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가 세운 황택사
https://cafe.daum.net/jslee7001/VFcU/52 온달이의 주유천하
광위엔은 삼국지와 관련해선 아주 중요한 지역이지만, 교통이 불편해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지만 삼국지에서만 큰 비중을 갖는 곳은 아니고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였던 무측천(측천무후)의 고향이다. 광위엔에 있는 황택사(皇澤寺)가 바로 무측천의 사당이다. 이 절은 북위의 말기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계속 중수한 것이다. 황택이란 이름은 무측천이 내린 이름으로 황제가 내린 은혜가 넓고 커서 이곳까지 미친다는 뜻이란다.
입구에는 궈모뤄가 쓴 '광원황택사(廣元黃澤寺)'의 비석이 우리를 맞이한다. 검문관의 것보다는 작지만 행서(行書)의 글씨가 그렇게 단아할 수 없다. 검문관의 휘호는 웅장하고 거친데 비하여 말이다.
황택사는 북위 때 처음 만든 절로 이 절이 유명한 것은 1,500여 년의 긴 역사만 아니라 바로 그 이름에서 보듯 무측천이 큰 시주를 해 자신을 위한 사찰로 만들도록 해 그 규모가 훨씬 커졌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무측천을 모시는 절로 대웅보전이 없어 사찰이라기보다는 무측천의 사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북주, 수, 당을 거치며 점차 확장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무측천의 고향이 광위엔이고 그녀가 황제가 된 후 여기는 그녀를 기리는 절로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택사 안에는 무측천과 그의 남편 고종을 모신 이성전(二聖殿)이라는 전각이 있다. 정문에서 들여다보니 바로 앞에 보이지만 들어가지 않고 그냥 문 앞에서 사진만 찍는다. 무씨 가묘라고 측천무후의 가문 사당도 있단다. 그곳에 만든 소상은 무측천의 나이 든 모습 그대로라는 무후 진용전도 있다는데 황제까지 지낸 여인인데 이 정도라면 아주 겸손하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3대 여걸을 꼽으라면 유방의 아내였던 여(呂)태후,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그리고 청(淸)나라의 서(西)태후를 꼽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측천무후가 유일하다. 측천무후는 이곳 광위안에서 자링강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
그녀는 성이 무(武)씨로 당시만 해도 당연하게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황제 자리에 여자가 앉았으니, 그 것으로도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당나라 황제들과 무측천의 관계를 요약하면 무측천은 건국공신의 딸로서,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태종이 죽자 황제의 여자인 후궁들은 전부 불교사원으로 출가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측천은 3대 황제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고종과의 사이에 4남2녀를 낳고 치열한 궁중 쟁투를 통해 원래의 황후였던 왕씨를 밀어내고 고종의 황후에 오른다. 그리고 4대 황제 문종의 어머니가 바로 무측천이다. 문종의 황후의 친정 쪽에서 무측천에 대항해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자, 이를 모조리 눌러버리고는 문종을 폐위시키며 사돈집을 박살낸 무서운 여자로 돌변한다. 문종의 뒤를 이어 무측천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예종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는데 이곳저곳에서 무측천에 반대하는 반란이 또 일어나자 신속하고 말끔하게 진압하고 예종마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6대 황제로 등극해 국호도 주(周)라고 바꾸며 자신이 직접 모든 정사를 관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직전 국호를 당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도 자신의 아들이자 자신이 폐위시켰던 문종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무측천 82세로 67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도 황제에 오른 가장 고령이라는 기록이겠고, 가장 고령까지 황제를 지낸 사람 역시 무측천이다.
그녀는 죽을 때 결자 해지를 다하고 죽었다 한다. 무측천은 권력계층에 대해서는 감시를 철저하게 해 공포정치를 했는데 그 이유는 정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독재정치를 통해서 사실 백성의 삶은 좋아졌는데 권력에 얼쩡거리는 계층에게는 공포였지만, 그 권력과 무관한 백성에게는 훌륭한 국가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당시의 치적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해 당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하고, 그 이후 당나라 전성시대인 현종의 개원(開元)의 치(治)가 열리는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한다. 그녀의 치세는 많은 염문을 남겼지만, 불교 사찰 건설을 또 많이 하였고, 불합리한 정치제도를 바꾸려는데 힘썼다. 다른 남자 황제와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