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세이 :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
1. 1927년 결성된 ‘신간회’는 급진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결합된 단체로 독립운동의 통합적 운동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점점 강하게 작동되는 시기 어쩌면 유일하게 한국에서 독립운동의 불씨를 유지하고 있는 단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31년 사회주의 세력이 전체회의를 요구했고 이들은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했다. 민족주의 세력은 이들의 주장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회의 결과 ‘해소’가 결정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한 것은 자율적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련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른 지시에 추종한 것에 불과했다. 소련은 ‘12월 테제’를 통해 민족적인 문제보다는 계급적 투쟁에 집중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그런 결정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한 사회주의 세력은 결국 한국 땅에서 의미있는 저항을 전개하지 못한 것이다. 한 학자는 신간회 해소와 관련해 한국 사회주의 세력의 굴종을 비판하였다. “일제의 야수적 탄압과 함께 코민테른의 부당한 전제적 독재와 자율성을 상실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에 대한 사대적 굴종이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 조선 공산당은 재건되지 못하였다. 코민테른은 1928년부터 이미 스탈린과 소련의 세계지배를 위한 도구로 전락(......) (식민지) 공산주의자들을 희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2.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소련에 대한 열광과 굴종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정치적 성공과 역사적 위치에 대한 존경을 담아 소련의 정책을 추종하였다. 하지만 초기 식민지 국가들에 일정한 지원과 후원을 제공하였던 소련은 점차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세력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스탈린의 집권은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코민테른’을 소련의 전제적 지배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독자적인 저항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채 다만 소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소극성을 보였다. 한 학자는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우선 전통을 부정하였다. 이들이 추구한 거울 이미지는 소련에 의해 해석된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한국 지식인들의 좌절된 욕망을 대치 충족시켜주는 역할로서 사회주의가 등장하였으며 이같은 대리충족과 환상적인 만족은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정서 속에 소련에 의존하는 전체주의 지향의 심리를 형성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3.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수많은 세력의 분파 활동으로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반성하며 이루어진 ‘신간회’ 설립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한 매우 보게 힘든 정치적 결단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연대가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짐으로써 독립 유일당 활동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조국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잃어버리고 교조적인 소련 공산주의의 개념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 이유로 빈민모금활동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자유시 참변’으로 사회주의 세력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한 바 있다. 그러한 조선 사회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1930년대 또다시 벌어지게 된다.
4. 일본은 1931년 민보산 사건을 핑계로 만주로 침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한다. 이때 일본의 점령 하에서 자치적인 세력을 추구하는 친일적 ‘민생단’이 설립되었는데, 당시 중국 공산당은 민생단의 밀정들이 중국 공산당 내부에 침투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들을 잡아내기 위해 조선인들에 대한 조사와 고문이 시작됐다. 1932년 10월에서 1936년까지 진행된 조사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민생단으로 지목되어 약 500명이 학살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조사과정에서 조선인 간부들은 같은 민족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색출하고 누명을 씌우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한인’에 의해 ‘한인’들이 배반당하고 학살당한 것이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혁명성을 나타나기 위해 조그만 일도 큰 문제로 고발하고 또 거짓 진술을 해댄 것이 빈민생단 투쟁을 확대 지속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5.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사회주의 운동’ 세력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맞선 대표적인 항일 세력이었다. 이들은 파업 선동, 소작쟁의, 임금 투쟁 등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였고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어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이 제대로 통합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계급적 논리를 따라 민족주의 세력을 공격함으로써 독립 운동의 통합과 집중을 방해했다. 수많은 분파적, 종파적 활동을 통해 서로 간 대립하였고 힘들게 추진하여 성취한 <신간회>도 단지 소련에 의한 지시에 따라 해소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시 사건’이나 ‘민생단 사건’과 같이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6. 이러한 사회주의 활동의 부정적 측면을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그는 이재유(1905-1944)이었다. 이재유는 조선 공산당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이현상, 김상룡과 협력하여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현장성과 대중성을 중시하였고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르게 한국적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공산당 재건 운동을 ‘트로이카’라 불렀는데 그것은 운동을 추진하는 사람이 3 사람이 있다는 것을 넘어 “구성원들이 모두 지도자인 동시에 피지도자가 되어 서로에게 지도받는 수평적 결합방식으로 대중적 기반을 확대한다는” 개념이었다. 이재유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명령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방식으로 서로가 평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7. 이재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화적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수없이 체포되었음에도 탈출하는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보호하는 여인들과의 신비스런 이야기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보호해주던 인물 하나가 경성제국 대학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였는데, 한인 사회주의자와 일본인 교수가 협력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방식이 아닌 인간의 동등성을 바탕으로 억압과 탄압을 제거하려 했던 이재유의 투쟁은 ‘사회주의자’로서 뿐 아니라 인간의 해방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제 시대 일본에 저항했던 인물 중,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들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이재유에 대한 기록은 그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특별한 업적(?)이 없기 때문에 기억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추진했던 운동의 연대, 운동의 방식, 운동 조직원 사이의 평등은 매우 특별한 지향점이 아닐 수 없다.
8. 1920년대와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은 독립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재유’와 같은 특정한 사례를 제외하고 사회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제한된 관점에 따라 움직였고,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 제시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독립 운동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이어야 함에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의 독립’에 앞서 ‘계급의 해방’이라는 한국적 역사와 상황과는 괴리가 있는 관념에 따라 소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잘못된 결정을 하였고 그러한 편향성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갈등 뿐 아니라 내부의 갈등까지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첫댓글 - 엣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 생각은 다양할 수밖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겠지.