·판사(判事) 윤인(尹麟)·
주부(注簿) 정내(鄭萊)·직장(直長) 여재(呂賫)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정왕(恭靖王)이 병이 위독하였을 때, 후궁(後宮)에서 반감(飯監) 김호(金浩)로 하여금
주찬(酒饌)을 갖추어 목멱산신(木覓山神)에 빌게 하였더니, 김호가 이를 사사로이 처분해 버렸다.
일이 발각되어 도망해 숨으니, 상왕께서 나라 안에 두루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으므로,
그 처자와 족속(族屬)을 선공감에 속하게 하여, 모두 몸으로써 고역(苦役)을 하게 정하였더니,
박자청이 그 첩의 청을 듣고 김호의 족속 3인으로써 근수노(根隨奴)095) 로 삼고,
윤인은 그 중 1인을 근수노를 삼고, 정내는 또 1인을 대신(代身)하기를 허락하고,
여재는 1인을 수월한 역군[歇役]으로 정하였다. 이 때에 와서 헌부(憲府)에서 자청 등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임금이 상왕에게 계하니, 자청 등의 관직이 파면되었다. 이 때 자청·인(麟) 등이
묘실(廟室)의 역사(役事)를 감독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역사를 마치도록 명하였다.
인은 선공감 권지 직장(繕工監權知直長)으로써 자청에게 아부하여
〈벼슬한 지〉 10년이 되지 않아서, 벼슬의 높은 품계에 이르렀다.
무릇 공역(工役)은 오로지 자청의 지휘만 듣게 되니, 그 외의 관원들은 일을 처리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같이 앉아서 그저 "예예"하고 명령만 따를 뿐이었다.
[註 095]근수노(根隨奴) : 관원이 외출할 때에 따라 시중 드는 하예(下隷)임.
○ 사헌부의 박자청의 치죄에 관한 소문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21일 신사 5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사헌부에서 소(疏)를 올리기를,
"김호(金浩)의 범한 죄는, 관계가 가볍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다 같이 분개하는 바인데,
상왕 전하께서 그 족속을 선공감(繕工監)의 고역(苦役)으로 정한 것은 김호로 하여금 자수하도록 한 것이나,
박자청이 그 사실을 알고도 사정(私情)에 따라 꺼림이 없으니, 죄가 진실로 큰 것이다.
윤인(尹麟)·정내(鄭萊)·여재(呂賫)가 자청의 하는 일에 아첨하고 순종하였거늘, 전하께서 다만
관직만 파면하게 하였으니, 죄는 중한데 벌은 가벼우므로, 뒷사람을 경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판관 임득귀(林得貴)는 그런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며,
녹사(錄事) 송의강(宋義剛)은 대신(代身)하는 청을 따르도록 허락하였으니,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자청 등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처단하여, 삼가하지 않은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사간원의 박자청과 수인의 처벌 강화에 관한 소문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22일 임오 1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박자청은 별로 재능도 없으면서 지극한 은혜를 외람히 입어, 벼슬이 재추(宰樞)에 이르렀으며,
윤인은 이서(吏胥)에서 출신(出身)하여, 벼슬이 3품(品)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그 마음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할 것인데,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선지(宣旨)를 따르지 않으며, 김호의 족친(族親)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느리고 다니니,
그 죄악이 김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재·임득귀·정내가 박자청에게 아첨하고 순종한 죄도 또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헌사(憲司)에서 소를 올려 논청(論請)하였으나, 다만 자청·윤인·정내·여재의 관직만 파면하고,
임득귀는 그냥 두고 논죄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실망함이 큽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헌사(憲司)의 아뢴 바를 일체 따르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이순몽·정진·오승·정초 등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2월 13일 병신 1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이순몽(李順蒙)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오승(吳陞)을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정초(鄭招)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하연(河演)을 병조 참판으로, 황상(黃象)을 공조 참판으로,
조완(趙琬)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조후(趙侯)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이천(李蕆)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유장(柳暲)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최관(崔關)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최부(崔府)를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조서로(趙瑞老)를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로, 조종생(趙從生)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김자(金赭)를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성억(成抑)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신개(申槪)를 황해도 도관찰사로, 이맹균(李孟畇)을 경기도 도관찰사로,
황자후(黃子厚)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김겸(金謙)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심보(沈寶)를 충청도 도절제사로, 송희미(宋希美)를 전라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로,
배소(裵素)를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삼았다.
○ 송거신·정진·조비형·권진·박자청·변이원·민생·정효문 등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1월 25일 정미 2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송거신(宋居信)으로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를 삼고,
정진(鄭津)으로 공조 판서를 삼고, 조비형(曺備衡)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권진(權軫)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박자청(朴子靑)으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삼고,
변이(邊頤)와 원민생(元閔生)으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삼고,
정효문(鄭孝文)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삼고, 윤하(尹夏)와 이숙묘(李叔畝)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삼고, 이중지(李中至)로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삼고,
한혜(韓惠)로 좌대언(左代言)을 삼고, 곽존중(郭存中)으로 우대언(右代言)을 삼고,
조종생(趙從生)으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삼고, 김맹성(金孟誠)으로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삼고,
심도원(沈道源)으로 형조 참의를 삼고, 이사후(李師厚)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삼고,
정분(鄭苯)으로 좌헌납(左獻納)을 삼고, 윤임(尹臨)으로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를 삼고,
최윤덕(崔閏德)으로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안순(安純)으로 함길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삼고,
박초(朴礎)로 경상우도 수군 처치사(水軍處置使)를 삼고,
이각(李恪)으로 경상우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우박(禹博)으로 충청도 수군 처치사를 삼았다.
○ 원민생·성억·정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9월 29일 정미 3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마천목(馬天牧)으로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원민생(元閔生)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성억(成抑)으로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변이(邊頤)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오승(吳陞)으로 공조 판서를, 권진(權軫)으로 형조 판서를, 허주(許周)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정진(鄭津)으로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윤회(尹淮)로 예문관 제학을,
곽존중(郭存中)으로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를, 정흠지(鄭欽之)로 동부 대언(同副代言)을,
차유(車有)로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을 삼았다.
○ 모화루에 거둥하고 효령 대군의 별서에서 잔치를 벌이다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5월 13일 임오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서변(西邊)에 말을 머물러 격구(擊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인하여 서강 효령 대군 이보(李𥙷)의 별서에 이르러 강 언덕 정자에 나앉아 포(砲) 놓는 것과
군사들의 말타고 활 쏘는 것을 관람하고 술잔치를 차리고,
인하여 대군에게 안장 갖춘 말과 본궁 근처의 농토 40여 섬지기 땅을 하사하였다.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평양 부원군
(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
(恭寧君)·이인(李䄄)·근녕군(謹寧君) 이농(李禯)·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총제 유은지
(柳殷之)·문효종(文孝宗)·이천(李蕆)·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참판 성엄(成揜)·전 절제사 왕인(王麟)·
군자감 조성 제조 전 유후 정진(鄭津)·지신사 곽존중(郭存中)이 잔치에 참석하였다.
오대언(五代言)과 참의(參議)·첨총제(僉摠制)는 장막 남쪽에서 먹게 하고 군사에게까지 사찬(賜饌)하였다.
이날 임금이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加乙頭] 들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밀·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정자 위에 올라 막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큰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네 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이에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 정진·김겸·신개·유사근·윤맹겸·조상치·정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24일 기축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이비(李)를 숭록 대부(崇祿大夫) 경녕군(敬寧君)으로 삼고,
이군생(李群生)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순평군(順平君)으로 삼다.
정진(鄭津)을 형조 판서로, 김겸(金謙)을 유후(留後)로, 신개(申槪)를 형조 참판으로,
유사근(柳士根)을 사헌부 장령으로, 윤맹겸(尹孟謙)을 좌헌납(左獻納)으로,
조상치(曺尙治)·정사(鄭賜)를 좌우 정언으로 삼다.
○ 수원에서 돌아오는 백언을 한강에서 맞이하여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게 하다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6월 19일 신사 3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사신 백언(白彦)이 수원(水原)에서 돌아오므로, 찬성 권진(權軫)·
판서 정진(鄭津)·대언 김자(金赭)를 보내어 한강(漢江)에서 맞이하여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 세자 및 문무 군신을 거느리고 모화루에 행차하여 백언을 전송하다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6월 26일 무자 1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임금이 왕세자 및 문무 군신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행차하여,
백언(白彦)을 전송(餞送)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을 증정하였다. 좌의정 이직(李稷)·
형조 판서 정진(鄭津)·지신사 곽존중(郭存中)에게 명하여 벽제관(碧蹄館)에서 전송(餞送)하도록 하였다.
한양에 머물러 있는 종친과 대신들에게 각각 노루 한 마리씩을 하사하다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0월 8일 무진 3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서울에 머물러 있는 종친과 좌의정 이직(李稷)·영돈녕(領敦寧) 권홍(權弘)·판돈녕(判敦寧) 김구덕
(金九德)·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판한성(判漢城) 오승(吳陞)·이조 판서 이맹균(李孟畇)·
호조 판서 안순(安純)·예조 판서 신상(申商)·
형조 판서 정진(鄭津)·대사헌(大司憲) 최사강(崔士康)·대제학 이수(李隨)·참찬 허조(許稠)·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에게 각각 노루 한 마리씩을 하사하였다.
○ 형조 판서 정진의 졸기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6일 갑오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형조 판서 정진(鄭津)이 졸(卒)하였다.
정진은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다.
홍무 임술년에 낭장(郞將)에 임명되어 여러번 옮겨 사재 령(司宰令)과 전농 정(典農正)에 이르렀다.
임신년에 태조가 처음 왕위에 오름에, 정진은 공신(功臣)의 적자(嫡子)로서
지방관에 보직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임명되니,
연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훈가(勳家)의 아들이니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서
서무(庶務)는 친히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정진이 임지(任地)에 가서 겸손하여 자기를 억제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니, 고을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한 해가 지나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가 되고,
승진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가 형조 전서(刑曹典書)로 옮겨졌다.
이 때 최안종(崔安宗)의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그 시체를 첩의 집 문밖에 두었는데,
첩이 매질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없는 죄를 있다고 자복(自服)하였다.
옥사(獄事)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정진이 관청에 올려 말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가 그 흔적을 가리우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인데,
어찌 자기가 남편을 죽여서 그 문밖에 둘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다시 그 아내를 국문하니, 과연 말이 궁하여 자복하였다.
그 당시에 공명(公明)하고 진실하다고 일컬었었다.
경흥부 윤(敬興府尹)에 승진되고, 나가서 원주 목사(原州牧事)가 되었고,
들어와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임명되었다.
정해년에 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가 되고, 병신년에 인녕부 윤(仁寧府尹)이 되고,
충청도 도관찰사(都觀察使)·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
공조 판서·개성 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역임하고,
형조 판서로 옮겨져서 이 때에 와서 돌아가니, 나이 67세이다.
부고(訃告)가 들리니,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내렸다.
희절(僖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두 아들이 있으니, 내(來)와 속(束)이다.
상사(喪事)는 일절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라 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않았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었다.
○ 고 형조 판서 정진에게 사제하다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4월 16일 갑술 3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예관(禮官)을 보내어 돌아간 형조 판서 정진(鄭津)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몸을 바쳐 신하가 됨에, 마음이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니,
공을 갚고 덕을 높이매, 예의는 마땅히 슬픔과 영화에 극진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경은 천성이 곧고 순수하며, 품행이 온화하고 근신한지라, 맑고 깨끗함으로 몸을 지키고,
청렴하고 조용하여 외화가 없었도다. 우리 태조의 개국하심을 만나 바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태종의 수성(守成)하심에 이르러 특히 포상의 은전을 입었으며,
나의 부족한 몸에 이르러서 많이 선대의 공렬을 계승하여,
이미 이루어 놓은 헌장을 존중하여 바야흐로 노숙한 이에게 맡기려 하였도다.
경은 바로 내직과 외임을 역임하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고,
형조(刑曹)에서 옥사를 판결함에 반드시 원통함이 없게 하여,
우리 나라를 특장있게 함으로써 거의 모범이 되게 하기에 이르렀더니,
어찌 갑자기 병사(病死)하여 나에게 서러운 회포를 무겁게 하는고.
이미 유사를 시켜서 시호를 내렸거니와 이제 예관을 보내어 전(奠)을 올리게 하노라.
슬프다, 인명은 비록 운수에 매이어서 길고 짧은 수한을 어찌할 수 없으나,
은전은 어찌 생사에 차별하랴. 조문하고 위로하는 예의를 마땅히 베푸노라."하였다.
○ 정속이 사조하니 인견하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2일 을축 1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진위 현감(振威縣監) 정속(鄭束)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경기에는 밀·보리가 좀 잘되었다고 하던데, 가뭄이 지금 시작되니 매우 염려된다.
하늘의 뜻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으나,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